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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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가 되었다.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다. 새로운 기지로 전입한 것도 1년이 다 되어갔다. 이제는 새 기지가 전에 있던 곳 보다 훨씬 편할 정도로 적응되었다. 정말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대답은 또 달라지겠지만.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는 일정 수준에서 진도를 멈추었다. 다만 크게 문제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원래 기간 제한 없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3~4년은 족히 걸려야 해결 될 문제가 1년만에 풀렸으니 오히려 단축된 셈이다. 상부도 그걸 알고 있었고, 예전만큼 우리 팀을 졸라대진 않았다. '회사'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되돌아온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빅터 박사는 이런 것 까지 설계하고 있었던 걸까? 어떻게 본다면 지독하게 무서운 사람이다. 물론 내 기억이 돌아온 것은 프로젝트 진행에 아주 약간 기여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팀이 밤낮 가리지 않고 신나게 구른 게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재단 업무는 업무대로 보면서 프로젝트까지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아무튼 1년 동안 고생한 덕분에 우리 팀 모두가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일주일이 조금 넘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어느 때보다 알차게 보낼 자신이 있었다. 평행우주의 나와는 재단 전용 단말기로 대화하는지라 휴가 중에는 대화 할 수가 없었다. 기지 밖으로 단말기를 들고 나가면 보안 위반으로 그대로 즉결처분 될 게 뻔하지. 물론 조기복귀해서 녀석과 신나게 떠들면 된다. 하지만, 글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휴가 전 날부터 굉장히 설렜다. 사실 설레기보다는 긴장이었다. 어딘가의 손 모 요원처럼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다행히도 안전하게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휴가 당일에 갑자기 비상 상황이 터진다던가, 변칙개체가 탈주 했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기지에서 나온 지 3시간이 넘었는데도 별 일이 없었으니 휴가 끝날 때 까지는 별 일 없을 것이다. 희망사항에 가깝지만.
휴가가 결정됐을 때, 처음엔 집에서나 푹 쉴 생각이었다. 가족들하고도 오랜만에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다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간만에 지역사령부 본부를 찾아가고 싶었다. 출장이나 기타 업무로 다른 기지나 지방에 간 적이 있었어도 정작 본부에 갈 일은 없었다. 오죽 했으면 빅터 박사가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물증이 없으니 어찌 할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휴가 둘째 날에 본부에 찾아왔다. 확실히 공기부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지 내부는 퀴퀴한 냄새로, 회부는 풀냄새와 흙냄새로 범벅인 빅터 박사의 기지와는 사뭇 달랐다. 기지관리관이 달라서 그럴까. 알 길이 없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개인 연구실이었다. 문을 열고 연구실의 불을 켰다. 아늑한 개인 연구실이 주인을 반겨주었다.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모든 게 작년과 그대로였다. 서재에 꽂혀있는 책과 논문, 손에 닿을 위치에 놓여있는 필기구며 사무용품. 치우기 귀찮아서 내버려둔 초코바 봉지까지 그대로 있는 건 좀 너무했지만. 책상 위를 쓱 훑어보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집에 온 것 보다 더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어,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후임 연구원이었던 제레미가 있었다. 멍한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고개를 돌아보자마자 그의 표정이 천천히 환해졌다.

"박사님! 이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출장 나오셨어요? 아니면 복귀?"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묵히고 묵혀서 군내가 날 정도로 많은 질문이었다. 질문에 일일이 답하다가는 밤을 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못 본 새 얼굴 많이 좋아졌다? 나 없으니까 아주 살겠지?"

"에이,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이 놈 자식.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의 연구용 가운에 달려있는 신분증에는 '선임 연구원'이라는 직책이 표시되어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제레미의 직책은 연구 보조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선임 연구원이라니. 1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본부에 왔으니 관리관님을 찾아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울렸다. 문을 벌컥 열었다. 노래마인님이 보였다.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날 보시자마자 놀라시는 그 표정이란. 아니면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보고 놀라신 걸까. 보물 다루듯이 케이크 상자부터 받으시는 걸 보면 후자가 맞는 것 같다. 1년만에 왔어도 내 입지는 여전히 케이크에 밀리는구나. 괜히 가져왔다. 맥주나 사올걸. 아니, 그랬다간 또 술이냐며 혼날 것 같다.

"앉아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한 박사가 너무 막 대하지는 않고요?"

관리관님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주며 물었다. '한' 박사라니. 빅터 박사가 듣는다면 분명 벌레 한 트럭을 씹은 표정이 나오리라.

"지낼만해요. 크게 힘든 것도 없고. 물론 여기보다야 힘들지만. 면식이 있으니까 잘 해주더라고요."

사실 빅터 박사에 대해 죄다 일러바칠까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러진 않았다. 애써 웃었다.

"함든가보네요."

들켰다.

"참, 개인 연구실 가 봤어요. 먼지 하나 없던데요?"

"언제 올지 모르잖아요. 제가 치운 건 아니지만. 다들 많이 보고 싶어 해요. 안부인사는 다 했나요?"

"천천히 해야죠. 아직 시간도 좀 남았고. 다른 분들은 다들 잘 지내시나요? 데반님은요? 마크님, 물꼬기님, 자인님. 참, 샐님은 다른 기지로 가셨다고 들었어요. 로드 박사님도. 그 외 다른 분들은요? 브륄러 박사님도 잘 지내나요? 너무 많은데 기억이 다 안 나네요."

"대부분은 잘 지내시죠. 여전히 바쁘게요."

대부분? 아닌 사람도 있는 걸까?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어딘지 마음에 걸렸다.

"아닌 분들도 있어요?"

"재단이잖아요. 잊었어요? 무슨 일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관리관님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였다. 파고들수록 불안해졌다.

"제가 만나 뵙지 못 할 분들도 계신가요?"

"여기 인사 돌리러 온 거 아니었나요? 그럼 시간이 모자랄 텐데."

"저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리과님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관리관님은 한숨을 픽 내쉬며 서랍을 열었다. 관리관님이 꺼낸 것은 서류 한 뭉치였다. 얼핏 봐도 그 양이 상당했다.

"1년 사이에 더 이상 재단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직원 명단이에요. SCP-222로 복제된 직원은 예외에요."

서류뭉치를 받아드는 그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졌을까. 서류뭉치를 손에 들고 넘겨보았다. 누군가는 퇴역 도장이, 누군가는 사망 도장이, 또 누군가는 실종 도장이 찍혀있었다. 대부분은 친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직원이었지만 다들 한 번쯤 본 적은 있었다. 물론 그보다 친했던 이들도 있었다.

"에이먼드, 현기, 버젯, 미라이씨 까지."

서류를 넘길수록 우울해졌다.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비웠다. 더 이상은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장만 더 넘기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고 한 장을 넘겼다. 해당 직원의 프로필을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등 위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해당 직원의 프로필에는 L. H. Sein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 이게……"

"사실이에요. 이젠 재단 인원이 아니에요."

관리관님은 여전히 표정변화가 없었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담담하게 말씀하시고는 있지만 목이 탈 것이다. 자인 사서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분이 아닌가.

"변칙 능력이 사라졌어요."

관리관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억 소거제도 잘 듣고요. O5측도 더 이상은 자인 사서가 재단에 머무는 걸 원치 않았어요. 하긴,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 높으신 분들 눈에는 그렇게 거슬렸나보죠. 그래서 기억 소거하고 돌려보냈어요. 그게 전부에요. 정기 사살 전에 은퇴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죠."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1년이라는 시간은 분명 긴 시간이다. 동시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책까지 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괜찮아요?"

괜찮을리가.

"좀 충격이네요. 1년 사이 너무 많은 게 변했어요. 머리에 다 안 들어와요."

서류뭉치를 관리관님께 건넸다. 더 이상 봤다가는 토할 것 같았다.

"난 그대로인 것 같은데, 왜 나만 빼고 모든 게 변하는 거죠? 나는 1년째 그대로인데. 난 그냥 다른 기지에 잠깐 갔다 온 거잖아요. 솔직히 긴 시간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게 변한 거죠? 누군가는 진급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지로 전출을 가고."

관리관님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누군가는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 혼자만 뒤늦게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는 것. 문제는 그거였다.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떨어져 지내면 그런 문제점과 마주했다. 이래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전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구나. 언젠가 돌아오게 되면 너무도 많은 게 바뀌어 있을 테고, 나 이외에 다른 이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 이질감이 들 테니까. 혼자서, 혹은 소수의 인원들이 모여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풀그림 박사님."

관리관님은 어느새 다른 서류 뭉치를 들고 계셨다.

"관리관 자리에 앉아있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생겨요. 관리관은 그 누구보다 기지 내 인원을 잘 알아야하죠. 그만큼 힘들어요. 지금은 힘들 수 있어요. 하지만 곧 괜찮아질 겁니다. 봐요."

관리관님이 서류 뭉치를 건네주셨다. 직원 인사파일이었다. 모두 처음 보는 인원이었다.

"신규 직원이에요. 모두 유능한 인재들이죠. 누군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상처가 되는 거죠. 하지만 그 상처는 천천히 메워져요. 또 다른 누군가와 친해지면서요. 물론 흉터는 조금 남겠지만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에요. 봐요. 벌써 누군가가 상처를 메워주기 위해서 들어왔잖아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들과 친해질 수 있을지. 게다가 다른 이들과 점점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 고민거리가 하나 더 남았죠? 다시 돌아왔을 때 이 기지의 직원들은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것들, 이 기지의 분위기를 다시 따라잡을 수 있을지의 여부, 그런 게 걱정인거죠?"

역시. 관리관은 관리관이다. 사람을 꿰뚫어본다.

"전출 갔다가 돌아온 이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곤 해요.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시 친해지기 힘들다, 등.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실제로 절반 정도는 다시 전출 가곤 하니까요. 이건 시간의 문제에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 될 문제라는 거죠. 그러고 보면, 새로 전출 간 기지는 잘 적응했잖아요?"

"그랬었죠. 농담 좀 보태서 이젠 거기가 더 편하기도 하고."

"맞죠? 완전히 새로운 곳도 적응을 하는데, 한 번 적응했던 곳에 다시 적응 못 할 이유라도 있나요? 당신이 이 기지에 없단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요? 천천히 알아 가면되죠. 이 기지엔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많이 있어요. 그들이 도움을 줄 겁니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이곳에 적응 할 수 있게."

관리관님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채워주셨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신규 직원의 마음가짐으로."

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쓰고 떫었다. 물론 잠깐이었다. 이내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이런, 설탕을 넣는다는 걸 또 깜빡했네. 그거 원액수준이라 엄청 쓰고 떫을 텐데요."

향이 아니라 그냥 쓴맛이었다.


사무실에서 나왔다. 목적지 없이 기지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 기지는 여전히 바빴다. 내가 전출가기 전 과 다를 바 없었다. 관리관님이 옳았다. 여긴 한 번 적응했던 곳이고, 다시 적응 못 할 이유는 없다. 물론 처음엔 조금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다시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렴 어떠랴. 시간이 약인데. 부딪혀 봐야지.
멀찌감치 제레미가 보였다. 그의 뒤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그를 따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저들이 그 신규 직원들인 것 같다. 기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바쁜 모습이 영락없는 신입의 모습이었다. 나도 처음엔 저런 얼빠진 표정으로 기지를 구경하고 있었을까.

"이번에 왔다던 신규 직원들?"

내 질문에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르는 무리만 해도 대략 이삼십 명은 되어보였다.

"신규 직원들 오리엔테이션 하러 가는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아니 됐어. 이미 한 번 들은 거 뭐하러 또……"

"아니다, 말 나온 김에 박사님이 한 번 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오리엔테이션."

놀라서 날 말하는 거냐며 되물었다.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전출 가서 정식으로 돌아온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신입 분들, 이쪽으로."

결국 단상에 서야했다. 뒤에서는 제레미가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저 녀석 머리나 한 대 더 쥐어 박고 가야 할 것 같다. 문득 신규 직원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 누구지, 뜬금없니 나와선 왜 우리 앞에 서 있는 거지, 박사라고 한 걸 봐서는 높으신 분 같아, 아냐, 여긴 죄다 박사라고 부른대 등. 마음에도 없는 오리엔테이션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뒤에서 제레미가 손을 흔들었다. 웃지 마, 인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두 대는 쥐어박아야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할 말은 다 하련다. 철면피까지는 아니어도 얼굴에 두꺼운 살가죽도 덮었겠다, 여차하면 가면 벗어버리고 시각 테러나 하지 뭐. 마이크 테스트 원, 투.

"반갑습니다, 여러분. 오리엔테이션 시작합니다."

까짓 거 뭐 있나. 부딪혀 보는 거지.


"그렇게 삼사십 분은 떠들었을 걸요?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진짜, 마지막에 가면을 확 벗어버리는 건데."

침묵 요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로 재밌어서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웃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침묵 요원이 전용 단말기를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수화를 모르는 사람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 기지는 언제 다시 가는 거죠?'

"글쎄요. 휴가 나가면 가든가, 아니면 이번 프로젝트 완료되면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죠."

'두번째는 좀 아쉬운데.'

"자주 놀러 올 게요. 이 참에 차 한 대 지원받아서 왔다 갔다 하죠 뭐. 거리상으로도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면허부터 따요.'

정곡을 찔렀다. 침묵 요원의 말은 언제나 짧고 굵었다. 그 때, 내 개인 단말기가 울렸다. 채팅 서버에서 누군가 날 호출한 모양이었다.

"잠시 만요."

역시. 녀석이 돌아왔다.

<Armygrim> ㅎㅇㅇ
<Armygrim> 복귀하기 전에 인사나 하려고 왔음
<풀그림> 아하
<풀그림> 언제 가는데?
<Armygrim> 5
<풀그림> 5일 남았어?
<풀그림> 아직도 많이 남았네
<Armygrim> 4
<Armygrim> 3
<풀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mygrim> 2
<Armygrim> 1
<Armygrim> ㅂㅂ
<풀그림> 언제 오는 지 얘기는 해 주고 가 인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mygrim> 5월은 좀 바쁘겠고 6월이나 7월?
<풀그림> ㅇㅋㅇㅋ 그 때 보자.
<Armygrim> ㅂㅂ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침묵 요원이 내 휴대용 단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죄송해요. 가끔 연락 닿는다던 그 친구에요."

침묵 요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뭔가 이상한 행동이라도 한 걸까? 채팅하면서 낄낄댄 게 그렇게도 이상한 행동이었나? 물론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사람이랑 채팅하면 기분 나쁜 건 맞겠지만. 침묵 요원은 자신의 단말기 자판을 두드렸다. 그리곤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누구랑 대화 했다고요?'

"가끔 연락 닿는다던 친구요. 설마 제가 뭐 다른 여직원들이랑 대화하고 그럴까 봐요? 보여 드릴게요."

채팅 서버 화면을 침묵 요원에게 보여주었다.

"이 친구가 엄청 재밌는 친구에요. 작년에 친해졌는데……"

침묵 요원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한참동안이나 내 단말기 화면만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자신의 단말기를 톡톡 두드렸다.

'제가 말은 못 해도 눈 하나는 엄청 좋거든요?'

"어, 네. 아고 있죠."

'지금 챗방에 캡이 남긴 로그만 있어요.'

그럴 리가. 침묵 요원이 장난치는 것 일 것이다. 내 단말기 화면을 다시 보았다. 대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쯤 되면 침묵 요원도 '짜잔, 장난이었어요' 라는 반응을 보여야한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여전히 진지했다.

'챗방 화면 캡처해서 다시 보세요.'

그녀 말대로 채팅방 화면을 캡처했다. 캡처된 사진첩에서 내가 접속했던 채팅방 화면 사진을 찾아냈다.

<풀그림> 아하
<풀그림> 언제 가는데?
<풀그림> 5일 남았어?
<풀그림> 아직도 많이 남았네
<풀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언제 오는 지 얘기는 해 주고 가 인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ㅇㅋㅇㅋ 그 때 보자.

정말로 나 혼자 떠들고 있었다. 분명 채팅방에는 녀석의 로그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채팅방을 캡처한 사진에는 내 로그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말 실례인 거 알지만요.'

침묵 요원은 문장을 지우고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과로인 것 같아요. 상담이라도 받아보세요.'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한 순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게 이런 기분일까. 게다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취급을 받으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에이, 장난이었는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셨네요. 안 보이신다고 말씀 하시면 이건 착한 사람한테만 보인다고 말 하려고 했는데. 아, 진짜. 빅터 박사님한테 이상한 개그만 배워가지고. 하하."

거짓말은 이성보다 빨랐다. 침묵 요원이 믿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신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상한 장난은 그만둬요. 다른 분들 의심하는 건 별로 안 좋아 하니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선을 넘었네요."

'이만 들어가요. 저도 근무교대 해 주러 가야해요.'

침묵 요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단말기를 두드렸다. 내 단말기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상담은 꼭 받아요.'

알겠다고 대답했다. 상담은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녀석과 대화를 해 볼 것이다. 7월. 어쩌면 녀석이 누군지 확연하게 알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내가 이상한 게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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