50년 12월 30일, 구름 약간
PB의 개인 기록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안경은 잃어버렸고, 휴대전화는 박살났고, 그 덕분에 연지와도 싸우고 나왔다. 곧 신년이니 한동안 잘해줘야겠다 다짐한 게 엊그제인데 그새를 못 넘기고 또 화를 냈다는 것에 짜증이 치솟았다. 진정하고 일을 시작하려 해도, 칸막이 너머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소리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이딴 흉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는 얼마 전 SCiPNET에 올라온 유럽 쪽의 소식 때문이다. 프로이센 지부가 완전히 함락당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연합국에 대한 공격 계획이니 극비 무기니 하는 소문이 어느새 관할청 전체에 퍼져 위기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따가워지기도 한다. 이 시대에 타지에서 살아가는 프로이센계 사람의 숙명 같은 것이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연지 녀석을 어떻게 달래야 할 지 감이 안잡힌다. 으음… 집에 들어갈 때 신년 축하 꽃이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하루 남았는데 뭔 신년 축하냐고 놀리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떡국이 없는 새해 첫 아침 따위는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오늘 치의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동 복도를 걷던 중에 TV 속보를 보았다. 라인란트가 대대적인 도발 행위를 시작했다는 소식과 총통의 연설 영상이 흘러나오자 나는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라인 제국의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오셨던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을 그리면서도 항상 제국을 두려워하셨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부터 라인란트는 각국에 융단 폭격을 가했고 그것은 아버지의 히스테리 성향을 더욱 키우고 말았다.

아버지는 가끔 취하신 채 어린 나에게 그런 불안감을 털어놓으시곤 하셨다. 가끔은 겁을 주듯이, 가끔은 체념한 듯이, 라인 제국의 악행과 무시무시한 악당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린 내가 그런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아버지는 그리 신경쓰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무서운 악당들이 나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내 몸에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혐오하고 또 두려워했다. 난 아직도 이 굴레를 벗지 못했다. 친구, 동료, 애인에게 버럭거리고 화를 내다가도 그 피를 생각하면 흠칫 움츠러들곤 한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재단의 일에 그렇게 몰두하게 된 것은. 이십대 중반에 박사 학위를 따자 마자 아버지 추천으로 재단에 입사한 뒤 나는 전쟁 소식이 들리면 더욱 일에 파묻히는 식으로 바깥 세상을 잊어오곤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그들이 날 쫓아올 수 없도록 계속 기밀 가까이로 숨어들기만 해왔다.

이런, 뭘 쓰고 있는 건지. 얼른 가서 연구나 마저 해야겠다.

 

격리실에 들어서자 082 만능 열쇠가 조신하게 고리에 걸려 있었다. 피쉬 박사는 먼저 격리실에서 보고서 초안을 쓰고 있었다. 그 친구, 다 좋은데 너무 유쾌해서 보고서에 장난질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아무래도 나중에 저 보고서는 다시 검토해야 될 것 같다.

이미 격리된지 한참 된 이 대상의 보고서를 다시 쓰고 있는 건 녀석의 변칙 특성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확인 차 격리실 방문을 잠그고 082를 꽂는다. 이전엔, 지금 문고리를 돌리면 그냥 덜컥 열렸을 것이다. 그야말로 "만능 열쇠"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덜컥 열리긴 열린다. 뒤에 연결된 곳이 연구동 복도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

이번 달 중순, 무작위 문이 갑자기 변칙성을 잃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그 특성은 만능 열쇠가 갖게 되었다. 변칙적인 성질은 한층 강화되어서, 이젠 열 때 마다 전혀 엉뚱한 곳으로 연결되어 버린다. 지금 열어제낀 문 건너편도 웬 러시아 관할청 소속의 한 SCP 격리실… 오 맙소사, 급하게 문을 닫고 082를 뽑아버린다.

하여튼 O5는 무작위 문의 SCP 분류를 취소했고 만능 열쇠의 재연구를 지시했다. 내가 그 연구를 맡게 되었고 실험을 위해 지금까지 여기 문만 3000번을 열어 제꼈다. 그 결과 확실해진 것은, 지금의 082는 특히 재단 시설에 많이 연결한다는 것이다. 재단 기지에 연결된 것만 무려 2981번이니 거의 재단 전용의 열쇠가 되었다 봐도 무리가 없었다. 일단 유클리드 상향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아무도 이 대상들의 특성이 왜 바뀌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이유를 모르는 현상 아닌가. 브라이트 박사는 아무래도 평행우주 몇 개가 멸망하면서 우주의 축이 뒤틀어지면서 벌어진 일 같다고 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피쉬 박사와 마크 박사가 휴게실을 가자는 것을 격하게 뿌리치고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오늘 일은 다 끝냈으니 퇴근 시간까지는 자유다. 컴퓨터를 켜고 방금 작성한 실험 기록과 보고서를 옮긴 뒤, 인터넷을 켜고 메일을 연다. 읽지 않은 메일이 한통. 연지다.
 
아침엔 미안했어. 얼른 들어와. YJ.

 
웬일로 먼저 사과 메일을 보냈다. 새해 분위기를 위해 참기로 한 것일까? 나도 미안하고,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 오늘은 정시 퇴근이니까 가는 길에 안경이랑 꽃이랑 이것저것 사도 빨리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신년 파티를 하루쯤 일찍 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 재단 전체에 비상 사태가 발령되었다. 라인 제국이 연합국을 공격하면서 미국과 유럽 방면의 기지들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기지에 쫙 퍼졌다. 동료들 몇은 주저앉아 떨고 있고, 몇은 또 바쁘게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혼란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퍼뜩 바깥 생각이 났다. 제국이 공격을 시작했다면 한국도 안전 지대가 아니다. 맙소사, 연지와 부모님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경계 발령 시의 무단 외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사태에 대해 기지 관리관의 설명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당장 소강당으로 달려갔다.

 

샐 박사의 발표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당분간 기지에서 대기하라는ㅡ저 당분간이 올해 안에 끝날 일은 없을 거라고 옆에서 경비대원 진수가 투덜거린다ㅡ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는 우리가 바라던 어떤 정보도 말해주지 않았다. 다들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채 웅성이고 있을 뿐 돌아갈 생각을 않는 것은 그때문이다.

 

'오늘의 소식'을 사용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는진 모르겠지만 아주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우리는 다같이 직원 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오, 세상에. 그곳에 있던 모두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리모컨을 집어든 사서 한 명이 채널을 뉴스 프로그램에 맞추자 새빨간 화염과 연기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불타는 워싱턴, 백악관을 삼킨 불길,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러나 진정 우리를 놀라게 만든 영상은 따로 있었다. 뉴스가 끝나갈 무렵 화면에 잡힌 건물. 검붉은 불꽃과 버섯 구름을 내뿜으며 무너져 가던 그 건물은,
 
 
제19기지였다.

 
 
 
 
 


SCP-447-KO 배출 문서 기록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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