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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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불참했다. 후임 연구원에게는 적당히 변명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어떤 변명을 늘어 놓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마주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기지 내에 나와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이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본사에 넣어본 연락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을 겪은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나마도 부재중이라 조언을 구하기는 힘들었다. 규모가 큰 본사에서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내게 들이 닥쳤다.

전출에 이해 못 할 사건에. 이제 뭐가 남았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 시간 정도 헤매다 결국엔 다시 돌아와야했다. 혹시나 싶어 가져온 논문들을 손에 쥔 채. 정리 할 시간 달라고 말 한지 한 시간이 지났다. 저쪽 세계의 '나'는 아직 채팅 서버에 있었다.

<풀그림> 돌아왔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10초, 1분, 5분, 20분. 이윽고 40분이 넘어갈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허탈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럼 그렇지. 채팅으로 평행우주와 대화하는 일 따위는…

<Poolgrim> 어 왔냐

씨발.

얼굴을 감싸고 긴 한숨을 토했다.

<Poolgrim> 불러놓고 왜 대답이 없어?
<풀그림> 창조주를 욕하고 있었어.
<Poolgrim> …
<풀그림> 그런데 뭐하다가 이제야 답 하는거야?
<풀그림> 한 시간이 넘어서 답을 하네.
<Poolgrim> 사실 게임하다 옴

아, 젠장. 누군 이 엿같은 상황을 해명하겠다고 한 시간 넘게 뛰어다녔는데 저 놈은 실실 쪼개며 게임이나 하고 있다니. 화상 통화만 가능하다면 맨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Poolgrim> 근데 왜 갑자기 반말이야?
<풀그림> 아니, 반말은 그쪽에서 먼저 했잖아. 너도 안 하는데 내가 해야 돼?
<Poolgrim> 음
<Poolgrim> 인정

이 대화 계속 해야 돼?

<풀그림> 아무튼 지금 이 현상이 뭔지 대충 알아봤어.
<풀그림> 내가 속한 우주를 기점으로 해서 평행 선 상에 있는 또다른 세계, 즉 평행우주가 존재해.
<Poolgrim> 그래서?
<풀그림> 각각의 평행우주는 펑샤오 법칙이 적용돼서 상호 간섭이 불가능 해. 당연히 관측은 커녕 통신도 안 되지. 하지만 톨먼 상수를 만족시키는 등 정해진 변수가 발생하면 그 즉시 레이모 현상이 일어나서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평행우주가 서로 간에 간섭이 가능해져. 일반적으로는 아라키-윤 효과 때문에 통신이 불가능하지만, 제 2 카루노브 가설을 적용하면 제한적이지만 가능은 한 것 같아.
<풀그림> 극악의 확률이긴 해도 안 될 건 없다는 거지.
<Poolgrim> 오…
<풀그림> 이해 했어?
<Poolgrim> 이게 말이야 방구야

맙소사

<Poolgrim> 그러니까
<Poolgrim> 그 칭다오 법칙인지 뭔지
<풀그림> 펑샤오 법칙인데.
<Poolgrim> 맥주이름 같은데…
<Poolgrim> 아쿠튼. 그 뭐시기 이론으로 우리가 통신이 가능하게 됐다, 그거 아냐?
<풀그림> ㅇㅇ
<Poolgrim> 그럼 일단 넌 내 자캐가 맞는건가?
<풀그림>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가?
<Poolgrim> 아니 그러니까 맞는지 아닌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Poolgrim> 그래야 니가 말한 그 이론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응용해서 원인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냐?
<풀그림> 그건 그러네
<풀그림> 그런데 난 네가 세운 자캐의 설정이 뭔지도 잘 몰라.
<Poolgrim> 아까 얘기 했잖아
<풀그림> 그거 가지고 어떻게 판단해? 적어도 몇 가지는 더 일치해야지.
<Poolgrim> 흠
<Poolgrim> 요약을 원해? 아니면 전부 다?
<풀그림> 가능하면 전부가 좋지만 요약도 좋지.
<Poolgrim> ㅇㅋ 간단하게 간다. 잘 봐 둬.
<Poolgrim> 20대 한국인 남성. 재단 입사 전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가 사고로 얼굴 작살남.
<풀그림> 작살났다는 건 너무하잖아…
<Poolgrim> 중간에 끊지 좀 말아줄래
<풀그림> 아… 네…
<Poolgrim> (이어서)재단에 스카웃 되고 승진 보상으로 얼굴 고쳐달라 했다는 재단이 '그거 무리ㅋ' 해서 공돌이 갈아넣은 인공 피부로 대체. 현재까지 SCP-037-KO, SCP-134-KO, SCP-408-KO작성.
<Poolgrim> 혹시 틀린 거 라도?
<풀그림> 좀 과하게 줄이긴 했지만… 맞네, 전부 다.

그의 자캐 설정은 나에 대한 정보와 일치했다. 어째 기분이 묘했다.

<풀그림> 그런데 내가 정확히 어디에 입사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게 몇 살인지는 모르는 거야?
<Poolgrim> 사실 그게, 그런 건 구체적으로 세운 설정이 없거든.
<풀그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날조설정이 된 기분인데.
<Poolgrim>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몇 살 때 졸업하고, 박사 학위 따고, 재단에 입사 했는지, 하나 하나 구상하기엔 어렵단 말야.
<Poolgrim> 네가 겁나 천재에 신동이라 9살에 대학을 졸업했는지, 아니면 사정이 있어서 스무살의 절반을 날려먹고 나서야 대학에 들어갔는지 모를 일 이잖아.
<풀그림> 후자는 좀 너무한 구석이 있는데…
<풀그림> 아무튼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어
<Poolgrim> 좋게 말하면 상상 할 여지, 혹은 추가 설정이 가능 할 여지를 남겨 둔 거고
<풀그림> 나쁘게 말하면 구체적으로 설정을 짜긴 너무 어려워서?
<Poolgrim> 뭐… 맞지
<Poolgrim> 그런데 낸 들 알았냐. 내가 내 자캐랑 대화하는 날이 올 지.
<풀그림> 창조주와 대화하는 기분이야.

여기까지 대화 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쪽 세계의 자캐라면 저쪽 세계에서의 재단은 뭐지?

<풀그림> 질문 하나 해도 돼?
<Poolgrim> 뭔 질문이길래 허락까지 받고 해?
<Poolgrim> 아무튼 ㅇㅋ
<풀그림> 그쪽 세계에서의 재단은 어때?
<Poolgrim> SCP 재단 말 하는거지?
<풀그림> ㅇㅇ

그는 대답이 없었다.

<Poolgrim> 아 씨.. 꼭 들어야겠어?
<Poolgrim> 충격먹을텐데.
<풀그림> 아니 뭐 재단이 없는 세계라도 되는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
<Poolgrim> …
<풀그림> 야
<풀그림> 설마
<풀그림> 씨발?
<Poolgrim> 빙고.

잠시간 정신을 놓아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나를 찾는 로그로 가득했다.

<풀그림> 미안. 머리가 좀 아파서.
<Poolgrim> 괜찮냐?
<Poolgrim> 계속 해, 말아?
<풀그림> ㅇㅇ 평행세계인데 뭐.
<풀그림> 평행세계인데.
<풀그림> 괜찮아
<풀그림> ㅇㅇ
<Poolgrim> 너 임마 상태 안 좋아 보여

진정하자, 진정. 어디까지나 평행세계의 일이다. 내가 상관할 일 따위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재단이 없다고? 그럼 변칙 물체의 관리는 누가 하는 거지? 요주의 단체가 가하는 위협은? 아니, 설마 요주의 단체도 없나?

<풀그림> GOC는 있어?
<Poolgrim> ㄴㄴ
<Poolgrim> 공장, 원더테인먼트 박사, 유한회사 마셜, 카터&다크, 뱀의 손, 전부 다 없어.
<Poolgrim> 재단의 주요 인물 들 대신 각각에 대응 되는 자캐의 주인들이 있고.
<풀그림> 그럼 대체 그 곳에서의 재단은 뭔데?
<Poolgrim> 넌 알면 안 돼.
<풀그림> 대체 왜?
<Poolgrim> 둘 중 하나야
<Poolgrim> 네가 미치던가, 아니면 보안과에서 널 잡아 처리하던가.
<풀그림> 기밀과 관련 된 거야?
<Poolgrim> 단순 기밀이면 말을 안 하지
<Poolgrim> 그 이상 일 걸?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문을 열어보았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경비대나 잔업하는 연구원들만 가끔 보였다. 나는 개인 연구실의 문을 잠궜다.

<풀그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게.
<Poolgrim> 너 방금 문 잠그고 왔지?
<풀그림>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러니까 어서 말 해 줘.
<풀그림> 미치더라도 알 건 알고 미치자고.
<Poolgrim> 좋아. 심호흡 크게 해.
<Poolgrim> 여기에서의 재단은 위키위키 형 창작 사이트야.
<풀그림> 창작? 뭘 만드는데?
<Poolgrim> 너희 쪽에서 SCP 보고서라고 불리는 'SCP 항목', SCP 재단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이야기(테일). 추가로 한국어 위키(원래 SCP 재단이 영어권에서 시작 했거든)는 번역 활동도 있고. 일단은 이 세가지가 주요 활동.
<Poolgrim>
<풀그림> 그렇다는 건 너희 쪽에서 창작한 것들이 우리에겐 현실로 된다고?
<Poolgrim>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풀그림>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게 기밀 사항 중 하나고?
<Poolgrim> 뭐… 진실을 가리기 위해 거짓으로 작성 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풀그림> 젠장, 골 때리네.
<Poolgrim> 그러게 내가 충격 먹을 거라고 했잖아.
<풀그림> 기억 말소제 겁나 땡긴다.
<풀그림> 주모, 여기 기억 말소제 한 잔 진하게 말하주쇼ㅋㅋㅋㅋ
<Poolgrim> 너 진짜 괜찮은 거냐
<풀그림> 예전에 평행우주 관련 프로젝트 진행 할 때 그런 가설이 하나 나오긴 했어.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른 세계에선 허구로 기록 됐을지도 모른다고.
<풀그림> 그런데 그걸 마주하니까 골치가 좀 아프네
<Poolgrim>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풀그림>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요.
<Poolgrim> 요즘엔 채팅방에 자주 접속 하니까 필요하면 연락 해. 어째 괜히 얘기 한 것 같아서 겁나 신경쓰이네.
<Poolgrim> 충격 먹었다고 죽지 말고.
<Poolgrim> 무병장수 해야지 임마

그의 말이 맞다. 진실을 알았다고 죽는 건 손해보는 짓이다. 다만 머리가 아파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건과 마주해서 그런 것 같았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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