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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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월 7일, 날씨는 매우 맑다.
정확히는 지하실천장 벽 아래에 달린 조그만 디지털 화면이 그렇게 설명했다. 재단직원들 사이에선 100% 랜덤으로 돌려서 나온 일기예보란 오래된 음모론이 돌고 있지만, 어쨌든 연구원M은 기지의 유일한 일기예보에 맞춰 충실히 맑은 하늘을 떠올렸다. 숙취에 찌든 머릿속을 정화하는 데는 그러는 편이 좋았다.

일기예보가 영 틀린 것은 아닌 게, 그녀는 기지 내에 붕 뜬 듯한 분위기를 맡을 수 있었다. 요원들은 제각기 팔다리에 부상 하나씩을 매달고 어두운 얼굴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풍선껌이 둥둥 떠다니고 설탕가루가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새로 들어온 SCP가 말썽을 일으켜 몇 달 동안 부서지고 폭발하길 밥 먹듯이 했던 기지는 경계태세가 주황으로 안정되어-심지어 오전 2시엔 약 17초 동안 녹색이었다. 물론 17초간의 광란의 난동이 있었다. 그녀가 참여한,- 간만에 모든 연구원들이 한결 가벼운 어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구원M 또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농땡이를 피울 수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하늘색 상자를 손에 쥐고 책상에 톡톡 두드렸는데 다른 연구원들은 업무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는지 아니면 피곤에 찌들어 졸고 있는지 그녀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아니면 건너편 휴게실에서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풍악과 노랫소리에 소음이 묻힌 것일 수도 있다. 후자가 가능성이 크겠군. 연구원M이 술기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아직 생일파티 시작안한 거 아니었어요?"

"이제 곧이지."
커피한잔을 들고서 다가온 선임연구원이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본인 또한 녹색경보-17초간의-기념으로 오늘 새벽 거하게 들이켰음을-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에 M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1초라도 더 놀려고 애쓰는 건데 봐줘야지."
생일파티장 꾸미기를 맡은 몇몇이 들뜬 분위기에 홀랑 넘어가버린 모양이었다.

"피곤해죽을 것 같아요."

"그렇겠지. 어제보단 오늘이 진짠데 말이야. 어제 엄청 퍼마시더군.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녹색이었잖아요."

M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하늘색 상자를 꽉 쥐었다. 선임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M은 그게 좀 아쉬웠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오늘은 생일파티가 있잖아."

재단은 축제를 좋아했다. 그리고 생일은 축제였다. 삶을 축하하고, 웃고 떠들 수 있는걸 축하하고.
러브크래프트의 머릿속에서 기어 나온 듯한 죽음의 위협들을 상대하려면,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는 노력도 보통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 재단 사람들은 대부분의 기념일에-달력의 바닥까지 바득바득 긁어서 기념일들을 찾아낸 다음-온갖 구실을 붙여서 파티를 벌이곤 했지만, 생일은 언제나 더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특히 중요한 사람들의 것은. 때문에 이쪽 기지가 건설된 후 처음 맞는 생일파티에 몇몇 요원들은 시작부터 광란을 예고했다.


하루 종일 엎드려서 토할 것 같다고 시늉하는 M을 아랑곳하지 않고 질질 끌고 가는 선임에 매달려 도착한 파티장은 벌써 분위기가 무르익어있었다. 하기야, 재단의 축제는 언제나 무르익어있다.

HAPPY BIRTHDAY GRACE.오늘은 M의 까마득한 상사이자 이 자리에 모인 요원들 대부분의 상사인 그녀의 생일이었다. M의 목숨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가 오늘새벽에 거하게 마시고 죽지 않았더라면 M도 그레이스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리에 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을 것이다. 새벽에 녹색이 떴는데도-17초나!-얌전히 물러서던 요원들이 제게도 경고를 줬다면 말이다.

대신 그녀는 파티 멀찍이 구석으로 들어가 앉아있었다. 만에 하나 그레이스 앞에서 대놓고 실수하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그녀는 한손에 쥔 하늘색 상자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번쩍거리는 종류의 모든 안전등급 SCP가 불법으로 위장되어 축제를 빛내고-물론 그레이스에게 지적받았고, 범인은 곧장 칼 같은 징계를 받았다- 깨진 유리병과 잔이 자글자글 짓밟힌 바닥에 뒹구는 요원들이 노래하며 마이크가 올리브 대신 꼬치에 꿰여 취객들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우퍼 몇 개가 취한 젊은 연구원들의 발길질에 박살나는 광경'을 구경했다. 최소한 후자는 축제를 좀 더 조용하게 만들었고 아직 제정신인 요원들만 광란의 현장에서 조금 옆으로 비껴나 모여 놀고 있었다.

"그거 선물상자야?"

마침내 누군가 물어봐줬군. M은 옆을 바라보았다. 다른 부서인지 처음 보는 요원이 다가와 있었다. M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술에 취해 그녀 옆의 선인장에 말을 걸고 있는 건지 아님 기적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한 채 친목을 도모하려는 요원인지 살폈다.
"네."

"이상하다니까." 요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뭐가요?"

"다들 선물은 귀신같이 일찍 준비해놓고 주느니 마느니 고민하고 있거든. 부끄럽다고 말이야."

"네?"

"내 동료 중에도 너 같은 놈이 있다니까. 간단한 편지를 쓰는데 백번은 찢지를 않나.. 평생 연구만 하던 놈들이라 그런지 이상한데서 숫기가 없어."

M은 상대방의 오해를 고쳐주었다.
"이거 관리자님 선물 아니에요."

"어? 생일 선물 아냐?"

"생일 선물은 맞는데.."
못이긴 척 센티멘탈한 기분에 젖어 처음 보는 사람에게 2월 7일의 생일선물 상자에 얽힌 자신의 숨겨진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려던 M은 뜨악한 표정의 요원을 보고 당황했다.

"왜, 왜요?"

"그게…"

요원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레이스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내 친구에겐 효과가 있었거든. 미안." 입안에 위스키를 털어놓고 도망치는 요원을 바라보다 M은 그레이스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레이스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르게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조명 탓인지 취기 탓인지, 아니면 하늘높이 쌓인 애정 어린 선물들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은 한결 부드럽고 앳되어보였다.

"절 찾으셨다구요."

"아 그게-저기,그…"
그제야 M은 숙취에 벌벌 기느라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없는 선물 때문에 까마득한 아랫등급이 관리자를 직접오라고 불러내기까지 했다는 것을. M은 버벅거리다 가장 쉬운 해결책을 선택했다.

"생일 축하드려요."
그녀는 하늘색 선물상자를 건넸다. 그레이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웃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건 받지 않을게요."

"네?"

"그거 동생 선물이잖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 주에 인사관리보고서를 갱신했답니다. M 밑에 세살터울의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평소에 미워하고 괴롭혔었지만 갑자기 철이 들어서 마침 2월 7일이 생일이고 앞으로 잘해볼 겸 선물을 샀는데 순전히 M의 잘못으로 SCP가 얽힌 불의의 사고로 끔찍한 일을 당하고 가족들은 기억이 지워져서 동생에 대해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그래서 우울증과 죄책감에 매년 2월 7일마다 술독에 빠져서 산다든가하는 기지에서 267번째로 기구한 사연이었죠. 제 생일이랑 똑같아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M은 얼굴을 감싸 쥐고 민망해서 끙끙거렸다.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그레이스는 살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역시 왁자지껄한 분위기인지 아니면 산처럼 쌓인 애정 어린 선물 때문인지 생일파티가 만들어낸 미소는 평상시보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선물 꼭 받아주세요. 정말이에요.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라서 죄송해요."

그레이스가 얼떨떨하게 M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동생과 같은 생일을 가진, 괴로운 추억에 사로잡힌 저를 다정히 위로해준 상냥한 그레이스에게 동생의 선물을 줌으로써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하는 이기적인 플롯이 되거든요."

"에잇, 알았어요. 그러면 다음번엔 제대로 된 선물을 주세요."
그레이스는 깔깔 웃으며 선물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M의 속쓰림과 두통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파티장-으로 개조되어 박살난 식당-을 빠져나와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마실 거리를 찾아다녔다. 파티요원들이 정수기 대부분에 술병을 통째로 꽂아놓은 상태라서 꽤 어려운 일이었다.

사무실마다 멀쩡한 정수기가 있는지 찾아다니다가 M은 격리구역 환기구에서 또다시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곧장 모니터실로 들어가 보니 감시 요원 둘이 이미 죽어있었다. M은 이걸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보안프로토콜이 자동 상향되는 것을 잠시 지연시켰다. 그녀는 당장 가서 벽에 달린 크고 예쁜 빨간 버튼을 누른 뒤 긴급방송을 공지해야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녹색경보도 17초나 울렸고 생일파티도 그럭저럭 즐겼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그녀는 버릇대로 하늘색 선물상자를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그레이스.
생일 축하 합니다.

어쨌든 눈앞에 죽어있는 요원 둘만 빼자면, M은 기지에서 유일하게 그레이스에게 -제대로- 선물을 주지 않은 사람일 터였고 그레이스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그걸 신경 쓸 거였다.

M은 규약 진행을 세 시간 뒤로 맞춰놓고, 격리구역 아래로 내려갔다. M은 어쨌든 자신이 세 시간 정도는 이 까탈스런 SCP를 돌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SCP를 완전히 안정시키거나 문제를 해결한대도 두말할 것 없이 1,2등급 강등에 진급정지임은 틀림없었다. 사실 그건 그렇게 신경 쓰일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M은 파티장에서 들려오는 생일축하 노랫소리를 따라 부르며 쾌활하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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