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새, 짙은 안개와 무진의 밤 (上)

 
 
 2011년 3월 8일, 그 날은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 너머로 꽃샘추위가 다시금 심술을 부린 날이었다. 하지만 재단 한국사령부는 마지막 겨울 공기를 음미하거나 추위에 몸을 움츠릴 여유조차 없을 만큼 심각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 개의 비보가 연달아 한국사령부를 강타한 건 7일 저녁이었다.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작전 중이던 베테랑 현장 요원인 쯔산이 임무를 마치고 무선 침묵을 해제했어야 할 시간이 지나고도 응답이 없자 킬리 박사는 요원 연락 두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고작 10여분 남짓이 지난 때에 호송차량 대열이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끝에 이송 중이던 D계급 인원을 납치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교전 중에 대파된 적 차량에서 생포한 인원의 자백으로 공격 주체가 B.E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노래마인 관리관은 7시 54분을 기하여 사령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응에 나선 상태였다.

 내부보안부 긴급회의에서 최두익 박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의 계책을 실행했지만 이번만큼은 B.E가 한 수 앞서고 있었다. 서아인 행정관, 킬리 박사, 브릴러 박사를 비롯한 이번 작전의 관계자들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두익은 자신의 안일했던 판단을 자책했다.

"눈에 띄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무장호위병력을 대동시켰어야 했는데!"
"진정하세요… 지금은 후회보단 어떻게 쯔산 요원과 유리 수사관을 되찾을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킬리가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녀도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가 생사불명인 만큼 동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아인이 킬리의 말에 동의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단서가 필요해요."
"이번 내통사건의 재조사의 핵심 증거를 가진 요원과 핵심 증인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 우연은 아닐 겁니다."
"바로 그거에요, 브릴러 박사. 오히려 나는 연구팀을 공격할 기회를 고스란히 포기하고 고작 D계급 인원 한 명을 납치해간 것이야말로 유리 수사관이 그들에게 있어서 불리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 고백한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쯔산은 러시아 제50기지에서 감사 자료를 회수한 뒤 소식이 없는 상태. 유리 쪽은 뭔가 알 수 있는게 없나, 행정관?"
"정보국에서 유리 수사관을 납치한 차량을 CCTV로 추적했지만, 놈들은 천안 망향휴게소에서 차를 버렸습니다. 다른 차량으로 옮긴 것이 확실한데… 옮기는 장면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서 바꾼 차량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대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고 있을까요?"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의 분기일세. 사실상 남부의 어느 곳으로든 도주할 수 있어."

 두익의 말에 참석자들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시간이 그들의 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B.E는 이미 쯔산과 유리를 확보한 이상 재조사를 막은 것으로 만족하고 죽여버리든, 내부보안부의 정보를 캐내려 시도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했다간 재단의 기밀과 그들의 목숨 중 하나는 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침묵이 계속되던 가운데, 킬리 박사가 입을 열자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어쩌면… 쯔산 요원의 행적을 불확실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인가?"
"요원은 개인적으로 반지로 위장한 비상호출기를 착용하고 다녔습니다. 호출을 울리거나, 정기 생존 신호를 이틀 연속으로 미입력하면 제 단말로 그동안의 GPS 좌표 기록이 전송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신호는 매일 오후 8시에 입력하도록 설정했고요."
"그렇다면… 그가 정말 무슨 위기에 처했다면 곧 위치 정보가 전송되겠군."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쩌면 당장 알아낼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일지도 모를 킬리의 개인 단말에 모두의 실낱같은 기대가 모아졌다. 8시 정각이 다가오자 참석자들은 모두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이윽고 킬리가 단말 화면을 확인하며 말했다.

"발신기의 현재 위치는… 무진,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진시?!"
"국내에 있다고?!"
"행정관, 당장 정보국에 알리게! 그리고 전원 각자 가능한 루트로 무진의 B.E 활동을 당장 조사하게!"

 두익의 명령에 긴급회의는 즉시 종료되었고, 모두 분주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두익 자신도 자리를 뜨려는 찰나 브릴러가 그를 잡아세웠다.

"부장님."
"무슨 일인가, 브릴러 박사."
"휴가를 신청하겠습니다."

 두익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지만, 아인이 한 이야기를 떠올림과 동시에 금세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다.

"자네와는 더이상 관련 없는 일이야. 오늘은 들어가 쉬고 내일부터는 과학부 업무에 복귀하게."
"무진으로 가겠습니다."
"현지 특무부대가 맡을걸세."
"아뇨, 특무부대는 쯔산 요원 구출에 집중할 겁니다. 그들에게 일개 D계급 인원 따위는 구출할 가치가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직접 나서야만 합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는 지금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게 아니야."

 두익이 브릴러의 가슴팍에 검지 손가락을 찔러 짚으며 단언했다.

 "자네 자신을 구하려는 것이지."

 브릴러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그저 가만히 두익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대로 둘은 한동안 마주보고 서 있었다. 두익은 곧 자신이 어떻게 해도 지금의 브릴러는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이 일에 불러들인 것은 두익 자신이었다. 두익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한 걸음 물러나며 짧게 말했다.

"…3월 8일까지 일박 휴가를 허가하네. 소지 허가 물품은 권총 한 정과 충분한 탄약.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고 오게."

 브릴러는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한달음에 회의장을 달려 나갔다.
 


 
 유리는 몸을 칭칭 옭아맨 밧줄의 감촉과 심한 피로감 속에서 눈을 떴다. 호송차에 녹색 연기가 가득 차오르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 흠칫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엔 연기도 없었고, 차 안도 아니었다. 혼란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옆에 같이 잡혀있던 쯔산이 소근거리며 안부를 묻자 유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너, 너는 누구니? 대체 누가 아이를 이렇게…"
"아… 그렇지. 저 이래봬도 성인이고, 재단 한국사령부 현장요원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제서야 자신의 특이한 외형이 이 상황에서 마주치기엔 기묘하기 짝이 없다는 걸 자각한 쯔산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쯔산이라고 합니다. 여유롭게 인사를 나눌 처지는 아니지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리."
"아, 네. 반갑습니다. 상황이 이래서 유감이네요."

 유리는 통성명을 마친 뒤 주변을 마저 둘러보았다. 그곳은 화물용 컨테이너 안인 것 같았다. 가설한 조명 두어개가 내부를 약하게 밝히고 있었고, 쯔산과 유리는 대략 컨테이너 내부를 3등분하는 지점에 각각 묶여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의 벽면엔 대문짝만하게 B.E의 깃발이 걸려 있었으며 출입구는 모두 닫힌 채였다. 내부를 감시하는 보초는 없었지만, 불규칙적으로 들리는 발소리를 통해 그들을 납치한 자들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쯔산이 말했다.

"여긴 어딘가의 항구인 것 같습니다. B.E 놈들은 중국을 거쳐 밀항선으로 날 데려왔고, 당신도 여기에 있다는 건 한국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혹시 짐작가는 것 있습니까? 기억나는 건?"
"이송 도중에 추격전이 벌어졌고… 연막같은 것을 맞고 잠들어버린 것 이후론 전혀."
"이런."
"당신은 언제부터 갇혀 있었나요?"
"납치를 당한 건 6일 오후였고, 여기에 도착하고 감금당한 건 몇시간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맞게 헤아렸다면 지금은 8일 새벽 1시일 겁니다."
"그때부터 깨어 있었군요. 혹시 지금 상황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나요?"
"여기에 도착한 이후론 안개가 워낙 짙어서, 바로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것 말곤 달리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제50기지 감사 자료의 마지막 남은 사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방수 비밀 주머니에 USB를 숨겨두었는데 코트 째로 빼앗겨버렸어요.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닌걸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제50기지 이야기를 들으니 제 앞가림에 바빠서 잊고 있었던 제리코 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면 제리코는 요원을 관두고 연인과도 헤어진 채 우울하게 업무에만 매진하던 유리를 북돋고 이끌어 준 은인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누명을 쓴 유리를 끝까지 믿고 자기 일처럼 변호해주었던 것을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맺혔다.

"만약에… 감사 자료를 되찾지 못한 채 제가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제리코 교수님은 어떻게 될까요?"
"…희망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죠."

 그리고 둘 사이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재단은 지금 우리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까요?"
"8시에 이미 내 호출기에서 신호가 갔을 겁니다. 그것도 오는 중에 빼앗겨서 정확한 위치를 알고 오기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하튼 지금은 침착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쯔산의 말대로였다. 둘은 몸통과 손목 발목이 구속되어 도저히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소지품은 전부 압수당했고, 서로의 포박을 풀어주기엔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설령 여기에서 벗어난다 해도, 현재 자신들의 위치도 적의 숫자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을 도모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구조대가 자기들을 찾아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 컨테이너 문에 조그맣게 달려있는 쪽문이 열리며 중절모와 코트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나, 내부보안부의 귀빈 여러분. 방이 편안했는지 모르겠군 그래."
"…이바노프!"

 유리는 익숙한 얼굴을 알아보고 경악과 분노에 차서 외쳤다. 이바노프는 모자를 벗어들고는 싱긋 웃어보이며 그녀를 조롱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마리아… 네가 버렸던 남자가 기어코 널 찾아왔는데 기분은 좀 어때?"
"닥쳐. 너 엔트로피랑 무슨 관계야!"
"응? …아하. 그래. 국소 기억소거를 받았겠지. 넌 기억 못하겠지만 네 덕분에 내가 참 난처할 뻔했거든. 다행히도 머저리같은 높으신 분들이 공작질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가주셔서 나 대신 네가 이렇게 험한 꼴을 보고 있지만 말이야."
"이바노프. 재단의 특무부대가 이 곳을 찾고 있다. 정중히 경고하는데, 지금 그만두고 투항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보장하겠다. 하지만 계속 B.E의 졸개로 굴 것을 자처한다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다."
"하, 최대한의 선처라면 D계급으로 강등해서 173 우리에 처넣는 것 말인가? 재단 때문에 그 모양 그 꼴이 되고서도 멍청하게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쯔산 수사관님!"
"…"
"재단 특무부대는 이곳을 못찾는다. 너의 발신기는 어제 상륙하기도 전에 바다에 던져버렸거든."

 그 말에 쯔산이 미간을 찡그렸다.

"반대로 내 쪽에서 제안하는데, 순순히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목숨을 보장하는 건 물론이고 우리 세포에서 보람차게 일할 기회도 제공하겠다."
"거절하겠다."
"요구사항도 듣지 않고 거절인가?"
"뻔하지. 우리가 아는 정보를 내놓으라는 것 아닌가?"
"으흠. 정답이다."
"안타깝지만 협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난 어제 정신을 차리자마자 비상기억소거제 캡슐을 씹었고, 유리 역시 네 말대로 기억소거 조치를 받은지 오래다. 따라서 너희가 원할 만한 디테일은 우리에게서 얻을 수 없다. 재단에 몸담았다던 사람이 우리가 이렇게 대응하리란 걸 몰랐나?"

 쯔산이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이바노프는 쿡쿡 웃음을 터트리더니 가지고 온 슈트케이스를 옆의 탁자에 올려놓고 잠금을 해제했다. 철컥하고 열린 케이스 안에서 무언가가 차 있는 주사기를 들어보이며 이바노프가 말했다.

"당연히 알았지. 그래서 이걸 준비한 거다."
"…?"
"프로젝트 카론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어떤 바보들이 기억소거를 파훼할 방법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물이 바로 이거다."
"뭐라고?!"
"가급적이면 재단이 사용하는 임시소거 해독제를 얻고 싶었지만 실패했지. 이놈은 훨씬 지독해. 침투한 사람에게서 망각하는 힘을 영원히 빼앗아버리는 악마다. 유전자에 작용해서, 너희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에게까지도 영원한 기억이란 저주를 걸지. 앞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워지겠지만… 너희가 자초한 결말이다."

 끔찍한 설명을 읊으며 이바노프는 주사기 하나를 잡고 피스톤을 약간 밀어 내용물을 뿜어보였다. 주삿바늘 끝에 바이러스 주입액이 방울지는 것처럼 쯔산과 유리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맺혔다.

"하지만 뭐 어때. 죽는 것보단 악마와 거래를 하는 게 현명하지. 안 그래?"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전에 내게 대답해주지 않겠어? 왜… 왜 배신한거야? 어째서 B.E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마리아… 넌 정말 나쁜 여자야. 남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어놓고선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 이건 그런 너에게 합당한 처벌일지도 몰라."
"대답해 줘… 아이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제발."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유리가 부탁하자 이바노프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린 문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오던 안개가 어느새 컨테이너 안에 제법 자욱해지고 있었다. 주사기를 케이스에 내려놓고는, 이바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왜… 날 떠났던 거야, 마리아?"
"아이브…"
"우리… 우리 정말 행복했잖아. 우리 함께였잖아. 같은 부대에서 나는 연구원, 너는 현장요원, 척하면 척, 정말 많은 일을 해냈던 거 기억해? 나는 우리가 정말 좋은 콤비라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어. 하지만 넌 만족을 몰랐지. 힘들고 위험한 요원 따위는 관두겠다며 특무부대를 관두고 과학부로 훌쩍 가버렸잖아. 그래도 요타 33은 네가 떠난 뒤에도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최고의 명사수가 빠진 구멍을 쉽게 메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며 이바노프가 슬픈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해야, 아이브! 난…!"
"아니, 오해일 리가 없어! 네가 우리를 버렸어! 버린 거라고!"

 이바노프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우린 너 없이 엔트로피 놈들과 싸워야 했어! 너는 유능했고, 우린 너만큼 유능하지 못했는데도! 네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때 그렇게 허무하게 전멸하진 않았을 거야. 랩터도, 바이마르도, 카디널도 죽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걸 후회하기엔 너나 나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래… 랩터가? 그 셋이 죽었단 말야?"
"그래! 맨 뒤에 있던 나를 빼고는 모두 한 순간에 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멀쩡히 살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너는 어떻게 지금까지도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유리는 뭐라 할 말을 찾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그들은 살아남았어. 하지만 모두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었지.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엔트로피의 간부인 윌이 나에게 다가와서 거래를 제안했지. 엔트로피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한다면 대원들을 모두 살려주겠다고 말이야. 난 너를 잃었어… 더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단 말야…"
"아이브…"
"하지만 그들의 치료법은 내 기대와 많이 달랐어. 겨우 숨만 붙어있던 우리 대원들의 몸에 그들이 괴상한 유기 물질을 뿌렸지. 랩터, 바이마르, 카디널은 그렇게 부활 당한거야. 윌에게 생사여탈권이 달린 노예이자 사이보그 좀비나 다름없는 존재로. …내게 있어서 그들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때부터 네 명의 B.E 조직원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재단에 복귀해서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거군."

 쯔산이 요약하자 이바노프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유리는 더이상 반박할 의지조차 상실한 채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 그래도 연민이라곤 전혀 없는 얼음 여왕은 아닌가보지…?"
"…자네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 걸 잘 알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라. 소중한 동료들을 그런 처지에 내버려둘 셈인가? 재단의 의료 기술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구할 수 있다."
"난 말했다, 수사관… 우리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이바노프가 허무함과 슬픔, 한편으로는 증오가 짙게 서린 목소리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는 주사기를 다시 집어들고 쯔산에게 다가갔다. 쯔산은 단호하게 외쳤다.

"그걸 내려놔! 다시 경고한다, 이바노프! 당장 우리를 해방하고 이적 행위를 중단해라!"
"하, 입만 살았구나! 재단의 정예 정보요원이라는 자가 목숨의 위기 앞에서 고작 알량한 협박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니! 이런 조직에 내가 뭐가 좋다고 돌아가서 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지?!"
"그러지 않으면 지금 죽을테니까!"
"웃기시는군, 좋은 소식을 알려주마! 네가 기다리는 그 특무부대는 지금 내가 네 반지를 던져버린 여수 쪽 해안 마을이나 샅샅이 뒤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 여기를 찾아 내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너희의 패배란 말이다!"
"아니, 지는 건 너희다. 이미 시 전체에 포위망을 쳤을 것이고,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든 너희가 무사히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방금 그 말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다신 잊어버릴 수조차 없을 거다!"
"그만해!"

 유리가 소리를 지르자 쯔산과 이바노프 둘 다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유리는 이를 몇 번 부딫혀가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바노프가 주삿바늘을 거두자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만해… 알았어… 네 말을 들을게… 내가 그 주사를 맞겠어."
"유리, 안됩니다!"
"후… 진작에 그랬어야지."
"유리!"
"대신… 우리한테 시간을 줘. 부탁할게, 아이브. 이대로 나 자신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내 추악한 과거를 강제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아… 난 너무 두려워… 부탁이야."
"…넌 언제나 그렇게 이기적이야."

 이바노프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터덜터덜 뒤쪽 벽으로 걸어간 뒤, 한 손으로 힘없이 이마를 짚으며 컨테이너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난 그런 너를 이길 수가 없고."
"…고마워, 아이브."

 유리는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흐느낌이 한동안 컨테이너 안을 맴돌았고, 그 소리와 안개 속에서 다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다들 격앙됐던 감정 탓에 지쳐버린 채였다. 이바노프는 특히나 혼자서 안고 있던 울분을 폭발시킨 탓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리의 울음도 사그라들어 이제 잔잔한 숨소리만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적막을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배기음이 깨트렸다. 이바노프는 퍼뜩 문 밖을 내다본 뒤에 서둘러 쪽문을 닫았다. 그는 황급히 유리에게 달음박질쳐오더니 한 손아귀로 그녀의 뺨을 움켜잡았다. 유리의 저항을 찍어누르며 그는 강제로 유리의 입을 벌려 안을 초조하게 살폈고, 곧 오른쪽 아래의 어금니 위에 붙어있던 아이보리색 플라스틱 조형물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도청기였다.

 이바노프가 고함을 질렀다.

 "네년이 날 속였어!"

 탕! 탕!!

 이바노프가 주사기 가방으로 손을 뻗던 그 순간, 총성이 울리더니 쪽문이 벌컥 열렸다.

 "멈춰라."

 그리고 마스크를 낀 브릴러가, 덜덜 떨리는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을 이바노프에게 겨눈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컨테이너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당장 그 손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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