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재단 연구원들은 흔치 않은 휴가를 맞았다. 하늘에서 케테르급 SCP가 떨어지거나 아니면 땅에서 XK급 세계멸망을 일으킬 SCP가 솟아나지 않는 이상 연구원들은 각자의 집에서 편안하게 휴일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휴가를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말하자면 새해이기 때문에 휴가를 받은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휴가 명목이 신년 휴가니까.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새해를 맞아 재단의 데이터 배이스를 점검해야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배이스 점검은 누가 하느냐, 하면 당연히…….

2014년 1월 1일
그 공책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 우리 사서들이다. SCP 재단의 중앙 도서관과 중앙 기록보관소가 중심이 되어 재단의 모든 문서를 정리하는 것이다. 주어진 기한은 딱 일주일. 중앙 도서관은 연구원들이 요구한 학술 데이터 배이스 등을 사들이거나 이미 산 데이터 배이스를 점검하는 일을 주로 한다. 중앙 기록보관소는 지금까지 쌓인 SCP 보고서와 사건 기록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다시 한번 분류한다. 여기에 덧붙여 종이에 적은 보고서와 사건기록 파일을 들춰가면서 훼손된 것을 하나하나 골라내서 복구하는 작업까지 한다. 기록보관소 사서들은 흰 장갑과 방진마스크를 낀 채 기록보관실의 서류 캐비닛을 하나하나 들춰본다. 당연히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일주일동안 사서들에게는 임시 보안등급이 부여된다. 도서관 사서들은 좀 낮지만, 기록 보관소 사서들은 대충 3에서 4등급과 비슷한 권한을 갖게된다. 당연히 0등급 인원을 포함한 몇 몇 직원들은 등급이 그대로이고, 이들은 단순한 작업을 해야했다.

내 옆에 앉은 선배도 등급이 오르지 않는 몇몇 직원 중 하나였다.
"부럽네요."
손에 장갑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부럽긴 뭐가 부럽냐? 앉아서 노가다나 해야하는데."
선배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먼지 구덩이에 안 들어가도 되잖아요?"
"커피나 끓여놓을게. 내 일이 다 끝난다면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연구원들의 휴가이자 사서들의 지옥이 시작된 날, 사서들은 고카페인 음료를 일곱 박스나 구비해놓았다. 재단에서 지원한 것이 세 박스이고, 사서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산 것이 네 박스이다.
"됐어요. 그냥 일이나 하세요."
마스크를 꼈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저거 그 이상한 음료수 마시지 말고 커피나 마셔."
"저거 그 이상한 음료수 맛있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정확히 말하면 그 고카페인 음료보다 선배의 커피가 맛이 없는 것이다.
"임마, 어른한테 수고한다고 말하는거 아니다?"
선배가 소리쳤다.
나는 들은 척 만 척 책수레를 끌고 기록보관실 쪽으로 갔다. 사서들이 수없이 들락날락해야하는 이 날에도 기록보관실은 굳게 닫혀있었다. 제일 먼저 보안 카드를 긁었다. 내 사진, 1등급 요원, 내 이름, SCP 중앙 기록관리소 일반 사서, 직원 번호. 비밀번호 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10자리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무진장하게 길면서 매주 바뀐다. 자칫 잘못 누르면 번거로운 일을 당해야했다. 다시 한 번 보안카드를 긁었다. 기계음이 들렸다. 내 출입이 그대로 기록된다는 말을 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안은 조용했다. 침묵의 수도원 마냥 사람의 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스무명의 사서들이 교대로 들어가 훼손 문서를 판별해낸다. 워낙에 넓어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교대 시간에 늦지 않게 손목의 시계를 눌러 알람을 맞췄다. 수레를 끌고 천천히 내가 맡은 구역으로 갔다. 좀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는지 문서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들어온 사서들은 다들 기록학의 대가이다. 적어도 박사학위까지는 받았을 것이다. 나는 조금 예외지만 말이다.

일단 커다란 캐비닛 앞에 섰다. 키가 큰 편이라 맨 꼭대기 서랍장을 여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키가 고만고만한 여자 사서들은 책수레에 발판을 싣고 다녔다. 캐비닛 번호를 살폈다. 1920년대의 기록이다. 맞게 찾아왔다. 캐비닛은 잠겨있었다. 이것도 역시 비밀번호로 여는 것이었다. 기판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네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이 라인의 캐비닛이 전부 풀린 것이다. 맨 위의 서랍부터 열었다.

손목시계가 삑삑거렸다. 시간을 봤다. 네 시간이 지나있었다. 마지막으로 보던 문서를 접고 캐비닛 안에 집어넣었다. 캐비닛 번호를 확인하였다. 그래도 꽤 왔다. 1910년대 사건 기록에서 1920년대 후반 사건 기록까지 왔다. 시간을 넘나든 느낌이었다. 저쪽 구석에서 누가 재채기를 했다. 혀를 찼다. 저러다 문서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내 일만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나는 꽤 잘 버텼다. 선배가 말하기를, 나는 이런 직업에 맞게 몸이 잘 진화한 사람이랬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재단 기록보관실은 온전히 문서를 위한 곳이었다. 적절한 습도와 적절한 온도.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부서지거나 먼지를 뿜어내는 문서가 있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여기 문서가 모두 몇 부던가. 재단 중앙 기록보관실에 보관된 SCP 문서만해도 이천부가 넘었다. 사건 기록 및 기타 문서까지 포함한다면 사천부가 넘을 것이다. 그 중 1%만 망가진다 쳐도……. 지부 것 까지 중앙에서 관리했다면 우린 아마 죽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캐비닛 번호를 확인했다. 1920년대 요주의 단체로 인한 사건 기록, 문서 번호 1108-028. 교대해줄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자석을 붙여 표시하고, 캐비닛을 잠갔다. 보수해야 할 문서는 두 부가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켰다. 한 사람당 두 부여도 스무명이면 사십부, 또 삼교대니까 육십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책수레에 손을 대었을 때 바로 그것을 발견했다.

공책 말이다.

여기에 공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첫 작업조에 들어가있었기에 내 이전에 들어왔던 사서가 흘렸을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기록이 훼손되거나 기밀이 유출될 위험성 때문에 사서들은 여기 들어갈 때 몇 가지 물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오면 안된다. 공책을 집어들었다. 어쩌면 요주의 단체 스파이가 흘린 것일지도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묘히 숨겨진 감시카메라가 가득한 이 곳에, 도대체 누가 공책을 가지고 들어온단 말인가? 몸을 굽혀 공책을 들어올렸다. 그 공책은 아주 낡은 것이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장갑을 낀 손으로 그 공책을 천천히 뒤집었다. 부식된 상태로 봐서는 몇십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상태는 양호, 아마 기록보관실에 들어가있었기에 이만큼 깔끔하게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의 연구원 개인 일지가 여기 방치되어있는 것이라면 큰일이었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조심스럽게 첫 표지를 펼쳤다.

L.Lee

19█9. 1. █. 나의 소유가 되다.

고개를 바투했다. 군데군데 번져있었다. 자세한 분석은 내 작업실에 들어가서 할 수 있겠지만, 종이가 질이 안 좋거나 잉크가 질이 안 좋거나 둘중의 하나다. 그나저나 중간에 숫자 하나가 번져서 몇 년대 것인지 영 알 수 없었다. 일단 공책을 닫았다. 여기서 힘들게 분석하는 것 보다 밖에 나가서 당당히 보는것이 나았다.

기록보관소 문 밖을 나가니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달랐다. 마스크를 벗었다. 인중에서 땀냄새가 났다. 수염을 안 깎은 것 마냥 불쾌했다.
"마지막으로 나오셨네요."
교체될 사서가 싱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갔으니까요."
"어디까지 하셨죠?"
"Arc.-OR-20s-GI 1108-028."
"워우."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수고하세요. 제가 끝낸 서랍장에 자석 붙여놨어요."
"네, 고마워요."
다시 책수레를 끌었다. 새로운 사서가 들어가고, 나는 나왔다.
"여."
선배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인사했다.
"토끼눈이 다 됐네요."
"네 시간 동안 컴퓨터만 봐봐."
"전 이제 여덟시간 동안 문서를 봐야해요."
"고생이 많으셔, 고문서 복원팀. 아. 팀이 아니지."
선배는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몇 년 전에, 그러니까 내가 아직 0등급짜리 신입일 때, 고문서 복원을 하던 선임이 죽었다. 고고학 팀과 함께 외근을 나갔는데, 하필이면 외근 나간 기지로 혼돈의 반란이 쳐들어갔다. 그 혼란한 와중에, 선임은 혼돈의 반란이 쏜 총에 맞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아직 문서 복원 전문가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까지 했어요?"
내가 물었다.
"그걸 꼭 물어야겠냐!"
선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담배도 못 피고 지금 여기 앉아서 뭐 하는 짓이야."
"이 참에 금연하시지 그래요?"
"넌 일 안하냐."
"난 담배피는 여자 싫더라."
"임마, 너랑 나랑 몇 살 차인지나 알고있는거냐?"
"그래봐야 얼마 차이 안 나면서."
선배가 픽 웃었다.
"내 나이 알면 넌 기절할거다. 너 나온 김에 담배 좀 피자."
"어째서 말이 그렇게 이어지는거죠?"
선배는 듣지도 않았다. 서버에서 로그아웃한 뒤, 컴퓨터를 껐다. 나는 책수레를 끌고 저만치 도망갔다. 저 선배란 인간은 담배를 필 때 마다 꼭 나를 데려갔다. 나는 담배를 피지도 않고, 또 담배냄새를 엄청 싫어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취향은 엄청나게 특이해서 파이프 담배를 즐긴다. 그 말인 즉슨, 지금 잡혀서 흡연실로 끌려가면 그 지독한 담배냄새 속에서 십분이 넘는 시간을 버텨야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작업실 속으로 냉큼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선배가 발을 문 사이에 끼워넣었다.
"아파!"
선배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픈게 당연하죠!"
나도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이거 빼요, 나 흡연실 가기 싫단 말이야!"
그리고 무슨 여자가 이렇게 빨라, 남자만큼 빨라! 하지만 선배의 발을 언제까지 문에 끼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을 찼다. 찰 때 마다 선배가 짐승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여자의 목소리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너 담뱃불 붙이는거 신기하댔잖아, 그거 보여준다는데 왜!"
"이제 안 신기하거든요?"
"알았어, 알았어. 나 진짜 너 안 데려가. 그러니까 나 발 좀 빼게 힘 좀 빼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분명 힘을 빼면 문을 열어젖힐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대비해서 문고리에 체인을 걸어두었다. 먼저 그 것을 끌어당겨 벽에 연결했다. 그리고 선배의 요구대로 힘을 뺐다.
"이자식 또 체인 연결했어!"
선배가 소리쳤다.
"가서 일 해요. 안녕!"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갔다. 체인을 빼고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중앙 기록보관소 소장에게 보고서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보수할 문서의 리스트를 만들고,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보고해야했다. 문서 리스트를 먼저 만들까, 아니면 저 공책을 보고할까. 짧은 것 부터 하기로 했다. 재단 데이터배이스에 수록되지 않은 이상한 공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
선배가 씨익 웃고있었다.
"마스터 키 가져왔지."

그리고 나는 흡연실에 끌려왔다. 손에 면장갑을 끼고, 담배를 꺼내고, 파이프를 조심스럽게 꺼내고, 그 안에 담배를 집어넣고, 다지고, 그리고 입에 물고선 불을 붙이는 그 모든 과정을 봤다. 신기했다. 담배 나부랭이 하나에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것이 참 신기했다. 그리고 그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사시처럼 눈을 가운데로 모으고 뻐끔거리는 것도 참 신기했다. 담배 넣는 부분이 시뻘갰다. 골초만이 갖는 명예의 색이라고 언젠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새하얀 색이었다나. 왕왕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있는 파이프를 가져와서 자랑한 적도 있었다. 파이프 담배도 무진장 희안한데, 더 희안한건 라이터였다. 화구에 크고 동그란 구멍이 양 옆에 하나씩 나있었다. 그 정도 구경거리면 흡연실에 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고작 0등급 신입이었을 때 부터 지금까지 그 이야기 잘못 했다가 이렇게 간접흡연 신세다.
"그래서, 뭐 재미있는 것 찾았냐?"
불이 만족스럽게 붙었는지 선배는 라이터를 껐다.
"이건 보물찾기가 아닌거 알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지만."
방진 마스크를 가져올걸 후회가 들었다. 양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너 이번에 사건기록 맡았다며."
"예에."
"SCP 탈주 기록이냐?"
"아뇨."
"그럼."
"요주의 단체 사건 기록이요. 뭐, 탈주 기록이랑 겹치는 것이 없잖아 있지만."
"또 혼돈의 반란 놈들이 반을 차지하고 있겠지. 사지를 찢어놔도 시원찮을 놈들."
다른 요주의 단체에 대해서는 민숭민숭한 태도를 갖고있지만, 어쩐지 혼돈의 반란에 대해서는 대놓고 적대한다. 듣자하니 재단하고 척진 것이 많은 이상한 단체지만, 자세한 사항은 E등급을 갖고서도 접근할 수 없는 자료 뿐이었다.
"선임때문에요?"
"그런 것도 있고."
선배가 뚱하게 답했다.
"어서 그놈들 소굴을 찾아내서 소탕해야하는데."
"아. 오늘 이상한거 찾았어요."
일단 화제를 바꾸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보물찾기도 아닌데 뭘 찾아? 고의적으로 훼손한 자료?"
"아뇨. 공책이요."
선배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뭔 공책? 아니, 그 이전에 그거 내가 들어도 되는 내용이냐?"
"아. 선배는 E등급이 아니었죠. 일단 보고해봐야지 몇 등급 짜리 자료인지 알 수 있겠죠."
"보고는 했냐?"
"선배가 끌고나왔잖아요."
"미리미리 해 두지, 이 자식아."
나는 선배를 슬쩍 노려봤다.
"그래서 데이터 배이스에 없는 것이라면, 네가 지금 읽고 있냐?"
"네. 제가 최초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어디까지 읽었는데?"
"그냥 맨 앞장만……."
"뭐 같디? 연구원 개인 일지?"
"사람 이름밖에 없었어요."
"이름이 뭔데."
"리."
"리?"
"정확히 말하면, L.Lee 요. L, L-E-E."
선배가 담배에서 입을 뗐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몇 년도인지 검사했냐?"
"어……. 그게 맨 앞에 년도랑 날짜 써 놓았는데, 하필이면 몇 군데가 번져서……."
"대충 뭐라 써있었는데."
"1900년대, 몇월 1일. 정확히 말하면 천구백몇십구 년 몇 월 일 일 입니다. 근데 왜 그렇게 자세히 물어봐요?"
"일기장이네!"
선배가 씩 웃었다. 나는 선배를 멍하게 쳐다봤다.
"사람 이름, 몇 월 몇 일. 너 일기 안 써봤냐?"
"아니, 쓰기는 하는데……."
"일기장이네. 에이 별거 없겠다. 가서 일기장 찾았다고 보고나 해."
"아니 근데 그게 일기장에 쓰는 그런 숫자가 아니라, 몇 년 몇 월 몇 일, 나의 소유가 되다. 하고 써있는걸요?"
"그래도 공식적인건 아니란 뜻이잖아. 왜, 안 갈거야? 흡연실에 계속 있을래?"
선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박차고 나와 옷을 탈탈 털었다. 몇 분 안 앉아있었는데 온 몸에 담배냄새가 밴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작업실 문 옆의 기판에 카드를 댔다. 경쾌한 알림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다시 한번 옷을 털었다. 지금 보수하는 문서들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고문서이거나 아니면 복원해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갓 출토된 문서가 아닌지라 그렇게 꼼꼼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죽은 선임이 늘 강조하던 것이었다. 그래도 몸에 냄새가 배면 기분이 찝찝한건 사실이다. 옷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혀를 한번 차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자, 그럼 보고부터 해볼까."
방금 쓰다 만 보고서를 계속 썼다. 현재 이 공책의 내용은 모르는 상태이므로, E등급 사서의 권한에 따라 발견 개체를 읽고……. 다 읽으면 보고서를 한번 더 작성해야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팔자야. 전송 버튼을 눌렀다. 문서 리스트를 만드는건 잠시 뒤에 하기로 하고. 저 공책부터 처리해야겠다. 장갑을 끼고, 공책을 가져왔다. 책상 서랍에서 돋보기 등 간단한 도구를 꺼냈다. L.Lee, 19█9.█.1 나의 소유가 되다, 다음장. 날짜가 써있었고, 그 날짜에 해당되는 내용이 거기에 써있었다. 오른쪽, 맨 위.

1.█.
오늘 관장님께서 소개해준 남자를 만났다.

나는 공책을 덮었다. 컴퓨터를 만져 중앙 기록관리소 소장님에게 보낼 후속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냥 평범한 일기 아냐, 이거. 모월 모일 기록보관실에서 의문의 공책을 찾았으나 평범한 일기였음, 이 일기가 유입된 경로가 불분명하니 경로 추적이 필요합니다. 타자를 치다 멈췄다. 천구백년대의 일기장이 왜 저기 들어가 있는 거지? 다시 공책을 열었다. 종이 재질과 잉크 자국을 꼼꼼히 확인해보았다. 맨 뒷부분을 펼쳐보았다. 세로로 네 번 접은 종이가 보였다. 종이가 껴있는 곳을 다시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무리 봐도 여기 쓰인 잉크는 볼펜의 것으로 보기 힘들었다. 번진 자국을 보면 펜촉에 묻혀 쓰는 잉크인 것 같다. 만년필이 언제까지 쓰였더라. 볼펜이 50년 될 때 즈음에 나왔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쓰였으니까……. 후하게 잡아도 70년대 이전의 공책이다. 1919년에서 1979년. 1919년은 너무한가. 보고서에 덧붙였다. 자세한 년도 분석을 위해 기기 사용을 허락해 주십시오. 커서가 깜박였다. 보고서를 깡그리 지우고, 컴퓨터를 껐다. 제거한 종이를 펼쳤다. 한번, 두번. 그리고 나는 사색이 되었다. 종이가 네 조각이 되어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문서를 파괴한 것이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찾았다. 일단 각 조각의 내용을 보았다.

우리 ████ ███ ██ ████는 월 ███을 ██ █ █ █ ███, 연구소 생활동에 리 씨의 ██ 또█ ███ ██ █ █████ ███ ██ █ ████ █████ ██ ███ ██ █ ███ ██ █…….

아 일단 다음.

L.Lee

안녕하십니까?
귀하가 계신 도서관 관장님께서 추천을 하셔서 연락을 보내봅니다. …….

편지였다. 그럼 이게 제일 위일 것이다. 편지 조각을 책상 위쪽에 놓았다. 그리고 다음.

███ █████ ██ ███ █████. 숙███, 또 ██ ████ 의견█ 받███ ████로, ████ ██ ███ ████. ██ █████ ███ ██ ██ █ ████ 겠지만, 리 씨의 ██과 ████를 받███ ██ ████ ██.

██ 좋█ ███ 기다리█ █니다.

████,
██.█.K████

상당히 많이 번져있었다. 누가 물이라도 뿌린 모양이다. 다행이 맨 마지막을 보니 가장 마지막인 것 같았다. 첫번째 조각과 적절히 떨어진 곳에 마지막 조각을 두었다.

우리 █구소의 이름은 "S█████ ██l████ ███e 연구소"로, █설██ ████ ██ ███ █████ ██. …….

물에 넣었다가 뺀 모양이다. 종이를 잘 살펴보았다. 글자가 번진 부분이 특히 누렇게 변색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변색된 부분은 편지 전체에 걸쳐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봤자 네 조각 뿐이다. 첫 번째 조각과 비교하여 그 다음 조각을, 또 그 다음 조각과 마지막 조각을 비교해서 세 번째 조각을 찾아냈다. 얼룩은 종이 반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차례대로 배열한 것을 한번 내려보았다. 저게 이 공책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까.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L.Lee

안녕하십니까?
귀하가 계신 도서관 관장님께서 추천을 하셔서 연락을 보내봅니다. 저는 "█in███ C█l████ ██d██ 연구소" 의 최고 책임자, █안 G. █테█입니다. 리 씨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많이 실례라는 것█ 알지만, 혹시 저희 연구소에서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인지라, 리 씨에게도 많이 당███울것입니██ 하지██ 잠시만 ███ █ █████오.

우리 █구소의 이름은 "S█████ ██l████ ███e 연구소"로, █설██ ████ ██ ███ █████ ██, 제 1█ ████ 이후█ █립█████. 아마 해당 █관에 ████ 여기에서 연구하는 분야는 자연재█로, ████ 인██ █호하는 █이 우리의 ██ █니다. 하█만, █립 ███ ██ █ █ ██, 이 연█소█ ██ 인재가 부████. 특히, 연구 기록 및 논문을 정리할 사람이 전무합니다. 이█ ███ █씨█ ███ 저███ ███ 것입니다.

우리 ████ ███ ██ ████는 월 ███을 ██ █ █ █ ███, 연구소 생활동에 리 씨의 ██ 또█ ███ ██ █ █████ ███ ██ █ ████ █████ ██ ███ ██ █ ███ ██ █, 리 █의 ████ ██도 책██ ███습██. 행여█도 이 조건이 마██ ██ 않는다면, ███ ███ 통█ ████ ██ ████. 지금 리 씨의 직█인 ██ ████다 많이 █족█ █████, █ █께█ 갖고 있█ ███ ██ ███ ███ █████. ██████ ██ ████ ██ █ ███

███ █████ ██ ███ █████. 숙███, 또 ██ ████ 의견█ 받███ ████로, ████ ██ ███ ████. ██ █████ ███ ██ ██ █ ████ 겠지만, 리 씨의 ██과 ████를 받███ ██ ████ ██.

██ 좋█ ███ 기다리█ █니다.

████,
██.█.K████

읽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첫 문단이 살아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일단 맞춰놓은 편지 조각을 다른 곳에 옮겨놓았다.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리에게 스카웃 제의가 왔다. 연구소지만 이름이 심하게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었다. 자연재해로부터 인류를 보호한다는 아주 두루뭉실한 계획을 갖고있는 이 연구소의 이름은, Sin███ C█l████ ███e……. 미간을 찌푸렸다. S, C, █……. 받은 사람은 L.Lee. 보낸 사람은 █안. G. K█테█.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받는 이, L. Lee. 보낸 이, █안. G. K█테█. 연구소 이름, Sin███ C█l████ ███e 연구소. 연구소가 하는 일, 자연재해로부터 인류를 보호. 설립 시기,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필을 놓았다. 저 공책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일단 편지는 스캔을 떠서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놓았다. 성심성의껏 작업한거라 꽤 선명하게 나왔다. 여차하면 컴퓨터로 펜촉 자국을 되살려서 내용을 복원할 생각이다. 편지 조각은 임시로 보관해두었다. 일기장도 보관 자료로 만들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읽어보고 판단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공책을 폈다.

1.█
오늘 관장님께서 소개해준 남자를 만났다. 이름은 리안. █. ███, 며칠 전 나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다. ██에 있는 █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리는 옷을 꺼내입었다. 아마 자신을 스카웃하려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니, 꽤 멋지게 차려입었을 것이다. 리안과 리는 음식점…….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리는 일찍 출발했고, 일찍 도착했지만 리안이 더 먼저 도착해있었다. 리를 보자,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일찍 오셨군요."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리안의 몸짓은 절도있었다. 그리고 정중했다. 리는, 그러니까 이 일기장에 따르면, 리안이 군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서?
"이게 무슨……."
나는 입술을 핥았다. 지금 이 연구소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설립되었으니까……. 공책 맨 앞의 19█9년은 1919년 혹은 1929년, 아니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9년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일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리안은 군인처럼 절도있게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정중했는데, 리는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기사도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리는 여자였던 것이다. 여자가 이런 시각을 가지려면…….. 페미니즘 운동이 격렬했던 때……. 그냥 기기 사용 신청을 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도를 측정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시대가 어떻게 되든 간에, 리는 계속 쓰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도 문 열 수 있는걸요."
리는 살짝 쏘아붙였다.
리안은 그 말에 웃었을 것이다. 그냥 정중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리안이 예약을 했다고 써있다.
"뭐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리안이 물었다.
"우리 연구소 측에서 대접하는 것이니 부담갖지는 말아주십시오."
"어……."
리는 리안이 건네준 메뉴를 읽었고, 그대로 굳었다. 리는 음식 하나가 그렇게 비쌀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놀란 티를 낼 리는 없었다.

당황하지 않은 채 천천히 메뉴를 덮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 사람은 나를 쳐다봤다. 그리█ 그 역시 메뉴를 덮었다. 그는 ██스럽게 나 대█ 음식을 시켰다. 자존심이 상했다. 부르주아.

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여간 리도 참 이상한 사람이다. 조금 비싼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시킨 것 갖고 부르주아라니. 가만, 음식?
"어라, 지금 몇시야?"
나는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보았다. 두 시 반.
"아?"
재빨리 옷을 집어들고 복도로 나섰다. 문을 잠그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문서복원 작업실 앞에서는 책 수레가 하나 가득 있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직원식당으로 갔다. 점심은 열 한시 부터 세 시 까지였다. 가는 도중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밥 먹었냐?"
선배였다.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지금까지 담배를 핀거에요?"
"겸사겸사 나가서 산책도 했고."
팔자 늘어졌다. 그래, 2등급이나 되니까 이제 대충대충 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아니, 그 위로도 3등급이 있고 4등급이 있지 않던가? 아무튼 팔자 늘어졌다.
"밥 먹으러 가요."
"뭐 먹게?"
성가셨다.
"직원 식당이요. 비켜요, 이제 삼십분 밖에 안 남았어요."
"야. 오늘 문 닫잖아, 거기."
"……네?"
"오늘은 일 월 일 일이야. 누가 나와서 일하니?"
"네?"
"이럴 줄 알고 내가 샌드위치 싸왔지."
"아니, 오늘 직원 식당이 문이 안 연다고요?"
"속고만 살았냐?"
선배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서, 그 공책은 읽어봤어?"
"오늘 직원 식당 문 안 여는거 맞아요? 그리고 무슨 샌드위치에요?"
"그냥……. 햄 넣었어."
"그거 스팸이죠?"
"왜?"
나는 선배의 손을 뿌리쳤다.
"안 먹어요, 혼자 맛나게 먹으라고요."
선배의 음식 솜씨는 최악이었다. 중앙 기록보관소는 거대한 서버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기록보관소와 서버는 중앙 도서관과 다른 기지들과 동떨어진 적막한 곳에 위치했다. [데이터 말소] 주의 [데이터 말소] 카운티, [데이터 말소] 의 뜻은, 인적도 없고, 대중 교통도 없고, 식당도 없다는 뜻이었다. 가장 가까운 식당, 정확히 말하면 가장 가까운 페스트 푸드 점이 우리 보관소에서 한 시간을 차 타고 가야했다. 그래서 기지 내부에는 직원 식당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록 보관소 관사에는 개인 냉장고와 간단한 취사도구가 있었다. 다들 인터넷으로 식료품을 구매해서 직접 요리해서 먹거나, 직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너, 도시락은 있냐?"
그 중 직원 식당이 문을 닫았다.
"뭐 관사에 가면 있겠죠."
사실 냉장고는 텅 빈지 오래였다.
"거기까지 가려면 오며가며 삼십분이야."
"굶는 것 보다 낫겠죠."
정확히 말하면 선배 음식을 먹는 것 보다 나은 것이다. 제발 이쯤되면 알아 먹었으면 좋겠다.
"그러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공책은 어떻게 된거야? 왜 답이 없어?"
"아직 읽고 있거든요?"
"뭐디? 일기 맞지?"
"맞긴 맞는데……."
"그럼 폐기 신청 할거냐?"
나는 살짝 표정을 구겼다.
"알아서 할거에요. 근데 좀 더 읽어보고요. 나 밥 먹으러 갑니다?"
"어디까지 읽었어? 일기라면 더 읽을 것도 없지 않아?"
선배가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아, 계속 귀찮게 할래요?"
"거 참 날카롭기는."
선배가 입을 비죽였다.
"이봐. 나는 네 상관이라고. 내가 담당하는 일반 사서들 중 하나가 너야. 너 저번에 사고 한번 쳐서 나 엿먹인 적 있었잖아?"
그래, 딱 삼 개월 전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왜 꺼내요!"
그냥 마이크로 필름을 써보고 싶어서 낙서를 찍은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낙서를 마이크로 필름 자료로 남긴 것이다. 당연히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로 내가 얼마나 까였는지 알아? 내가 이 짬밥 먹고 소장한테 까여야겠어?"
"하지만 그건 마이크로…. 아 몰라요, 난 그냥 관사 갈거에요!"
"그리고 너 또 사고 친 거 있잖아."
"이번엔 또 뭔데요!"
나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음."
선배는 걸려들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나는 또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샌드위치 먹으면서 말할까?"

선배는 자기가 만든 커피와 자기가 만든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선배가 만든 커피를 멀찌감치 놓고 선배가 만든 샌드위치를 깨작깨작 먹었다. 빵은 마요네즈 때문에 눅눅했고, 사이에 끼운 몇 장 안 되는 양배추는 고무마냥 질겼다. 햄은 다행이 스팸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훈제햄이었고, 무엇보다 스팸만큼 짰다. 햄의 기묘한 연기 냄새는 모든 재료에 배어있었다. 햄의 지나친 짠맛도 모든 재료에 배어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에너지 음료 세 캔을 갖고가야겠다. 저걸로 점심을 대신해야지.
"그래서, 어디까지 읽었어?"
선배가 물었다.
"뭘요."
퉁명스럽게 답했다.
"공책. 그 일기장!"
"아 선배님, 그만 좀 물어봐요. 기껏해야 몇 장 안 읽었어요."
"그럼 읽은 데 까지만 말해봐."
선배는 끈질겼다.

리는, 자신을 이 만찬에 초대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실 음식은 대단할 것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방금 먹은 괴상한 훈제햄 샌드위치보단 맛있었겠지. 하지만 와인은 대단했다. 지금 두 캔 째 마시고 있는 이 에너지 드링크가 와인이었으면 좋겠다. 리는 그냥 음식을 묵묵이 먹었고, 남자 역시 말은 적었다.
"그래서."
남자가 적당한 때를 봐서 물었다.
"우리 연구소의 제안은 어떻습니까?"
"제가 해야할 일이 정확히 뭔지도 안 적어놓으셨더군요."
"문서 정리말입니다.."
"설마 그게 충분하다고 보시는건가요?"
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도 강했지만, 동시에 자기 직업에 대한 자존심도 강했다.
"문서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이걸 처음부터 분류를 해야하는지, 아님 분류 체계가 있고 그걸 손봐달라는 소리인지, 분류 체계에 맞춰서 문서를 집어넣는 단순 작업을 해야하는지 등등 아무것도 말 안해주셨잖아요."
남자는 잠시 입을 다셨다.
"엄……."
남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문서… 정리… 입니다만."
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리."
남자가 사과했다.
그리고 날짜는 넘어갔다. 리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군인같던 남자는 반쯤 잊었다. 관장한테 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날짜가 또 넘어갔다. 리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군인같던 남자는 거의 잊었지만, 관장에게 난 화는 더 커졌다. 다시 날짜가 넘어가고, 리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 어수룩하고 군인같던 남자만 생각했다.

그의 키는 얼마나 되었던가, 그래 꽤 컸다.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은 너무 허무하게 끝났고, 나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 그가 편지에서 제안했던 그 모든 것, 그러니까 내가 해야할 일과 그것에 맞춰 당연히 따라올 것들은 지금 이 도서관보다 훨씬 못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을 소개하고 제안하는 모든 과정은 어설펐고, 또 내게 보여준 미래는 불확실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 도서관보다는 그 연구소가 훨씬 자유로우리란 것.

리는 그의 어수룩한 태도가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무튼 여자의 마음은 모르겠다. 날짜는 자꾸 지났다. 리는 도서관의 책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관장에게는 화가 나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괴상한 스카웃 시스템은 이 때 부터 시작된건가. 나도 그랬었다. 몇 년 전이었다. 나는 두꺼운 돋보기를 몇 겹씩 끼고 낡은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피지. 먼지를 털어낼 것인가, 아니면 세척을 할 것인가. 나는 문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먼지를 털어내기로 결정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앞에는 어떤 사람이 서있었다.
"저희 연구소의 기록보관소에서 일하지 않겠나요?"
그래 나는 먼지 풀풀 날리는 곳에서 문서나 들이 파는 것에 염증을 느꼈던 차였다. 내 상사들은 다 뭣같았고, 내 밑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서 복원 예산은 쥐꼬리만큼 줬는데, 그 돈을 쪼개고 쪼개다보면 결국 부서져가는 문서의 사본을 만드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예산은 많나요?"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산을 많이 주세요. 시간도 많이 주고요. 그럼 당신네 연구소에 가겠습니다."
그 사람은 딱히 답을 하지는 않고 돌아갔지만 나는 이미 국가기록원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몇 일을 고민했다. '빌어먹을'을 몇 번 씩 되뇌이며 사표를 냈다. 하지만 결과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 당신은 속은거에요……. 그리고 나는 헛웃음을 웃었다. 어느순간 리가 들어온 연구소가 SCP 재단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 추측은 틀린 것이 아니리라.

"아니,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너가 재단에 들어온 비화가 아니야."
선배가 내 뒤에서 쫑알거렸다.
"그런데 선배는 일 안 해도 되요? 이렇게 작업실에 처박혀서."
"나? 지금 하고 있잖아, 내 노트북으로."
"개인 노트북은 데이터 배이스로 접근 안 되잖아요."
선배는 딱히 답을 하지 않았다.
"땡땡이치지 마요. 0등급 사서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여기서 담배 피워서 네 가슴을 선뜩하게 해줄테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다. 그래서 계속 읽어봐."
"나는 편지를 썼다."
리는 편지를 썼다. 길고 긴 장문의 편지였다. 보낸 이는 L.리, 받는 이는 리안 G. 케…….
"케테르!"
나는 소리쳤다.
"리안 G. 케테르!"
"아이고 귀야."
"케테르라고요, 케테르! 철자도 똑같아요, K-E-T-E-R!"
"알았어. 계속 읽어."
"기다려요. 소장님께 말씀드리고요."
"그 딱딱한 놈한테 말해서 뭘 하게?"
"이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어요. 케테르라니, 케테르라니!"
나는 신나게 타자를 두드렸다.
"기록보관소 소장님께…. 대단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선배가 서서 읽고있었다.
"계속 이럴래요?"
"보내지 마."
선배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나는 말을 멈췄다. 선배가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이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게 흔치는 않는데. 나는 입술을 잠시 핥고 말을 이었다.
"…말이에요."
"내가 책임진다, 보내지 마."
"선배. 이거 보관하려면 일단 스캔 떠서 이미지 자료 만들어야하죠? 그럼 뭐가 필요할까요? 그래, 기계 아닙니까, 기계! 근데 그 기계가 제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건가요? 당연히 아니죠. 그럼 뭘 해야할까요? 그래, 소장님 허가를 받아와야죠. 보냅니다."
"그 꼴통은 분명 이 공책을 파기하라고 명령할거야."
"설마요."
선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기 노트북을 챙겨서 나갔다. 나는 기록보관소 소장에게 할 말을 마저 적고 메세지를 보냈다.

리는 당장 연구소에 들어가기보다는 잠시 그 근처에 머물며 연구소를 탐색해보기로 했다. 관장에게는 휴가를 따냈다. 의사의 필체를 흉내내서 몸이 아프단 진단서를 만들었다. 관장은 리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는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싶었지만 꾹 참았다.
"리 씨."
케테르는 리를 맞았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꽤 하늘하늘한 차림을 하고있었다.
"결국 와주셨군요.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케테르가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아귀는 강했다.
"며칠간 둘러보시고 결정해주십시오. 아마 이 곳에 대한 설명은 여기 이 여자분이 해주실겁니다."
작은 여자는 예쁘게 인사했다. 리 역시 인사했다. 하지만 리의 인사는 좀 더 중후했다.
"이 분은 그뤼네테 양입니다. 별명이긴 하지만. 현재 이 연구소의 번역가 겸 비서를 맡고있습니다."
"비서요?"
"네, 제 비서입니다."
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럼 다시 한번, 우리 17기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케테르가 웃었다.
"기지?"
리가 물었다.
"네, 기지요."
답은 그뤼네테가 했다.
"죄송합니다만 곧 회의가 있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답변을 내리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케테르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성큼성큼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리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리는 어쩌면 자기가 연구소에 방문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들어가실까요?"
그뤼네테가 물었다.
그 여인의 입에는 살가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리는 뭐라 답할 새도 없이 그뤼네테의 손에 이끌려 기지로 들어갔다.
"기지라니, 그것도 17 기지요? 그럼 기지가 열 일곱개 있다는 것인가요?"
리는 끌려가면서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그냥 17 기지라니까 17기지인줄 알고있는거에요."
"그게 뭐에요?"
"우리 연구소는 생각보다 중요하답니다, 리 씨. 우리가 세력이 얼마나 큰지는 철저히 숨길 필요가 있거든요."
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뤼네테를 보았다. 기지 안에는 연구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남자였고, 대부분의 사람이 남자였다.
"그럼 이 곳이 뭘 하는 곳입니까?"
리가 물었다.
의미심장한 버저 소리와, 의심스러운 소란이 흘렀다. 경쾌한 알림음이 들렸다. 나는 공책을 놓고 컴퓨터를 보았다. 기록보관소 소장이었다. 메세지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당장 내 방으로 오게.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뭣 때문일까. 나는 공책을 서둘러 닫았다.

그리고 그 이상한 공책도 갖고오는거 잊지 말게.

분명히 이것 갖고 뭐 하냐는 거냐고 묻겠지. 하지만 그건 이 공책의 내용을 몰라서 그런 것이었다. 나는 소장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글쎄요,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그뤼네테가 생긋 웃었다.

"뭘 하는 짓인가?"
소장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뭘 하는 짓이라뇨?"
나는 되물었다.
"기껏 이 일기장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걸 보존해?"
소장이 일기장을 툭 내던졌다.
"소장님,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이건 적어도 재단이 설립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록된 것이에요."
"그래서?"
"네?"
"그래서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네."
"재단의 역사 말입니다. 우리 재단의……."
"그래서 그 역사 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일세."
소장이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확보, 격리, 보호일세. 우리 조상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는지가 아니라. 자네, 자꾸 이런 이상한 짓 하면서 시간과 예산을 낭비할 생각인가?"
"하지만!"
"필요 없네, 이런 공책은."
소장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나가보게. 공책이 여기에 왜 있는지는 그쪽 사람들이 알아서 조사할걸세."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직접 파기 문서로 신청해놓겠네."
"파기 문서요?"
리가 물었다.
리와 그뤼네테는 문서를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서 두 남자가 나오다 두 여자를 보고 멈췄다. 그들은 문서를 파기하겠다느니 어쩌느니하고 말하고 있었다.
"네, 파기 문서요."
그뤼네테가 말했다.
그뤼네테 뒤에는 두 남자가 차트를 들고 멍하게 서있었다.
"그 문서 이리 줘봐요. 이거 뭐에 관한 거죠?"
두 남자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그뤼네테를 보았다. 그뤼네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연구 기록에 대한 것입니다. 별거 아니에요."
"기록?"
리는 한숨처럼 물었다.
"도대체 이걸 왜 파기하려는거죠? 이리 내요."
나는 소장에게 말했다.
"난 더이상 자네에게 입 아프게 설명하고 싶지 않네."
소장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이건 기록입니다! 기록 중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 것 같나요? 아뇨, 없습니다."
리는 일장 연설을 토해내고 있었다. 리는 차트를 휙휙 넘겨보았다. 당연히 리가 이해하기에는 분야가 너무 다른 글자들이 눈 앞에 지나갔다.
"신기한 내용이군요."
리가 말했다.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요."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왔지만, 리는 그 차트의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아주 어처구니 없는 자료이군요.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한겁니까?"
"리 씨."
그뤼네테가 소근거렸다.
"그거 진짜 연구 기록이에요. 진짜 있는 물체로 실험을 했다고요."
"그럼 그 물체를 여기 가져와요. 전혀 있을 법 하지도 않은 결과 아닙니까. 잘못 나온 결과여서 가져다 버리려는 것 아니었나요?"
서 있던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봐요, 뭐 하시던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결국 공책은 소장의 방에 있는 양철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어이, 호출당했다며?"
선배와 복도에서 만났다.
"선배도요?"
"내가 이래뵈도 네놈의 직속 상관이다."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뺏겼냐, 그 공책?"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거야?"
"선배가 잘 좀 설득해봐요."
"너는 그동안 저지른 일이 많아서 내가 어떻게 설득도 못해볼걸."
"만일 설득이 안되면……."
"안되면?"
"훔칠거에요."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재미있는데."
선배는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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