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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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벤 드웰러는 숨을 헐떡이며 숲이 끝나는 길에 발을 디뎠다. 밤이 다 된 지경에서 나타난 도시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남아 있는 장비들을 확인했다.

총알, 거의 다 떨어짐.

의료품, 연고 빼고는 많이 안 씀.

도끼, 날이 살짝 나감.

몸, 축축 처지고 온몸이 쑤심. 숨은 머리끝까지 차올랐고 눈꺼풀은 뻑뻑해서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을 것 같음. 한 마디로, 쓰레기.

카벤은 걸음을 옮겼다.

도시 외곽은 불 꺼지고 낡은 건물로 가득했다. 중소 도시의 안온하고 선선한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카벤은 폐허 사이를 걸어 다니며 건물 안에서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거주자인지 노숙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비슷한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카벤은 추측했다. 하루 만에 전쟁이라도 일어난 게 아니라면.
소위 ‘좀비’들이 공격해오면서 패닉 상태에서 총을 갈겨대는 인간들이 분명 생겨났으리라. 시체가 일어나 날뛰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나 이성을 잃은 그들은 산 사람마저도 맞췄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건물은 맞췄을 거란 사실. 그는 건물들 곳곳에 나 있는 일련의 바람구멍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황은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웰러는 슬그머니 가까운 집 안에 불을 피우고 있는 무리에 다가갔다. 무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두루 섞여 있었고, 나잇대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는 이들이 가족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모인 사람들의 집합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났는지 알리라.
어디선가 시계라도 고장 났는지 끊임 없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카벤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고, 턱수염이 무성했으며, 어딘가 광택이 이상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꾀죄죄한 야상이 어둠에 깔려 더욱 더러워 보였다. 어두침침한 주택 안에서 일렁이는 불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해서," 남자가 기계음을 연상케 하는 뒤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원하시우?"

남자가 묻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셋, 남자가 턱수염을 포함해서 넷. 여자는 젊은 사람이 둘이었고 노파가 하나였다. 남자는 턱수염을 제외하면 다 젊었다. 아니, 젊다기보단 어리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나잇대였다.

"같이 불 좀 쐽시다." 카벤은 짐짓 턱수염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경계를 무시하며 말했다. "밤도 깊어 가는데."

예상 외로 그들은 카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내심 당황했지만, 능글맞은 척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두 손을 불가에 내밀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카벤의 머릿속에서 1차 경보음이 울렸다. 어딘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피부를 타고 전신으로 전달되었다.

"형씨." 침묵을 깨고 턱수염이 카벤에게 말을 걸었다. "연락을 받고 오신 게로구만?"

"어…" 카벤은 자연스럽게 굴기로 했다. "그렇죠."

"형씨는 어디서 왔길래, 거 이리 힘들어 뵈슈?"

"가까운 …어, 경호 시설에서 왔습니다. 선생님도 오전 나절에 겪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일이요."

턱수염의 턱이 당겨졌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도 사납게 굳어갔다. 카벤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은 더욱 커졌다.

"살덩이들의 수작이었지. 그렇지 않소? 죽은 이들의 살이 깨어나 지랄을 하는 사건이니, 당연히 그 배후가 누군지는 너무나 뻔했소."

"맞아요. 사르킥교도들이 드디어 교단에 선전포고를 한 거죠."

말없이 서 있던 젊은이 하나가 열정적으로 끼어들었다. 카벤은 놀라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 남자의 눈은 광택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눈이 구식 카메라의 렌즈였을 뿐이었다. 카벤은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턱수염은 그 행위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카벤에게 씨익 웃어 보이더니, 후라이팬 만한 거대한 손으로 카벤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씨는 읭읭… 아니, 맥스웰파인가 보오?" 턱수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이 안 고친 모양인데. 아, 물론 당황할 필욘 없소. 난 보다시피 정교 출신이지만, 총대주교님들의 전언도 있고 하니 굳이 화합의 명령에 분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어서."

턱수염은 변명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카벤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살덩이, 맥스웰파, 읭읭이.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단어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시 요주의 단체 오리엔테이션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적어도 간략하게나마는 이들이 말한 단어와 관련해서 뭔가를 들은 것 같은데, 그 뭔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씨 말고도 맥스웰파는 있소. 여기 레인 쿠퍼와 나오미 카마초Naomi Camacho, 저녁 나절에 왔소." 턱수염의 소개에 젊은 여자 둘이 카벤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얼떨결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 무언가가 떠올랐다.

'부서진 신의 교단!' 인체를 기계로 대체하고 기계를 숭상하는 종교. 카벤의 뇌리에 오리엔테이션 발표 자료에 수록된 사진이 스쳐 지나갔다. 입은 스피커로, 피는 수은으로, 피부를 청동으로 바꾼 기괴한 인간의 모습을 찍은 자료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그런 상태란 말인가.

불길이 거세지더니 화악 타올랐다. 그 바람에 카벤은 사람들의 자세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불이 타들어 가는 기름통 저편에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노파와 아까의 그 젊은이는 왼쪽 관자놀이에 톱니바퀴 하나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똑딱거리는 소음은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불길이 더욱 거세지자 노파와 젊은이의 몸이 더욱 잘 보였다.

젊은이는 팔이 어깨 말고도 옆구리에 세 개가 더 달려 있었고, 각각의 팔에서는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리 부위는 평범해 보였지만 카벤이 자세히 바라보니 작게 두 개의 돌기가 그의 장딴지에 있었고, 간헐적으로 그곳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결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노파의 눈구멍은 떼꾼히 없어져 있었고, 공허한 어둠만이 차 있었다. 그러나 카벤은 가끔 그 공허 사이에서 작은 뭔가가 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카벤과 인사를 나눈 두 여자는 플라스틱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피부에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이따금 기이한 빛이 이를 통과하자, 그 아래의 혈관이 빛났다. 빛은 아무래도 전신을 도는 모양이었다. 푸른색을 띄는 빛이 눈가를 지나고 망막을 지나며 발광하는 모습에, 카벤은 넋을 잃었다. 그들은 초현실주의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왔거나 실리콘밸리에서 탈출한 생명체 같았다. 일렁이는 불길에 한 여자의 미간이 뻥 뚫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카벤은 그만 봐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다른 두 청소년들은 겉보기에는 아무 특징도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불길에 드러나자 이마에 박힌 금속성의 무언가가 보였다. 어떤 도상인 듯 싶었는데, 카벤은 알지 못하는 표식이었다. 그들이 입을 까닥이거나 눈을 깜빡이는 등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그 주위의 얼굴 거죽이 마치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듯 오르내렸다.

턱수염이 카벤의 어깨를 턱 잡자, 그의 입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애써 막았다. 가까이서 보니 턱수염 역시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턱수염에 가려진 하관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턱,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카벤은 그 턱이 마치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져 흉부에 가 닿은 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턱이 아니라, 호스였다. 턱수염이 말할때마다 호스에서 쉬익 하고 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 밖에도 거대한 손, 건장한 덩치 등에서도 카벤은 개조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카벤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두번째 경고음이 머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아예 제대로 소개해주는 편이 피차 낫지 않겠수?" 턱수염은 어울리지 않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편이 낫겠죠."

"자, 저 쪽의 이마 깐 애들은 부서진 교단 출신. 이름은 각각 벤 코울리와 장… 뭐라더라?"

"몽파르나스, 그리고 장이 아니라 브루종이에요, 아저씨."

장이라고 불린 소년이 항변했다. 카벤은 놀람과 경계가 섞인 눈으로 두 청소년을 바라보았다. 그가 쳐다보는 것을 깨달은 그들이 짤막하게 목례했다.

"여기 노인 분이랑 이 청년, 그리고 나는 톱니바퀴 정교의 신자요. 노인분 성함은 올가 카맨스키, 이 친구 이름은 맥캔지 클라우드."

노파가 불길 위로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카벤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뒤이어 청년도 손을 내밀었다.

"어…" 카벤은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어느 손을…"

세 개의 손이 덜렁 나와 있는 꼴은 기이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러웠다. 맥스웰파, 나오미 카마초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거나 잡아주시면 됩니다."

클라우드는 모욕받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카벤은 조금 마음을 놓고 클라우드의 가운뎃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까 맥스웰파 여성분들은 설명했으니 됐고."

떨떠름한 표정의 레인 쿠퍼와는 달리 카마초는 밝게 웃으며 카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당혹감과 일말의 고마움에 휩싸여 덩달아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토마스 라르센이오. 노르웨이에서 왔고, 아실랑가는 모르겠다만 충실한 투쟁단원이지." 남자의 입가에 자랑스러움의 웃음이 깃들었다. "오늘 습격의 장(長)을 맡게 되었소. 형씨는?"

"…습격이요?"


"야."

루이즈 체호프는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우선 너무 오래 지쳐있었다. 온 몸에 졸음의 기운이 가득한 상황에서 일어나라는 건 과도한 요구였다. 둘째, 지금은 아직 눈꺼풀 위로 비쳐드는 불빛이 너무나 작았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루는 침대가 왜 이리 딱딱하고 차가운지 궁금했지만, 그걸 알겠다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야, 빨리 일어나 봐."

루의 정신은 저편에서 슬그머니 기어들고 있었다. 무형(無型)의 존재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날뛰었다. 복잡한 수식들, 고기 파이 만드는 법과 러버 덕, SCP-423, 제리, 존스, 그 버러지 같은 교회, 그리고 그 아이. 졸음을 가득 뒤집어 쓴 채로 루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앞에는 비틀린 갈색의 발이 있었다. 하품을 하며 루는 눈에 초점을 낮추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인상을 써가며 초점을 맞추고 보니, 썩어버려 구더기가 꿈틀대고 있는 발이었다.

괴물이 신음했다.

"아 씨바! 아!"

루는 필사적으로 몸을 구르고 기어서 좀비에게서 멀어졌다. 멀어지면서 좀비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생전에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을 법한 후줄근한 인상에 한 점 흠이 있다면 코부터 입까지 호를 그리며 찢어진 상처일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그 좀비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고 벽에 딱 붙어 으르렁댔다.

뇌진탕이 일었는지 머리가 띵했다. 루는 재빨리 뒷머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아까 얻어맞으면서 머리가 움푹 패이진 않았다. 혹이 났을 뿐. 그녀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대편 벽에 몸을 기댔다.
바로 옆에 흔들리는 손이 아니었다면 루는 계속 거기 붙어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그르륵대는 소리가 나자 루는 황급히 고개를 올렸다. 똑같이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괴물이 그녀를 향해 신음하고 있었다. 루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에서도 몸을 뗐다. 사방이 좀비로 가득했다. 벽에 몸을 붙이고 있는 좀비들은 마치 벽지라도 되는 것마냥 빼곡했다.

옆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 붉은 머리 여자 하나가 그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여자는 젊었고, 꾀죄죄했으며, 얼굴과 목에 멍이 들어있었고, 재단 교전용 바지를 입고 상체에는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내밀고 한 쪽 다리는 접혀 앉았고, 팔은 족쇄로 구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좀비들과 마찬가지로 벽에 붙어 앉아 있었다. 분명히 재단 인원이었다.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걔네 다 묶여 있어."

루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는 좀비들의 손목과 팔목을 보았다. 녹슨 족쇄가 그들을 구속하고 있었다.

"아."

한참 웃고 난 다음에 여자가 말했다. "너, 아주 웃기는 역할을 맡고 있네. 몸개그는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그쪽, 재단 인원이에요?" 루는 반쯤 쉬어버린 목을 가다듬었다. "그거 교전 복장이잖아요, 재단의."

"맞아. 관찰력이 좋네." 여자는 얼굴에 흐릿한 웃음의 흔적만을 남긴 채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는 넌? 재단을 아니 재단 인원인가… 아니면 다른 단체 소속인가? 이 좆같은 곳으로 끌려왔으니 사르킥교도가 아닌 건 확실하고."

"난 연구원이에요. 제376기지에서 왔고요."

"376?" 여자의 눈이 흐릿해지더니 곧 생각에 잠긴 투로 말했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당신 기지는 괜찮아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 이 좀비 같은 것들은 다 뭐고?"

여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불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할 웃음은 아니었다.

"…당신 진짜 재단 인원이 맞기는 해요?"

"맞아.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죽치고 있었지. 내가 웃은 이유는… 그냥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야." 여자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008이 퍼진지 벌써 수주가 지났는데 말야."

"008? 008이 뭔데요." 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SCP-140, SCP-1726 따위는 들어봤어도 한번도 008이라는 일련번호는 본 적이 없었다.

"아… 맞다. 그거 4등급 이상 열람이지."

여자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늘어졌다. 동시에 여자의 손목에서 덜컹하고 족쇄가 비명을 질렀다. 희고 가는 손목에 거대한 족쇄는 어딘가 너무 초현실적이라고, 루는 생각했다.

그런데 4등급 이상이라고?

"4등급 이상이에요?"

"뭐?"

"당신, 4등급 이상이냐고요."

여자의 곤란한 표정이 루의 집요한 입매와 대비되었다. 루는 애써 쑤시는 삭신을 일으켜 좀비와 맞닿지 않도록 여자에게로 기어갔다.

"너 되게 적극적이다."

"내 기지가 눈 앞에서 망했어요. 당신이라면 재단이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아서."

"망했다고?"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만… 아, 기억났다. 거기 그 826-423 교차실험 망한 기지잖아."

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떨었다.

여자는 한 쪽 눈을 찌푸리고는 신음했다. "좆됐네. 그 연구원도 죽었을거 아냐."

"어… 그거 전데요."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루를, 루는 여자를 바라보았고, 둘의 시선에는 조금의 의아함과 조금의 불신, 조금의 놀람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네가 그… 뭐라더라."

"맞아요, 내가 826 안에서 423을 만났고, 갑자기 발광한 동료가 또 다른 동료를 물었으며 그들이 프레드를 문 사건을 다 목격했죠."

여자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용케 잘 살아남았네."

"이제 당신이 좀 말해줄래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기까지 왔는지."

여자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 깜빡임에는 ‘내가 얘를 신용해도 될까?’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태초의 인간들이 서로를 한 대씩 후리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질문이었다. 모든 인류가 짊어지고 가야할, 고대서부터의 질문.

한참 뒤에 여자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둘은 동시에 문 쪽을 쳐다봤고, 이젠 불그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는 쥐색 정장에 붉은 로브를 뒤집어 쓴 목사가 좀비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았다.

"깨어났군."

목사가 여전히 쇠 긁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는 이를 악물며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바람에 다시 풀썩 쓰러졌다.

"굳이 일어나려고 할 필요 없다네, 아가씨. 적대적으로 굴지 않아도 좋아."

그가 두 손을 들어보였다. 루는 비틀거리면서 남자의 두 손이 마치 죽어버린 나무뿌리 같다고 생각했다. 목사는 그 메마른 두 손을 비비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의 새 수호 성인이 될 분이니, 명칭부터 고쳐야겠군. 아니, 겠군요."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네." 여자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당신 페티쉬가 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다만, 도대체 왜 그러는데?"

"성찬식을 받을 아이를 데려가시는 바람에 그 저의를 알지 못하고 악마라 멸칭하였고, 정신을 잃은 당신을 선구자들에게 던져주었지요. 그러나 성스러운 이들이 당신의 육(肉)을 참되다 여겨 입에 대지 않은 걸 보고 우린 당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루는 멍하게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의 눈은 로브에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입매와 얼굴 근육이 젖혀지는 양은 흡사 광인의 그것이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듯한 인간.

"당신의 뒤에 계신 분 역시 성녀십니다. 탄압자들의 제복을 입고 여기로 흘러들었지만 역시 선구자들이 그분을 탐하지 않으셨고, 곧 경배를 받게 되었죠."

"니미럴." 여자가 거칠게 내뱉었다. "가두고 내 앞에서 울고 지랄옘병을 하는게 경배냐?"

목사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당신 앞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겁니다." 목사가 루에게 말했다. "우리 어린 양들을 축복해주십시오."

루는 몸을 떨었다.

"몇 주 전만해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남자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킥킥댔다. "크로이 같은 다른 낼캐 교회처럼 우리도 고리타분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성스러운 이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신격화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선구자가 될 겁니다."

목사는 극적 효과를 위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당신께서 점찍으신 그 아이는 제일 선두에 세울 것입니다."

앤써니의 이미지가 루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목사는 그 아이를 좀비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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