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너머에-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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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풀그림이."

상사의 잔소리는 언제나 속이 뒤틀린다.

"자네 요즘 성실하지 못하다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말이야."

그것이 마주하기 어려운 상사가 하는 소리라면 더더욱. 하지만 어려울 것은 없다. 매뉴얼대로 행동한다. 왼손이 위로 가게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고개는 전방을 유지하되 시선은 상사의 넥타이를 향하게 약간 아래로. 윗입술을 살짝 문다. 최대한 자살 직전의 표정을 유지한다. 긴 말은 하지 않는다. 어떠한 말을 해도 상사에겐 변명으로 들릴 테니까.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 상사의 말과 내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내 업무는 효율적이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유 없이 같은 실험을 몇 번씩 반복한다던지, 보고서를 제 때 제출하지 못한다던지, 심지어는 보안 규정을 어길 뻔 한 적도 있었다. 솔직히 원인은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 부터 그랬다. 일에 흥미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흥미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니까.

"슬럼프라도 걸린 건가, 뭔가?"

"아마도…"

상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휴가 심의서로 보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잠깐 쉬었다 오는 것도 나쁘진 않아."

그는 서류 곳곳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휴가 심의서일 확률이 좀 더 올랐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마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올 뻔 했다.

"간혹 오해를 하는 게 있는데, 거기도 업무 환경은 괜찮거든."

뭐?

"마음 편하게 쉬다 온다고 생각 하라고."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천천히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머릿속을 관통했다. 관통한 글자는 문장이 되었고, 곧 머릿속을 멋대로 뒤섞어 놓았다.


상사에게 상담을 받고 온 이후, 도저히 일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작자가 내게 건낸 것은 휴가 심의서가 아니었다. 출장 심의서였다. 말이 좋아 출장 심의서지, 일정 기간 전출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씁쓸한 심정을 뒤로 하고 컴퓨터를 켰다. 화면 왼쪽 아래에 현재 SCiPNET에 접속 해 있는 인원을 확인하는 아이콘이 있었다.

위로라도 받으려고?

순간 떠오른 생각에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부정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위로 받고 싶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긴 하나, 위로 받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위로도 필요 없었다. 그저 편하게 대화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쌓이고 쌓여 만년설 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스트레스를 푸는 일은 그걸로 충분했다.

누가 잔소리라도 할까 봐?

아이콘을 눌렀다. 접속한 인원은 없었다. 채팅방은 볼 것도 없었다.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스트레스 받는다."

전출까지 2주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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