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선이 남작의 인형극: 내 이야기가 아닌 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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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목 : 살풀이 춤


이 이야기는 이미 죽은 너의 누이들에게 바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머물러 분노할 것이 아니라, 분노와 슬픔을 뒤로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분노는 너와 나를 가를 뿐이다.


너는 네 아버지와 할머니 앞에 앉아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할머니보다 약간 앞에 앉아있고, 할머니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아버지보다 약간 뒤에 앉아있다. 너는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네 아버지와 할머니를 쳐다본다.
“무진으로 내려가겠습니다.”
네가 말한다.
“저도 나이가 나이이고, 언제까지 아버지와 할머니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이제 분가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묵묵이 네 말에 동의한다. 할머니는 못마땅한 듯이 혀를 한 번 찬다.
“그 기집과 함께냐?”
할머니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 상판도 못 본 불여우 년이 우리 귀한 손주를 꼬여내서 무진으로 도망가자고 했구나, 아이고오-.”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는 원래부터 망상증이 있었다. 너는 티 나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고 아버지를 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꼬리 아홉 달린 불여우가 우리 손주를 꿰차는구나,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는 쳐다보지 않은 채였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래, 이 모든거이 네가 새장가를 안 들어서 그런게야. 바깥양반은 바깥일에, 안사람은 집안일에만 신경을 써야하는 것인데, 바깥양반이 안팎을 다 맡겠다고 나서니 어찌 자식 관리가 제대로 되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강이 애비야, 새장가를 들거라.”
“그만하세요, 어머니!”
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이고, 자식새끼도 애미를 무시하는구나, 이 모든거이 그 죽어버린 기집년 때문이라!”
“어머니!”
아버지가 고함쳤다.
“아무튼 저는 무진으로 내려갈거에요.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랑 누나랑 돈 모아서 거기 작은 집을 샀거든요.”
네가 재빠르게 끼어든다.
“아구, 아구, 아구, 아주 작당을 하였구나! 그 불여우 년이!”
할머니가 가슴을 쳤다.
“내려가거라. 젊은 애들 둘이 벌어봤자 얼마나 벌겠냐. 내가 돈도 보태주마.”
아버지는 할머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이 마련해야 의미가 있죠. 보태주실 돈은 따로 쟁여두셨다가, 나중에 진짜 힘든 일이 있으면 손 벌릴 때 주세요.”
“우리 귀한 손주 앞에 무슨 힘든 일이 있겠냐! 우리 손주는 귀하디 귀한 삼대 독자라 악귀 잡귀도 다 피해가느니라! 우리 손주한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모오다 그 불여우 기집년이나 죽은 그 기집들 때문이라!”
“어머니!”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이젠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그만 하시죠!”
“이게 다 그 죽은 년들이 우리 집안에 씌여서 그런게라! 우리 귀한 아들 홀릴 때부터 내 알아보았다!”
“내 가족이고, 우리 가족이고, 내 아내고, 내 딸이고, 우리 강이 엄마랑 누나입니다!”
고함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지는 이빨을 깍 다문 채 어깨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호령에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히 앉아계셨다.
“가족이 자기 가족 못 되라고 저주를 해요? 그만 하십시오.”
목소리는 다시 침착해졌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잠시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갔다. 너는 대충 앉은 채로 할머니께 인사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골치아파진다는걸 이미 너는 알고 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뱃 속에서 죽은 누이와 네가 태어날 때 죽은 너의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부터, 너는 알고 있다. 황급히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밖에서 가만히 서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거짓 곡소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자, 밤 공기가 상쾌하였다.
“아들.”
아버지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나 하지.”
“저야 좋죠.”
너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냥 동네에 있는 조그만 선술집이다. 아버지는 소주 한 병과 찌개 하나를 시켰다.
“갑자기 그런 말 해서 죄송해요. 아버지께는 몇 번 언지를 드렸어야하는데.”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아니다. 네가 말 하지 않았어도 다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께 술을 따라드렸다. 두 손으로 공손히 따랐다.
“그래도 그 여자 말이다.”
“아, 누나요?”
“얼굴 한 번 못 본 것이 좀 그렇구나.”
“몇 번 보려고 했었잖아요. 그 때 마다 이상한 일이 터져서 서로 시간이 어긋난거지.”
“그거 말고는 별다른 문제 없다.”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언제나 너에게 관대했다. 너와 네 애인은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고, 결혼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네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할머니 뿐이었다. 너는 그 이상한 비밀에 내심 설레었다.
“뭔 일이었나, 컴퓨터 일이랬나?”
아버지가 물었다.
“네, 누나는 코딩해요. 프리랜서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름은 뭐랬더라?”
“뫼요.”
“매?”
“뫼. 뫼 산 할 때 뫼요.”
“여자애 이름이 그리 어려워서야…….”
잠시 말이 끊겼다. 찌개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잔을 부딪히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잔을 비울 때 언제나 아버지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홀짝홀짝 들이켜야했다.
“성은.”
“이 씨요. 이 뫼.”
“우리랑 같은 본이냐?”
“아니에요. 그쪽은 함평 이씨랬어요.”
“그럼 된거다.”
삼대 독자. 그것은 너를 괴롭힌 이름이었다. 이대 독자. 그건 네 아버지를 괴롭힌 이름일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족보와 본, 성씨와 이름에 민감하였다. 나이도 약간 문제가 되었지만 할머니의 억지 망상에 싫증을 낸 아버지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 아가씨랑 너는 몇 살 차이냐.”
“두 살이요.”
“한번 얼굴을 보면 좋겠다만.”
“이번에 무진 내려가면서 한번 봐요. 나랑 같이 내려갈건데, 그 때 짐 옮겨준단 명분으로 같은 차 타면 되죠?”
“이사 갈 때 시부모가 같이 가면 마음이 좋겠나.”
“시부모라뇨, 결혼할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가벼운 사이는 아니다. 너는 네 애인과 평생을 같이 살 각오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너도 그렇고 네 애인도 그렇고 결혼으로 서로를 옭아매는 것은 싫어했다. 뫼가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꺼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결혼이란 말이, 정확히 말하면 장가라는 말이 싫었다. 그리고 장가 들면 필연적으로 해야 할 육체 관계도 싫었다.
“그래.”
아버지가 술을 들이켰다. 잠시 틈을 두고 너는 아버지 잔에 술을 따라드렸다.
“사진도 없더냐.”
“제가 초상화 그려서 보여드렸잖아요.”
“그게 사진이랑 같은건 아니지 않니.”
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수 있을거에요. 무진에 놀러와요, 아버지.”
“네 할머니를 혼자 두고 어떻게 가느냐.”
할머니라는 글자가 떨어지자마자 너는 자동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냥 아쉽다는 것 뿐이지, 꼭 봐야하겠다는 이야긴 아니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행복하게 살거라.”

“그런게 어딨어, 누나! 오늘 같이 내려가기로 했잖아.”
너는 반쯤 울상이 되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오늘 밤에 내려갈 수 있을거야.
“오늘 밤이 문제야? 아, 진짜아! 이게 뭐야. 나 혼자서 운전하고 내려가라고?”
-진짜 미안해. 어제 밤부터 일이 터져서 나도 한 숨도 못 잤단 말이야. 오늘 너랑 같이 내려갈려구. 근데 지금까지 일이 안 풀려. 사실 이번 저녁에 내려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야.
“너무해. 그럼 오늘 내려오지 말고 내일 내려와. 한 숨도 못 잤다며, 피로는 풀고 내려와야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냐, 오늘 내려갈게.
“얼른 내려와. 기다릴거야.”
전화를 끊기 전에 너는 황급히 덧붙인다.
“무진 내려가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란 말 한 마디만 하면 화난 거 풀게.”
뫼는 계속 무진에 내려가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왠지 무진, 네 고향 무진으로 내려가면 네가 그리는 동화책 그림이 더 잘 그려질 것 같아서,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애원에 애원을 해서 간신히 따낸 허락이었다. 너는 무진의 안개에 대해 말했다. 따듯한 솜처럼 피어오르는 안개를 본 적 있느냐고. 온 세상을 희게 덮은 안개는 강과 산이 만나는 그 곳에서부터 올거라고. 살짝 상기된 채 안개에 대해 말하던 너를 뫼는 귀엽게 쳐다보았다. 안개에 대해 네가 열변을 토한 그 날, 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건 아니야, 강아. 나도 네가 말하던 안개를 보고싶은걸?
안개는 산과 강이 만나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아. 안개는 강만 낳을 수 있거든.
“뫼라는 여자애는 오늘 못 온다냐?”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가봐요. 한번 인사나 시켜주려고 했는데.”
“아쉽구나. 따로 내려가겠구나.”
“집에 한번 들리라고 할까요?”
“아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틀어지는 것을 보니 하늘이 우리 가족과 그 애가 만나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순리에 어긋나는 일 괜히 했다가 탈내지 말고 그냥 내려가라 하라.”
“미안해요.”
“아니다.”
아버지는 너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준다. 너는 살짝 웃는다.
“무진에서 짐 풀고 어느정도 정리되면 초대할게요. 우리가 산 집이 얼마나 멋진지 자랑할거라구요.”
아버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너는 안심한다. 떠나려니 뭔가 섭섭해서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한참을 우물거렸지만, 결국 할 말을 못 찾고 차에 탔다. 아버지는 백미러에서 손을 흔드는 작은 상으로 남았다. 너는 괜히 눈가를 슥슥 비볐다.

자동차는 몇 시간을 달려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부터 무진시입니다. 어릴 때 떠나온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무진이다. 너는 무진시에 들어간 후에 핸들을 꺾었다. 너와 뫼가 같이 살 집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너는 네 어머니를 뵙고싶었다. 취한 아버지께 은근히 물어 알아낸 길이었다. 무진시에 산이 하나 있고, 작은 물길이 하나 있다, 그 산줄기에서 떨어진 작은 야산이 있는데, 그 산 양지바른 곳에 네 어머니를 묻고 나왔구나, 참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쓸쓸해보였다. 그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꼭 할머니 입에만 올라가면 우리 가족을 붙잡고 괴롭히는 못된 악녀로 변모하였다. 너는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사처럼 아름다웠으리라. 네 대학교 졸업 작품은 네 어머니와 네 누이, 너와 네 아버지가 한데 모여 웃고있는 가족 그림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내 어머니가 지금쯤이면 이만한 나이가 되셨겠죠? 아버지는 그 때 정말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버지, 내 누이는 어머니를 닮았을까요? 첫 애는 아버지를 많이 닮는다던데,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너를 안았다. 아버지의 팔 힘이 그렇게 센지, 너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차는 무진 시내를 뚫고 저쪽 야산으로 가고있었다. 쇠락한 거리는 더러웠다. 건물은 80년대 이후로 보수나 증축을 하지 않은 양 시커멓게 바래있었고, 간판은 군데군데 귀가 나가있었다. 길은 사차선이었지만 양쪽에 불법주차한 차 때문에 이차선이나 다름없었다. 너는 천천히 운전하며 시내를 구경했다.
“뫼가 싫어하겠네.”
오후가 되었지만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안개 속에 어렴풋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마치 기형도의 시 한 편 같은 풍경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뫼는 싫어했다.
“한세상 기쁘게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늪 같은 시를 읽으라고?”
네가 옆에서 빈 집을 읽어준 뒤의 감상이었다. 너는 내심 풀이 죽었다. 뫼는 그것을 보고 방긋이 웃었다. 빨간불이라 너는 멈췄다. 두리번거렸다. 다 낡아빠진 산부인과 건물이 옆에 보였다. 너는 그 건물을 알아보았다. 너는 그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네 어머니도 그 산부인과에서 돌아가셨다. 네 누이도 그 건물에서 죽은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하나의 삶과 두 개의 죽음. 너는 옆 좌석을 보았다. 네 졸업 작품이 거기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액자에 고이 끼워 옷장에 숨겨두셨다. 가끔 그것을 꺼내보며 혼자 중얼거리시는 것을 너는 알고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말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몰래 네 짐에 그 액자를 끼워놓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와 누이에게도 보여주렴. 불이 바뀌어 출발하려할 때 너는 산부인과 건물 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았다. 흰 판에 붉은 글씨로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폐업. 하나의 삶과 세 개의 죽음. 너는 엑셀을 밟았다. 그래도 저 건물을 본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너와 어머니와 네 누이가 유일하게 맞닿은 그 곳.

집은 여러 번 오가며 인테리어나 가구를 미리 구비해놓은 덕에 짐만 풀어놓으면 되었다. 일부러 벽지와 소품들은 뫼가 좋아하게 밝은 것으로 샀다. 뫼는 이런 것에 젬병이었다. 미술을 하는 네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네가 보여주는 인테리어를 어머 어머 호들갑 떨며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파스텔 톤의 벽지. 너는 동화를 그리듯 그렇게 집을 꾸몄다. 네가 가장 먼저 푼 짐은 너의 가족 그림이었다. 그건 네 방에 가만히 걸어놓았다. 침대 머리 맡에. 그리고 거실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야심차게 준비한 그림을 꺼냈다. 너와 뫼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는 뫼에요. 산을 뜻하는 뫼. 성은 이씨고요.”
뫼랑 처음 만난 것은 졸업작품 전시회에서였다.
“가족인가봐요?”
선배님의 친구였다.
“아, 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가족 그림에는 할머니를 빼놓았다. 죽은 사람에게 언제까지 시집살이를 시킬 겁니까!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너는 할머니의 망상증에 일방적으로 화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그림을 스케치 했다. 교수님은 반대했지만, 네 사정을 듣고선 잘 해봐라, 한 마디만 던지셨다.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저는 강이입니다. 이 강이.”
선배가 옆에서 놀렸다.
“산과 강이라니, 이거 천생연분 아니야?”
너는 수채화로 그림을 그렸다. 연하게 연필 선이 남아있었고, 아주 엷은 색으로 너와 뫼를 색칠했다. 흰 안개에서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듯이, 부드러운 솜처럼 물감은 번져있었다. 예쁜 액자를 사서 거기 그 그림을 끼워 넣었다. 거실에 들어온 뫼가 저 그림을 보고 뭐라고 말할까? 너는 다른 짐을 치웠다. 커다란 타블렛과 펜은 컴퓨터 앞에 놓았고, 책장에는 수많은 그림책을 끼워넣었다. 권정생, 가브리엘 뱅상, 앤소니 브라운……. 그리고 컴퓨터 맡에 책을 한 권 놓았다. 기형도 시집, 잎 속의 검은 잎. 서랍에 화구를 차곡차곡 채워넣었다. 팔레트, 붓, 스케치북, 물통.
“엄마. 나 왔어…요.”
네 짐을 다 치우고, 액자를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누나도 안녕.”
가족들은 너무나도 행복하게 웃고있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아버지도 모시고 무진에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너 역시 행복하게 웃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뫼였다. 나 출발했어, 이제 몇 시간 뒤에 도착할거야. 데리러 갈까? 아냐, 있어. 내가 택시 타고 갈게. 아. 맥주 먹고싶다. 맥주 사갈까? 너는 씩 웃었다. 좋지, 내가 안주 만들어 놓을게. 우리 집에서 먹는 첫 끼 식사야. 문자는 거기서 끝났다. 거실에 상을 펼쳐놓고, 강과 산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는다. 무진에서, 너는 행복했다.
“이 강이. 거꾸로 해도 이 강이네요?”
뫼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너는 어색히 웃으며 뫼를 찬찬히 살폈다.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너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머니는 사진이 남아있어서 상상하기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상상하려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고만 네 누나의 모습.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았으면서 너 역시 닮은 그 모습. 머리 속에 맴돌 뿐 손 끝으로 나오지 않았던 그 모습. 누이의 모습.
“우리 누나의 태명은 산이었대요.”
처음 보는 여인 앞에서 네가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아아, 그래서 강이 씨 이름은 강이 되었군요?”
“네. 강 강자를 써서 강이에요. 이는 그냥 붙였대요.”
강은 한자고 이는 한글. 동화책 그림 작가 강. 새 집에 음식 재료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너는 바로 앞 구멍가게에서 산 다 시들어빠진 채소와 싸구려 비엔나 소시지를 갖고 훌륭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할머니는 네 모습을 보면서 늘 그 망상증을 지껄여댔다. 제 애미랑 누이가 저기 깃든거라 굿을 해야한다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어머니와 누이 탓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너는 뜨거운 후라이펜을 식탁에 대충 올려놓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양 손에 잔뜩 봉지를 든 뫼가 서있었다.
“누나!”
“늦어서 미안.”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할게 뭐야. 너는 뫼의 손에서 봉지를 옮겼다.
“그래도 용케 음식을 했네? 새 집에 음식이 있을 리 없어서 내가 사오긴 했는데.”
“그냥 간단하게 먹고 자려고 앞에서 대충 샀어.”
“하여간 널 보면 대단하다니까?”
“누나, 일단 얼른 거실에 가봐.”
“왜?”
“왜냐니, 어서 어서 거실 가봐.”
“하여간 누가 동화작가 아니랠까봐…….”
뫼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거실로 갔다. 너는 잠시 뒤에 터져나온 뫼의 웃음소리에 같이 크게 웃었다. 집 안의 불빛은 안개에 희부옇게 번져나갔다.

이 곳에 온지 한 달이 지났다. 너는 새벽에 일어나서 베란다에 몸을 기댄 채 안개가 천천히 거리를 메우는 것을 보았다. 그 시간이면 언제나 뫼는 잠을 자고 있었다. 나다니기 좋아하는 뫼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가서 시내 구경도 해보고 그래. 좀 낡고 쇠락하긴 했지만 좋은 곳이야.”
“나가기 싫어.”
뫼가 툴툴거렸다.
“한 발짝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곧장 둘이서 무슨 관계냐, 결혼한거냐, 애는 언제 낳을거냐 쓸데없이 물어보잖아.”
그럴 때 마다 너는 힘이 빠졌다. 안개는 천천히 거리를 흘러갔다. 희고 거대한 뱀이었다. 동화 글 작가에게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당연히 편집장이 부탁을 했지만. 그 글 작가는 고집이 있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서 흔쾌히 그 일을 받았다. 동생이 생긴 첫째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다섯 살 까지 자란 아이는 동생이 생겨버렸다. 엄마는 잔뜩 부풀어오른 배를 안고, 아빠는 그 배에 손을 대며 우리 아기 우리 아기 하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이 영 못마땅했다. 도대체 저 뱃 속에 뭐가 있기에, 엄마랑 아빠의 사랑을 다 가져가버린거야?
“나 동생 생긴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자랑했다.
“진짜? 동생이 어디 있는데?”
“울 엄마 뱃속에 있지!”
그 때 너는 엄마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었다.
“내 엄마는 어딨어? 나는 동생 안 생겨?”
너는 아버지에게 물었고, 그 때 할머니와 아버지는 새장가 문제로 싸웠다. 할머니는 아버지만 보면 늘 새장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새장가 이야기만 하면 늘 불과 같이 화를 내셨다. 그리고 그렇게 긴 세월동안 홀로 너를 키워냈다. 중학교 때 홀아비의 자식이라고 짓궂은 애들이 놀릴 때 속이 상했던 기억이 났다. 흰 안개는 그 모든걸 품고 흐르는 것일까.
“징그럽게도 짙다.”
뒤에서 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화들짝 놀라 뫼를 쳐다보았다.
“이, 이 시간에 일어났어?”
너는 말을 더듬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뫼는 잠옷만 걸친 채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담배 연기 같다.”
뫼는 담배를 싫어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아?”
너는 뫼를 설득하고 있었다.
“저걸 마시면 질식할 것 같아. 제 1차 세계대전 때 전장에 퍼져있는 독가스 같지 않아?”
“저건 커다란 이불이야.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는 어린 애들을 이렇게 덮어주는 이불.”
너는 뫼를 가볍게 안았다. 뫼는 네가 안은 것 만큼 가볍게 웃었다.
“너만 일어나 있는 줄 알았지?”
뫼가 잘 때는 뫼의 방문을 열어보지 않았다. 늘 컴퓨터를 두드리다 늦게 자는 것을 알기에 깨우고 싶지 않았다.
“신새벽에 잠을 깨. 안개가 퍼질 때 즈음이지. 내 방에 작은 창문으로 그게 보이더라.”
“좋지 않아? 몽환적이고.”
뫼는 네 포옹을 풀어냈다.
“아니, 징그러.”
너는 뫼를 보았다. 뫼도 너를 보았다.
“저게 얇은 한지가 되어서 내 얼굴에 붙어버리는 것 같아. 도무지 말하는거야, 도무지. 안개는 디버깅해야 할 에러 같기도 하고. 시야를 가리는 악성 코드인거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풀이 죽어 서있는 너를 뫼가 쓰다듬어주었다.
“그냥 개인 취향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 오늘 아침은 내가 할게.”
뫼는 부엌으로 가버렸다. 너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짙어지는 안개를 보았다. 켜켜히 쌓여가는 흰색 물방울들. 도대체 저 뱃 속에 뭐가 있기에 엄마 아빠의 사랑을 다 가져가는거야? 너는 그 장면까지 그림을 그렸다. 아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입을 비죽이 내밀고 있었다. 벽이 끝나는 지점은 책의 구석이었다. 그 구석에는 의자에 앉은, 배가 불룩한 엄마와 그 배에 귀를 대고있는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따듯하게, 주황색과 노란색을 섞어 배경을 칠했다. 아이가 등을 기댄 벽은 차갑고 우울한 푸른색으로 칠했다. 세상은 해가 뜨기 시작하는 쪽은 주황색과 노랑색이 섞인 따듯한 배경이었고, 해가 지는 쪽은 차갑고 우울한 푸른색 배경이었다. 어제 자기 전에 뫼가 컴퓨터 타자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목이 말라 잠이 깼을 때도 뫼는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타자를 두드리는 뫼에게 감히 갈 수 없어서 먼 발에서 조용히 응원을 한 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뫼는 잠을 얼마 자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한 달 동안.

“작가님, 요즘 그림체 많이 바뀌셨더라고요?”
글 작가가 너를 찾아왔다. 딱히 작가를 모실 데가 없어서 뫼가 없을 때 집으로 작가를 들였다. 뫼는 일부러 늦게 들어오마하고 말했다.
“뭐랄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라 조예가 깊진 않은데…….”
작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휘를 골랐다. 네가 세상을 색과 구도로 보듯, 작가는 세상을 글과 플롯으로 보았다.
“그……. 부유스름한 느낌이 감돌아요.”
“무진에 있어서 그런가봐요.”
너도 모르는 새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면요.”
황급히 설명을 덧붙이려했지만, 작가는 손을 저었다. 이미 그는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안개가 멋지더라고요.”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안개를 좋아해요.”
“물안개. 강 작가님이 아이를 낳으면 물안개라 이름을 지으실건가요?”
“아이라뇨, 생각 없어요.”
너는 수줍게 웃는다.
“그래도 혹시나 말이에요, 혹시나.”
작가는 자꾸 짓궂게 물어본다.
“물안개로는 안 지을거에요.”
뫼가 한 말을 너는 생각해낸다.
“안개는 강만 낳을 수 있는거잖아요.”
작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리고 곧 너털웃음으로 바뀌었다.
“이야, 역시 강 작가님! 아 맞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게요, 이번 그림 원고 때문에 그런데 말입니다. 이 부분…….”
작가가 원고를 꺼냈다. 너는 살짝 긴장한다.
“미안해요, 편집장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제대로 전해줄지 몰라서……”
작가는 네 긴장한 모습을 보고 살풋 웃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너는 말하려고 했다. 너와 작가는 모두 현관을 쳐다보았다. 문을 미친듯이 두드려대는 소리 때문이었다.
“강아!”
뫼의 목소리였다.
“강아, 살려줘!”
작가와 너는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너는 급하게 튀어나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누가 있는지 신경쓰지 않고 뫼는 네 품으로 뛰어들었다. 뫼는 심하게 울고 있었다. 너는 당황한 표정으로 울고있는 뫼를 내려보았다. 글 작가는 이 상황 안에서 불청객으로 점처럼 찍혀있었다.

뫼는 무슨 일이 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너는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내가 도와줄 것 아니야.”
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고, 난 너무 무서웠어. 뫼가 그렇게 말했다. 너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 말 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말 안 해도 괜찮아.”
하지만 그 답답함을 꾹 눌렀다.
“그래도 나중엔 꼭 말해줘야해. 누구한테 맞은거면 그 사람 신고해야지.”
네가 뫼의 터진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은 거 아냐.”
뫼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놀랬지.”
그 말을 해줘야 했다. 제일 먼저 그 말을 해줘야 했다. 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뫼가 말했다. 안 괜찮은거 다 알아. 네가 말했다. 괜찮대도. 안 괜찮잖아. 괜찮다면 괜찮은거야. 뫼는 날카롭게 말하면서 너를 밀쳤다. 그건 시작이었다. 뫼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안개가 창궐하는 새벽과 아침나절에는 시뻘건 눈을 하고 방 안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다. 안개가 차츰 사라지는 오후가 되서야 꿈뻑거리면서 졸다가, 컴퓨터 앞에서 엎어져 자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은 뫼가 보이질 않았다. 밤이 늦도록 뫼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뫼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있었다.
“자꾸만 왜 그래?”
너는 결국 말을 하고 말았다.
“왜 그러냐고. 불만이 있으면 말해.”
“불만 없어. 너도 있고, 집도 있고.”
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것을 열거했다.
“그러면 왜 그러는건데? 일이 안 풀려?”
“일도 돈은 많이 주는데 간단한 것들 뿐이야. 힘들지 않아.”
“그럼 뭐가 문제야?”
너는 소리질러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뫼는 한참을 망설였다.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
뫼는 울먹이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긴거라 되뇌이며 너는 뫼를 끌어안아주었다. 그러자 뫼가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너는 몹시 놀랐다. 그랬던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냐, 그건 싫어.”
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뫼는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생각해봤어.”
몇 일이 지난 뒤, 아침상을 마주하고 뫼가 말했다. 뫼의 눈 밑에는 시커멓게 기미가 껴있었다. 너는 수저를 놓고 뫼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뫼는 눈을 사뿐히 내리깔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개 때문이야.”
“죄 없는 안개 탓 하지 마.”
너는 살짝 화가 났다.
“넌 기형도 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것도 모르니?”
뫼도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안개’ 말하는거야? 아니, 그 시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안개는 포근한 솜이불이 아니야, 강아.”
뫼는 호소했다.
“안개는 장막이야, 너와 나 사이를 가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을 가려버리는 그런 장막이라고. 신이 설치한 매직미러야. 아니, 신도 모를걸? 안개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너는 뫼를 거의 노려보고있었다.
“안개가 햇빛을 가려버린 바람에 넌 우울증이 온거야.”
“강아.”
“뫼, 병원으로 가.”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네 방으로 갔다. 문을 닫자 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았다. 침대 머리맡에 가족 그림이 보였다. 좋은 평은 받지 못했다. 저 그림에는 설명이 필요했다. 주춤거리면서 사실 우리 어머니와 우리 누나는…… 하고 말하면 사람들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봐주었다. 하지만 네게 필요한 것은 안쓰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강은 밝은 표정으로 그림을 보았다. 네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환하게 웃으면서 분명 엄마랑 언니도 행복할거야, 하고 답했다. 너는 그 말에 위안을 얻었다. 저 그림에 그려진 행복감이 진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너의 집은 할머니의 망상증과 아버지의 반항으로 회색조였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간다면, 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이와 너는 과연 행복했을까? 너는 언제부턴가 그 답을 아니오, 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없다면, 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이와 너는 행복했을까? 하지만 그 답도 애매했다. 아버지가 관대하고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하며 개방적으로 나서는 것은 할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너는 알고있었다. 네 가족 그림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네 가족 사정을 들은 교수님이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하지만 너는 알고있었다. 저 그림은, 쓰레기다. 진실을 담지 않은 쓰레기다. 그런 그림을 저기 걸어놓은 너는, 쓰레기였다.

뫼는 병원에 다닐 준비를 했지만, 무진시에는 신경정신과가 없었다. 너와 뫼는 난감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옆에 있는 시에 병원이 있긴 하대. 대학병원에.”
뫼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데려다 줄까?”
“아냐. 혼자서 족히 다녀왔어.”
뫼는 너에게 말하지도 않고 병원에 다녀왔다.
“가벼운 우울감이 있지만, 우울증은 아니래. 약도 필요없고, 모든게 정상이래. 그래도 밖에 나가서 자주 돌아다니고…….”
“나한테 말하지 않고선 다녀왔다고?”
“그 쪽은 안개가 없었어.”
“누나… 뫼. 나한테 말하지 않고 다녀왔다는거야?”
“그 쪽에는 안개가 없었고, 나는 정말 날아갈 것 처럼 기분이 좋았어.”
“누나, 내 말에 대답을 해줘! 왜 나한테 말 안했어?”
“너는 안 믿잖아, 안개 탓이란 것을.”
“안개 탓이 아니니까!”
“아냐, 안개 탓이야.”
너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만 하자.”
네가 첫번째로 보인 체념이었다.
“그래. 나도 그만하고 싶어.”
뫼도 첫번째로 체념했다. 너는 방에 틀어박혀 글 작가가 보내준 피드백을 다시 읽었다. 다시 고쳐 보내주신 그림은 잘 받았어요, 강 작가님. 하지만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 부분은 정말 맑은 부분이어야했는데, 아직도 부유스름한 기운이 있어요. 아니……. 더 심해졌어요. 희부연 것이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 같다니까요? 이건 청명한 날처럼 쨍하고 맑아야해요. 다시 한번 부탁할게요, 강 작가님. 하지만 쨍하고 밝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쨍한 햇살을 본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너는 안개를 생각하고, 안개를 사랑했다. 하지만 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인가. 뫼는 안개 때문에 자신이 우울한 것이라며 이상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너는 안개를 사랑했다. 기형도 시집을 펴서 맨 앞에 있는 시, ‘안개’ 를 찢어내 휴지통에 버렸다.

강아, 살려줘, 강아, 네가 뿜어내는 그 안개 때문에 내가 숨을 쉴 수 없어, 코에도 입에도 폐에도 귀에도 눈에도 그 작은 물방울이 붙어서 숨을 쉴 수 없어, 나는 안개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어, 내 뱃속에는 안개가 가득 들어 차 있어, 강아, 너의 안개 때문에 내가 살 수 없어, 이 땅은 나를 죽이고 있어, 강아, 제발, 강아, 강아, 강아, 네가 뿜어내는 그 안개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어. 뫼는 뛰어가며 비명을 질렀다. 네 꿈 속에서 뫼는 비명을 지르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빠듯이 휩싸인 채 뫼는 소리를 치고 있었다. 너는 뫼를 쫓아가고 있었다. 네 상상 속의 누이를 닮은 뫼. 산은 산은 그 안에 많은 생명을 품고 기른다. 산은 산은 환한 햇빛을 먹으며 그 생명을 먹여 살린다. 산은 산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강아, 네가 뿜어내는 그 안개 때문에.
“누나. 우리 이사하자.”
네가 말했다.
뫼는 너를 빤히 올려보았다.
“안개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뫼는 말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사하지만 나는 여기 집을 따로 마련해서 작업실처럼 쓸게. 옆의 시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게, 무진의 외곽 쪽에 나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누나랑 내 집은 옆에 있는 시에 마련하자.”
“무진에서 완전히 떠나가는 것은 안되는구나.”
뫼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만은 봐줘. 여긴 내 엄마랑 누나가 묻힌 곳이야.”
“알아.”
“안개에…… 내 엄마랑 누나의 혼백이 묻어있을 것 같아.”
“그래.”
“우리 엄마랑, 태어나지 않았다던 누나의 숨결이 있는 땅이야.”
“응.”
“난 여기 있을게. 누나는 집을 알아봐줘.”
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딜?”
“어쩌면 영영 못 갈 수도 있는 곳.”
“왜 못가?”
“누나가 여길 싫어하니까.”
그 말에는 약간 가시가 박혀있었다.
“……다녀와.”
뫼도 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면 내가 왜 이 땅을 싫어하는지 알게 될거야.”
뫼가 네 뒤에 대고 말했다.
너는 답하지 않고 묵묵이 집을 나섰다. 차 안에 들어가서 잠시 생각을 했다. 시내로 가야 한다. 엄마와 누이의 무덤으로 가는 길. 그 길목에 있는, 산부인과. 그 낡고 흉흉한 산부인과는 여전히 서있었다. 분명 문에는 폐쇄라고 써있었지만, 경비실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빨며 평상에 앉았다. 슬슬 점심 때가 다가왔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다 핥아 먹을 때 즈음, 경비실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전화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화장실에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어느정도 시야에서 사라지자, 너는 은근슬쩍 산부인과로 갔다. 네가 태어난 곳.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 태어나본 적 없는 네 누이가 죽은 곳. 기대하지는 않았다. 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열렸다. 너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쉽게? 어린이 동화책 같은 모험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의외였다. 저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너는 얼른 문을 열고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갔다. 폐쇄라고 적은 흰색 간판이 살짝 흔들렸다. 건물 안은 어둡고 침침했다. 햇빛이 안 들어오게 시트지로 창문을 모두 가려서다. 너는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그냥 먼지만 가득한 시멘트 건물이었다. 산부인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네 발소리가 타박타박 울렸다. 낡은 문은 떨어져있었다. 부서지는 채로 보관이라도 하는 듯, 생각보다 더럽지는 않았다. 먼지가 점점이 날리기는 했지만 짓궂은 악동들이 쳐들어와 의기양양하게 했을 법한 낙서조차도 없었다. 천천히 들어갔다. 귀가 가볍게 울렸다. 낡은 포스터가 보였다. 정말 옛날 것이었다. 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안까지 울리는 모양이다. 진료실. 진료실은 그냥 평범한 산부인과였다. 낡아빠진 산부인과 의자가 있었다. 입원실. 몇 개의 침상이 있었다. 분만실. 너는 그 문을 열기 망설였다. 난산이었지, 너를 낳을 때 말이다, 스물 다섯 시간을 애를 쓰다가 간신히 낳았지만……. 아버지의 말은 거기서 끊겨있었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여기까지 와서 뭘 하는거지, 너는 어머니와 누이를 찾고 싶었다. 할머니의 새된 비명소리에 섞인 그 저주가 아닌, 따듯한 피를 흘리는 육신으로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고 싶었다. 아니면 아주 약간의, 아주 약간의 흔적이라도. 분만실 문을 열었다. 그 곳에 커다란 물고기가 썩고있었다. 순간 끼쳐오는 역한 암모니아 냄새에 너는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썩은 물고기가 날고 있었다. 썩은 물고기는 썩은 지느러미를 펄떡거리고 있었다. 너는 코를 막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 물고기를 보고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썩은 물고기는 없었다. 다만 저 구석에 회백색의 더미가 있었다. 회백색의 더미는 회백색의 아이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아직 탯줄이 떨어지지도 않은 작은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썩고있었다. 엄마? 너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앞을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두려워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요즘 뫼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봤겠지. 이제는 텅 비어버린 분만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잘못 보는게 맞겠지? 이제 너는 너를 믿기가 어렵다. 물고기가 너에게 온다. 너는 비명을 지르며 짐승처럼 옆 방으로 들어간다. 젊은 아버지와 젊은 할머니가 아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래도 사내새끼 낳고 갔으니 제 할 일은 다 한거다. 내 아내가 사내애 낳기 위해 시집온 사람입니까? 그럼 차라리 씨앗 받이 할 짐승을 돈 주고 사들이지, 왜 결혼을 시킨겁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를 이어야 할 것 아니냐. 대, 대, 대, 그놈의 대! 아버지가 너를 스쳐지나갔다. 할머니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너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할머니가 뒤에서 너를 어르고 있다. 귀여운 우리 손주, 귀여운 우리 손주. 하지만 네 아버지는 온데 없다. 다만 먼 곳에서 안개처럼 내 아내를 살려내,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다시 네가 나온 곳으로 들어갔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좀 작은 물고기가 너를 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자 곧 그 물고기는 사라졌다. 너는 그 산부인과를 뛰쳐나와야했다. 이건 이상한 곳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곳이었다. 낡아빠진 포스터들이 너를 보며 비웃었다. 첫 애가 기집이라니, 이건 안되는 일이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너는 걸음을 멈췄다. 첫 애는 아들이어야 한다. 첫 애는 아들이어야 해! 여인은 울고있었다. 엄마! 너는 그 쪽으로 뛰어갔다. 할머니를 밀쳤다. 우리 엄마를 그냥 둬요, 우리 엄마를 죽어서도 시집살이 시키지 말란 말이에요! 네가 소리쳤다. 할머니도 네 엄마도 없었다. 대신에 그 자리에 뫼가 있었다.
“내 누나의 태명은 산이었대.”
네가 말했다.
“나도 알아.”
너는 뫼에게 다가간다. 뫼는 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다. 더 이상 벽이 있어 못 물러설 때 까지 물러선다.
“왜 누나만 이렇게 흐리게 그린거야?”
뫼가 물었다.
“나는 누나를 본 적이 없어. 누나는 태어난 적이 없었거든.”
“엄마는?”
“사진으로만.”
네가 말한다.
“누나가 있다면, 뫼…… 꼭 뫼 같을거야.”
“네 누이는 언제 죽었니?”
“가지 마, 뫼.”
“네 누이는 언제 죽었니?”
“나와 두 살 차이가 나, 그러니까 가지 마.”
“나는 이 땅이 싫어.”
“나도 이제 싫어.”
“아니. 무진이 싫다는게 아니야.”
뫼가 말한다.
“나는 땅이 싫어.”
물고기는 허공을 헤엄치고 산은 안개에 휩싸이고 강이 뿜은 안개에 휩싸이고 할머니는 어머니를 윽박지르고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로 윽박지르고 윽박지르고 너는 뫼에게 달려가고 너는 사지가 찢어지는 뫼에게 달려가고 뫼를 안고 웅크리고 마치 어머니의 몸 속에 있듯 그렇게 웅크리고 뫼는 찢어진 사지로 너를 안고 마치 누이가 동생을 안듯 그렇게 웅크리고 둘은 어머니의 뱃 속 안에 있듯 뱃 속 안에 있듯 그렇게 그렇게 서로 다정하게 웅크리고 웅크리고 가지 마, 가지 마, 뫼, 더 나은 곳이 될거야, 나는 결혼이 싫어, 아이를 만드는 것도 싫어, 아이를 낳는 것도 싫어, 가지 마, 누나, 더 나은 곳이 될거야,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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