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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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 또 왔다.

<Poolgrim> 잊을 만 하면 돌아오는 풀그림이다.
<풀그림> 야, 네가 내 이름 말하니까 어색하잖아. 아무튼 반갑다.
<Poolgrim> 어색하면 닉네임 바꾸지 뭐.
Poolgrim님이 닉네임을 군그림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군그림> 쨘.
<풀그림> 군그림이라니.
<군그림> 마음에 드냐?
<풀그림> 센스 없는 건 여전하네.
<군그림> 젠장.
<풀그림> 게다가 헷갈려. 다른 걸로 바꿔 봐.
<군그림> 알았어.
군그림님이 닉네임을 Armygrim으로 변경하였습니다.
<풀그림> …
<Armygrim> 좀 낫네.
<풀그림> 이젠 뭐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Armygrim> 됐고. 진행 중이라던 프로젝트는 좀 어때?
<풀그림> 진행 속도가 좀 느려지긴 했어도 큰 차질은 없어. 상부에서 쪼이는 것도 견딜 만 하고.
<풀그림> 요즘엔 다른 이유로 힘 들어 죽겠다.
<풀그림> 우리 기지 관리관이 날 너무 굴려먹어.
<Armygrim> 빅터 박사? 전부터 그랬잖아. 뭘 새삼스럽게.
<풀그림> 갑자기 나한테 군사 훈련을 시키잖아.
<풀그림> 아니 나 말고도 기지 인원 전체한테.
<Armygrim> …
<풀그림> 미치겠다 진짜. 체력단련은 기본에다가 총까지 쐈어. 그 와중에 스무발 중 16발 간신히 맞춰서 더 이상은 총은 안 만져도 된다.
<풀그림> 이 양반 왜 이랴…
<Armygrim> 내 고통을 알겠냐.
<풀그림> 육체적 고통은 알겠다.
<풀그림> 그래도 제설은 안 시키니까.
<Armygrim> 제설도 했었어?
<풀그림> 다른 직원들은 가끔 하더라고. 우리 기지 앞은 우리가 치우자면서.
<Armygrim> 뼛속까지 군인이구만.
<Armygrim> 전직 군인으로 잡긴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풀그림> 빅터 박사도 네 자캐야?
<Armygrim> 일단은.
<풀그림> 대체 자캐를 몇 명이나 만든 거야?
<Armygrim> 음. 다섯 명?
<풀그림> 이 기지로 내 친구 한 명도 전출 왔던데.
<풀그림> 고등학교 동창이거든? 얘도 네 자캐야?
<Armygrim> 고럼.
<풀그림> …
<풀그림> 문어발 사업이냐. 아이고.
<풀그림> 야, 밖에 눈 온다는데.
<Armygrim> 어라, 진짜네.
<Armygrim> 내 동기들 신나게 눈 치우고 있겠네.
<풀그림> 흠.
<풀그림> 똑 똑똑 똑
<Armygrim> 눈사람 안 만들어 개객갸.
<풀그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mygrim> 언제 적 드립이야 그게.
<풀그림> 추억이지 추억.
<Armygrim> 그건 그냥 유행이 지난 거지.
<풀그림> 낭만이 없네.
<풀그림> 잠깐만 잠수 좀.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에 알람이 떴다. 채팅 서버로 초대하는 알람이었다. 보낸 이의 이름에는 Silence라는 사람이었다.

<풀그림> 넵, 무슨 일 이시죠?
<Silence> 지난 번 변칙 현상에 관한 건 입니다.
<Silence> 11월자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난 달 대비 현상의 평균 발생 빈도가 0.5% 증가 했습니다.
<Silence> 현재까지 현상 발생 빈도의 증감수준이 0.2% 내외 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큰 폭입니다.
<풀그림> 격리예산 감소 건과 같이 보고하면 되겠네요. 수고하셨어요.
<Silence> 바쁜 일 이라도 있으신 것 같네요.
<풀그림> 바쁜 건 아닌데. 일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풀그림> 오랜만에 연락 닿은 친구랑 대화하고 있었어요.
<Silence> 근무태만입니다.
<풀그림> …죄송합니다.
<Silence> 농담인데.
<Silence> 저녁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Silence> 수고하십셔, 캡.

채팅서버를 나와 다시 휴가나온 친구가 있는 서버로 돌아왔다.

<풀그림> 오래 기다렸지?
<Armygrim> 일 하느라 바쁠텐데 이해 해야지.
<Armygrim> 썸 타는 여자랑 일 하는 것도 아닐텐데.
<풀그림> …
<풀그림> 미안.
<Armygrim> ?
<Armygrim> 설마?
<Armygrim> 마사카?
<풀그림>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듯.
<Armygrim> …

그는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몇 분이 지나서야 돌아온 대답은 온갖 욕으로 뒤범벅 되어 있었다.

<Armygrim> 네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
<Armygrim> 날 배신하고오오오오오오오오
<풀그림> 미안 하다니까…
<Armygrim> 창조주가 모쏠인데 피조물이 나보다 먼저 썸을 타?
<Armygrim> 제정신이냐!
<Armygrim> 얼굴을 갈아 만든 고기쉐이크 마냥 생긴 놈이!
<풀그림> 야 너 말이 좀 심하다?
<Armygrim> 닥쳐 얼굴 겁나 혼란스럽게 생긴 놈아
<풀그림> 넵.
<Armygrim> 와, 진짜.
<Armygrim> 내가 미쳤지.
<Armygrim> 미쳤다고 그딴 설정을 세웠어.
<Armygrim> 확 지워 버릴까.
<풀그림> 뭔데. 설명이라도 좀 해 봐.
<Armygrim> 내가 대리만족 하겠다고 자캐 5인방중에 썸녀를 만들어 버렸어야.
<Armygrim> 진짜 갈아 엎어버릴까.

안돼.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나는 그녀와 친한 직장 동료일 뿐이며, 서로 편한 친구 같은 사이일 뿐, 네가 생각하는 불순한 건 없다고.

<Armygrim> 그러냐.
<풀그림> 물론이지. 네가 생각하는 앙힝흥행한 그런 건 없어. 절대.
<Armygrim> 그래. 믿어야지.
<Armygrim> 그러니까 자세히 말 해봐.
<풀그림> 진정하고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Armygrim> ㅇㅇ
<풀그림> 일단 그 사람 이름이 '침묵'요원이야. 당연히 본명은 아니지.
<Armygrim> 그건 나도 알지. 내 자캐인데 내가 모를까.
<Armygrim> 예쁘냐?

뒤를 돌아보았다. 개인 사무실에는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풀그림> 객관적으로 봐도 미녀는 아님. 명백하게. 대신 거칠게 자른 단발이 잘 어울리는 정도?
<Armygrim> 너 말 할때 뒤돌아봤지? ㅋㅋㅋㅋㅋㅋㅋ
<풀그림> 에이, 들켰네.
<풀그림> 아무튼 이 기지로 전입오고 얼마 후에 처음 만났어.
<풀그림> 정확히는 변칙 현상 조사 때문에 잠깐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지.
<풀그림> 전엔 기동특무부대 소속이었는데 사고 후에 소속을 바꿨다더라고. 사고 후유증 때문에 말을 못 하셔. 실어증은 아니고 목에 문제가 생겼다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어. 안 물어보기도 했고.
<Armygrim> 그래서 이름이 침묵이야?
<풀그림> 원체 말 수가 적은데다 목표를 한 방에 보내버리니까 코드네임을 그렇게 붙인거래. 그런데 사고 때문에 진짜 말을 못 하게 된 거야. 그래서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코드네임은 한 번 부여되면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바꿀 수 없거든.
<Armygrim>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풀그림> 소음기에서 이름을 따서 '소은'양 정도? 여성 이름이기도 하고. 당연히 가명이지만.
<Armygrim> 너도 그렇게 불러?
<풀그림> 서로 친해서 다른 별명으로 불러. 나는 뮤트(mute) 라고 부르고, 침묵 요원은 지 캡틴, 아니면 캡이라고 불러. 각자 트라우마를 편하게 부르는 거지.
<Armygrim> 젠장, 설탕이 가득해. 달달해서 버틸 수가 없다.
<풀그림> 원래 좀 오글거리게 노는 걸 좋아해서.
<Armygrim> 이따구로 하면서 친한 직장 동료?
<풀그림> 야 잠깐 얘기가 왜 그렇게 가냐.
<Armygrim> 죽인다. 둘 다 죽인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뜯어 말렸다. 그 와는 그렇게 놀아야 재밌으니까. 어쩌면 장난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음, 아주 약간.

<풀그림> 아, 맞아. 어제 잠깐 무진시 갔다 왔어.
<풀그림> 진짜 안개로 뒤덮여 있더라고.
<풀그림> 무진시 가 본 적 있어?
<Armygrim> 아니.
<풀그림> 나중에 가 봐. 거긴 변칙현상도 없어서 좀 심심하겠지만.
<Armygrim> 여긴 무진이 없는데.
<풀그림> …?
<풀그림> 진짜?
<Armygrim> ㅇㅇ
<Armygrim> 무진은 소설에나 나오는 곳이란 말야.
<Armygrim> 나도 진짜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풀그림> 이게 SCP-964-KO와 연관이 있으려나.
<Armygrim> 아, 그 네비랑 지도 등등?
<풀그림> 응.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거든. 무진을 인식 못 하는 현상일 뿐인지, 아니면 평행 우주를 한 번 거치는 건 지. 아니면 무진시 자체가 통째로 다른 공간인지.
<풀그림> 생각 해 보면 무진시에 변칙 요소가 많은 편이긴 해. 땅덩어리도 좁은 나라인데 무진시에만 변칙 요소가 몇 가지는 되니까.
<Armygrim> 문득 궁금한건데, 나랑 대화 할 때 뭔가 알게 되면 보고서에 반영 해?
<풀그림> 진짜 그럴 듯 한 거 아니면 안 함.
<Armygrim> 왜죠?
<풀그림> 생각 해 봐. 만약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걸 실험하거나 적용한다 치자. 그러려면 상급자를 거쳐야 하는데, 상급자가 '어떻게 이런 가설을 세우게 되었나'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풀그림> 네, 평행 우주 사는 친구가 알려줬어요, 할 수도 없고.
<Armygrim> 그러네. 아이고, 복잡해.
<풀그림> 너랑 대화하는 지금 이 상황도 아직까지 이해 불가인데 다른 가설이야 오죽하겠어?
<Armygrim> 그건 또 그렇네.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지다가 끝이났다. 그는 3월에 다시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 때는 내가 바쁠지도 모르겠다.
기지 밖으로 나가 보았다. 눈이 그쳤다. 햇빛이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다.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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