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오컬트 연합의 이사관보

세계 오컬트 연합 프시케 분과 동유럽국 국장이자 바르샤바 지부의 이사관보인 바솔리아basolia의 아침은 보통 오전 6시에 시작한다. 지겨운 알람벨과 가벼운 스트레칭, 샤워 후엔 으깬 감자로 속을 채운 빵을 오븐에 넣어 데우고, 그 사이 계란 프라이를 반숙으로 구워 준다. 또는 비엘코폴스키Wielkopolskie의 코닌Konin의 목장에서 짜내온 우유로 만들어진 샤워크림이 얹어진 유명 제빵점의 사과 팬케이크 포장지를 뜯고, 마찬가지로 코닌에서 온 블루베리가 블랜딩된 요거트의 뚜껑을 따 꿀을 조금 넣어 휘저어 준다. 마무리론 메이커에 에티오피아산 원두를 넣고, 김이 올라오는 진한 갈색 추출물에 미리 끓인 우유를 타 카푸치노를 한 잔 정도 마신다면 적당할 것이다.

바쁜 직장인답지 않은 그의 느긋한 아침 식사는, '아침이 여유롭고 풍족하다면, 온 하루가 그렇다'라는 그의 지론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2월 24일 새벽 5시 25분, 부재중 전화 4통과 문자 7통, 그리고 BBC의 화면에서 특별 군사 작전을 선포하는 푸틴의 모습을 본 그 순간, 바솔리아 이사관보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늦는걸 미덕으로 아는 거야? 여유로운 사람인 건 알지만 상황을 봐가면서 했어야지. 전화는 왜 그렇게 안 받았어?" 코지올Kozioł 이사관이 쏘아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됐고, 나 어때? 옷차림에 이상한 부분 없나?" 바솔리아 이사관보가 회의실로 허겁지겁 들어온 후 3분 동안의 공세가 무색하게도, 코지올 이사관은 그의 변명을 단칼에 일축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뿔테 안경과 늘 충혈된 눈, 진한 데오드란트 향, 매듭을 바짝 조여 숨이 막힐 것처럼 보이는 브룩스 브라더스 사의 넥타이와 브뤼셀에서 맞춤 제작된 그레이톤의 쓰리 버튼 양복, 두 개의 문자열로 바르샤바 시각과 뉴욕 시각을 가리키는 스위스산 크롬 도금 시계로는 코지올 이사관을 설명하기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는 신경질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명예욕과 출세욕이 강하며, 능력 콤플렉스 환자이기도 하다.

뺨에 미처 면도 되지 못한 수염이 살짝 튀어나왔다고 지적할까 고민하던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회의 시작과 화면 연결을 알리는 기술요원의 말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다영역 이중공명 동시송출 시스템, 약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광학과 양자역학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 경이로운 영상 시스템은 참가자의 시청각은 물론, 촉각, 후각, 미각까지 원거리 대상에게 공유시켜 수천 km 떨어진 참가자일지라도 직면해서 대화하는 듯한 효과를 준다.

그리고 빛이 밝아오면서, D.C. 알 피네, 세계 오컬트 연합의 사무차장이자 신비와 공포의 대상,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초상 단체의 총수가 나타났다. 늘 모습을 달리하면서 영화 속 여러 인물의 모습을 취한다고 알려진 그는 오늘도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고전스러우면서 상징적이었기에. 알 피네는 '학이 난다'의 베로니카 역의 타티아나 사모로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도 문제입니다. 겨우 진정된 지역들까지 불이 번진다면.." 코지올 이사관의 발언을 들으면서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엉뚱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무차장님도 코지올 이사관의 데오드란트 향을 맡을 수 있을까?' 실속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알 피네 사무차장이 말했다.

"반도체 노르니르는 전황을 어떻게 분석했습니까?"

열쇠고리를 닦는 자, 상아탑의 흉상을 깎는 자, 베르단디의 세 번째 종복 헬게센이 전자음으로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쟁은 이제 시작했고,"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노르니르에게 주어진 시간 또한 적었지만, 늘 그랬듯이 대답이 나왔습니다. 러시아가 승리할 확률은 67% 정도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곳곳에서 탄식하는 듯한 신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헬게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 지도부가 원하는 신속한 승리는 거의 불가능하며, 전쟁이 종결하기까지 러시아군이 감당해야 할 피해는 그들의 예상보다 곱절은 더할 것입니다."

헬게센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발언을 요청하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분석은 기계의 몫이다. 그러나 해석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 해석에 치이는 것은 그와 같은 실무자이다.

'역시 아침이 잘못되면 하루를 고생해.'


비상 회의가 종료되자,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드디어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하고 있나? 지금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야?" 코지올 이사관의 질책이 쏟아진다.

"아닙니다, 이사관님." 사실 그의 말이 맞다. 비상회의가 종료되고, 곧바로 프시케 분과의 긴급 회의와 세르히 키슬리차 주 UN 우크라이나 대사와의 화상 회담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코지올 이사관 또한 다른 긴급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질책할 시간도, 변명할 시간도 부족했기에 둘은 회의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러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휴대폰을 들어 키슬리차 대사의 안보리 연설을 잠시 보았다. '전범들에게 연옥은 없습니다. 그들은 지옥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108 평의회 중에 연옥을 관장한다고 알려진—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단체가 있는데, 그들이 대신 회담에 참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당신네 유럽 지부에 분명히 전달하세요. 성명문은 접어두라고. 예? 아뇨, 옵션이 세 가지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뭐라고요? 아니, 아니! 규탄이랑 인도적 지원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성명에 우리 시대의 평화가 적혀있든, 덩케르크 연설이 담겨있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세 가지 성명문 중 그 어느 것도 채택하지 말란 이야깁니다! 당신이 속한 국제이사회에서! 바르셀로나 지부장에게 분명히 설명해주세요. 대륙사무장이랑 그 임무이사관한테도! 네, 임무이사관 말한 거 맞습니다. 당신들은 UN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 기구란 말입니다. 예, 우리 지원을! 그런데 우리도 아직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는데 당신들이 먼저 선수를 치면 의도가 왜곡될 겁니다. 알겠습니까? 차후의 인도적 지원은 조율하면 되는 문제고, 지금 당장은 국제이사회에서 바르셀로나 지부가 기습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막아달라 이 이야깁니다. 예? 아르메니아.. 아뇨, 나고르노 카라바흐랑은 다르죠, 경우가. 아뇨, 지금 전쟁은 그때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이야기가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까? 아프가니스탄은 경우가 더 다르지 않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만나 자선재단의 국제이사회 이사 하나를 설득시키는—최소한 설득시켰다고 믿고 싶은— 전화를 끊고서,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두통약을 내무반에 부탁할까 고민했지만, 또 비상 확대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두통약을 포기하고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만나 자선재단이 규탄 성명문을 기습적으로 발표하고 임무작업반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잠시 유예시킨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후원자가 연합만 있는 게 아니라면서, 본인들이 이럴 때 나서지 않으면 대체 언제 나서야 하냐고, 후원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말을 끝내고 테이블에 미리 준비된 민트티를 마셨다. 바짝 말랐던 목을 축이면서, 사흘 동안 그를 괴롭혔던 두통도 잠시 가시는 듯했다. 바솔리아 이사관보에게 108 평의회가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발언하기란, 늘 어려운 일이었다.

바깥에서 본다면, 108 평의회는 흑과 백의 싸움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변칙 개체와 현상을 두고 '이건 위험하네, 파괴.', '이건 안 위험하네.', '이건 위험한데 도움이 되네.'라고 108명의 판사들이 모여 판결을 두고 말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냐고. 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합의 이미지가 굳어진 것에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큰 유감은 없지만, 108 평의회가 단지 파괴, 또는 이용 둘 만을 가지고 싸워대는 단순한 곳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108 평의회는 그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정치적인 개싸움의 현장이다.

누군가 비유한 적이 있다. 세계 오컬트 연합의 108 평의회는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이 양복을 입고 한 우리 안에 모여들어 서로 예의를 갖추는 곳이라고. 크고 작은 이권단체들이 108개나 모여 세상의 모든 사건에 간섭해대며 결정하려는 곳. 다극화의 극단이자 신자유주의적인 정치역학으로 구동하는 이 체제를 미어샤이머가 본다면 무릎을 칠 것이고 우드로 윌슨이 본다면 탄식할 것이다. 108개의 가맹 단체뿐만 아니라 준가맹 단체, 협력 단체, 기타 등등 원외 단체들로 이루어진 이 거두는 연합을 굴리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저울질하고자 한다.

잡생각을 하는 사이, MI666의 부국장, 윌리엄 케버슨이 발언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보안원 변칙위협부가 연합의 협력 단체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렇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재작년에 MI666와 변칙위협부가 대초상 역량 개발 및 공유 협정을 맺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가 협력 단체를 쓰다 버린 걸레처럼 대우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가 이들을 버린다면, 다른 단체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린 성의와 존중을 보여줘야 합니다. 세계 최대의 초상 단체로서, 우호적인 파트너에게 우리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말입니다!" 윌리엄 케버슨 부국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물론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가 정상세계의 한 국가를 상대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행동해야 합니다. MI666의 부국장인 저는, 전쟁을 결심한 러시아 지도부, 푸틴과 그의 이너서클에 제재를 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MI666은 지난 몇 년 동안 마셜, 카터&다크가 러시아 지도부를 상대로 변칙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온 사실을 추적해 왔습니다. 피직스 분과가 움직여준다면, 푸틴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는 연합의 의중을요. 그리고 만일 푸틴이 깨닫지 못한다면, 더 큰 경고가 필요할 것입니다."

"부국장님이 우려하는 바는 십분 이해 갑니다." 무저갱의 지하 수도회의 알치오 수도사가 발언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러시아는 유엔 가맹국이자 그들도 우리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푸틴을 직접 겨냥해 행동한다면, 푸틴 역시 우리에게 보복할 명분을 얻게 될 겁니다. 그럴 경우, 보복으로 인한 피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죄 없는 국민이 받게 될 겁니다."

"죄가 없기는요. 최신 여론 조사를 보십시오. 푸틴의 지지율은요?" 비겁자 니쥬웨를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모임의 회장이 발언했다.

"이 자리에서 커티스 르메이의 재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회장님. 당신은 모스크바에서 시위하며 무장경찰에게 저항하는 이들은 못 보는 겁니까? 그들도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탄타코니아 집회의 1번 서기가 발언했다.

"여러분, 이 자리에 모여 논쟁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사항이 한가지 있습니다." 키르차투프 탄광 광부 조합의 조합장, 이바레프가 입을 뗐다. "바로, 러시아가 승리해 전쟁의 목적을 이뤘을 때 말입니다." 조합장의 말은 좌중을 술렁이게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케버슨 부국장이 날 선 어조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는건, 우리가 냉전기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과, 신냉전의 한복판에 우리가 다시금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조합장이 받아쳤다. "UN에 속한 조직으로서, 냉전기에 우리가 서방과 공산권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인류를 얼마나 잘 수호했는지 기억해보자는 겁니다. 1950년의 한국 전쟁 속에서 우리가 개입하지 못했기에 우린 반백 년 동안 SCP 재단이 한국 지역에서 어떠한 제한 없이 활동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속에서, 소련군과 CIA가 키워낸 반군 사이에서 연합 타격조가 얼마나 개입할 수 있었습니까? 쿠바는 어떻고요? 평의회 여러분, 우린 지금 세계의 질서가 바뀔지도 모르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이전처럼 줄타기만 하며 기회를 놓쳐선 안 될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러시아가 승리할 게 분명하니 그들의 심기를 미리 건드려선 안 된다는 소리군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케버슨 부국장이 힐난하는 어조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조합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노르니르의 세 여신께서 러시아가 승리할 확률을 이전 계산보다 4% 하향해 63%로 계산하셨습니다." 녹아내린 촛농의 목도자, 번제물의 초상, 우르드의 네 번째 종복, 뤼네프가 전자음으로 울리는 목소리로 발언했다. 그의 발언에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잠시 식었다. 식은 분위기를 재점화시킨 자는 아케리우카 망명 정부의 대변인이었다.

"우린 키르차투프 탄광 광부 조합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오늘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각 대표들은 러시아에 배치된 연합의 자산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단순한 무력 자산뿐만이 아니라 세계초상보건기구의 의료 인력들, ICUST 상트페테르부르크 캠퍼스 등 말입니다."

"우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캠퍼스는 러시아의 전쟁 결정을 규탄하기로 이미 결의했습니다. 재학생 대부분이 동의한 바입니다." 비상 확대 회의로 참석해 있던 ICUST 상트페테르부르크 캠퍼스 학장이 대변인의 우려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발언했다.

"연합 차원에서 결의가 어렵다면 삼두회는 어떨까요? 공동 결의안 말입니다." 1번 서기가 제안했다. 하지만 베니스 지부의 프시케 분과의 테노리온 이사관이 반박했다. "삼두회가 결성된 이래 초상세계가 아닌 정상세계의 사건에 삼두회가 공동 결의안을 발표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이 전쟁이 매우 중요한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공동 결의를 연합이 제안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짊어질 리스크가 실익에 비해 더 커질 것입니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연이어 이뤄지는 발언들을 민트티를 홀짝이며 듣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단체의 대표들이 각양각색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발언하고, 반박하고, 질의하고, 논쟁하고, 비난하고, 제지당했다. 108개의 서로 다른 이념과 목표를 가진 단체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말로 싸워대는 모습을 보려 하니 고막이 타들어 가는 듯 했다. 게다가 이번 회의는 확대 회의이기도 해서 준가맹 단체들까지 발언 기회를 타려고 가진 애를 써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108개라는 상징성에 들기 위해 다투는 이권 단체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렸다. 협력 단체 중에서 준가맹 단체에 들어가기도 하늘에 별 따기라는 걸 생각하면, 그가 민트티를 홀짝이고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중한 자리인지 되새기게 하겠지만,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구태여 그런 생각을 하진 않기로 했다. '그런 생각은 할수록 사람을 피 말리게할 뿐이지.' 마치 바로 옆자리에서 민트티를 홀짝이는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코지올 이사관처럼.

준가맹 단체는 108 평의회에서 투표권을 갖지 않고, 108 평의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얻을 수 없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재심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계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심사 과정이 까다로워서 많은 단체들이 잘려나가는 일도 잦지만, 그럼에도 많은 단체가 연합의 협력 단체를 넘어 준가맹 단체가 되기 위해 온갖 로비를 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준가맹 단체는 연합의 지원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준가맹 단체가 된다는 것이 단체의 이념과 목표를 연합에서 인정해준다와 동일선상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연합이 108 평의회에 유동성을 주기 위하여, 108 평의회에 빈 자리와 임기제 직위를 마련해두었다는 점이다. 임기제 직위는 일정 임기 동안 108 평의회의 자격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준가맹 단체들이 돌아가면서 해당 직위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유엔 가입국이 193개국인 걸 생각하면 108 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각국에 속한 108 평의회 가맹 단체들은 본국의 다른 단체들도 준가맹 단체 직위로 넣어주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한다. 그렇기에, 연합이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들의 영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그들 역시 108 평의회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지평선 구상에서는 전쟁 지지 선언을 한 모스크바 총대주교에게 발언을 취하하지 않으면 심판관을 보내겠다고 공식적으로 경고하더군요." 바솔리아 이사관보가 잡념에 빠져있던 사이, 영광의 추도회의 총대가 발언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아시겠죠. 전 연합도 비슷한 방법을 택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전쟁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단체, 혹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단체는 준가맹 단체 또는 협력 단체 자격을 박탈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러시아의 영토 내의 협력 단체나 준가맹 단체, 또는 준가맹 단체 직위를 신청한 단체가 꽤 있는 걸로 압니다. 충분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다른 제안은 없습니까?" 알 피네가 말했다. 오늘의 그는 '병사의 발라드'의 슈라 역의 잔나 프로코렌코였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양파를 도마에 대고 썰었다. 아주 얇게 썰지는 않고, 반으로 자르고 뭉텅이로 서너 조각으로 만드는 게 다였다. 썰질을 하는 바솔리아 이사관보의 등 뒤로는 예열 중인 프라이팬이 내는 기분 좋은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파 썰기가 끝나고, 이사관보는 미리 썰고 씻어둔 감자 조각들을 양파 조각들과 함께 믹서기에 넣었다. 양파와 감자가 다 갈리고, 그는 밀가루가 담긴 양푼에 계란을 깨 넣었다. 수저로 둘을 휘저어 섞은 다음, 그는 갈린 양파와 감자를 전부 양푼에 부었고, 나무 주걱으로 그것까지 모두 저어 섞어 주었다. 그 다음에는 제빵용 수저를 들어 반죽을 올리브유로 예열된 프라이팬 위로 조심스레 퍼와 원반 모양으로 천천히 부어주었다. 반죽이 지글거리면서 점차 구운 감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솔리아 이사관보의 오늘 아침 식사는 폴란드식 감자 팬케이크와 블루베리 치즈토스트였다. 전날에 사와 차갑게 식은 토스트를 오븐에 넣어 살짝 데워준 다음, 그는 치즈토스트를 먼저 한 입 베어먹었다. 녹은 치즈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살짝 눅눅한 맛이 입안을 채우며 그의 식욕을 자극했다. 곧이어 느끼할 수 있는 치즈의 식감을 블루베리의 달콤한 맛이 찌르듯이 찾아왔고, 입맛이 심심해지기 전에 그는 감자 팬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갓 구워내 바삭하면서 따뜻한 팬케이크는 아침의 빈속의 훌륭한 해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묻는다면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대답할 것이다. 구운 감자의 풍미는 '채우는 맛'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침 시간을 방해하며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고,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면서 남은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온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혼돈의 도가니였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과 800km 남짓한 거리에서 여전히 전투는 진행 중이다. 그동안 키이우는 건재하였으며, 하르키우와 헤르손은 해방되었다. 부차와 이르핀, 헤르손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의 실태가 속속히 드러났고, 신속한 종결을 낼 것만 같았던 러시아는 부분 동원령을 선포했다.

반도체 노르니르에서 동원령이 선포될 가능성을 31%로 추산했던 사실을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기억했다. 그리고 동원령이 선포되자, 연합의 모든 피직스, 프시케, 프톨레미 분과의 자산이 동원되어 러시아 내 연합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들이 변명하는 모습은 참 보기 어려운데 말이야.' 당시의 지옥같은 업무를 기억하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숨 돌렸다고 할 수 있다.

108 평의회는 결국 영광의 추도회의 제안을 채택했다. 같은 편의 단체를 준가맹 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로비를 하는 가맹 단체들 입장에선 찝찝한 제안이었다.

"협력 단체는 말 그대로 연합과 좋은 협력을 보이는 단체와 파트너쉽을 맺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합당한 사유 없이 자격을 박탈한다면 다른 협력 단체들도 동요할 겁니다."

시무르그의 둥지지기, 타쉬크만이 발언했다.

"전쟁을 지지하거나 직접 개입한다면 그것만한 사유가 어딨겠습니까? 무슨 명분을 더 쌓아야 한단 말입니까?"

비스케흄 시의 시장, 스트라우드가 발언했다.

"제 말은, 우린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와의 복잡한 관계도 생각해야 하고, 협력 단체와 준가맹 단체, 가맹 단체 사이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타쉬크만의 일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를 직접 자극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연합의 의사를 최소한의 리스크를 통해 보여줄 수 있고, 또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도 나름의 행동력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결국 많은 반대표를 무릅쓰고 찬성파가 승리할 수 있었다.

결의안 채택 이후,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협력 단체 3개가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러시아 내 대부분의 준가맹 단체들이 재심사 과정에서 탈락했다. 벨라루스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정부는 특정 국가에게만 불합리한 과정이었다며 반발하기는 하였지만, 예상보다는 덜 격한 반응이었다. 전쟁 초기의 피 말리는 눈치싸움과 논쟁을 생각한다면, 참 허무하다고 논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08 평의회는 전쟁 중의 인도적 지원을 허가했다. 만나 자선재단은 부차에 임무작업반을 파견했으며, 조만간 헤르손에도 임무작업반이 파견될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연합은 만나 자선재단에게 후원함으로서 이를 간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전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지원은 금지되었기에, 이를 감시할 합동 감시단이 발족했다.

삑. 코지올 이사관의 연락이다. 합동 감시단에 한 자리를 원했었는데,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요새 예민한 정도가 부쩍 심해졌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남은 팬케이크 조각을 입에 물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상은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지나간 일은 아예 일어난 적도 없는 것처럼, 그의 집에서 800km 떨어진 전쟁은 문자 그대로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바솔리아 이사관보는 2월 24일, 황급히 일어나 정신없이 출근하느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것만 같은 그 날의 아침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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