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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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grim> 굿 모닝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그와 처음 만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의 존재는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자고 일어나니 머릿속이 조금 진정 된 기분도 들었다.

<풀그림> ㅎㅇ
<Poolgrim> 진정은 좀 되셨냐
<풀그림> 아니 전혀. 죽을 것 같다. 살려줘
<Poolgrim> 헐
<풀그림> 농담이고
<풀그림> 사실 어제 자면서 깊이 생각 해 봤어. 이 쪽과 그 쪽의 관계에 대해서.
<Poolgrim> 이 쪽 세계와 그 쪽 세계?
<풀그림> ㅇㅇ
<풀그림> 결론은 그냥 우연이겠지, 뭐.
<Poolgrim> ?????
<풀그림> 우리가 대화 할 수 있게 된 게 우연이었다면, 이 곳의 재단과 그 곳의 재단, 그러니까 그곳의 위키 사이트와의 관계 역시 단순한 우연이 아닐까 싶어.
<풀그림> 정리하면, 어쩌다보니 맞아 떨어진 거지, 그곳에서 쓴 글이 여기서 현실이 되는 건 아닐 거라는 소리야.
<Poolgrim> 너님 최소 긍정킹
<풀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olgrim> 아니 근데 틀린 말도 아닌 게
<Poolgrim> 이 곳 사이트에 있는 모든 SCP 항목이나 이야기 다 합쳐서 너네 세계에 적용하면
<Poolgrim> 거기 이미 멸망함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ㅅㅂ
<풀그림> 웃을 일이 아니잖어
<Poolgrim> 근데 아직 멀쩡하잖아?
<Poolgrim> 그러니까, SCP 재단이라는 곳이 여긴 창작 사이트 인 곳이고, 거긴 실재하는 곳 일 뿐이지.
<풀그림> 내 말이 그 말이야.
<풀그림>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훨씬 낫네
<Poolgrim> 굿ㅋ
<Poolgrim> 얌마 너 걱정 덜어주려고 밤새 고민 한 건 아냐?
<Poolgrim> 어서 고맙다고 말 해라 어서
<풀그림> 아 네 감사합니다
<풀그림> 는 개뿔이 생각 해 보니까 내가 먼저 말 한 거잖아
<Poolgrim> 얌마 나도 같은 생각은 하고 있었어
<Poolgrim> 네가 먼저 말 한 거 뿐이지
<풀그림> 먼저 말하면 장땡이죠 퉤퉤퉤
<Poolgrim> ㅅㅂ
<Poolgrim> 자캐 창조자의 이름으로 네게 오체분시의 결말을 내리겠다
<풀그림> 네 잘못했습니다. 제가 나쁜놈입니다.
<Poolgrim>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누군가와 이토록 재미있게 대화 한 적이 얼마만일까. 그와는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풀그림> 야
<Poolgrim> 왜
<풀그림> 수영장… 이 아니고
<풀그림>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계속 연락이나 주고 받을까?
<Poolgrim>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Poolgrim> 언제는 보안과에 넘긴다더니 어쩌니 하더니.
<풀그림> 아니 그냥. 재밌을 것 같지 않냐?
<풀그림> 나는 민간인 신분의 '나'와 대화하는 거고, 너는 네가 만든 자캐와 대화 할 수 있는 거고.
<Poolgrim> 흠
<풀그림> 어떰?
<Poolgrim> 괜찮겠는데
<Poolgrim> 사실 다른 분들 자캐는 거기서는 어떤지, 여기서 터진 사건 사고는 거기서 어떻게 벌어졌는지 궁금하기도 함.
<풀그림> 좋은 것 같지?
<풀그림> 너도 그 창작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거라면 이걸로 소재 하나 잡을 수도 있지 않겠어?
<Poolgrim> 어 잠깐만
<Poolgrim> 그거 존나 굿 아이디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olgrim> 오 슈발 그 생각을 못 했었네
<풀그림> 존나좋군?
<Poolgrim> 아 근데 문제가 있음요.
<풀그림> 뭔데?
<Poolgrim> 내가 2주 밖에 채팅을 못 해(…)
<풀그림> 니 무슨 시한부 인생이냐
<Poolgrim> 비슷할 듯
<풀그림> 헐 농담이었는데
<Poolgrim> 죽는 건 아니지 임마. 내가 얼마나 오래 살 건데.
<풀그림> 그럼 뭔데?
<Poolgrim> 군 입대.

잠시간 대화가 죽었다. 죽은 대화를 되살린 건 내 쪽 이었다.

<풀그림> 언제인데?
<Poolgrim> 3월 25일
<Poolgrim> 13일 남았네.
<풀그림> …
<풀그림> 난 그 날 기지 전출 있음요
<Poolgrim> ?!
<Poolgrim> 님 뭐 사고 침?
<Poolgrim> 변칙물체 하나 방생했냐?
<풀그림> 미쳤냐
<Poolgrim> 그럼 뭔데?
<풀그림> 출장 보낸다더라. 새로 갈 기지에서 쉬엄쉬엄 일 하라는데
<풀그림> 개소리죠 시팔
<Poolgrim> 근데 어째 맞아 떨어진다?
<Poolgrim> 나는 집 떠나고 넌 사령부 떠나고.
<풀그림> 우짜겠냐. 위에서 하라는데.
<Poolgrim> 넌 입대 안 해?
<풀그림> 나? 면제.
<풀그림> PO재단 입사 버프WER
<Poolgrim> ㅅㅂ…
<Poolgrim> 야 평행우주에서 온 이방인은 스카웃 안 해주냐
<풀그림> 너님이 오시던가요
<풀그림> 근데 님 머리 빠가라 안 될 듯
<Poolgrim> (부들부들) 인정
<풀그림> D계급 지원은 상시 모집인데, 그거라도?
<Poolgrim> 미친노마
<Poolgrim> 차라리 죽으라고 해라
<Poolgrim> 야 야 잡소리 그만하고 중요한 얘기부터 하자

좋은 화제 전환이다.

<풀그림> ㅇㅇ 그래
<풀그림> 뭐가 궁금한데?
<Poolgrim> 음
<Poolgrim> 우리 쪽 위키 사이트가 원래는 작은 온라인 카페에서 시작했거든? 거기는 어떤지 궁금하네.
<풀그림> 나도 한국 사령부의 시작은 잘 몰라. 물론 지금에서 본다면 비교적 초창기 멤버에 포함되어 있는 건 맞지만, 그 이전은 얘기로만 들었거든.
<Poolgrim> 그럼 그거라도.
<풀그림> 처음엔 변변한 기지라고 하기 힘 들 정도로 규모가 작았대. 위장용 회사로 사용중인 빌딩 내 에서만 활동 했으니까. 물론 지하실 포함해서.
<풀그림> 본사와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어. 필요한 자료를 받아다 번역해서 보긴 했는데, 사실상 그게 전부였거든. 본사에서도 큰 관심은 없었을 거야, 아마도.
<풀그림> 그러다가 어는 순간부터 본사와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고급 인력도 양성하고, 기지도 세우고. 극소수지만 본사에서 파견 온 인원도 있었어. 그렇게 지금의 대한민국 지역 사령부로 성장 한 거야.
<풀그림> 참고로 난 본사와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입사했어.
<Poolgrim> 그, 네가 겪었던 그 사고 직후에?
<풀그림> ㅇㅇ 거의 직후지.
<Poolgrim> 그럼 이전에 쓰던 위장 회사 빌딩은 어떻게 했어?
<풀그림> 그 때 까진 데이터 이전 사업을 계획하던 중이라 데이터 관리소로 쓰고 있었어. 초대형 임시 저장 파일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려나.
<풀그림> 사실 데이터 이전 사업을 계획하긴 했지만, 딱히 실행 할 생각은 없어 보였어. 잘 쓰고 있는 건물을 굳이 폐쇄하고 새로 지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풀그림> 보안 관리만 잘 하면 문제 될 것도 없었지.
<Poolgrim> 하나 더 물어봐도 돼?
<풀그림> 이번엔 내가 물어 볼 차례 아닌가.
<Poolgrim> 뭐… 그래.
<풀그림> 아까 말했던 위장 회사의 빌딩에 화재가 일어나서 폭발사고로 번지는 사건이 있었어. 당연히 이전되지 못 한 데이터는 그대로 날아갔지. 그나마 다행인 건 중요한 데이터는 새로 지어진 사령부에 있었지만, 비공식 사건기록이나 본사에서 보내온 보고서의 번역 기록 일부가 소실됐어.
<풀그림> 게다가 그 사건으로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날려먹은 일부 인원이 퇴사하고, 실종 된 직원은 아예 이름까지 알 수 없게 됐어.
<풀그림> 거기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Poolgrim> 1월 쯤이었지?
<풀그림> ㅇㅇ
<Poolgrim> 아까 말했던 온라인 카페가 터졌었어. 정확히는 현재 위키 사이트의 뿌리였던 카페가 해킹을 당한거야.
<Poolgrim> 지금 내가 활동하는 위키 사이트는 구 카페에서 활동하던 인원+a가 세운 사이트인데, 완전한 독립까진 아니었어도 별개의 사이트다보니 인원이 갈려서 활동하기 시작했어. 카페에서만, 혹은 위키 사이트에서만, 혹은 둘 다 활동하는 인원, 이렇게 나뉘었지. 카페에서만 활동하다가 활동을 중단하고 그대로 잠수한 유저 중에는 우수한 번역가들이 일부 있었어. 그들이 남긴 번역물이 전부 카페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질적으로 우수한 창작글도 많았지. 마찬가지로 일부는 카페에만 남았지만.
<풀그림> 그런데 그 카페가 해킹을 당했다?
<Poolgrim> 사실 그거에 관해선 아직도 확실치가 않아. 한 동안 우리는 해킹이라고 믿었었거든?
<풀그림> 공범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났지?
<Poolgrim> 너희도 그랬어?
<풀그림> 기지에 직접 찾아왔더라. 경비대와 같이.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서. 그는 요주의 단체도 아니었고, 재단 직원도 아니었어. 사라진 위장 회사의 관리자와 아는 사이 였을 뿐.
<Poolgrim> 그 관리자 이름이 혹시 M으로 시작하지?
<풀그림> 너네도 똑같구나.
<Poolgrim> 으휴
<풀그림> 아무튼 우리도 제 3자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 자가 말하길 위장 회사의 관리자가 방화를 했다고 하더라고. 마치 자신도 피해자인 것 처럼 ID 카드 기록을 조작하고, CCTV에 찍히지 않도록 얼굴을 가렸지. 어차피 다 폭발한 마당에 쓸모 없는 짓 이었지만.
<Poolgrim> 이유는?
<풀그림> 싫증나서
<Poolgrim> 싫증나서
<풀그림> …
<Poolgrim> …
<풀그림> 종합하자면 대충 이래. 위장 회사의 관리자가 재단의 일에 싫증이 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 처럼 위장하고 건물에 방화를 했다는 거지. 기지에 찾아온 그 자와 함께.
<Poolgrim>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했어?
<풀그림> 솔직히 난 안 믿었어. 지금도 안 믿고. 증언에 신빙성이 높긴 했지만, 한 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무작정 믿을 순 없지. 기억소거제 투여하고 돌려 보냈어. 현 사령부 관리자 지시사항으로.
<풀그림> 너희는?
<Poolgrim> 카페 회원 한 분이 대처를 잘못 하시는 통에 그거 수습하느라 진땀 뺐지. 아무튼 그 공범은 사과문 올리고 카페에서 자진 탈퇴했어. 우리도 그 공범에 대해서는 별 말 안했지. 이제와서 뭐라 해 봤자 터진 카페가 돌아올리도 없으니까.
<풀그림> 우리나 그 쪽이나 별 차이는 없는 것 같네.
<Poolgrim> 그러게.

대화가 끊어졌다. 문득 불 타 버린 빌딩이 떠올랐다. 저쪽 세계의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해킹당해 게시물이 사라지고 엉망이 된 카페, 공들여 만든 창작물이 사라지고, 혼란스러워 하는 회원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들이라고 다르진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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