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6
평가: +11+x

빅터 박사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이 곳은 어디인지, 뭐 하는 곳인지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 있다가 천천히 해 주겠다'가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근무했던 곳 과는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군인이 이상하리만큼 많았다. 베레모에 부착된 마크, 전투복 왼쪽 가슴에 부착된 약장 등, 재단 소속의 특무부대가 아닌 국가에 소속된 현역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일반 병사들만 본 것은 아니다. 낮게는 하사를 달고 있는 사관급부터, 위관급, 영관급도 하나 둘 보였다. 사실 계급을 제대로 본 것은 병사들과 부사관들 뿐 이었다. 이외의 계급? 주변 병사들이 목이 터져라 경례 하는데 못 알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현역 군인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현역까지 동원 될 정도로 보안 등급이 높은 곳이라고 생각하니 납득은 됐지만, 이 작은 나라에 그 정도로 보안 등급이 높은 곳이 필요한가 싶었다. 아무튼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직은.
도착한 곳은 유리창이 많은 건물 앞 이었다. 건물 전체를 유리창으로 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기지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기지 치고는 너무 작았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역 군인들은 설명이 되질 않았다.

"설마 여기가…"

"새 집에 온 걸 환영하네. 앞으로 자네가 지내게 될 곳 이야."

설마 했는데. 비율대로라면 내 사무실은 손톱 크기 정도로 예상 되었다.

"당분간 햇빛 못 볼 거야. 상관 없겠나?"

상관은 없었다. 빅터 박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일 뿐. 대답을 들은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인식기에 카드를 찍자 유리문이 열렸다. 건물 안 쪽은 기지보다는 회사에 더 가까웠다. 긴 복도 양 옆으로 주르륵 늘어선 각종 사무실들. 중앙의 계단, 그리고 복도 양쪽 끝에는 엘리베이터. 아무리 보아도 사무실이었다. 빅터 박사의 안내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군인들은 더 이상 동행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긴 복도가 있었다. 지상과는 다른 구조인 셈이다.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무장한 인원은 덤으로 있었고. 무장 인원들은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경례했다.

"4등급 빅터 한. 옆은 전출 온 직원."

빅터 박사는 무장 인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나도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지역 사령부에서 쓰던 신분증이지만 기본적인 사진과 정보가 적혀있어 신원 확인에는 문제가 없었다. 신원이 확인되자, 무장 인원 두 명이 목에 걸고 있던 카드를 철문 양 쪽의 리더기에 긁었다. 문이 열렸다.

"수고들 하게."

빅터 박사가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모기 소리로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무장 인원을 지나쳤다. 그 사이 빅터 박사는 문 너머로 가고 있었다.
문 너머는 작은 방이었다. 벽에 카드 리더기만 하나 달랑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 등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빅터 박사는 카드 리더기에 신분증을 꽂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카드를 뽑자, 리더기가 가로로 열리며 작은 화면과 동그란 구멍이 보였다. 성인 주먹 하나 정도는 거뜬히 들어 갈 정도의 구멍이었다. 빅터 박사는 오른쪽 옷 소매를 살짝 걷어 구멍으로 오른손을 넣고, 손목을 구멍의 위 쪽에 밀착시켰다. 화면에 스캔 중 이라는 글자가 뜨더니 곧 빅터 박사의 이름과 함께 인증 완료라는 문구가 떴다. 방 전체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몸이 살짝 뜨는 기분이 들었다. 들어간 방 자체가 하나의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가끔은 왼쪽으로도, 또 오른쪽으로도 가곤 했다. 얼마간 지나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문이 열리고 보인 곳은 압도적으로 넓은 로비였다. 타고 온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문이 몇 십 개는 더 있었다. 게다가 언뜻 보아도 기지 거주 인원이 꽤 많았다. 사령부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럼에도 많았다.

"개미집에 온 걸 환영하네."

빅터 박사는 면담부터 하자며 어딘가로 향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갔다. 그는 개인 사무실로 날 안내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개인 사무실은 꽤 넓었다. 기지 관리관이 사용 할 법한 크기였다. 여긴 뭐든지 크고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 한 쪽에 탁자와 소파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빅터 박사는 뭔가를 준비 해 왔다. 양 손에 잔을 들고 마주보고 앉았는데, 그가 건넨 잔에서 익숙한 향이 났다.

"둥굴레차 좋아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입맛이 싸구려라."

그가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서, 용건이 뭐죠?"

다른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그걸 먼저 듣고 싶었다. 빅터 박사는 종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파일을 받아들고 내용을 읽었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떠느냐고 묻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도망치고 있군."

도망이라. 자발적으로 기억소거를 받아서 경험과 지식을 묶어둔 것을 도망친다고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 머릿속을 벗어나면서 누군가가 다치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남들을 신경 쓸 만큼 영웅적이진 못하니까. 그 때의 그 곳을 다시 한 번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사람 꼴도 면하지 못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것을 도망이라고 본다면 부정 할 이유는 없었다.

"악용되는 게 싫을 뿐 입니다."

빅터 박사가 입을 열려다 그만 두었다. 그는 물론 재단 내에서 악용 될 일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허나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게 설명했다. 내가 본 곳에 대하여. 그 곳은 평행우주다. 그러나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역겨운 피조물로 가득했을 뿐. 빅터 박사는 잔을 말끔하게 비웠다. 티백으로 우려낸 싸구려 둥굴레차지만, 그걸 맥주마냥 들이키는 사람은 이 양반 외엔 없으리라. 그는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도 어거지로 시키고 싶진 않네. 하지만 상관의 지시사항이야. 예나 지금이나 계급 사회에 뒤엉켜 살아온 내가 반항을 하면 얼마나 할 거라 생각하나?"

그는 늘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난 예전부터 좋은 병사였지만 좋은 박사는 아니다"라고. 맞는 말이다. 상관의 지시를 어기는 일은 그로서는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아주 예전부터 지켜왔던 일 이니까.

"젠장, 박사님까지 그러시니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한 수 접어야 했다. 물론 곧이곧대로 들어 줄 생각도 없었다. 조건을 붙였다.

"잠깐, 그러니까, 뭐?"

되묻는 게 당연하다. 내가 제시한 조건은 평행우주를 관측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 이었다. 프로젝트에는 빠짐없이 참여하되, 관측에 대해서는 손을 떼는 것이다. 물론 정말 필요한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 어지간하면 안 볼 것이다.

"그러니까, 연구는 하되 관측은 안 하겠다 이거 아닌가."

"칵테일은 만들지만 마시진 않겠다는 거죠. 어때요?"

빅터 박사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도 보기 싫은가?"

"차라리 스너프 필름을 보겠습니다. 3D로, 팝콘도 챙겨서."

"그만두겠다는 소린 안 하는군."

"도망치는 건 이쯤 하려고요."

능구렁이 같은 놈, 그는 분명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럼,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능구렁이 시즌인데 놓칠 수야 없지. 결국 그에게서 승인을 받아냈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질질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기억 복원 시술 받으러 가야죠. 안내 좀 해 주시겠어요?"

돌아온 건 빅터 박사의 웃음이었다. 특유의 비웃는 듯 한 웃음. 찜찜했다. 할인 받아서 싸게 샀는데 오히려 바가지 쓴 기분과 똑같았다.

"뭘, 한다고?"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기억 복원은 개뿔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자네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렇지?

"아니, 분명 파일에는 평행우주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한다고… 진행하려면 일단 소거된 기억을 되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 복원에 관한 조항이 있었나?"

제기랄.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 분명 그의 말 대로였다. 그가 건넨 문서 어디에도 소거된 기억을 복원하는 내용은 없었다. 어쩌면 이 문서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눠주는 형식적인 절차 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날 위한 문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내 편의를 봐 줄 내용도 없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 하지만, 난 자넬 속인 적 없어. 인정하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덧붙이지 마.

"처음부터 다시 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예산이 들 겁니다."

"글쎄, 연구하다 보면 묶여있던 지식이 새어나올 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차피 시간은 많아. 예산도 넉넉하고. 쓸 데 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그가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뇌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기, 기, 기지 지휘관과 직접 얘기 하겠습니다. 아니, 얘기하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빅터 박사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보았다. 그는 대답 없이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한참을 서 있으려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말 하게."

"저는 기지 지휘관과…"

"자네 앞에 있잖아."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건 이런 걸 의미 하나보다. 농담하지 말라며 피식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되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어, 어, 언제 진급하신…"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그게 하고 싶은 말 이냐고 되묻는 것 같았다. 물론 아니지만.

"개인 사무실에 관련자료 뒀네. 아마 바쁠 거야. 잘 해 봐, 풀."

그는 방을 나갔다. 올해의 개자식 시상식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압승하지 않을까.


전입 1주 째. 솔직히 죽을 맛이다. 빌어먹을 기지 관리관인 빅터 박사의 지시로 두 달 정도는 일반적인 업무에서 제외되고, 프로젝트 관련 공부에만 열중했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다.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하려 하면 어김 없이 전화가 온다. 물론 전화의 주인은 빅터 박사. 주로 하는 말은 공부 하라느니, 딴 짓 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공부한 것을 잘 익혔는지 뜬금없이 새벽에 깨워 공부한 것을 물어 본 적도 있었다. 대학 입시 때도, 회사 입사 때도 이렇게는 안 했다.
생각 해 보면 이전에 있던 회사도 가혹하긴 했다. 직원 및 연구원들 굴리기를 햄스터가 쳇바퀴 굴리듯이 했으니까. 물론 거긴 거기고 여긴 여기다. 다만 거긴 사적인 이익을 위한 회사였고, 여긴 공익의 이익을 위한 재단인데 이렇게까지 굴려도 되나 싶긴 하다. 정말로 공익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기억 복원이나 한 번 해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은 여전히 버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평행우주 관련 자료를 공부하다 보니, 빅터 박사가 했던 말의 뜻을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 처음 보는 용어들이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따로 주석을 찾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정말로 소거된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공부에 도움을 주는 것 일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따로 알아봤는데, 기억 복원 시술은 부작용이 남기도 한다는 말이 있었다. 소거된 기억 중 복원되면 안 될 기억까지 복원되어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말이 대표적이었다. 하기사 기억 소거가 일상인 이 곳에선 내가 언제 기억 소거를 당했는지 모를 일 이니까. 빅터 박사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개 같이 공부하게.

빅터 박사의 음성 메시지였다. 이 양반은 여전히 개자식이다. 의심 할 여지 없이.


전입 온 지 6주가 지났다. 프로젝트 관련 자료는 거의 다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빅터 박사는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 하지만, 솔직히 내가 한 만큼 한다면 뭐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5월 2일 금요일. 다음 주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행된다. 월요일부터 휴일이긴 하지만 그건 바깥세상 얘기고. 세상을 지키는 지구방위 재단에 휴일은 없다.

14시 정각에 프로젝트 관련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미리 채팅방을 개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 보는 이름의 연구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어디선가 많이 본 내용 같았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채팅 서버에 접속했다. 채팅 서버를 연 것이 아닌, 서버에 접속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풀그림님이 채널에 참여하였습니다.
<Poolgrim> ㅎㅇㅇ

맙소사.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