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영원

평가: +4+x

hotpants 2023/6/9 (목) 20:36:14 #0862117


여러분은 유령을 믿는가?

믿든 안 믿든 크게 상관은 없다. 이번에 할 이야기는 유령 목격담은 아니며, 유령이라는 개념은 단지 들어 본 이야기의 곁다리가 될 뿐이다. 어쨌든 여러분도 유령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들어봤으리라 믿는다. 유령 하면 비물질적이고 어떤 다른 생물에게 빙의해야만 물질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인식이 크지.

내가 들은,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 줄 이야기도 그런 클리셰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diegobrando 2023/6/9 (목) 20:38:15 #4812994


유령은 전 세계 공통으로 떠도는 존재라는 느낌이 강하지. 어쨌든 육체에서 분리된 것이니까 말이야.

어쨌든 보통 파라워치의 유령담이라 하면 역시나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이야기인데, 이건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hotpants 2023/6/9 (목) 20:39:21 #0862117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아는 언니의 친구가 겪은 경험담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 현실성이 없어도 그럭저럭 봐 주었으면 한다.

옛날에 서로 무척이나 사랑하는 커플 한 쌍이 있었다. 아마 결혼도 한 달 앞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둘 다 각자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 만나기로 한 밤에 남자친구를 기다리던 여자친구가 그만 음주운전 차량에 치이고 말았다.

여자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이송 도중 뇌 손상과 출혈성 쇼크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니 남자는 홀로 남겨졌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는 하루하루를 폐인처럼 살아갔다. 여러분도 대충 예측하겠듯이 직장도 나가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그러던 중 49일 후, 돌연히 그의 앞에 여자친구가 나타났다. 당연히 여자친구는 이미 죽었지만 남자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의 손을 덥석 쥐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의 두 손은 그저 안개처럼 남자의 손에서 흘러내려 버렸지.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이미 여자는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그래도 평생에서 최고로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자 행복했다. 여자는 비록 물질적인 존재는 아니였지만 정신적인 교감은 나눌 수 있었지. 집에서 넷플릭스를 본다거나 함께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은 가능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여자친구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당황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보며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사실은 남자가 폐인처럼 살 때는 "기가 허해서" 여자가 보였던 것이지만 건강하게 살면서 점점 유령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임을 알아냈다.

그래서 남자는 그날부터 하루에 몇 끼 굶기 시작했다. 여자는 말렸지만 남자의 고집은 대단해서, 4일간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아예 끼니를 거른 덕에 여자는 다시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nailbullet 2023/6/9 (목) 20:42:14 #3242494


음… 건강한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에 너무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만

밥을 거르면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솔직히 자살 행위나 다름 없지

오컬트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diegobrando 2023/6/9 (목) 20:44:45 #4812994


기묘한 사랑 이야기구만. 이게 끝이야?

hotpants 2023/6/9 (목) 20:45:43 #0862117


아직 안 끝났어. 계속한다.

어쨌든 첫 번째 고비를 넘긴 커플은 알콩달콩 지내다가, 어느 날 문제 하나를 마주했다. 정신적인 활동은 가능했지만 육체적인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애정행각만이 아니라, 밖으로 데이트를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니 얼마나 무료했겠어.

남자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빙의를 생각해냈다. 알다시피 유령이라는 것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빙의를 하기도 한다는 속설이 무척 유명하고, 또 사실상 괴담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확실히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너희들도 재미있어할 거라고 믿는다.

남녀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다. 물론 이 세상 어딘가에는 아주 값비싸고 정교한 로봇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마 그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우린 돈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겠지. 애당초 둘 다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당시에는 여자는 일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들의 생각은 결국, 다른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결론까지 다다랐다. 조금 소름끼치는 일이 분명하지. 여자가 들어갈 육체의 원래 주인의 의식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연인만큼 아름답지 않다고. 그리고 이 드넓은 세상 수많은 사람 중 여자와 똑같이 생긴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을 구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남자는 도통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원래의 여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던 어느 밤 남자는 생각해냈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여자를 닮지 않았대도, 여자의 눈을 닮은 사람은 있다. 코를 닮은 사람이 있고, 반짝이는 머리칼을 닮은 사람이 있고, 가느다란 손을 그리고 입술을 닮은 사람은 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남자는 그 길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는 차례차례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다른 곳에서 구해낸 신체 부위를 오려 붙이고 꿰매면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여자의 몸을 구성해 나갔다. 개인이 신체 부위를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아주 한정적이다. 아마도 불법적인,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

diegobrando 2023/6/9 (목) 20:51:16 #4812994


무척 비현실적이야. 남자가 의사라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어 붙인 장기가 작동할 리도 없고.

어떤 '썰'이라기보다는 판타지나 메르헨에 가까운 그런 느낌이군.

hotpants 2023/6/9 (목) 20:53:44 #0862117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이게 내가 아는 이야기의 끝이다.

이것저것 굉장히 빈틈 투성이인 이야기지.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좀 더 묘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준 아는 언니— 이하 여성 K는 올해에 귀국했다. 미국 위스콘신에 살다가 남자친구와 결혼해 한국에 터를 잡고 살려는 모양이다. K는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하이킹을 하다가 곰인지 뭔지, 어떤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았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심하게 다친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겼었다고 한다. 본인은 겨우겨우 온 몸을 다시 꿰매는 수술을 받아서 건강해졌다고는 한다. 그래서 아직도 온 몸에는 그 수술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나는 한쪽 발이 없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서 괴사해 잘라내야만 했다. 그리고 어제 여성 K와 나는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해수욕장에 내려갔을 적에 나는 그의 맨다리를 보았다. 정말 무릎께를 선명히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이 익숙한 모양새였다. 발등의 점이라던지 그것이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여성 K는 이 발도 이식받은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발을 이식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누구의 발일까? 왜 나는 교통사고에서 오른발만 잃어야 했을까? 그리고 왜 여성 K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아직 여성 K의 남자친구를 만나본 적 없다. 그리고 만나볼 계획조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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