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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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출 지시를 받은 당일, 밤 늦은 시간. 개인 연구실에서 문서작업을 마무리 하던 나는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22시 30분에 회의가 있습니다. 미리 채팅방을 개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임 연구원의 메시지였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C사에서 만든 검은색 손목 시계는 22시 20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숨을 흘렸다.

"잔업으로도 모자라서 회의까지 하자는 거냐. 대충 마무리하고 자야지."

풀그림님이 채널에 참여하였습니다.

채팅 서버가 열렸다. 페이지 우측에는 현재 입장 해 있는 인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22시 25분, 현재 인원은 나 하나 뿐이었다. 다른 인원을 기다리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곤 작은 에너지 드링크 하나를 꺼냈다. 에너지 드링크에는 소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내 작업 속도에도 날개 좀 달아주지."

누구 들으라고 하는지, 그렇게 투덜대고는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켰다. 약간의 탄산이 목을 자극했다. 잠을 깨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빈 캔은 깔끔하지 못하게 찌그러지고,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서버에 입장했다. 서버의 입장을 알려주는 문구가 뜨고… 내 눈을 의심했다.

Poolgrim님이 채널에 참여하였습니다.
<Poolgrim> 안녕하세요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때 나는 분명 서버 내에서 한글로 쓴 '풀그림'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보통은 한글로 쓴 이름을 사용했고, Poolgrim이라는 이름은 불가피하게 재접속을 해야 하는데 채팅방에 접속 ip가 남아 있을 때, 혹은 휴대기기로 서버에 자동 접속 할 때에나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켜 보았다. 휴대전화에 다운로드 되어 있는 채팅 서버 접속 어플은 켜져 있지 않았다.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공통되는 답은 하나였다. 지금 접속한 사람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응, 시도는 좋았어."

채팅을 시도했다.

<풀그림> 당신 누구십니까?
<Poolgrim> ?????

답변은 빠르게 왔다. 그러나 고작 물음표 다섯 개 였다. 만족할 만한 답변은 아니었다.

<풀그림> 당신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Poolgrim>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너님은 누군데 내 닉네임을 함부로 쓰고 있는 건가요?
<풀그림> 비허가 인원이 접속 시, 즉시 추적에 들어갑니다. 보안 요원이 출동하기 전에 종료할 것을 권합니다.
<Poolgrim>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뭐가 우스운 거죠?
<Poolgrim> 픽션이랑 현실 구분 못 하는 분이 여기 또 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olgrim> 그 보안 요원인가 뭔가 불러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뭐라고요?
<Poolgrim> 불러 보라니까? ip 대조 해서 누가 차단 먹나 보자고.

기분이 엿같았다. 상대는 오히려 기세등등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흥분 해 봐야 이득 볼 건 없었다. 차분하게 네트워크 보안과에 연락을 걸었다. 보안 담당관은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겠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풀그림> 보안 담당관에게 연락 했습니다.
<Poolgrim> ㅋㅋㅋ?
<풀그림> 저는 경고 했고, 경고를 무시한 모든 책임은 당신이 짊어지게 될 겁니다.
<Poolgrim> 아, 시발 손발 날아가는 것 같아서 더는 못 보겠네.
<Poolgrim> 그 엿같은 설정놀음 좀 그만 하죠?
<Poolgrim> 픽션하고 현실 구분 좀 하라고요.
<풀그림>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당신보단 낫겠죠.
<Poolgrim> 와나 진짜 돌겠네.
<Poolgrim> 간만에 재단 분들하고 채팅이나 할까 해서 왔는데, 정신나간 놈이 개소릴 늘어놓네.

…뭐?

<풀그림> 재단? 설마 재단 직원 분들과 연락을 했던 겁니까? 대체 어떻게?
<Poolgrim> 여기 챗방 밖에 더 있냐?
<Poolgrim> 카페 챗방도 있긴 한데 거긴 내 알바 아니고.

그 즈음, 보안 담당관에게서 연락이 도착했다. 보안 담당관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현재 채팅 서버에 접속한 인원은 나 혼자라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

<풀그림> 지금 서버에 접속 해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Poolgrim> 풀그림이라고
<Poolgrim> 그러는 넌 누군데?
<풀그림> 저 역시 풀그림 입니다. 가명 '풀그림'으로 활동하는 재단 직원이란 말입니다. 본명은 박██ 입니다.
<Poolgrim> ?????
<Poolgrim> 너 누구냐?
<Poolgrim> 넌 뭔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Poolgrim> 너 내가 아는 사람이지? 누구야? 어떤 놈이 장난 치는 건데?
<풀그림> 잠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Poolgrim> 뭘?
<풀그림> 당신 생년월일이?
<Poolgrim> 그걸 왜 말해 줘야 되는데?
<풀그림> 닥치고 생년월일이나 말 해
<Poolgrim> 아나
<Poolgrim> 19██년 10월 23일. 됐냐?
<Poolgrim> 신상 털리면 이 쪽에서 바로 신고 할 거니까 허튼 짓 하지 마라.
<Poolgrim> 여보세요?
<Poolgrim> 왜 대답이 없어?
<풀그림> 제 생년월일도 같습니다.
<Poolgrim> 어?
<풀그림> 아무튼, 가족 구성원은?
<Poolgrim> 이번엔 내 쪽에서 물어볼 차례 아냐?
<풀그림> 좋습니다. 양친에 2남 중 장남입니다.
<Poolgrim> 너 진짜 누구야?
<풀그림> 그쪽도 마찬가지 입니까?
<Poolgrim> ㅇㅇ
<Poolgrim> 일단 여기까지는 내 친구나 다른 지인 몇 분도 알고 있거든? 가족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고. 다른 걸 물어볼게.
<풀그림> 좋습니다.
<Poolgrim> 초등학생 때, 친구의 어머니가 저녁 즈음에 전화한 적 있었어. 자기 아들 필통이 없어졌다고. 난 아니라고 했고, 아주머니는 끝내 내가 훔쳐간 증거가 있다고 했지.
<풀그림> 자기 아들을 라이벌로 보고 있어서 훔쳐간 거 아니었냐고… 했었습니다.
<Poolgrim>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아니 그런데, 이건 사실입니다.
<풀그림> 솔직히 믿기 힘드신 건 알지만…
<Poolgrim> 아니, 나도 알아.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똑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그와 몇 가지 사항을 더 확인했다. 대부분의 신상 정보는 전부 동일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를 보인 점이 있었다.

<풀그림> 그 사고를 모른다는 겁니까?

그는 '그 사고'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 곳에서 나온 계기 이자, 이 곳에 있게 된 계기. 그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Poolgrim> 그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난 모른다니까?
<Poolgrim> 애초에 난 그런 기억이 없어. 게다가 그렇게 큰 사고 였다면 인터넷에 기록이라도 남았을텐데, 그런 것도 없는데?
<풀그림> '██주식회사 폭발 사고' 라고 검색하시면 대충 나오지 않습니까?
<Poolgrim> 그런 회사도 없는데.
<풀그림> 설마 N 사이트에만 치신 건…
<Poolgrim> 구글링했어.
<풀그림> 넵.
<풀그림> 아무튼 전 그때 사고로 얼굴이 심각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인공 피부를 덮고 다니는 걸로 숨기곤 있지만. 전에 다니던 곳에서도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Poolgrim> ?????
<풀그림> 또 물음표만 다섯 개 입니까?
<Poolgrim> 그건 내 자캐 설정인데?
<풀그림>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Poolgrim> 아니 그러니까, 내가 활동하는 창작 사이트 자캐 설정이라고.

자판에서 손을 떼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풀그림> 제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잠시 정리 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Poolgrim> 어, 어 그래.

컴퓨터 모니터가 잠시 꺼졌다. 꺼진 화면에는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일에 능통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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