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새, 짙은 안개와 무진의 밤 (下)

 
 
 2011년 3월 8일, 그 날은 운명을 거부하는 검푸른 안개 속에서 열기를 높여가던 갈등이 마침내 최종장을 향해 질주하던 날이었다. 엔트로피를 넘어서의 조직원들은 그 안개를 아군 삼아 서둘러 도망가려 했지만, 유리는 겨우 벗어난 그들의 손아귀 속으로 목숨을 걸고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 무모한 돌진에 브릴러가 함께하고 있었다.

"저거 뭐하는 거야?"
"브릴러 박사! 돌아오십시오! D-3325한테서 총 뺏으시고! 당장!"

 난데없이 브릴러가 D계급 인원을 데리고 엔트로피 진영을 향해 달려가는 걸 본 특무부대원들은 경악했다. 브릴러는 휙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현장 판단으로 중요 물품을 탈환해 돌아오겠습니다!"

 브릴러가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뒤돌아 달려가자 기선은 일이 꼬이는 것에 난감해했다. 저격수와 함께 인근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고 쌍안경을 들여다보던 대원이 그에게 무선을 보냈다.

"일단 전개는 마쳤습니다만, 안개도 짙은데 박사가 저렇게 나와버리면 여기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저격조는 현 위치에 대기한다. 상황 격상! 쯔산을 보호하는 인원 빼고 지상 인원은 전원 진입해서 브릴러 박사를 엄호해라!"

 기선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직접 권총을 뽑아들었다.

 한편 정은 다 놓친 줄 알았던 인질들이 제발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그는 이 처참한 실패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반 년 넘게 3개 국가에 걸친 세포 조직들이 공을 들였던 작전이 잠입 요원 발각, 기밀 정보 입수 실패, 적 인원 납치 실패의 트리플 크라운으로 마무리되어가는 상황에서, 최대의 실책을 범한 당사자인 이바노프는 이미 그가 홧김에 처형해버렸으니 모든 책임을 그가 떠안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만회할 만한 실적이 넝쿨 째 제발로 굴러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정은 악을 쓰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것들, 저 금발 두 명 잡아! 앞으로 인생 꼬이기 싫으면 절대 놓치지 마라!"

 혼돈의 도가니로 말려들어가는 그 한가운데에 두 사람은 달리고 있었다.
 


 

"사격엔 자신 없으신가요? 브릴러 박사님."

 달려드는 B.E 전투원의 오른손을 쏘아 소총을 떨구어내면서, 유리가 물었다. 그들은 이미 컨테이너 바깥의 B.E 진영 한복판에 도달해 지게차 뒤에 몸을 숨긴 참이었다. 바로 근처에서 방파제에 파도가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좋은 기억이 조금… 사람은 도저히 못 쏘겠더군요."
"그렇다면 박사님은 코트를 찾는데 집중해주세요. 요격은 제가 맡죠."

 브릴러는 두말 없이 예비 탄약집을 유리에게 넘겨주었다. 유리는 건네받은 탄약집을 능숙한 동작으로 허리춤에 찼다. 실린더에 남은 총알은 세 발, 예비 열두 발. 재빨리 잔탄을 헤아리며 유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녀의 엄호를 받으며 브릴러는 자세를 낮춘 채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상황은 시시각각 B.E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 방면의 B.E 교전세포는 현역 복무 경력자들로 구성되어있긴 했지만, 상대는 매일같이 훈련과 실전을 반복하는 특무부대 요원들이었다. 특히나 제1차 삼각 분쟁을 겪지 못한 세대의 전투원들은 난생 처음으로 진짜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 세워져 죽음의 위기를 마주하자 패닉에 빠져버렸다. 코앞에 유리가 고작 리볼버 하나만 든 채 서있었지만 감히 그녀를 쓰러트리러 총구를 들이밀 자는 방금 오른손이 불구가 되어버린 놈을 빼면 없는 듯 했다. 그 사실이 정의 초조함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젠장, 서두르지 않고 뭣들 하는거야?! 저것들이 뭘 하러 왔든, 당장 잡는다!"

 그는 욕지거리를 줄줄이 내뱉으면서 직접 소총을 쥐었다. 위화감은 들었지만 놈들의 의도를 신경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안개가 짙어지고 특무부대와 인질이 떨어진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가 나서자 부하들도 정신을 차린듯 하나둘씩 전투태세를 다시 갖추기 시작했다.

"박사님, 뭔가 좀 보이나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리가 재촉했다.

"저기다. 저기 놈들 대장 바로 뒤 밧줄뭉치 보여요?"

 브릴러가 작은 목소리로 유리에게 귀띔했다. 한쪽 끝이 기둥에 묶인 채 대충 말려서 놓여있는 밧줄 뭉치 위에, 며칠 전 쯔산 요원이 기지를 나설 때 입었던 코트가 버려져 있었다. 유리가 그것을 확인하는 찰나 정이 지게차 창문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급히 수그린 유리의 머리 위로 총알과 유리조각이 흩날렸다. 브릴러가 그녀에게 바짝 붙자 유리가 물었다.

"놈들이 저걸 알고 있을까요?"
"모르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잘 들어요.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고선 브릴러는 유리의 귀에 대고 무어라 작전을 속닥였다. 유리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유리가 몸을 옆으로 내밀어 정을 향해 총알을 갈겼다. 정은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유리 입장에서도 각도가 나오지 않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기만 해도 정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었다. 초조함 속에서 정은 문득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시간을 끌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유리와 브릴러가 그냥 거기서 특무부대 쪽으로 달려갔다면 당연히 그대로 상황 끝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놈들, 저놈들 뭘 되찾으러 온거지?"
"네?"
"놈들한테서 압수한 게 뭐뭐 있었나?!"
"여자는 별거 없었고, 꼬맹이 호출기랑 권총, 코트…"
"어딨어!"
"어, 저, 저깄네요."

 부하가 겁에 질려 가리킨 곳에는 밧줄더미 위에 버려진 쯔산의 코트가 있었다. 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트를 집으러 달려갔다. 그러나 정과 동시에 마스크를 벗어던진 브릴러가 밧줄더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봐, 저거!"
 "쏴! 쏴라!"

 정의 부하들은 브릴러를 쏘아버리려 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서로의 사선에 정통으로 겹치는 바람에 섣불리 발사하지 못하고 말았다. 장전을 마친 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의 손과 어깨죽지마다 한 발 씩 총알 여섯 발을 순식간에 박아넣어 주었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정과, 정이 움켜쥔 코트와 밧줄더미에 브릴러의 몸뚱이가 정통으로 들이박혔다.

 "이… 이놈이?!"
 "같이 수영 좀…! 해주시지!"

 그러면서 브릴러는 일부러 밧줄을 흐뜨려 그와 정의 몸에 엉키게 해 버렸다. 꼼짝없이 얽혀버린 두 명은 달려오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대장!"
"야, 뭐해! 빨리 건져!"
"진입해! 적 전투원을 제압해라!"
"으, 재단 놈들이다!"
"동작 그만! 너희는 포위됐다. 전원 무기를 버려라. 당장!"

 B.E 측에서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쯔산과 기선을 위시한 재단 요원들이 안개를 뚫고 도착해 사격을 가했다. 유리도 엄폐를 벗어나 공격에 가세하자,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된 B.E 조직원들이 하나하나 소총을 던져버리곤 무릎을 꿇어 투항했다.

 상황이 정리되기 무섭게 유리는 서둘러 밧줄이 묶인 곳으로 달려가 바다를 향해 외쳤다.

 "브릴러 박사님! 브릴러 박사님!!"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자, 유리는 울상이 되어 다급히 밧줄을 붙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챈 뮤-39 대원들도 달려왔다. 유리의 요청에 그들은 다같이 밧줄을 끌어당겼다. 몇십 초 쯤 밧줄을 당기자, 엉망으로 엉킨 밧줄 끝부분이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브릴러 박사님!!"
 "흐억, 허. 하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참던 숨을 몰아쉬면서, 브릴러는 쯔산의 코트를 번쩍 들어올려보였다. 그의 옆엔 물이 가득 들어찬 방독면을 낀 채 의식을 잃고 널부러진 정이 그와 같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눈물 범벅이 된 채 안도하는 유리의 얼굴을 보며 브릴러는 활짝 웃으면서 코트를 가슴팍에 대고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피로와, 안개에 섞여있는 수면제 때문에,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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