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눈내린 오후

 
 
 2011년 3월 6일, 그 날은 밤새 몰아친 거센 눈발이 계속해서 이어진 날이었다. 쯔산은 고생 끝에 발급받은 수색 영장을 담은 서류가방을 들고 제50기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부보안부 감사관 비서 겸 수석조사관인 그로서도 연금 중인 인물을, 그것도 독대하여 조사하는 것은 아주 복잡한 승인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지난한 행정 절차를 해치우는 데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쏟은 터라 피곤할 만도 했지만 그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길어야 사흘이야. 그녀의 실험 투입을 지연시키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효력을 상실한 문서의 폐기 명령이 곧 나올 테니까. 본격적인 수사는 늦어진다 해도 자료는 최대한 서둘러서 확보해야 돼.'

 이틀 전 명령을 내리며 킬리가 한 당부를 곱씹으며 쯔산은 걸음을 재촉했다. A동의 1층 복도를 한참 가로지르자 경비대원이 지키고 서 있는 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쯔산이 영장 서류를 꺼내 넘기자 대원은 개인 단말로 승인 코드를 확인하고는 자물쇠를 풀었다. 영장을 다시 받아 챙긴 쯔산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제리코 교수가 흘낏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소?"

 쯔산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문고리 옆의 키패드를 조작하자 방음 셔터가 문을 덮었다.

"당신 누구요?"
"감사 자료. 아직 가지고 있지요?"
"…우리 기지에서 저장하던 것 말이요?"
"그래요. 증거 효력을 부정당한 그 자료. 난 이런 사람입니다. 조사에 필요하니 제공해주시길."

 쯔산은 신분증을 건네며 다급하게 말했다. 제리코는 그의 내부보안부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말 없이 컴퓨터에서 외장 저장장치 하나를 뽑아 신분증과 함께 건넸다.

 "2010년 3분기부터 지난 2월까지의 이상 동향을 분석한 자료요."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건네받은 물건을 서류 가방에 챙겨 넣은 쯔산은 감사를 표한 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리코 박사는 잠시 침묵하며 앉아 있다가, 쯔산이 문고리에 손을 댈 때 짧게 덧붙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잘 부탁드리겠소."

 쯔산은 그의 진심어린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방음 셔터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들어와."

 서아인 행정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브릴러 박사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아인은 검토하던 서류들에서 잠깐 눈을 떼고 브릴러에게 물었다.

"총은 아직 무리인가봐?"
"아… 사격 훈련에선 무사히 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향한다 생각하니 역시 헛구역질이 나서 안되더군요."
"뭐, 그럴 만도 해.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주입받은 혐오감인걸. 재단 생활 편하게 하고 싶으면 정신 상담 꾸준히 받아."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운 신변잡기를 나눈 뒤 아인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D-3325는 잘 보호해뒀지?"
"예. 이미 실험에 투입해서 경과를 관찰 중인 인원으로 처리해뒀습니다. 여기, 최두익 부장님의 승인 서류입니다."
"오호. 괜찮은 핑계네. 그거라면 수사 시간을 꽤 길게 벌 수 있겠어. 수감계획은 확정됐나?"
"제159K기지, D계급 구치소 211호 독방에 빼둘 겁니다. 내일 정기 이감 인원들과 함께 이동합니다."
"관찰 인원은?"
"서다인 박사의 2지원팀이 배정되었습니다."
"음… 귀띔은 해 뒀어?"
"팀장님께만 직접 전달했습니다."
"그래. 잘 했네…"

 아인은 약간 인상을 쓴 채 서류를 펄럭펄럭 넘기며 말했다. 브릴러는 그녀가 민감한 사안에 동생이 연루된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방금 브리핑 받은 내용대로라면 B.E, 그리고 그들과 내통 중인 자들은 내부보안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확보하고 있을 터였다. 만약 한국사령부 쪽에서 재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면 그들은 기껏 떠넘긴 혐의가 되돌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추가 공작을 벌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종결된 사안을 반쯤 무단으로 재조사하는 것인 이상 성과가 없다면 처벌받는 것도 각오해야 하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별 수 없지. 이제 와서 배정된 연구팀을 교체하는 게 더 눈에 띌 테니까."
"그렇군요."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애가 직접 관여한 일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넌 괜찮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인은 되묻는 브릴러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부장님 말마따나, 연고가 없는 넌 결백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인원이야.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지금 상황에선 일선 작업을 맡아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재지.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앞으로의 재단 커리어는 장담할 수 없어. 나와 부장님은 내부보안부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으로 나서는 거지만, 너는 이쪽 사람도 아니고, 아직 후폭풍을 감당할 만큼 이곳에서 기반을 쌓지도 못했잖아. 이런 위험부담 가득한 일에 굳이 나서는 건 좋지 않아."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이미 한 번 죽은거나 다름없는 목숨입니다. 이제와서 맡겨진 일도 팽개치고 몸을 사릴 생각은 없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한 브릴러는 표정을 풀며 한 문장을 보탰다.

 "내빼기엔 이미 늦은 것도 같고 말이죠."
 "…쿡, 그렇긴 하지."

 아인도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러면 이제 우린 D-3325가 정말 무고하길 빌어주는 수 밖에 없겠군. 우리 모두 뒤탈 없이 무사히 끝나려면. 사건 종료되면 보너스 지급되고, 내부보안부에 대한 기억은 국소소거시술 받는다는 건 전달받았지?"
"네."
"좋아, 수고했어. 다시 호출할 때까지는 본업에 충실하도록."
"알겠습니다."

 브릴러는 목례한 뒤 뒤돌아 방을 나섰다. 그의 인사에 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지만, 그녀의 입가는 더이상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 아인은 방금 웃어넘겼던 그의 말을 통해 그의 심리 상태가 447-KO 사건 이후로 아직 전혀 회복되지 않았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고작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가 직접 참관해왔던 브릴러의 정신 감정에서 담당의는 그가 자기 정신세계 한 구석에 깊숙히 자리잡은 온갖 기억들과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것들에 기대고 있다고 소견을 남겼다. 어렸을 적 그에게 총기를 들이밀며 전쟁과 폭력과 조국에 대한 혐오를 대물림했던 그의 부친도, 마지막 다툼에 대해 사과할 기회조차 서로 잃은 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연인도, 멸망을 막고자 최후까지 함께 최선을 다했지만 끝끝내 그가 버리고 도망쳐버렸던 동료들도,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들은 언제나 브릴러를 괴롭게 만들면서도, 지금 그가 보여주는 놀랄 만한 업무 집중력과 성실성의 근원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인은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브릴러의 그 조급함과 지나친 헌신성이 그에게 족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결국엔 자기들 편한 대로 그를 이용하고 있다 생각하니 뒷맛이 씁쓸했다. 아인은 다음 기회에 최 부장에게 브릴러 박사를 담당 업무 외에 차출하는 것을 그만두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그녀는 킬리 박사가 전해줄 제50기지의 감사 자료를 기다렸다.
 


 
 쯔산은 제리코 교수에게 받은 저장장치를 들고 제50기지를 나섰다. 킬리 박사가 적대 요주의 단체의 개입, 그것도 내부보안부를 직접 노린 침투를 가정하고 있는 이상 파일을 함부로 재단 전산망을 통해 전달할 순 없었다. 시간이 걸릴 것을 감수하더라도 인편으로 직접 저장장치를 건네주는 것이 합당했다. 그는 방금 마주친, 자신이 제리코의 방을 나선 뒤에 교수의 방으로 향한 수사관들이 교수의 감사 자료 원본을 곧 삭제할 것이라는 것과, 그가 들고 있는 사본이 마지막 증거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랄 산맥 서편은 어제부터 시작된 폭설이 다시 온세상을 뒤덮어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쯔산은 열차를 타고 우랄 산맥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한 뒤, 콜초보 공항에서 재단의 전용기를 탈 생각이었다. 코트 안감에 숨겨져있는 방수 비밀 주머니에 깊숙히 넣은 저장장치를 더듬어 확인한 쯔산은 코트를 힘껏 여미며 철도역으로 향했다. 성인 남성의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밭의 사이사이로 치워놓은 길을 걷자, 바로 양옆의 눈더미에서 살을 에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과거 모종의 사건으로 킬리와 쯔산은 조그만 십대 아이의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주변 시야는 쌓인 눈에 완전히 가려지고 오직 눈앞의 길만이 보일 뿐이었다.

 "미리 다 알고 온 거지만 정말 지독한 눈이라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며 걷던 쯔산은, 추위와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불쾌한 예감이 엄습해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세갈래 길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의 왼쪽 사각지대에서 누군가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쯔산을 덮쳤다. 그는 코트 안에 숨겨둔 권총을 뽑아들으려 했지만, 상대방의 숙련된 제압술로 순식간에 오른손과 입을 잡힌 탓에 아이의 몸으로는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순식간에 괴한의 일당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쯔산은 좆됐다고 생각했지만,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짐짓 겁먹은 소년처럼 눈물을 그렁이며 훌쩍였다. 이들이 그냥 인신매매 범죄 조직인지, 자신의 정체를 알고 덤벼든 적대단체의 공작원인지 판단하려는 수작이었다. 습격자들은 그러나 아무런 동요도 의도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앗고 천조각을 가져다 입을 틀어막았다. 수면제였다.

 의식이 흐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쯔산은 항상 왼손 검지에 끼고 다니던 반지형 비상호출기를 누르려 했지만 비몽사몽한 탓에 몇 차례 손가락을 허우적거리는 사이 온몸에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쯔산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전 | 허브 | 다음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