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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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오지 않는 듯 오는 가느다란 빗줄기에, 카벤은 요원복의 후드를 뒤집어 썼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빗줄기 속에서 그는 놈들을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카벤 드웰러는 천천히 마을로 걸어 내려갔다. 온 몸에 무장한 보호장구와 무기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도 거대한 무게가 요동쳤다. 기지 2층에서 주워온 누군가의 배낭이었다. 정황상 그 누군가는 분명히 이를 쓰기도 전에 죽은 게 확실했다. 아님 좀비가 됐거나.

카벤은 그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꿍쳐넣었다. 재단 인원증, 자신의 노숙을 결정하게 된 경위가 담긴 인원 파일, 여분 옷 두 벌. 뿔뿔이 흩어져 다른 기지로 전근 가게 된 동기들과의 사진. 이사관실에서 발견한 아일랜드 이사관의 개인 서류. 그는 앞으로의 험난할 여정을 생각하면 뭔가가 더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없었고 마음은 급했다.

그는 어깨와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를 얻을 때마다 고통은 요란스럽게 찾아왔다. 동료와 상관의 숨통을 끊을 때도 예외는 아녔다. 그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죽은 이들의 환영을 망막에서 내몰았다. 해야하는 일이었다.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친구가 아닌 변이체일 뿐이다. 적이다.

'애처롭군요.'

머릿속에서 이마에 구멍이 난 하시니가 내뱉었다.

'결국 사람을 죽인 거잖아요.'

카벤은 듣지 않았다. 그는 기지 상비품 보관실에서 꿍쳐 온 재단 표준형 진정제와 비타민제를 입에다 털어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곧 끔찍한 쓴 맛이 혀를 비틀었다. 그는 입에 퍼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하시니와 아일랜드 이사관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고통은 탁월한 망각제였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빗소리만이 유일한 마을의 소리였다. 카벤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마을의 광장에 발을 디뎠다. 음울한 빗소리는 마을의 섬뜩한 공허를 부각하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가 범벅이 된 마을 분수에는 청동 소년상이 있었다. 소년상은 웃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입 주위가 피에 젖어 있었다. 빗줄기가 그 피를 씻어내리고 있었다. 카벤은 분수대 안에 있는 시체가 못해도 다섯 구는 되리라고 짐작했다. 이따금 움찔거리는 걸 제외하면, 시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주위의 작은 아파트들도 기괴한 분위기는 비슷했다. 창문이 여럿 깨져있었고, 복도 창문으로 보이는 안은 광장과 다를 바 없이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가끔 아파트 아래에 추락한 사람의 시체도 시야에 들어왔다. 까마귀가 비에도 개의치 않고 그 위로 날아와 시체의 눈알을 파먹었다.

카벤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겉에 걸친 트렌치 코트에서 손도끼를 꺼내 꼬나들었다. 어디서 뭔가가 나타날 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대한 마을을 빨리 빠져나가는 것으로 마음 먹었다. 총알과 체력은 언젠가는 다 떨어질 소모품이니, 불필요한 낭비는 사치였다.

그 결심이 무색하게 아파트 저편에서 비척거리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남자였다. 운동을 한 듯 체격이 건장했고, 일이 좋게 돌아갔더라면 인기를 끌었을 법한 준수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턱만 부서져 비틀리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완벽했을 것이다.

놈은 카벤을 발견했고 으르렁거렸다.

카벤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그쪽은 뭐하는 사람인가?"

곧장 싸움이 시작됐다. 남자는 카벤을 향해 달려들었고, 카벤은 피하지 않았다. 되려 여유로이 거리를 가늠했다. 재단 표준형 진정제는 단순히 흥분과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뿐 아니라 전투의 능률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손도끼의 날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카벤의 오른손이 왼팔 아래로 향하더니, 다시금 빠르게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남자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당연한 결과로, 그 속도 그대로 도끼날을 얼굴로 받아버렸다.

카벤이 눈의 초점을 맞추었을 때, 이미 괴물의 얼굴에 손도끼가 깊숙히 박혀 있었다. 놈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지만 이미 그 힘을 잃은 투였다.

카벤은 도끼에서 손을 뗐다. 왼손으로 상냥하게 남자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도끼를 후려쳤다. 억센 팔이 앞 뒤로 진자 운동을 했다. 카벤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힘을 유지하지 못하면 도끼는 두개골을 갈라낼 수 없다.

주먹이 날아갈 때마다 남자의 입에는 형태를 이루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벤은 개의치 않았다. 곧 왼손마저도 떼어냈다. 그리고는 한발 물러나, 세차게 남자를 걷어차 바닥에다 쓰러뜨렸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머리뼈 깨야하니까요." 카벤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날과 이어진 도끼 자루 부위에다가 끊임없이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날아갈 때마다 남자의 신음 소리는 작아지고, 카벤이 내는 기합 소리는 커져갔다. 퍽 하는 갈라지는 소리가 광장에 퍼져나갔다. 마침내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카벤은 농부가 벼를 수확하듯 좀비의 얼굴에서 도끼를 빼냈다. 도끼는 B급 코미디 영화의 효과음처럼 뽁 하는 소리와 함께 빠졌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네 정말로 미쳐가는군.'

가상의 남자가 카벤의 뒤에서 시체를 넘어다보며 말했다. 카벤은 뒤를 돌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봤자 얻는 건 회의와 정신 건강에 대한 걱정 밖에는 없을 것이다. 턱 위가 날아간 채로 말하는 이사관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을 죽여 놓고 웃어.'

"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일랜드." 그는 침을 뱉었다. "내 머릿속에서 당장 꺼지세요."

둘은 침묵에 잠겼다.

카벤은 코트에서 휴지를 꺼내 도끼날을 닦은 다음, 다시 허리춤에 찼다. 갈 길은 아직 멀었고, 해는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지만 비가 와서 온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빨리 마을을 나가야 한다. 나가서 온전한 기지에 가, 도움을 요청해야한다. 이 사태를 진압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재단뿐이었다. 그는 코트 자락을 정돈하고 쓰러져 있는 좀비의 몸을 뒤로 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돌아왔다. 얼굴에는 석연찮다는 기운이 가득했다. 카벤은 허리춤에서 다시 도끼를 끌렀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야 했으니. 그는 곧장 도끼를 내리쳤다. 바람을 가르는 금속의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빠른 속도로 하강한 도끼날이 좀비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했다.

꽤 중요한 일이었다. 수많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는 이런 일이 또 화근이니까. 적어도 카벤은 그렇게 생각했다. 카벤은 이 과정에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을 저편에서 수십 명의 좀비가 더 달려오기 전까지는. 카벤은 자갈 바닥을 울리는 굉장한 소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씨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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