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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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다. 왼 손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3월 25일. 시간은 정확하게 흘러 가 있었다.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세상이 망한 것 마냥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이 곳에서 전출 갈 곳으로 따로 보내기로 했다. 어디로 갈 지는 모르겠지만 사령부에서 책임지고 보내주신다 했으니 믿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중요한 짐은 가방에 넣어서 들고 갈 예정이니까. 텅 빈 사무실에 가방을 두고 기지를 돌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나 드실래요?"

자판기에서 방금 뽑은 커피 한 잔은 건넸다. 샐 씨는 가볍게 목례 하고는 받아 들었다.

"잠시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샐 씨였다. 멋쩍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출에 관해서는 이전에 샐 씨와 상담한 적 있었다. 그는 서투른 위로를 하지 않았다. 사람 없는 곳에 보내진 않을 것 이다, 새로운 이들과 만나 잘 적응하면 되는 것이다, 등등. 친척 형이 해주는 조언과 비슷했다.

"잠시만요. 어, 아냐. 풀그림님 전출가신다고 하시네. 응."

그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내면의 인격인 샐리 씨와 대화하는 것 이리라.

"그러고 보니, 샐리하고는 화해 하셨습니까?"

아차, 그걸 잊고 있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는 못 하고 있었다.

"그게… 하하."

"왠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아니면, 자리라도 내어 드립니까? 지금 입고 있는 옷 이면 샐리도 큰 문제는 없을테고 말이죠."

"아뇨, 괜찮습니다. 다만 저번 일은 죄송하다고 좀 전해주실 수 있나요?"

"커피 값은 하죠. 아."

샐 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샐리가 전해 달라는데요, 다른 곳 가서 사슴 드립 퍼뜨리고 다니면… 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닙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결국 대답은 듣지 못 했다. 샐리 씨 성격 상 아마 정강이 정도로는 끝내지 않겠다고 할 게 분명하다. 절대 맞아서는 안 될 부위가 싸해지기 시작했다. 그 얘길 퍼뜨렸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꺼운 책 몇 권과 수십장의 논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L.H.Sein, 흔히 '자인'님으로 불리는 여성이 쌓여 있는 책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반납이요."

"어쩐 일 이에요? 반납일자를 다 지키고."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독서는 좋아했지만 반납 일자를 제 때 지키지 않아 항상 메시지가 날아왔고, 그 마저도 내가 직접 반납 한 경우는 많이 없었다. 보통은 견습들에게 부탁하기 일쑤였다.

"전출 간다면서요?"

그녀가 반납한 책을 확인하며 물었다.

"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거죠. 분명 몇 분 말고는 알려드린 적 없는데."

"나 관리자 직속 비서에요.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관리자 직속 비서 신분과 내 전출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대체 무슨 상관 인 걸까.

"아 참, 이거."

자인님이 책장으로 가더니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전에 부탁했던 단편집이었다.

"어라, 이거 절판이라고 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찾으셨대요?"

"그거야 뭐…"

"하, 그것도 관리자 직속 비서라서 그런 건가요?"

"아뇨, 그건 그냥 제가 사서라서."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싶다.

"아무튼, 당신이라면 잘 해낼 겁니다. 어딜 가든지 말이죠. 그러니까 잘 하고 돌아와요."

"덕분에 가서도 심심하진 않겠네요. 책 잘 읽을게요. 고마워요."

책을 흔들어 보였다.

"아 참."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았다.

"그거 5만원이에요. 중고가라 비싸더라고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젠장, 말려들었다. 구해 준다고 했지, 아예 준다고는 안 했었으니까. 억지 웃음을 지으며 지갑을 열었다. 카드가 된다면 좋을텐데.


현재 시간 13시 20분. 날 태우러 올 수송기는 14시에 온다고 했다. 가기 전에 우선은 기지 관리자부터 찾아 뵈어야 했다. 전출 신고는 해야 하니까. 가방을 메고 관리자실에 찾아갔다.
관리자실은 언제 찾아가도 긴장되는 곳이다. 좋은 이유로 찾아가는 경우 보다는 그렇지 못 한 경우가 훨씬 많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심호홉을 크게 하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는 한 여성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기지 관리관 노래마인. 메시지나 회의 때 에는 비교적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곤 하지만, 1:1로 대할 때 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아, 왔네요. 앉아요."

의자 하나를 가져다 관리자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 전출이네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당신이라면 가서도 잘 하실거라 믿습니다. 이 곳 만큼은 아니어도, 그 쪽 기지도 한국 내에서는 꽤나 큰 편이에요. 당연히 사람도 많죠. 좀 괴팍한 사람이 많을 거에요. 크고 작은 일들이 좀 있던 곳 이라."

그녀가 몇 장의 서류에 휘리릭 서명을 하며 말했다.

"자, 일단 이거 받으시고."

종이 한 장. 엉겁결에 양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이전에 빌어먹을 상사와 마주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용이 조금 달랐다. 아니, 애초에 문서 양식 부터가 달랐다.

"추천서? 추천서요?"

"네, 추천서. 몰랐어요?"

관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상사가 내게 주었던 서류는 전출 동의서였다. 잠깐, 그러고보니 그건 전출 동의서였지, 어떤 이유로 전출을 가는 것인지는 써 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관리자에게 설명했다. 정확히는 일러 바친 것 이지만.

"하, 이 양반이. 심의서로 장난 걸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 했는데. 아무튼."

관리자가 표정을 바꿨다.

"당신은 추천으로 전출 가는 겁니다. 재단에서 시행중인 새 프로젝트의 참여자로써."

"누가 추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미안해요. 당사자가 말 하지 말아달라고 해서요. 이건 저도 알려드리기 곤란하네요. 약속은 약속 인지라."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니, 사실은 아니었다. 다른 기지로 전출 간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니까.

"왜, 걱정 되세요?"

"아니라고 할 순 없죠. 얼마나 걸릴지, 또 복귀는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혼자 잊혀지진 않을지 걱정도 되고. 아, 이건 아닌가?"

"글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에요. 프로젝트가 끝나는대로 복귀 할 수 있으니까요. 열심히만 하면 빨리 오는거죠.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당신 한 명도 기억 못 해 줄까봐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죠."

"그거 다행이네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천서를 파일에 철해 가방에 넣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가요, 풀. 올 때 선물 사 오는 거 잊지 말고요. 케이크로."

관리자에게 인사까지 하고나니 정말로 간다는 게 느껴졌다. 시간을 확인했다. 수송기가 도착 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기지 옥상에 있는 헬기장으로 올라갔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은 헬기 한 대가 착륙했다.

"풀그림 씨 맞으십니까!"

헬기에서 내린 요원이 엔진 소리를 뚫을 기세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신분증 좀 보여 주십시오!"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요원은 헬기로 안내했다. 발걸음이 좀 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몇 년간 지냈던, 이제는 집과도 같은 곳이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헬기에 올랐다. 곧 헬기가 이륙했다. 창 밖으로 기지의 모습이 보였다. 기지에서 눈을 떼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얼마나 왔을까. 어디까지 왔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울 쯤, 헬기가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렸다. 멀찌감치에서 몇 명의 무리가 오는 것이 보였다. 흰 색 가운을 입은 사람을 필두로 해서 대략 서너명 정도. 한 명은 흰 색 가운 차림이었고 나머진 전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흰 색 가운은 짧게 깎은 흰 머리에 전투복 하의와 전투화까지 입고 있었다. 그렇게 입고 다닐 만한 사람은 내가 아는 선 에서는 단 한 명 뿐이었다.

"빅터 박사님?"

나를 맞이 한 것은 다름 아닌 빅터 박사였다.

"어서오게, 풀그림. 오는 길에 문제는 없었나?"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도 몰라 멍하니 있기만 했다.

"하하, 그 멍청한 표정은 여전하구만."

"박사님께서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아니, 혹시 박사님이 절 추천하신 건…"

"그 얘긴 들어가서 하지. 짐도 풀겸."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갔다. 한 번도 온 적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이상할 정도로 군인도 많이 보였다.

군인?

문득 저 너머어 있을 내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도 오늘이 입대라고 했다. 그는 별 일 없을까? 설마 별 일이야 있겠느냐만은.

"오는데 하루 종일 잡아 먹을 생각인가, 자네."

"아, 예, 예."

그를 따라 가볍게 뛰어갔다. 우선은 나부터 이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했다. 그 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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