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0001로부터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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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안녕하쇼들.

뭐야, 별로 반가워하진 않는 눈치인데. 안 그런가, 먹물 양반?

까짓거, 상관없어. 당신들이 다 똑같지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시간 보내려니, 내 신세가 영 깝깝~ 해서 한번 말 좀 걸어봤소. 잠깐 말동무 좀 할 수는 있겠지?

그래, 나는 D-00001이요. 얼마 안 돼서 전에는, 내 번호 갈아준다고 누가 옷을 싹 다 가져가서 기분이 좀 그랬수다. 그랬는데 다시 돌아온 옷을 보니까, 세상에, D-0001이던 것이 0 하나 더 붙어서 도로 돌아온 거여. 허 참. 나도 누구 뭐라 할 놈은 아니지만, 세상에 참 별의별 깝깝~ 한 인생들 많기는 하구만, 하는 생각이 들더만 응.

말 나온 김에 말이지, 솔직히 난 이놈의 D-00001이란 번호가 맘에 안 든단 말요. 그거 아쇼? 예전에 새파란 신입 들어올 적에도 번호가 천 얼마를 넘기 전에는 말이야, 내가 지나가면 다들 내가 말이야, 여기 최고참이라고, 내가 응 이 재단에 O5 따꺼인가 뭐시기인가들하고 밥도 같이 먹던 사이라고 말이야, 다들 깍듯하게 인사도 하고 그랬다고. 근데 요즘은 예전같지가 않어. 볼 꼴 못볼 꼴 다 보는 것도 말이야 한도끝도 없겠지만, 요즘 짜식들은 날 봐도 잔뜩 겁을 먹고 지레 피해다니니 원. 어떻소 먹물 양반? 이거 웃기지 않어?

그래도 요즘 것들은 참 편해. 보급 나오는 거 보면 아주 그냥 쌔삥인데 말이지, 침대도 좋은 거 쓰고 말이야. 나는 말이야, 정말 옛날에는 벽에 쇠사슬로 고정해서 접는 침대 썼수다. 요즘 것들이 내가 쓰던 보급품 어쩌다 마주치면 뭐 무슨 짬의 상징이라느니 너보다 어르신이라느니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는데, 그러는 거 보면 그저 귀여워 응.

요즘 내가 이 같잖은 토굴에서도 그런대로 적응해서 느긋하게 살고 있는데 말이야, 먹물 양반, 지금 듣고 있소? 응, 요새 밖에 얘기 돌아가는 거 보니까 아주 가관이더만. 내가 보기엔 많이 배워봐야 다 소용없어. 안 그렇소? 아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을 그냥 놔두고 말이야, 무슨 SCP-001 이 어쩌니 저쩌니, 재단이 처음에는 이랬니 저랬니, 무슨 천사가 어쩌고 하는 이따위 깝깝~ 한 개소리만 주워쌓고 있으니… 근데 아무도 D 계급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어! 웃기는 꼬라지 아니요? 내가 이 재단의 역사의 산 증인이라 이거야!

어, 먹물 양반, 말 좀 해 보시구려. 처음엔 그렇게 얼어붙어 있더니 이제야 좀 할 말이 생긴 모양이네.

…응, ……응? 월말 정기 처리? 난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고? 아니 이보쇼,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이 어째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응. 당신 같으면 이 재단의 시작을 함께 한 역사적인 사람을, 그렇게 코 푼 휴지 버리듯이 무슨 숯불갈비모냥 만들면 좋겠수? 그러니까 O5 따꺼들도 나는 못 건드리는 거야!

…웅, 으웅, 그렇지. 그러니까 나한테 먼저 그걸 물어봐야지. SCP-001 따위는 집어치우고 말야.

클클클, 이거 간만에 재밌는 친구 만났구만. 당신도 알고보면 나랑 비슷한 것 같아. 어쩌면… 또 다른 나인지도 모르지. 안 그렇소, 먹물 양반? ……아,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요즘은 이러면서 놀아. 이거 재밌지. 혹시 먹물 양반도 알고 있소? 시간 드럽게 안 흘러가면 나 혼자서 묻고 대답하고, 응? 얼마나 재밌는데 말요.

내가 말이지, 얼마 전부터는 나한테 주는 알약을 몰래몰래 꽁쳐놨다가 변기 물에 흘려버리거든. 그 알약을 먹으면 아주 그냥,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고 재미도 없고 기운도 없소. 이렇게 살 바엔 무슨 낙이 있나 하다가, 눈치 봐 가면서 그 알약을 버리기 시작했수다. 그 이후로 이러면서 노는 습관을 들인 거요. 거 의사양반은 뭐라더라, 내가 무슨 장애라더라, 혼자 쫑알쫑알 얘기하고 허공에다 대고 뭐라뭐라 하는 거 무슨 병이라던데, 거 기분 드럽게 나쁘더만.

아, 이제 편지를 끝맺을 시간이군. 거… 먹물 양반, 바쁠 텐데 붙잡아서 미안했수다. 미래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아주 그냥 깝깝~ 한 인생이 혼자 꼴깝떠는 거라고 생각하고 넘기쇼. 나는 이제 내 촉수에 다시 물을 주러 가야 하니까… 으음, 거 왜 놀라시나. 설마 내가 이 미친 집단 속에서 여지껏 무탈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지내 왔을 거라고 여겼던 거요? 클클클, 순진하기는. 아니 이보쇼, 내가 지금까지 여기서 얼마나 세월을 보냈는데 응, 볼 꼴 못볼 꼴은 웬만하면 다 겪었어! 먹물 양반,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이 촉수들도… 언제부턴가 내 일부가 되었고 말요.

아무튼 난 이제 할 말 다 했수다. 손 대신에 촉수 흔드는 거지만, 어쨌든 먹물 양반도 이걸 작별 인사라고 받아줬으면 싶은데. 이것도 인연이니까 말요. 어쩌면 내가 내일 갑자기 숯불구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안 그렇소?

그럼 몸 건강히 잘 지내시우. 조심하시구.

D-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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