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6

2014년 1월 6일
나는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었다.

“공책은 두고 가.”
선배가 내 손을 잡았다.
“뭘 알고 싶은데?”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묻지 못했다. 선배는 옆에 앉아서 담배만 피고 있었다. 내 방은, 금연 구역이었지만 굳이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새벽 한 시.

“묻고 싶은 건 다 물어도 되요?”
선배는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길게 연기를 뱉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는 맛있나요?”
선배가 픽 웃었다.
“향으로 먹는 거지 뭐.”
“왜 피는 거에요?”
“흡연자들은 자기가 왜 담배를 피우는지 몰라.”
나는 여전히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었다.
“선배는 묻고 싶은 것 없어요?”
“너에게 다 양보하지. 어차피 나는 이제 알아도 쓸모 없으니.”
나는 계속 천장만 보았다.
“왜 그런 거에요?”
선배는 잠시 침묵했다. 담배를 조심스럽게 탁자에 놓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신상에 대한 것은 다 기밀이거든. 어쩔 수 없어.”
“그럼 안전한 곳에 박혀서 나오지 않으면 되잖아요.”
“우리도 사람이야. 넌 몇 십 년 동안 동굴에 틀어박힐 수 있겠냐?”
하긴. 나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내……. 선임도 알고 있었어요?”
선배에게서 답은 들리지 않았다. 분명 고개를 가로 젓거나 끄덕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상이 기밀이면 왜 이 일기장을 기록보관실에 넣었어요?”
“확인했냐?”
“심증.”
선배는 다시 담배를 들었다.
“말했지. 역사는 알려져야 해. 일기장이야 미시사적인 것이지만.”
나는 천장을 보았다. 선배는 계속 담배를 피고 있었다. 선배는 대답 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인가보다.
“나에게는 왜 알려준 거에요?”
“알려줄 의도는 없었어.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았거든. 난……. 좀 부주의 해. 늙어서 이렇지.”
“논리적 추론 엔진.”
“나중에 공부해봐. 그거 재미있다.”
“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너무 질문이 방대한데.”
나는 아직도 천장을 보고 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다.
“다 들어 줄 용의가 있어요.”
선심 쓰듯 말했다. 선배는 다시 작게 웃었다. 나도 실없이 웃었다.
“그래, 어디까지 읽었다고?”
“리와 케테르의 면담, 부서진 신의 교단이 나오는 그 부분이요.”
“참 나……. 그게 언제적 거야?”
“요주의 단체는 얼마나 있어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
나는 혀를 찼다. 선배는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나와 같이 천장을 보았다. 나는 누운 채로, 선배는 앉은 채로. 눈빛이 약간 몽롱했다.
“아쉽게도 케테르는 리에게서 괜찮은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다.”
선배는 책에 있는 내용을 읊듯, 과거를 노래했다. 나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노래에 찬성했다.
“동생은 리에게 찾아와서 약을 살 돈을 요구했고, 리는 그 때 마다 동생을 죽이려고 했다. 어쩌면 죽이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매번 살아서 기지를 걸어나갔고, 리는 언제나 화가 나있었다.”

기지는 소란스러웠다. 예정보다 빨리 지어진 기지. 케테르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데미안과 그뤼네테, 그리고 리는 긴장했다. 도킨스는 새로운 기지의 기지 관리자가 되고 싶어했다. 리는 어서 저 사람이 그쪽 기지로 갔으면 했다. 리는 이 일에서 역할을 맡기에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리가 말했다. 결국 도킨스 박사를 그 기지로 보내겠다는 겁니까, 아닌 겁니까? 아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는 하지만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사실을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그냥 믿는 것이 좋을 게다. 케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선배는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뤼네테의 손에 있던 반지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도킨스의 손에 있던 반지 역시 없어졌다. 그뤼네테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만은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뤼네테는 리에게 자주 찾아왔다. 리는 훌륭한 상담가는 아니었다. 리는 그뤼네테가 자기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쏟아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리는 케테르에게 물었다. 기지 이전은 언제부터입니까? 케테르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보낼 것은 다 적어놨습니다. 빠를수록 좋겠죠.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정말로 빠르게, 도킨스는 그 기지에 갔다. 그리고 그것 보다는 좀 늦게, SCP와 연구원들은 자리를 옮겼다. 사병집단이 된 요원들, 지금 특무부대의 전신이 되는 그들은 SCP 탐색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지했다. 아직 재단은 연구원이 많이 없었다. 연구와 이전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케테르가 했던 두 번째 실수는 도킨스의 기지로 보낸 연구원들에 대한 검사를 안 했다는 것이다. 그쪽으로 간 연구원들은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또 각각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다.
“첫 번째 실수는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도킨스를 런던탑에 가둔 것이지.”
선배가 답했다.
“하지만 상황은 케테르가 말한 것 보다 훨씬 나빴다. 훨씬, 훨씬 말이지.”
선배는 ‘훨씬’ 을 몇 번 더 중얼거렸다. 선배는 이미 과거에 빠져있었다. 오래된 기억은 색이 바랬지만, 군더더기는 적었다. 나는 천장에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리와 재단의 동료들. 케테르, 그뤼네테, 스킹크……. 곧 떨어져 나갈 도킨스.
“오캐인 대령은 언제나처럼 케테르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물었다.”
천장은 좋은 도화지였다. 의외로 나 자신은 그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방향을 변경하기에는 그들은 외길로 달렸고, 또 너무 멀리 달려 나왔다. 오캐인 대령은 좋은 전술가였지만 이번 전략에 대한 대안을 말하지 못했다. 오캐인 대령은 좋은 전술가였지만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도킨스가 이 재단에서 뛰쳐나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도킨스가 빠진 전체 회의에서, 오캐인 대령이 물었다. 말해 보시오, 리안. 케테르는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캐인은 재차 물었다. 케테르의 표정은 어두웠다. 확실히 어두웠을 것이다. 그가 재단에 위협이 되지만 않기를 빌 뿐입니다. 케테르는 더 이상 재단의 앞을 예언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일이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걱정 마요. 잘 될거에요. 그뤼네테가 말했다. 그뤼네테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었다. 의외로 도킨스는 잘 해냈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 것에 대해 불평을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동시에 본부는 도킨스의 기지에 정보를 주지 않았다. 정보 통제는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본부로 사용할 새로운 기지는 거의 완성이 되어갔고, 이 역시 꽤 빠르게 지어진 것이었다. 그 때까지 도킨스는 그 사실을 몰랐다.
“언제 완성된 건데요?”
내가 물었다.
“음……. 천구백…….”
선배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십사 년 초반.”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야기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도킨스는 왜 화가 난거에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까지 참석한 정기 회의 때 도킨스는 알아버렸다. 본부를 이전할 계획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기지의 공동 책임자가 그뤼네테와 데미안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도 그가 그렇게 크게 화를 낼 줄 몰랐고, 아무도 그의 기지 직원들이 그에게 충성할 줄을 몰랐지.”
정확히 말하면 도킨스가 자신에게 찬성하는 사람들만 남긴 것이다. 그는 그 기지에서 우리에게 보내지 않은 정보가 있었다. 이 역시 의심한 사람이 없었다. 그 정보는 바로 인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기지의 인원을 거의 갈아치웠다. 남은 사람들은 본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 반감은 그대로 신입 요원들에게 내려갔다. 다행인 것은 특무부대 요원들은 도킨스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지가 이상하다는 것은 특무부대 요원들이 보낸 정보로 간신히 알았다. 그들은 심각하게 많은 변수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테르는 이를 물었고, 오캐인은 머리를 굴렸고, 그뤼네테는 분통을 터뜨렸고, 스킹크는 절망했겠죠.”
“아니, 데미안은 비웃었어. 도킨스의 언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비웃었다.”
선배가 내 말을 정정했다.
“리는요?”
“리는…….”
선배는 휴지 하나를 뽑았다. 나는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선배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재를 털었다. 나는 천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천장에 아는 사람을 다 그려보았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선배, 내가 거쳐왔던 일가 친척들, 기록보관소의 동료 사서들, 내 선임, 소장님,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모님.
“리는 최대한 희망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오캐인은 가장 나쁜 상황을 가정하고 그 기지에 파견된 특무부대 요원들을 다시 본부로 송환했다. 하지만 그 가정이 결국 가장 나쁜 상황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캐인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분노할 차례였다. 케테르와 그뤼네테는 도킨스가 연방정부에게 보낸 서신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 관계자들이 재단에게 보여준 것이다. 도킨스는 재단의 특무부대를 갖다 사병 집단으로 비유하며 재단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갔다. 그 때는 사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였다. 냉전보다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냉전 보다 더 치열할 때였다. 1924년. 소련은 세워졌으며, 노동자들은 시위를 했고, 정부는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도킨스는 리를 끌고 들어갔다. 리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방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정부는 곧 재단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은 쉽게 풀렸다. 케테르는 외교에 능했지만, 그게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증명했다. 연줄이었다. 케테르는 정치인의 외아들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집안은 부유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정계에 연줄이 많았다. 아버지의 연줄은 아들의 연줄로 이어졌다. 또한 리안 케테르는 올바르고 착실한 청년으로 정평이 나있었는데, 사관학교를 나왔고 장교로 꽤 오래 근무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때 조국을 위해 참전했고 조국이 시킨 비밀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청년 리안을 건실하고 건전한 사람으로 높게 쳤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케테르는 비밀 임무에 지쳐 군을 나왔다는게 흠으로 잡힐 뻔 했지만, 곧 그 늙은이들은 케테르가 조국이 부담스러워하던 임무의 결과물을 스스로 치우겠다 나선 것을 기억해냈다. 그들이 치매에 안 걸린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데미안은 그 모든 과정을 비웃었다. 비웃고 비웃고 또 비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케테르의 얼굴을 봐 재단 박사들과 모든 직원의 고까운 점을 너그럽게 용서했다. 결과적으로 도킨스는 실패했지만…….
“재단은 잘못하면 지원이 끊기게 되었군요.”
“정부 사람들이 간섭하기 시작했지. 케테르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SCP 재단은 정치와 사상과 무관한 집단이다. 우리 SCP 재단은 절대 변칙 개체들을 누구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선배는 잠시 말을 쉬었다.
“재단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담배 냄새에 물들었다. 나는 살짝 어지러웠다. 천장은 내 고동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선배의 말은 그 고동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리안은, 선배가 계속 말했다. 리안 케테르는 우리에게 하나씩 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케테르는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마땅한 후계자를 뽑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가 꿈꾸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최고 권력은 의회에게 있다. 총리나 왕이나 대통령은 필요 없었다. 오캐인 대령은 반발했지만, 곧 자신의 의견을 꺾었다. 아무도 케테르 만큼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케테르는 이제 권력을 두려워했다. 누군가에게 힘이 몰려 도킨스와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을 두려워했다. 변절하느니 차라리 갈가리 찢겨지는게 나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도킨스는 후원자와 우리를 이간질했고, 자신이 정당한 재단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설파했지만, 후원자와 재단의 관계는 의외로 끈끈했다. 결국 도킨스는 이간질과 정당성을 주장하기를 그만 두고 재단과 결별을 선언했다. 우리는 그 결별을 준비했다. 도킨스는 자신의 패기를 받아 줄 새로운 후원자를 구했다. 그 후원자는 유럽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협상을 해 보는 것은 어때요?
선배는 아주 길게 침묵하고 말했다.
“난 아직도 그 질문을 한 것을 후회한다.”
낮고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 다음은…….”
“알아요.”
나는 선배의 말을 끊었다.
“도킨스는 케테르를 총으로 쐈죠.”
“시체로 돌아왔지. 돌아온게 어디야.”
리는 자조했다.
시신은 편지와 함께 돌아왔다. 도킨스의 완벽한 결별 선언.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오캐인 대령은 그들의 대범한 결별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뤼네테는 창백하게 케테르를 내려보았다. 데미안은 끝없이 비웃었다. 희망을 비웃고 질문을 한 리를 비웃고, 모든 것을 믿은 자신도 비웃었다. 리는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었다.
“돌아온게 어딥니까, 케테르.”
리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의석은 케테르의 자리까지 다섯 자리입니다.”
오캐인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석은 끊임없이 많아질 테지만, 15자리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죠. 우리는 교황을 뽑지 않는 추기경이지, 국정을 운영하는 국회의원이 아니니까요.”
리가 제안했다.
데미안은 비웃기를 멈췄다. 그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는 절망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순수하게 분노했다.
“혼돈이라.”
그는 낮게 웃었다.
“혼돈의 반란입니다.”
작은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렸다.
“혼돈(Chaos)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질서(Order)인가요?”
그뤼네테는 울지 않도록 노력했다.
“혼돈(Chaos)에는 코스모스(Cosmos)죠.”
데미안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도킨스가 우리를 못 알아보게 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혼돈의 반란 수뇌부는 앞에 C를 의무적으로 붙였다. 일종의 코드네임이지.”
선배가 덧붙였다.
“지금은 대충 임원이나 작전, 아니면 뭐……. 첩보원 기타 등등으로 쓰이는 것 같지만. 아무튼 꽤 바빴지. 자세히 생각할 틈이 없었어. 먼저 그들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17기지가 사실은 제 1기지나 다름 없었던 것을 생각했다. 그들은 다섯 뿐이었지만 번호는 1에서 15 사이의 것을 택했다. 가장 큰 수는 13이었다.
“지금까지 13명이 넘은 적은 없었어.”
선배는 다시 덧붙였다.
“우리의 내막을 알고 있었기에 뭐, 속을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혼란을 줄 수 있을 거라 오캐인 대령이 말했다.”
“혼돈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케테르가 없는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제 17기지는 이제 없습니다. 이 건물의 공식 명칭은 SCP입니다. 아직 번호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새로 지어진 건물은 제 19기지로 불릴 것이며, 본부로 사용할 것입니다.”
오캐인이 설명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그대로 특무부대에게 전해졌다.
“도킨스가 갖고 있는 SCP에 대한 자료는?”
오캐인이 리를 쳐다보았다. 리는 서류를 꺼냈다. 오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리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방금은 아니지만, 이렇게…….”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SCP의 번호를 섞는 것입니다. 중요한 SCP와 중요하지 않은 SCP를 같이 말이죠. 예를 들어 SCP-013, 그러니까 만병통치약은 SCP-500, 블루레이디 담배랑 번호를 바꾸는 겁니다.”
나는 만병통치약 보관실을 연 도킨스의 표정을 상상했다. 그 곳에는 약 대신 담배가 있었다. 선배는 바뀐 번호들을 나열했다. 모두 나열하지는 못했지만. SCP-173은 SCP-271과 번호를 맞바꿨다. 선배는 빌어먹을 교단과 거래를 할 수 있는 빌어먹을 원판을 빌어먹을 조각상과 바꾼 것이라고 했다. 빌어먹을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알아듣는데 힘들었지만, 아무튼 혼돈의 반란은 부서진 신의 교단과 거래하는 대신 목이 꺾여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새로 발견되었다는 인간형 SCP는 그냥 제 17기지에 두었다. SCP-073에게 SCP재단과 혼돈의 반란 간의 관계를 설명했고, 대상은 다행이 납득했다. 어차피 그에게 발포한다면 죽는 것은 SCP-073이 아니라 발포한 사람들일 것이다.
“페르마, 데카르트는 그대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등급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데미안이 제안했다.
그리고 다들 조용히 동의했다. 선배의 목소리는 조용히 분노에 타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히 복수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름이 끼쳤다.
“유클리드.”
데미안이 제안했다.
“케테르.”
오캐인이 다른 하나를 제안했다.
“뽑읍시다. 무슨 등급 대신 쓰일지 말이죠.”
그뤼네테는 종이를 찢어 제비를 만들었다. 뽑은 사람은 리였다. 페르마는 곧 유클리드가 되었고, 데카르트는 케테르가 되었다.
“문서 교체 작업이 힘들겠군요.”
그 회의에서 나온 유일한 농담이었다.
“……. 문서들은 어떻게 하죠?”
리의 안색이 변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차하면 태워버립시다.”
기본 중의 기본을 오캐인이 말했다.
“여차하지 않으면?”
리가 물었다.
“옮겨야죠.”
데미안이 답했다.
“어디로?”
리는 다시 물었다.
“새로운 기지로.”
데미안이 다시 답했다.
“옮기기엔 너무 방대해요. 부대 요원들은 SCP를 옮겨야 합니다. 그럼 문서는 누가 옮기죠?”
리는 재빨리 생각했다.
“너는 어떻게 했을 것 같냐?”
선배가 물었다.
“기록보관소는 한 군데 뿐이었다. 지금이야 여러 군데로 분산이 되어있다만.”
“사용합시다.”
데미안이 말했다.
“SCP, 사용합시다.”
다들 서로를 쳐다보았다.
“SCP-133. 즉석 구멍. 지금 800장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지반에 구멍을 낸 뒤, 보관 용기에 넣은 문서를 넣고 덮읍시다.”
“그래서, 사용 했어요?”
내가 물었다.
선배가 힘없이 웃었다. 그 날 약 200장의 SCP-133을 사용했다. 한번 사용한 뒤, 그들은 거침 없었다. 사실 SCP의 번호를 맞바꾼 것도 기지를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우리도 사람이고,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었지. 우리에게 ‘규정’ 이라는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여겼는지.”
예외 규정은 질서가 혼돈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마지막 안전선이었다.
“난 아직도 궁금하다.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이 이렇게 기를 쓰고 지킬만한 것 들인가. 우리는…….. 이걸 지킬 수 있는 기관인가.”
피곤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쉬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우리의 예측대로, 그들은 제 17기지, 아니 SCP를 습격했다.”
“그 학교는 결국 일련번호가 부여되지 않았나요?”
선배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결국 부여되었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초기 격리된 SCP들은 그 때 다시 재정비했지. 그 SCP들은 일련 번호가 아니라 고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보통 케테르와 오캐인 대령이 군에서 뛰쳐나올 때 가져온 SCP들이었어. 이들은 다들 ‘초기(original) SCP라고 불렸지. 우리는 그들의 번호를 다 합쳤다.”
SCP-001. 그 안에는 ‘악마’, ‘천사’, ‘공장에서 나온 몇 가지 물체’, ‘좌물쇠’, ‘변화하는 기지’ 등이 있었다.
“대략 열 몇 개는 될거야. 아니, 더 넘었던가.”
선배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끔가다 SCP-001이 재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너 같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해.”
선배는 우습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O5 평의회가 관리하는 SCP-001은 단순히 그런 멍청이들을 낚는데 쓰는 것일 뿐이야. 그들은 SCP-001의 보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진짜 위험한 멍청이는 너 같은 사람이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O5의 정보에 접근하는 사람들.”
“잠깐. 근데 선배는 저한테 일기장을 줬고……. 또 그걸 보관하려고 하셨잖아요?”
나는 대들 듯 물었다.
“이건……. 내 계획 중 하나였다. 동양의 옛 왕국에서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어. 그래, 왕이 말하는 것 한 마디 한 마디를 비롯해서 하다 못해 화장실을 다녀왔느니 왕비와 동침했느니 그런 것 까지 모두 말이야. 난 그걸 의도했어.”
“초기 수뇌부……. 그러니까 O5의 일거수일투족…….”
“좀 알아 들어라! 우리가 무슨 상황이었고, 무슨 환경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그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O5 평의회는 다른 결정을 내렸지. 역사책을 살려두기로 말이야.”
“SCP……. 그 만병통치약이요?”
“아니. SCP-006. 젊음의 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SCP-002, SCP-006, SCP-008, [데이터 말소]를 당한 사람, SCiPNET.
“재단 네트워크!”
나는 소리쳤다.
“거기까지 알아낸 건가. 설마 내 O5 아이디를 아는 건 아니겠지?”
선배가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추론, 추론 엔진이요.”
나는 변명하듯 손사래를 쳤다.
“뭐 읽어봤자 죄다 [데이터 말소] 였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알지도 못했는걸요.”
“흠. O5 평의회에……. 아니다, 아무리 막아도 찾을 놈은 다 찾겠지.”
“저, 선배님. [데이터 말소] 된 부분이 알고 싶은데…….”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서 전체는 잘 모르지만 일의 전말은……. 그래, 이거부터 설명하지.”
별 뜻 없이 파이프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선배의 손을 보았다.
“지금은 O5가 잘 드러나질 않아서 무슨 던전의 최종보스마냥 떠들어대는데, 50년대 까지만 해도 O5……. 그러니까 5등급 요원은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까 내가 말한데서 짐작했듯 우리 중 몇몇은 세대 교체를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SCP-006을 마시는 것으로 결정났지. 음. 그래. O5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온갖 실험에 다 참여했다. 4등급 요원들이 케테르 급 물체 실험을 감독하듯, 5등급 요원들도 그랬어. 4등급이 기지 관리자라면 5등급은 그냥……. 기지 관리자의 관리자? 지부장? 그런 느낌이었달까. 본디 박사니 특무부대 요원이니 하는 사람들이었고, 거기다 불로불사의 몸을 가졌으니 위험한 실험에도 서슴없이 나섰다.”
선배는 아무것도 안 든 담뱃대를 물었다. 나는 선배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데미안.”
선배의 입에서 떨어진 이름이었다.
“기억 소거 실험…….”
나는 중얼거렸다.
데미안 박사가 그 날도 피실험자였던 것이다. 선배는 나를 빤히 보다가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SCP-006의 효능과 기억소거제의 효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게다가 그 때는 완전한 기억소거제도 아니었으니, 원. 아마 그 기억소거제…… 우리는 제초제라고 불렀는데, 아마 그 제초제를 일반인에게 썼다면, 뇌가 몽땅 타버렸을걸?”
데미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006은 신경망을 재구축했고, 그 신경망은 기억소거제가 다시 파괴했다. O5 평의회는 데미안을 죽일 수 없었다. SCP-006의 영향을 받은 지라 소각을 제외한다면 그 사람을 죽일 방법이 묘연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정신을 잃어 식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입력 장치들은 멀쩡한데, 출력이 안 되는 것뿐이었다. 데미안 박사의 뇌는 인지하고 있었다. O5 평의회는 방향을 바꿨다. 실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재단의 의학 박사들과 공학자, 심리학자, 보조 연구원,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재단의 네트워크로 만든 것이군요.”
“그렇지. SCP-006과 신경을 말살해버리던 제초제급의 기억소거제. 그 두 개를 연달아 데미안 박사에게 투여했다.”
선배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잘 작용했고, 우리가 원하던 부작용이 일어났다. 가지고 있던 SCP-006을 거의 다 써버리긴 했지만, 데미안 박사는 통속의 뇌가 되었고, 신경망은 네트워크가 되었지. 아주 성공적이었어.”
하지만 입가에 걸린 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럼 그게……. SCiPNET…….”
“그것의 전신이지.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그걸 업그레이드 한 거야. 스킹크 박사는 관리자처럼 되어버렸지.”
둘 다 말이 없었다. SCP 재단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정말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나는 등을 벽에 기댔다. 다리를 세워 쪼그렸다.
“하, 담배 피고 싶은데.”
선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담뱃잎을 가져오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 방이 담배 연기로 오염되는 것은 더 이상 못 참았다.
“아무튼. 더 궁금한 건?”
“도킨스는 잘 막아냈나요?”
“어느 정도는. 하지만 헤르메스의 지팡이라던가 엔트로피의 종, 기타 등등을 빼앗겼지. 그리고 도킨스의 기지에 있던 그 SCP들도 거의 다 그들 손으로 넘어갔어. 한……. 30개 정도 되던가? 그 때 재단이 100개가 조금 넘는 SCP를 갖고 있었으니, 원.”
나는 혼돈의 반란이 뺏어간 SCP의 수 보다 재단이 그렇게 적은 수의 SCP를 관리했을 때가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 시였다.
“또 다른 질문.”
선배가 물었다.
“도킨스의 후원자는 누구였어요?”
“초기 후원자는 모르겠어. 하지만 도킨스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으로 튀었고, 나치당과 파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 같더군. 자기 딴에는 후시아틴 숲과 젊음의 샘을 노렸던 것 같은데…….”
“어, 잠깐요. 젊음의 샘은……. 고갈되는 건가요?”
“아니. 펑펑 솟아나오는데?”
“근데 방금 데미안 박사에서 가지고 있던 006을 거의 다 써버리셨다고…….”
“젊음의 샘은 러시아에 있어. 우리뿐만 아니라 오캐인 대령이 미군에 있을 때부터 호시탐탐 노리던 샘이라더군. 젊음의 샘은 공산당의 관리 하에 있었지. 재단은 국가 및 사상과 상관없는 단체라 미군이 개입했을 때 보단 유하게 반응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계가 있었지. 그냥 제 2차 세계대전 때 후시아틴 숲을 지키러 가면서 은근슬쩍 떠왔다.”
선배는 혀를 한번 찼다.
“그래, 뭐 도킨스 그 자식이 유럽으로 튄 덕에 우리는 연합군으로 붙을 수 있었어. 사상과 국가에서는 독립해있었지만, 이익에서는 차마 독립을 못하겠더군. 나치당과 파쇼들이 쓰던 SCP에 대항할 수 있는 약간의 SCP들을 빌려줬지. 그래, 우리도 똑 같은 인간이니까. 혼돈의 반란에 겁을 먹은건지, 아니면 재단에 겁을 먹은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몰라도 국가들은 세계 오컬트 연합을 만들어 SCP들을 부수더군. 그래. 이해할 수 있어. 그래, 그럴 수 있지.”
다시 방 안은 조용해졌다. 이제 나는 왜 그 공책을 봤고, 그 일기장을 읽었던 이유를 잃어버렸다.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커져버리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뭐야? 말이 없네.”
선배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벌어진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 바람은 언제나 우릴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데려가지.”
“삶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아니에요?”
“바람이 더 폼 나잖아.”
“하나도 안 나요.”
선배는 입을 비죽였다. 나는 작게 웃었다.
“내일 만나는 사람들은 O5들인가요?”
“그래. 네 놈 덕분에 긴급 의회가 열렸거든.”
나는 다시 풀이 죽었다. 이번에는 선배가 웃었다.
“어깨 펴 임마. 그럼, 문답은 이 정도면 충분한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더 생각나는 질문은 없네요.”
“그래, 그럼 잠시라도 눈 붙여. 내일 여섯 시다.”
그래 봤자 세 시간 자는 것이었다. 선배는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담배 냄새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눈을 감았다. 선배는 왜 나를 O5에게 데려가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이제 이 방에는 선배가 없었다.
“선배.”
나는 뜻 없이 말했다.
“선배가 리 맞죠?”
뜻 없는 말은 담배 냄새와 함께 공중에서 휘놀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선배의 얼굴은 리의 얼굴과 많이 닮아있었다.

새벽, 나는 거의 잠을 못 잤다. 그래도 여섯 시에 맞춰서 깔끔하게 옷을 입었다. 거울을 봤다. 나는 어색했다. 양복이 없어서 입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입었다. 선배한테 트집을 잡힐 까봐 잠시 걱정했다. 하지만 어제 선배가 방 안에서 담배를 핀 바람에 온 몸에 담배 냄새가 밴 것을 기억했다. 담배 냄새로 그 트집을 무효화할 생각이었다. 최고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와 닿았다. 코트를 입었지만, 그렇게 따듯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나 따순걸로 사야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뒤, 선배가 저만치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선배는 묘하게 찌뿌등해 보였다. 역시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선배, 담배 좀 끊어요.”
나는 장난스레 선배의 어깨를 쳤다.
“에라이, 너 때문에 피는거야, 너 때문에.”
선배는 답례로 나를 발로 찼다.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가자.”
선배가 앞장섰다. 나는 선배에게 맞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깨금발로 뒤를 쫓았다.
“뭐 타고 어디로 가요?”
“기차.”
간단명료한 답변이었다. 어릴 때 배운 것이 생각났다.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고 안전하고 어쩌구저쩌구해서 어쩌구저쩌구에 잘 쓰인다고. 어째서 중간 부분이 잘 생각이 안 나는 건지 모르겠다. 어릴 때 공부를 안 한 건 아닌데.
“준비 되셨수?”
선배가 소리쳤다.
경비 아저씨였다.
“뭐야, 저 애송이도 데려가는 건가?”
경비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도 꽤 점잖게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도 군복이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건 그럼 1차 세계대전 때 미군 군복인가? 경비는 뺨을 긁었다.
“진심인가?”
“보고 싶다며요.”
경비 아저씨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자네에게 좋은 결정이기를 바라네.”
선배는 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 애매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다섯 시간 동안 이어졌다.
“저…… 원래 여기 분위기가 이래요?”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내가 물었다.
“아. 너가 있었구나.”
선배는 이제야 내가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손에 뭐에요? 자꾸 조물딱거리는 그거요.”
하지만 선배가 답하기 전에 기차가 멈췄다.
“내리자.”
답 안 해주셨는데……. 나는 입 속으로 말을 삼키며 선배와 경비 아저씨를 따라 내렸다.
“저, 선배.”
나는 선배의 뒤에 대고 조그맣게 물었다.
“경비 아저씨도 O5였어요?”
“응. 왜?”
“재단은 개나 소나 다 O5에요?”
선배는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경비 아저씨 혹은 O5 평의회 중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안해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심심해도 뒷담화는 안 좋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가요?”
“그냥 안대 씌우고 얼굴에 포대를 뒤집어서 데려올 걸 그랬나 봐.”
선배는 내 질문에 투덜거렸다. 역에는 차가 한 대 나와있었다. 군용 차량과 승용차의 중간에 해당하는 무언가였다. 나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차 안에서 나는 한 마디도 못했다. 그냥 선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만지는 것만 구경했다. 주사위일까? 창문 밖을 보고 싶어도 유리는 검게 칠해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선배는 익숙한 모습으로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장난이라도 쳐줬으면 좋으련만. 나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몇 년이 지난 것 같이 지루하고 긴장되는 시간이 지났다. 차는 멈췄고, 우리 셋은 모두 내렸다. 평범하고 작은 기지였다. 그러니까, 딱 우리 기록보관소 만했다. 나는 멍하게 그 기지를 바라보았다.
“왜, 놀랍냐?”
선배가 기지개를 켰다.
“저게 사실상 제 01기지다. 정확히 말하면 제 01기지 중 하나지.”
“01기지라면, 본부를 말하는 건가요?”
“응. 제 01 보호기지. 저기가……. 몇 동이더라요?”
선배가 경비에게 물었다.
“C동. 아마 저번에는 A동이라 미친 듯이 멀었지?”
“끔찍했죠, 아주.”
선배는 진절머리를 쳤다. 경비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애송이를 소개시켜주러 가봅시다!”
아저씨는 내 어깨를 잡고 우악스럽게 끌었다. 나는 잠시 중심을 잃었다. 경비는 오른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사람. 나는 질질 끌려가다시피 건물로 들어갔다.
“맞다. 휴대기기 안 터지니까 조심하고.”
선배는 느긋하게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소지품 검사 덕분에 나는 경비 아저씨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잡힌 어깨가 얼얼했다.
“여긴 순수하게 회의 전용인가요?”
나는 속닥거렸다.
“엉? 아니. 여기가 아마……. 물류 기지도 겸하고 있던가? 어디보자, C동이면……. 맞네, 물류 기지.”
“물류……. 뭐요?”
“창고라고 창고.”
“무기 창고?”
“아니, 그냥 평범한 생필품 얹어놓는 데 있잖나. 사무용품이라던가. 무기는 너무 위험해. 회의하다 다 날아갈 걸세.”
“그럼 왜 소지품 검사는 해요?”
“E동…… 아니, 기록 보관소에서는 안 그러나?”
하긴 맞는 말이다.
“우리 기지가 E동이면, 거기서도 회의를 하나요?”
“당연하지. 하지만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게.”
더 알면 내가 실망할 것 같았다. 2등급짜리 일반 사서에 관사 경비원. 다음 O5들은 도대체 뭘 업으로 삼고 있을 지 궁금했다. 선배는 뒤에서 느릿느릿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또 그렇다고 한참을 들어간 곳에 회의실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여기……. 에 다 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그저 웃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직원 카드를 기판에 긁었다. 접근이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번호판의 한 버튼을 길게 눌렀다. 기판에서 소리가 났다. 단순한 비프 음이었다. 경비는 길디 긴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직원 카드를 다시 긁었다. 환영합니다. 그는 다시 암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기판 밑에 손등을 댔다. 문이 열렸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아저씨가 나를 막았다.
“하지만 저는…….”
“넌 나랑 같이 들어가.”
선배가 내 옷을 잡아 끌었다. 선배 역시 똑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기판에 내 보안 번호를 입력하게 했다.
“초대된 사람이니까 들어가도 돼.”
선배가 말했다.
문이 열렸다. 선배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복도였다. 경비 아저씨는 이미 없었다.
“빨리 움직여. 길게 미적거리면 일 난다.”
선배는 겁주는 것 같지 않았다. 담담하게 사실을 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무서웠다. 나는 선배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선배는 카드를 한번 긁었다.
“06?”
안에서 들렸다.
“02, 02a.”
선배가 말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소리가 없었다.
“아니면 말고.”
선배가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떤 매커니즘으로 열리는 것인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등 뒤에서 문은 닫혔다. 회의실은 꽤 밝았고, 의자와 책상은 모두 평범했다. 개인용 의자와 책상은 동글게 붙어있었다. 대학교 이후로 저런거 처음 봤는데. 재단은 참 검소하구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총 열 명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남자의 수가 여자보다 조금 더 많았다. 다들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경비 아저씨가 가장 늙어 보이니 말 다했다. 선배는……. 원래 노안인 것 같았다.
“앉아.”
선배가 나를 앉혔다. 나는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선배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저, 선배…….”
나는 선배를 쳐다봤지만 선배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봤다. 경비 아저씨를 빼고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던 사서가 이 남자입니다.”
선배가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사람들이 아주 잠깐 술렁였다.
“O5-06, 엄……. 저 혹시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까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는 물잔을 집어들었다. 다행이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그러십시오. 어차피 비정기 회의지 않습니까, 그뤼네테 양.”
나는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다.
“비정기 회의여도 회의는 회의입니다, O5-06.”
말한 사람은 남자였다. 경비 아저씨 다음으로 늙어보이는 사람이었다.
“호칭 문제에서는 자유로웠으면 좋겠군요, 13.”
선배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냥 코드로 부르는게 낫겠네요. O5-13의 말대로 회의는 회의니까요.”
체구가 작은 여자, 그러니까 그뤼네테가 내 앞에서 말했다.
“말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본새는 추궁이었다. 선배는 내 등에서 손을 떼었다.
“보다시피.”
“O5-06.”
13이라 불린 사람이 선배를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다 주죠.”
삶이라니까요, 선배. 나는 중얼거리며 사람들 몰래 책상 위에 뿜은 물을 옷자락으로 닦았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 개인 기록을 기록물로 관리하고자 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O5-02와 O5-10의 기록도 같이 보관하고자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그 계획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몇 몇 분들께서 반대를 하셔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 기록만이라도 보관하려고 작년 이맘때 기록보관소에 제 개인 기록을 보관하였고, 그 도중에 실수가 있었는지 한 권이 분실되었습니다. 그걸.”
선배가 내 어깨를 쳤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책상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자가 발견했습니다.”
다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안 했다.
“그……. 그냥 떨어져 있었어요.”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저기 구석에서 누가 웃었다.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았지만, 덕분에 더 긴장이 되었다.
“그럼 이 사람이, 우리의 정보를 캐냈다, 이 말인가요?”
그뤼네테가 물었다.
선배가 내 등을 찔렀다.
“아뇨!”
지나치게 큰 목소리라 나는 입을 막았다.
“처음에는 내 일기장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이 사서에게 접근했지만, 일이 자꾸 꼬이더군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여러분께 보고를 드린 바와 같이 말입니다.”
“보고를 전보로 치면 어떻게 합니까, O5-06.”
13이 타이르듯 말했다.
어쩐지 선배다워서 나는 슬며시 웃었다.
“처음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선배가 답했다.
“음. 약간 주제에 어긋난 것 같으니 다시 돌아오도록 합시다.”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제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 녀석은 사고를 친 게 거의 없었죠. 가장 큰 변수였다는 것만 빼면.”
그게 가장 큰 문젯거리란 이야기가 아니었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뤼네테는 다시 부드러운 말씨로 심문을 시작했다.
“O5-06. 현재 정보 유출이 얼마나 일어났습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본 요원에게 모든 것을 말해줬습니다.”
“리!”
그뤼네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06.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본 요원에 대해서 내가, 그러니까 O5-06인 저와 O5-10인 오캐인 대령님께서 책임지기로 했던 것 기억 하십니까?”
선배가 물었다.
“하지만 이건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06.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거라고요.”
“이 녀석은 괜찮은 인재입니다.”
“아닌데요.”
선배의 말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끼어들었다. 나는 다시 내 입을 잡았다. 선배는 나를 힐끗 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사서는 괜찮은 인재입니다. 내가 7년간 지켜봤습니다.”
“O5-06, 도대체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13이 쏘아붙였다.
“13, 내가 물러나겠다는 뜻입니다. 후임은, 이 녀석이고요.”
선배는 다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다시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리…….”
그뤼네테가 입을 열었다.
“아뇨. 02,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것입니다.”
“리, 아니 06, 아니, 리! 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급작스럽게란 말은 이제 지겹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끝난 다음부터 말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확실히 그럼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 나는 중얼거렸다.
“06. 당신이 한 결정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는 겁니까?”
다시 13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그 규정을 만들었으니까요. 당신들은 지금까지 나에게 무슨 핑계를 대면서 내 은퇴를 막았는지 기억하십니까? 후임이 없다, 이게 당신들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여기 제 후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를 떠나야 할 적절한 이유도 생겼고요. 자, 여러분. 이번에 댈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이 자리를 뜨고 싶어서 일부러 사건을 만든 것 같은데 말입니다.”
13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지금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말씀 드렸습니다. 수십 번 보고했고, 긴급 의회를 소집한 것도 저였습니다만.”
대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나는 멍하게 선배와 13의 공방전을 보았다. 선배는 천천히 걸었다.
“맞습니다. 확실히 이번 사건은 절묘한 시기에 터졌죠. 하지만 제가 앞서 말했다시피 바람은 언제나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도대체 몇 번 째 이 구절을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삶이요, 삶. 나는 이제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이 절묘한 것이 그냥 단순히 ‘절묘한’ 것이라는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하지 못하니까 ‘절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증명하지 못한다면 의도적인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요. 의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경비, 혹은 O5-10, 혹은 오캐인 대령이 손을 들었다. 선배와 13은 공방을 그쳤다.
“의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오캐인 대령이 말했다.
“어째서 증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06의 행동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이기 때문이죠.”
“공모자가 아니라요?”
“공모자라니, 06이 무슨 죄를 저지르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개인 기록을 보관하겠다는 그 의도가 불순한 것이라고 보십니까?”
“일단 그 기록으로 인해 지금 정보 유출이 있지 않습니까, 10!”
13이 소리쳤다.
“선배님이 의도한 게 아니에요. 엄…….”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우연하게 찾아서 내가 멋대로 날뛴 거에요.”
“몇 등급이라고 했나?”
13이 물었다.
“기록보관소 소속 1 등급 일반 사서이자 고문서 복원 전문가입니다.”
“1 등급이라고만 말하면 될 것을.”
“죄송…….”
“그래서, 1 등급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로, O5의 과거와 재단의 과거를 캐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엄, 되는데요.”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행정 기록은 1등급도 접근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저는 지금 사건 기록에 대해서는 임시 등급이 부여되었거든요. 한…… 3등급 정도……?”
선배의 번호를 빌려 데이터 배이스에 접근했다는 말은 쏙 빼놨다. 13은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근데 이건 보장할 수 있어요. 대부분 1등급도 접근할 수 있는 자료였습니다!”
허가가 있다면, 이란 말도 뺐다. 선배가 살짝 뒤돌아서는게 보였다. 입을 가린 것을 봐서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1 등급 인원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로, 이것 저것을 캐냈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13의 목소리는 머뭇거렸다.
“네. 다들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그 사람의 과거를 추측할 수 있잖아요. DDC 판본만큼 두꺼운 소설도 있는걸요.”
나는 잠시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여긴 O5의 회의장이었고, 나는 고작 1등급 인원이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경비 아저씨, 아니 오캐인 대령과 눈을 맞췄다. 대령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계속 했다.
“실례지 않는다면, 혹시 논리적 추론 엔진이라고 아세요? 기계가 언제 사람을 능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님께선 저를 추론 엔진이라고 부릅니다. 데이터와 데이터 간의 관계로 새로운 뜻을 추론하는 기계다, 이 말이죠. 저, O5 평의회 의원 여러분들도 다 하실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됐습니다.”
13이 내 말을 잘랐다. 선배는 몰래 내게 엄지를 치켜보였다.
“O5-06, 당신이 후임으로 점찍은 저 사서가 얼마나 건방진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1 등급 사서라니, 후임으로 부적절한 거 아닙니까? 자네, 학위는 있나?”
“예? 학사…….”
나는 말을 흐렸다.
“미안하지만 13, 당신은 0 등급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앉으신 04께서는 스킹크 박사의 연구 보조로 일하다가 O5에 올라오게 되었고요.”
“데미안 박사를 말하는 겁니다.”
그뤼네테가 덧붙였다. 그제야 몇 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
“O5는 승진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싹이 보이는 사람은 높은 등급이나 지위를 못 갖도록 유도하죠.”
선배가 말했다.
내가 7년간 0등급이었던 것과……. 는 관련이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4등급 다음 수순으로 5등급 요원이 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선배가 물었다.
“뭐 찾는다면야 저, 10, 02, 그리고 13 이렇게 넷뿐입니다. 그나마도 저와 10, 02는 초기 멤버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4등급 요원이 된 것도 아니었죠.”
보고서 읽었다고 승진한 사람이다, 저 선배라는 작자는.
“13, 당신만 0등급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서 O5가 된겁니다. 등급은 O5가 되는데 상관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충성도는 어떻게 평가할 것입니까?”
“그건 나중에 테스트 해야죠. 하지만 일단 인적 사항은 깨끗합니다. 요주의 단체에 소속된 적은 전혀 없고, 가족도 없는지라 혹시라도 허튼 짓을 할 확률은 낮죠.”
13은 헛기침을 했다.
“알았습니다. 뭐, O5-06은 사람 보는 눈이 꽤 괜찮으니 일단 믿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06. 은퇴라는게 뭘 뜻하는지 정말 아는건가요?”
그뤼네테가 물었다.
“네.”
선배는 짧게 대답했다.
“선택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 입니다.”
다시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침묵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겁에 질린 것인 것 알 수 없었다.
“06.”
13이 말했다.
“윤리위원회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SCP에 감염되거나 오염된 자를 처리하는 데는 꽤 관대합니다.”
다시 한번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규정을 어길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이게 O5의 자발적인 의사로 이루어진 첫 은퇴라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까? 내가 규정을 지키면 여러분도 그것을 지켜야 할까 봐 겁을 집어먹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후임 앞에서 말해보시죠.”
13이 말했다.
“이봐.”
선배가 나를 불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O5의 은퇴에 대해 논하는 거다. 내가 데미안 박사의 예를 말해줬지? 원래 데미안 박사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은퇴에 대해 꽤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은퇴할 때 즈음이면 기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겠지, 하는 생각 말이지.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 일이 지겨워진다면……. 빌어먹을, 나도 떨리나 보네.”
선배는 눈을 감았다. 말을 이었다.
“O5에게는 기억 소거가 듣지 않는다. 선택은 둘 중에 하나야. 첫째. 소각. 둘째. 통 속의 뇌.”
“선배가 말한 006의 효과 때문에요?”
“그래. 내가 너를 후임으로 지목했으니, 네 의지도 중요하겠구나.”
“제가 싫다고 말하면 선배님은 은퇴를 못 하는 건가요?”
“그럼.”
“나는 기억소거를 당하거나 아니면 사살당하거나 둘 중에 하나겠군요.”
“그렇지.”
“선배는 뭐가 좋은데요?”
내 질문에 선배는 나를 보았다.
“선배는 은퇴를 왜 하려고 하는 건데요?”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왜요, 또 그 때처럼 나는 이해 못한다고 할 거에요?”
“이것 보게?”
선배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선배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배는 허리를 꺾으면서까지 웃어 젖혔다. 나는 선배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알았어요. 선배님의 뜻을 존중하죠.”
그리고 좌중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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