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평가: +3+x

눈이 많이 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바람이 우짖곤 했었는데 끝끝내 폭풍이 몰아칠 모양입니다. 창문 안에서 바라보는 광경이 그토록 낭만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느긋하게 떨어지는 눈발이나 길에 소복히 쌓인 눈더미가 제 상상력을 자극하네요. 밤에 돌아오는 길, 짓밟히고 억눌러져도 끝끝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하얀 눈이 발에 소복소복 밟힙니다. 그래요, 내 집 앞의 눈은 당신을 닮았습니다.

당신을 데려온 날도 그랬지요. 눈이 심하게 몰아쳤습니다. 트렁크 앞에서 난감하게 이걸 어떻게 옮기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집이 그렇게 좋은 집은 아니었었죠. 아파트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낑낑대며 걷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남에게 들키면 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테니까요. 옮기고 나니 정말 힘들었어서, 이후로도 한동안 파스를 붙여야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람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신도 많이 아팠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네요. 겨우내 고생한 나무에게 좋은 양분을 주는 일이니까요. 음, 그래도 이 주제는 조금 우울하니까 다른 쪽을 주제를 돌려보죠. 밤하늘 좋아하시나요? 전 좋아합니다. 그동안 제가 보낸 사람들이 떠오른다는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그저 별이 반짝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듭니다만 제가 이국에서 지낼 때에는 별빛이 아름다웠습니다. 어제같이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길 위에 별이 하나 둘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해가 지고 나면 별은 머리 위가 아니라 발 밑에도 있지요. 하늘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겨울에만 일을 하는 이유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여름에는 벌레가 꼬여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아, 생각해보니 겨울엔 항상 옷을 두껍게 입어서 작업할 때 몸에 안 튀는 것도 있었네요. 생각보다 핑계가 많은 모양입니다. 다음 작업은 여름에 해 볼까요. 그래요,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다음 작업은 여름에 할 겁니다. 그동안 소나무 다섯 그루가 씩씩하게 자랐으니 이번엔 절벽 위에서 죽어가는 벚꽃을 도와줘 보렵니다. 내후년 봄에는 흐드러지는 벚꽃을 보고 싶습니다.

여태까지 너무 제 잇속만 챙긴 것 같기도 합니다. 저저번 주에 어느 할아버지에게 소나무 하나를 팔았습니다. 첫번째 소나무였습니다. 나무가 크고 튼실하다고 좋은 값을 치러주셨습니다. 그래요, 나무를 튼튼하게 키우려면 그에 따른 좋은 비료가 필요합니다. 나무 아래에 야트막한 구덩이를 팔 때마다 저는 희망에 가득 찹니다. 이번에 넣는 사람도 좋은 양분이 되어주겠지요. 여러번 실험으로 입증한 저 나름의 이론입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마다 하나씩 있는 자기 나름의 부적. 저에게는 이겁니다. 허술해보여도, 비밀 재료와 배합비의 비법도 제대로 있는 저만의 비전입니다. 훗날 제 후계자가 나타나면 그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이런, 제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비록 하늘에 계셔서 직접은 못 전해드리더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노력해주신 덕분에 소나무 하나가 추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묻힌 소나무입니다. 배합비를 조금 바꿔서 그런지, 책의 종이로 쓰일 예정이라고 하니 더욱 좋게 되었습니다. 글 좋아했다고 했잖아요. 맞죠?

이만 갈 시간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만, 최근 병 안의 눈이 자주 반짝여서 다음 사람을 죽이기 상당히 힘듭니다. 서면으로나마 부탁드릴테니 이젠 그만 지켜봐주세요.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