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8
평가: +5+x

여름이 찾아왔다. 프로젝트는 차근차근 잘 진행되고 있었다. 참여 인원들이 워낙에 베테랑인지라 더 분발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시절의 기억을 계속해서 끄집어 내야만 했다. '회사'에 출근하던 시절 사용했던 물품, 그 때 썼던 일기장과 기록, 사진 등. 효과는 있었다. 기억 말소제로 잊혀졌던 지식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이 되는 부분. '회사'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까지 다시 떠오르는 건 영 좋지 않았다. 단순히 흑역사면 좋겠지만 진짜 심하게 구르던 때 인지라.
주변 동료들은 빅터 박사에게 혹사당하는 날 안쓰럽겨 여겼다.
"암시의 가능성을 믿는다니, 무슨 사일런스냐?"
한 동기가 했던 말 이었다. 진심으로 와 닿았다. 그렇다고 빅터 박사가 녹아내린 타이어 캐릭터같이 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8월 1일, 군대 간 내가 다시 찾아왔다.

<Poolgrim> 짜잔, 내가 돌아왔다.

정말 잊으만 하면 오는 녀석이다. 그래도 농담으로 시작하는 대화라 그리 거북하진 않았다. 마지막 대화가 서로 쌍욕으로 끝났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풀그림> 오냐. 이번엔 또 뭐야?
<Poolgrim> 집에 왔지.
<Poolgrim> 드디어 100일 휴가를 썼다요. 3박4일 우-후.
<풀그림> 오호, 축하축하.
<풀그림> 이 쯤에서 다시 물어봐야지.
<Poolgrim> ?
<풀그림> 지금 군생활은 어떠냐?

뭔가 바뀌었을까?

<Poolgrim> 여전히 힘들고 엿 같은데.

난 돗자리 깔 자격이 없는 것 같다.

<Poolgrim> 그래도 전 보다는 나아졌어.
<Poolgrim> 아, 죽고싶다에서 에이 시벌 정도로 바뀐 거지만.
<풀그림> 2개월만에 많이 철 좀 들었네.
<Poolgrim> 저번달엔 일병도 달았어.
<Poolgrim> /뿌듯
<Poolgrim> 이번엔 내가 물어본다.
<풀그림> 전출 온 곳에서 지내는 거 물어보게?
<Poolgrim> ㅇㅇ 전에 지내던 곳하고는 달라?

그러고보니 저번엔 얘기하지 못 했었다. 하긴, 바로 저번엔 싸우다가 끝났으니 대화가 이어질 턱이 없긴 했다.

<풀그림> 꽤 많이 달라. 일단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지내고 있고, 당연하지만 주변 사람도 싹 바뀌었지. 할 일도 늘었고.
<풀그림> 무엇보다 아는 분이 초고속 승진하더니 날 너무 심하게 굴린다.
<Poolgrim> 힘들겠구만.
<풀그림> 딱히 위로 받고 싶은 건 아닌데.
<풀그림> 술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으니까 뭐.
<Poolgrim> 제기랄, 부럽네 그거.
<Poolgrim> 그런데 전에 있던 곳에서는 못 먹었어?
<풀그림> 못 먹게 하지는 않았지.
<풀그림> 그런데 우리 기지관리자님이 직원들 술 먹는 걸 별로 안 좋아 하시거든.
<Poolgrim> 왠지 알 것 같다…
<Poolgrim> 말 나온 김에 지역사령부 직원 분들 얘기 해 줄 수 있어?
<풀그림> 아, 저번에 못 했었지.
<Poolgrim> 팝콘 장전.
<풀그림> 자, 누구부터 시작할까?
<Poolgrim> 높으신 분 부터?
<풀그림> O5분들은 나도 모르는데.
<Poolgrim> 너무 높잖아 임마
<풀그림> 그럼 노래마인님하고 빅터 박사님 말 하는 거겠네.
<풀그림> 우선 노래마인님 부터.
<Poolgrim> 히얼 위 고
<풀그림> 딱히 할 말은 없는데.
<Poolgrim> 그렇게 어려워?
<풀그림> 아니, 모든 분들하고 친하신데다 일도 잘 하셔서. 딱히 뭐라고 콕 집에 말 할 특징이 없으셔. 온갖 괴인들만 모여있는 지역사령부 내에서도 유별나게 평범하셨으니까.
<풀그림> 대신 어떻게 된 건지 케이크 포식자, 케이크 학살자, 케이크 위에 올라 선 자 등등이 되셨음.
<Poolgrim> 왜 죄다 케이크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오죽했으면 그 미친듯이 불어나는 케이크 중에서 10%를 혼자서 처리하신다는 소문도 돌겠어.
<풀그림> 물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주일은 기지 전체에 금주령이 떨어질 거야.
<Poolgrim> 또 해줘 또.
<풀그림> 이 기회에 빅터 박사 뒷담화나 까야겠다.
<풀그림> 전직 군인이었던 양반이라 그 때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어. 군복에 군화 위에 가운이라니. 옷 입는 게 그게 뭐야.
<Poolgrim> 사시사철 칠부바지에 슬리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안 되는 듯.
<풀그림> …
<풀그림> 아무튼.
<풀그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3등급 이었는데 어느새 4등급으로 승진했더라고. 무서운 양반이야.
<풀그림> 행동은 좀 별로인데 겁나 유능해서 상부로부터 신뢰도 많이 얻나 보더라. 난 모르겠지만.
<Poolgrim> 오케, 다음 분.
<풀그림> 샐(리)님은 뭐 알고 있을테고.
<Poolgrim> ㅇㅇ
<Poolgrim> 그런데 내가 입대 한 사이에 작가 페이지를 수정하셨더라고. 원작자 분 회원 페이지에는 더 이상 샐(리)라는 자캐가 없어.
<풀그림> 이게 그거랑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풀그림> 사실 샐(리)님이 다른 기지로 전출 가셨거든. 연구 지원 차 가셨다는데 잘은 모르겠어. 그래도 지역사령부와는 계속 연락하신다고 하시니까.
<Poolgrim> 데반님은 어때?
<풀그림> 글쎄, 뭐라고 해야 하지.
<풀그림> 좀 무섭다고 해야 하나(…) 그냥 왠지 그래. 평소에는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장난도 치시고 그러시는데, 업무만 보시면… 어우, 무서워.
<풀그림> 자, 다음 질문?
<Poolgrim> 스카님은?
<풀그림> 아, 스카님. 장난 아니시지. '이 달의 우수 직원'에도 몇 번 뽑히셨고, 작업량도 엄청 많으셨어.
<풀그림> 평행 차원 관측 부서에서 자주 일 하시는데, 여기가 엄청 빡세거든.
<Poolgrim> 일이 그렇게 많아?
<풀그림> 아니. 그 부서가 하는 일이 평행 차원의 재단과 접촉하고, 해당 세계의 재단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를 관측하는 거야.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를 보고 기록한다고 해야 하나. 예방차원이지.
<풀그림> 그런데 이게 뇌에 영향을 많이 주거든.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만 가서 접촉하다 보니까 부작용이 심해. 현실 교란 증세도 보이고, 감정 기복도 심해져. 그래서 여러명이 번갈아서 할 수 밖에 없어. 스카님은 참여 횟수만 따져도 최상위권에서 머무르시고.
<풀그림> 물론 그건 예전 얘기고.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쉬고 계셔.
<Poolgrim> 갑자기 왜?
<풀그림> 누구든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어? 나도 딱히 물어보진 않았어. 개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풀그림> 에이, 다른 얘기 하자.
<Poolgrim> 물꼬기님? 그 분은 어때?
<풀그림> 음.
<Poolgrim> 여보세요?
<풀그림> 솔직히 말 해서
<풀그림> 나보다 더 이상하게 생기셨어(…)
<Poolgrim> …
<풀그림> 비린내도 좀 나는 것 같고.
<풀그림> 젠장, 미안해요, 물꼬기님. 나 한테 엄청 잘 해주셨는데.
<Poolgrim> 서로한테 상처구만 이거.
<풀그림> 다음 사람은 내가 정한다.
<Poolgrim> 그러시던가.
<풀그림> 게라닐 박사 알아?
<Poolgrim> 아니.
<풀그림> 빅센 연구원은?
<Poolgrim> ㄴㄴ

몇 명의 이름을 말 했지만 그는 한 명도 몰랐다.

<풀그림> 정작 내 동기들은 모르는구나.
<Poolgrim> 너도 내 동기들 모르니까 쌤쌤 아닐까.
<풀그림> 그러네.
<풀그림> 내 동기들 얘기가 제일 재밌는데. 아쉽네.
<Poolgrim> 모르는 사람들 얘기도 나쁘진 않은데.
<Poolgrim> 그걸로 아이디어 얻을 수도 있잖아?
<풀그림> 까짓거 썰이나 왕창 풀어 볼까?
<Poolgrim> ㄱㄱ

그렇게 두어시간은 신나게 떠들었다. 다리 다쳐서 난생 처음 깁스 한 썰, 선임 박사에게 말 실수 했다가 아직까지 놀림받는 썰, 기타 나 혹은 동기들의 바보 짓. 그는 군대와서 쌓인 한이 많았는지 묵었던 얘기를 잔뜩 풀었다. 군대 얘기가 그리 재미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어떠했을지 상상의 여지가 되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내가 입대했다면, 군생활 더럽게 못 했을 것이다.


슬슬 대화가 늘어지고 있었다. 썰도 밑천을 드러냈고, 마칠 때가 되었다.

<풀그림> 이번에 휴가 복귀하면 또 언제 나옴?
<Poolgrim> 아직 계획에 없는데.
<Poolgrim> 아마 11월 말?
<풀그림> 허, 그때까지 거기서 썩는 거야?
<Poolgrim> ㅇㅇ 맘껏 불쌍해 해라
<풀그림> 개같이 군생활해서 정승마냥 휴가 써야지.
<Poolgrim>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
<Poolgrim> 으아, 복귀하기 싫어진다.
<풀그림> 힘 내 임마.
<Poolgrim> 참, 다음에 외박 나오면 지금 대화로 테일이나 쓰려고 하는데, 어때?>
<풀그림> 마음대로. 나한테 지장만 없다면야.
<Poolgrim> 그런데 내가 쓴 소설의 대부분은 배드엔딩이라서.
<풀그림> 이런 미친.
<Poolgrim> "해피엔딩을 원했다고? 엿 먹어." 캬, 명언이지.
<풀그림> 살려줘 개객갸
<Poolgrim> 이 기회에 간만에 해피엔딩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풀그림> 그래, 가능하다면 내 짝도 좀 만들어 주고.
<Poolgrim> 내가 생긴다면 고려해 볼 게.
<풀그림> 제기랄, 평생 홀아비 냄새 풍기다 죽겠구만.
<Poolgrim> 그거 굿 아이디어.
<Poolgrim> 내가 생긴다면 고려해 볼 게.
<풀그림> 어억. 살려주세요.
<Poolgrim> 안 돼. 바꿔 줄 생각 없어. 돌아가.

분명 마무리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대화를 끊기가 힘들었다. 끊어진 대화는 다시 이어지곤 했다.


8월4일. 채팅 서버로 부터 로그가 하나 남겨졌다. 일 하기 있던 중이라 답은 하지 못 했다.

<Poolgrim> 간다. 11월에 보자.

답장을 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11월에 보자고, 친구.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