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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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grim> ㅎㅇㅇ

그 녀석이 말을 건지 10분이 지났다. 답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했다. 녀석은 분명 입대했다. 기억 말소제라도 거하게 빨지 않은 이상, 그건 장담할 수 있었다. 휴가 나오는 것 치고는 너무 빨리 나오기도 했다. 입대 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부딪혀야했다.

<풀그림> 어떻게 된 거야? 입대했다더니.

그게 전부였다. 녀석은 그대로 서버를 나가버렸다. 혹시나 해킹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속하자마자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튀어나왔으니 당황했으리라. 아무튼 어떻게 해서라도 녀석과 다시 대화해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녀석은 좀처럼 돌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었다. 그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그가 돌아온 건 회의가 다 끝난 후 였다. 물론 시간은 중요치 않았다. 가설이든 뭐든 확실히 하고 싶었다. 돌아온 그에게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 외박이라더니, 어떻게 여기 있느냐고.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Poolgrim> 외박

제기랄, 그게 다 였다.

<풀그림> 좀 더 길게 설명할 순 없어?
<풀그림> 한동안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인사 때리더니 대답이 그게 전부야?
<Poolgrim> 걱정이라도 한 거냐ㅋ

걱정 이전에 말을 저따구로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밖에.

<Poolgrim> 군생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널 위해 입대 경험자인 내가 친절히 설명하지.
<풀그림> 풀그림웨건이냐. 필요 없어.
<Poolgrim> 아 좀 들어주면 안 되냐
<풀그림> 요점만 간단히. OK?
<Poolgrim> 일단 입대 후 과정부터.
<Poolgrim> 입대-보충대 입소(4일째에 퇴소)-신병교육대대입소(5주간훈련)-자대(앞으로 지내게 될 부대) 전입
<풀그림> 그래서 연락이 안 됐구만?
<Poolgrim> ㅇㅇ
<Poolgrim> 지금은 위로 외박 나와서 사회 공기 섭취 중.
<풀그림> 외박은 알겠는데 위로 외박은 뭐야?
<Poolgrim> 전입 온 신병에게 주는 외박 정도? 위수지역 내에만 있고 부모님이 오셔야 나갈 수 있음. 내 휴대폰 가져오셔서 이렇게 채팅도 가능하지.
<풀그림> 그런데 아깐 왜 갑자기 나간 거야?
<Poolgrim> 3G가 불안정해서 자주 끊겨.
<Poolgrim> 지금은 가족 폰으로 테더링해서 하고 있고.
<풀그림> 아하.
<풀그림> 아무튼, 군생활은 어떠냐?
<풀그림> 요즘 많이 편해졌다는데. 너도야?

그는 대답이 없었다. 채팅방에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인터넷이 끊긴 것도 아닐 것이다. 대답은 조금 후에 돌아왔다.

<Poolgrim> 죽을 맛이다.

그는 심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낡고 후줄근한 막사, 틀에 짜여져 벗어나기 힘든 생활, 입맛에도 맞지 않고 양도 적은 식사 등. 물론 거기까진 예상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의 선임들이었다.

<Poolgrim> 내가 문제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어.
<Poolgrim> 그래도 난 내가 잘하는 게 아직은 있다고 믿고 있었어.
<Poolgrim> 글을 쓴다던가, 뭔가를 만든다던가, 일에 집중한다던가.
<Poolgrim> 자신 있었지. 그런 건.
<Poolgrim> 그런데 문제가 뭔 지 알아?
<Poolgrim> 신병에게 그런 건 아무짝에 쓸모 없었어.
<Poolgrim> 그럼 뭐가 필요할까?
<Poolgrim> 운동신경, 붙임성, 아부, 그게 안 되면 힘이 장사던가, 애마냥 귀엽게 생기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한 번 보고 들은 걸 기억하는 천재거나.
<Poolgrim> 내가 저 중에 몇 개나 해당 할 것 같아?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일단은 듣기로 마음 먹었다.

<Poolgrim> 하루 일과를 잔소리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끝날 때도 잔소리였어.
<Poolgrim> 그래도 참았어. 내가 잘못 한 거니까. 누굴 탓 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어.
<Poolgrim> 근데 씨발 내 동기들은 왜 걸고 넘어지냐고.
<Poolgrim> 내 실수로 내 동기들이 전부 모여서 혼 난 적이 있었어.
<Poolgrim> 내 동기들이 날 보는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
<Poolgrim> 아마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사실 알 수는 있었다. 내 맨얼굴 보면 다들 그런 표정을 지을 테니까. 차이가 있다면 내 얼굴 본 사람들은 진짜 역겹게 생겨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만.

<Poolgrim> 그렇게 신나게 탈탈 털리고 불침번 근무 섰어.
<Poolgrim> 근무 내내 손목만 보이더라. 내 손목만.
<Poolgrim> 여기, 여기만 그으면, 그 엿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마찬가지고.
<Poolgrim> 그런데 그게 안 돼.
<Poolgrim> 잔뜩 겁먹은 거지.
<Poolgrim> 뒈지지도 못 하면서 망상만 하는 쫄보새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채팅을 종료하고 진정할 것을 권했다.

<Poolgrim> 그래, 그만해야지.
<Poolgrim> 니가 뭘 알겠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풀그림> 그만 해. 나도 나갈 거야. 너도 그만하고 자.
<Poolgrim> 그러던가 말던가.
<Poolgrim> 의자에 앉아서 자판만 뚱땅거리는 게 뭘 알겠냐.

더 이상은 못 참아.

<풀그림> 맞아. 난 네 말대로 그런 거 몰라. 입대 자체를 안 했는데 알 턱이 없지.
<풀그림> 그런데 네가 겪은 건 나도 이미 겪은 적 있거든?
<풀그림> 재단이라고 뭐 다른 줄 알아? 여긴 뭐 웃음이 꽃피는 에덴동산인 줄 아냐고.
<풀그림> 똑같아. 내 잘못 하나로 팀 전체가 욕을 먹어. 부서가 욕을 먹고. 안 해도 될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시말서만 줄줄이 써. 그리고 빠꾸먹으면 다시 해. 또 하고 또, 또, 또, 해.
<풀그림>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단체생활이니까. 관료제가 있는 한 바뀌질 않아. 재단을 유지하는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순 없으니까.
<풀그림> 재단 생활과 네 핵똥짬 생활의 차이를 알려 줘?
<풀그림> 재단은 실전이야 병신아.
<풀그림> 계산 실수로 동기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또 그걸 막겠다고 특무부대원이 갈아 만든 고기쉐이크가 돼. 우린 그 꼴을 지금까지 봐 왔고, 앞으로도 볼 거야. 2년도 안 돼서 민간인으로 돌아가는 네깟 놈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이래도 재단이 부럽냐?
<풀그림> 네 장점이 쓸모가 없어? 그래, 쓸모 없지. 쓸모 없는 건 시작해 보기도 전에 포기부터 하는 그 썩어빠진 근성이지만.
<풀그림> 운동신경이 없어? 발바닥 터지도록 뛰어 볼 생각은 했냐? 붙임성이 부족해? 먼저 다가갈 생각은 해 봤어? 아부를 못 해? 그 실낱같은 자존심이 그리도 중요하냐?
<풀그림> 한 번 더 물어본다.
<풀그림> 안 하는 거냐? 못 하는 거냐?

자판에서 손을 떼었다.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풀그림> 너도 스무살 넘었어. 만으로 따져도 19년 넘게 살았잖아.
<풀그림> 어른 됐으면 어른답게 굴어. 1개월 남짓한 군생활에 겁먹고 찌질대는 건 적당히 해.
<풀그림> 자살 하고 싶다고? 그럼 넌 그 선임 하나만 보다가 죽는거야. 네 마지막 기억이라고는 욕 쳐먹다가 손목 긋고 죽는 게 전부라고. 이래도 죽고싶냐?
<풀그림> 네 위의 선임들, 시간 지나면 다 전역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참아. 이 악물고 참아. 친해질 수 없다면 참고 견뎌.
<풀그림> 앞으로 힘든 일 많을 거야. 그 때마다 여기 와서 찌질대던 말던 마음대로 해.
<풀그림> 물론 난 네 말에 조금도 맞장구 치지 않을 거야. 욕이 그리우면 돌아오던가.

슬슬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풀그림> 그만 잠이나 쳐 자. 나도 들어가야 돼. 자면서 네 문제가 뭐였는지 곱씹어 봐.
<풀그림> 할 말 있냐?

대답은 몇 분 후에 돌아왔다.

<Poolgrim> 넌 진짜 개자식이야.

그 양반 옆에 너무 오래 있었나. 나도 그 양반을 닮아가는 것 같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그에게 마지막 로그를 남기고 서버에서 나왔다.

<풀그림> 꼬우면 넘어오던가.

솔직히, 나도 못 할 것을 그 에게 강요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정신적인 스트레스 외에도 정말 육체적인 괴롭힘을 당해서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근본적으로 똑같은 사람이다. 나이도, 사는 곳도, 겪어온 환경도 조금씩 다르지만, 뼈를 이루는 성격은 큰 차이가 없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 역시 위로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험하게 대해야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아니니까. 예리하게 갈아낸 충고가 필요할 뿐이다. 따뜻한 가족 품에서 빠져나올 시기에는 혹독한 쓴 소리가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딘지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친구라면 나중에 술이라도 기울이면서 묵은 마음을 풀텐데, 화면 너머로만 간신히 대화하는 친구는 사정이 다른다. 대화도 자주 못 하면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서로 욕하고 끝났으면 더더욱.
그럼에도 그가 이해하길 바랐다. 그가 어른이 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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