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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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가 황량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밈적 재해 장막의 찢어진 구멍 사이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은 춥고, 고독했으며,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이내 무언가를 포착한 듯 풍선으로 만든 쌍안경을 눈에다 갖다 댔다. 저 멀리서 008 감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 오고 있었다. 옷은 정장 차림에 큰 외상은 없는 걸 보니, 도심에서 출근길에 슬쩍 물리기만 한 것 같다. 남자는 알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타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면서 끔찍한 좀비의 삶으로 접어들었으리라.

좀비는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사람 냄새를 그렇게 멀리까지 맡을 수 있는지, 남자는 문득 개보다도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사태가 진정되고 난 뒤에는 탐지견 대신 탐지 '좀비'가 나오는 건 어떨까. 남자는 혼자 키득키득 웃으면서 낡은 수첩에다가 탐지좀비라고 휘갈겨 놨다.

남자의 웃음 소리를 들은 건지 좀비가 신음하며 그가 서 있는 장막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을 뻗지는 않고 그저 걷기만 하는 걸 보니 구형 008 좀비인 것 같았다. 남자는 침을 삼키며 좀비가 가까이 걸어오길 기다렸다. 조금만 더 오면 된다. 조금만 더 오면… 조금만 더…

좀비가 남자로부터 1m 가량 떨어진 곳에 멈춰서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마치 가공의 적이라도 보는 양 허공에 달려들고 물어뜯었다. 공기를 가르는 감염자의 이빨이 딱딱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감염자들이 우르르 몰리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놈부터 시작해서 걸어오는 놈, 기어오는 놈까지. 수는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했다. 초반에는 5구 정도였던 감염자들이 이제는 3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남자는 침을 삼켰다. 인식 재해 지뢰가 효과를 다한다면 그들은 곧 다른 인간, 그러니까 진짜 인간을 찾을테고, 그렇다면 찢어진 장막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공격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자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뒤에서 풍선으로 만든 권총이 불을 뿜었다. 남자의 어깨를 지나쳐 날아간 총알은 공기를 밀어내고 곧 첫번째 좀비의 이마를 꿰뚫었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총알이 각각 1구씩 뇌를 파손했다. 뒤이어 흰 장갑이 빨간 버튼을 눌렀고, 나머지 사정거리 안에 있는 감염자들의 머리가 서커스 음악과 함께 터져나갔다.

남자는 벌벌 떨며 뒤를 돌아봤다. 가장 대면하기 싫었던 상대였다. 가장 이 사태를 들키기 싫었던 사람. 남자는 겁 먹은 채로 웃음 지으려 애쓰며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흰 피부와 대비되는 퍼런 눈두덩, 길게 그려서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입술. 눈 아래에 그린 눈물 자국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씨Mr. Hey 이 친구야. 내가 일 똑바로 하라고 안 했나?"

저기요 씨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내 이름은 저기요 씨가 아니라 헤럴드 윤Herald Yoon인—"

"닥쳐."

"옙."


5월 13일 오전 7시.

"그런데 이건 그냥 궁금해서, 왜… 나랑 같이 가려는 건데요?"

"혼자는 백퍼센트 죽는 세상이 됐는데, 그럼 배배 떠돌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하고 팀 먹으리?"

루 체호프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샐리 산 초이를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 끔찍했던 사르킥 교회에서 나온지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그 두 시간 동안 걷기만 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치고 짜증은 있는 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계속 하염없이 걸었다. 몸이 지치니 마음도 지치기 시작했고, 결국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이따금 부는 재 섞인 바람을 피할 때나 들리는 샐리의 욕지거리 말고는, 사람의 언어는 그들이 가는 길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두 시간에 한 시간이 더 추가될 즈음, 오랜 침묵을 깨고 루가 물었다.

"근데 당신은 왜 좀비가 먹질 않았어요?"

묵묵부답. 루는 샐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굳어버린 얼굴은 모종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가늠하기 힘든 표정. 루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 싫음 안 해도 돼요."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샐리의 목소리도 차가워져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럼 당신은 누군데요?"

"그걸 인제 물어?"

"경황이 없었으니까… 아니, 생각해보니까 많이 믈어봤는데? 4등급 이상이냐고 묻고 그랬잖아요!"

샐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시니컬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묻는 거냐."

"그래서, 누구신데요?"

"말했잖아. 샐리 산 초이, 4등급 연구원. 우리 기지에선 내가 부대빵이었고."

루가 놀라며 말했다. "진짜요? 진짜 4등급이었어? 오…"

"그럼 내가 너한테 008은 어떻게 이야기 해줬겠니."

"하긴 그러네요."

"에휴, 인생 모르는거야. 젠장 맞을 거. 우리 이사관 올해로 은퇴한다 그래서 이사관 직함 달 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개 같은 시츄에이션은 뭐냐고…"

루는 눈을 내리깔고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도 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실험은 망했고, 동료 둘을 잃었고, 기지는 망했으며, 몸은 이상해지고 수면은 부족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걸음을 내딛었다. 끝 없는 자기 연민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야, 체호프."

샐리가 부르는 소리에 루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앞을 가리켰다. 루가 앞을 바라보자 그곳엔 광활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일렁이는 공기의 형태 말고는, 아주 평범해보이는 수목이었다.

"숲이잖아요."

"아니, 내 말은 저기 시체가 산더미라고."

루는 눈을 번쩍 뜨고 숲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시체가 많았다. 루는 스콧의 눈을 가려주고 찬찬히 그 수를 세보았다. 대략 15구가 넘는 정도였다. 그녀는 무심결에 몸을 떨었다.

"으… 빨리 지나가요."

"무슨 소리야? 저기로 가야지."

"그건 진짜 무슨 소리에요!"

샐리는 한숨을 쉬었다. "너 시체 제대로 안 봤지. 저것들 그냥 인간들 아니고 좀비야. 그 감염자. 그런 감염자들을 저렇게 죽이는 건 생존자가 아니고서야 어려워."

루는 불안한 시선으로 샐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게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샐리는 대답 대신 총집에서 권총을 빼들어보였다.


윤은 저만치서 두 인영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또 다른 감염자겠거니, 하고 그는 다시 풍선 쌍안경을 집어들었다. 이번엔 절대로 실수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됐다. 그는 또 도시에 위협을 가져다 줄 낌새라도 보이면 그 즉시 쫓겨날 것이란 룽의 말을 떠올렸다. 윤은 쌍안경의 초점을 맞추며 슬그머니 옆에 놓인 권총 하나를 들고는 공이치기를 당겼다.

쌍안경에 맺힌 두 형체는 너무 멀어 자세한 표정을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총을 꺼내드는 동작은 알 수 있었다.

총을 들었다고…

헤럴드 윤은 그 안에 내포된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존자가 오고 있다.

"생존자 접근 중! 두 명!"

"뭐? 생존자?"

몇 명의 형체가 저편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희끄무레한 얼굴들이 암흑을 헤치고 나오자 윤은 무심결에 화들짝 놀랐다. 쿠에시 에라코Kwecy Eraco와 이주은이었다. 주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근방 마을은 다 털렸을거야. 에피스테메하고 연결된 정상세계 도시들은 다 망했다고. 그런데 무슨 생존자가… 내놔."

주은은 윤의 손에서 풍선 쌍안경을 낚아채 자신의 눈에 갖다대었다. 두 형체가 주저하며 걸어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숫자와 도표가 주은의 머릿속에서 흩어지고 재정립되었다. 그녀는 이내 에라코에게 손짓했다. 에라코는 즉시 총집에서 카터 싱글 액션Carter Single Action을 꺼내 공이치기를 당겼다. 그리고는 가장 좌측에 서 있는 갈색 머리 여자에게로 조준했다.

"뭐하는거에요!"

"보면 모르남?" 에라코는 여전히 여자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 뒤에 있는 수십 명의 사람의 명줄을 살리려는 중 아니겄냐."

"겨우 둘이에요!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요!"

"배회하고 있는 널 에피스테메Episteme로 데려왔을 때도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식량이 떨어졌어. 그런데 이젠 두 명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주은이 쏘아붙이자, 에라코는 피식 웃었고, 윤은 고개를 떨궜다.

"그건… 미안한데… 그래도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나요?"

"도움 줄 분량은 이미 저번 달에 다 써버렸어."

그리고 에라코는 여자의 머리를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주은이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아직도 머릿속에선 숫자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먹을 식량, 도움, 정보, 공격, 감염자들. 그 중 하나도 명확한 답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코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서서히 당기기 시작했다.

"이봐!"

에라코는 깜짝 놀라며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붉은 머리 여자가 권총을 정확히 그의 머리에 조준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주은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기 권총집에 손을 댔다.

"난 니네를 볼 수 있어, 이 사악한 새끼들아."

"돌겠군."

에라코는 한숨을 쉬며 총을 아래로 내렸다. 여자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고, 주은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를 좀 받아주는 건 어떠신지?"

그녀는 그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갈색 머리 여자는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한 눈치였다. 그녀는 붉은 머리 여자를 의아한 눈치로 쳐다봤다. 주은은 짜증이 가득 담긴 한숨을 쉬고, 윤에게 손짓했다.

"뭘요?"

"…장막 여기만 열라고."

윤은 재빨리 옆에 있던 태블릿을 줏어들고 무언가를 타이핑했다. 곧장 너덜너덜한 장막이 찢어져 양 옆으로 줄어들었다. 갈색 머리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은은 밖으로 걸어나와, 아직도 겨누고 있는 여자의 글록 17L 총신을 잡았다.

"…이봐,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인데…"

여자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주은은 곧장 손목을 비트는 동시에 붉은 머리의 배를 강타했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폐 속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총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붉은 머리는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다른 건 없나?"

여자는 고통이 섞인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약이라도 했냐?"

"먹고는 있지." 주은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비타민 D가 부족해서… 요새."

"넌 뭐야?"

붉은 머리는 무기를 떨군 것도 개의치 않는 듯 얼굴을 들이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걸 당신에게 왜 알려줘야 하지?"

"나는 이거 말고도 플랜 B가 있거든." 붉은 머리는 망가진 권총을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꽤 유용할 거고."

"말 다했으면 짐 싸서 집에나 가. 여긴 정원 초과니까."

"그래? 그럼… 요새 출몰하는 이 좀비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는… 아쉽지만 나 혼자만 알아야겠네…"

"헛수작 부리지—"

"치료제도 물 건너 가는 거고…"

주은은 멈칫하며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치료제?"


루는 샐리를 노려보았다. 샐리는 밧줄로 상체가 꽁꽁 묶여 있는 채로 씩 웃고 있었다. 루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총 든 두 사람과 한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정작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웃고 있다. 루는 샐리의 어깨를 때렸다.

그들은 장막을 다시 여매고 암흑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과 의식이 교란되는 듯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오로지 흑인 남자가 손에 쥔 손전등에만 의지하여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루는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재가 덕지덕지 붙은 초록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씩 웃더니 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는 당황하다가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헤럴드 윤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저기요 씨라고도 하고요. 긴장 놓으시죠."

"아, 네…"

루는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감췄다. 조금 어눌한 말투나 부러 유쾌하게 보이려는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마치 의도적인 광기를 내보이려는 느낌. 마침내 윤이 혼자서 스텝을 밟기 시작하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전 초보 변칙 예술가에요." 윤은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높낮이가 이상한 말투와 찡그린 표정이 한데 어우러졌다. "한 번도 작품을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게 무슨 예술가여." 흑인 남자가 비웃듯이 끼어들었다. "요리도 안 하고 요리라고 할 수 있겠냐."

"난 사상가에요, 쿠에시." 윤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난 사고하며, 예술을 향유하고, 유머를 즐기—"

"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고 입 닥쳐."

동양인 여자가 쏘아붙였다. 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루는 그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여자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험한 꼴을 당한 모양이었다.

"다 좀비로 변해서 뒤지게 생겼는데 예술은 무슨 예술."

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러지 마요, 주은. 우린 누가 뭐래도 쿨을—"

"허이고, 누가 들으면은 니 경력이 한 10년은 넘어버린 것처름 들리겠다."

"…요새 내 말 끊기가 유행인가."

곧 어둠이 걷히고 작은 건물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는 멍하니 낡은 건물과 이곳저곳 무너진 도로, 총구멍이 나 있는 담벼락을 눈여겨 보았다. 필경 단아한 색채로 칠해져 있었을 건물의 페인트는 빛바래 있었고, 가끔은 갈색 오물이 뿌려져 있었다.

"에피스테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윤이 신나서 날뛰었다. 그는 루와 샐리에게 과장스럽게 몸을 숙여 인사하더니,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어이쿠 실례."

"그만하고 여기로 와!"

앞서 가던 주은이 그들에게로 소리쳤다. 주은은 또 다른 황폐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쿠에시와 윤은 셋을 이끌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넓고 지저분했다. 온갖 그래피티가 서로를 타넘으며 벽 안에서 움직였고, 이따금 벽에 걸린 유화가 울부짖었다.

그 난장판 가운데에는 거대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루는 직감적으로 그가 대장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삐에로…?"

루가 중얼거리자 순간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얼떨떨한 분위기가 흘렀다. 샐리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맞는 말이구만 뭐!"

루는 남자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광대 분장을 한 사내가 붉은 가죽 점퍼와 청바지를 걸치고 삐딱하니 서 있었다. 그가 입을 까딱일 때마다 길게 바른 입술이 번뜩였다.

"뭐하다 오신 손님들이지?"

남자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 높고 새된 목소리를 상상했던 루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기웃거렸어. 자기네 말로는 치료제를 안대."

"치료제를 안다고?"

광대의 눈이 번뜩였다. 샐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귀빈이시군. 대접해드려야겠지."

광대가 손짓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샐리와 루를 무릎 꿇렸다.

"장막 당직은 내려가."

광대가 차갑게 내뱉자, 윤, 주은과 쿠에시가 건성으로 경례를 하며 내려갔다.

"니들 미친 예술가들이지?"

샐리가 사납게 소리쳤다. 양팔을 붙들린 채로 무릎을 꿇어도 그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샐리를 붙들고 있는 여자가 낑낑대며 무게를 실었다.

"또라이 새끼들. 치료제 알려준대도 지랄이야!"

"우선, 우린 미친놈들이 아니오." 광대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미친놈들의 시대는 갔거든."

"누가 그딴 거 알고 싶—"

"둘째, 당신들을 어떻게 믿지? 이 쪽은 몰라도, 당신은 양복쟁이들 전투복을 입고 있잖아. 우리가 당신을 도와준대도 당신이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 있나?"

"나도 니들만큼, 아니 니들보다 더 재단이 싫어. 상황이 골백번 바뀌어서 여기가 좀비 천지가 돼도 재단한테는 안 빌붙어, 새끼들아."

"왜?"

샐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라니."

"왜 재단이 싫으냐고."

샐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짓말을 들켜서, 라기보단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길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샐리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새끼들이 내 형제를 죽였어. 감염됐고, 초기라 살릴 수도 있었지. 나는 애써 녀석의 감염을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윗대가리 새끼들이 공식적으로 녀석을 처형시켰지."

샐리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려나왔다.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광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위의 모든 예술가가 말 없이 그를 주시했다. 마치 그가 이 도시의 수장이라도 되는 것마냥. 루는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살폈다. 변칙예술가는 다 아나키스트 아녔어?

광대가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숙녀분들, 난 리카르도 이케르 룽Riccardo Ìker Leung이라고 하네. 늦었지만 에피스테메에 온 걸 환영하지."

"그래, 이제야 내 말을 믿—"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정보가 거짓이면 둘 다 시멘트에 넣어버릴거야. 유념하고."

루는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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