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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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방에는 햇살이 비추지 않았다.

모두가 그 공간을 싫어했다. 지독한 어둠과 냉기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은 산 자를 위한 방이라기보단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마땅할 자리처럼 보였다. 아무도 배겨내지 못할 칠흑 같은 눅눅함. 끔찍한 음지.

그곳은 항상 서늘했다. 15평 남짓의 좁은 방 안, 쓸데없이 큰 창문에 햇살 대신 건물의 그림자만이 들어오며 그 창 사이로 늘어진 커튼. 한 번이라도 그곳에서 잠을 청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커튼이 흩날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다고 하소연했다. 커튼의 형체가 유령을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벽지, 가구, 심지어는 방의 구조. 모든 것이 기이하게 취급되었다. 그곳의 무언가가 어긋난 것처럼.

그래서일까. 방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어두운 간극 저편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를 것만 같은 분위기. 현실이 진정으로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그런 곳. 누가 그곳에서 쉬며 잠들고 싶겠는가. 숙소를 쉬이 바꾸지 못하는 조직 상황에서도 이러한 변경이 용인된 이유는 아마 상부도 이러한 일을 알아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방은 자주 공허했다.

제21K기지 숙소동 402호는 그러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구천은 그 앞에 서 있다.

구천은 숨을 잠깐 들이쉬고 문으로 다가간다. 402호 명판은 죽은 지 오래된 사체처럼 색이 바래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문은 요동이 없다. 다른 숙소의 문에서 휴식의 안온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방에서 거처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된 노동이 되는 것만 같은 크기의 깊은 절망이 그 안에 깔려 있다. 마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자의 관을 대하는 것만 같다.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칠흑 같은 고요함이 복도로 스며든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숙소동 건물의 바깥에서 바라본 402호 창은 커튼에 가려져 안을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한뼘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그 안의 상황을 감히 알 수 없다. 마치 방 자체가 바깥에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알게 될 것이다. 402호의 현 거주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율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일이 없는 탓이었다. 어지러이 파편화된 인사 관리의 문제는 여기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안에 있을 테니, 반응하리라.

구천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려, 문에 노크한다.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구천은 다시 문을 두드린다. 깨지는 듯한 노크 소리가 다시금 울린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고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무덤가의 적막처럼.

「안에 계십니까?」

묵묵부답.

「무속학부 이구천 연구원입니다. 나와보세요.」

여전히 답은 없다.

「성유다 요원!」

방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발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구천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들기며 목소리를 높인다.

「성유다 요원! 나와 보세요!」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오른다.

「진세연 요원.」

처음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은 그게 끝이 아님을 알고 있다. 구천이 아는, 적어도 구천이 기억하는 성유다는 결코 그 단어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진세연 요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 요원」

방 안에서 날카로운 파음(破音)이 들린다. 잠시 뒤, 담담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단지 발 소리만이 울린다. 구천은 긴장한 채로 뒤로 물러난다.

문이 삐그덕대며 열린다. 성유다가 고개를 내민다. 생각보다 깔끔한 얼굴이다. 면도도 하고 세수도 한 것 같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옷 역시 깔끔하다. 마치 방금 전까지도 업무를 보고 있던 사람 같다. 퇴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단지 한 가지, 눈에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입가를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좌절이 눈에 어려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구천이 입을 연다.

「진 요원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

유다는 12월 18일에 401호로 왔다. 제21K기지로 온 지 6달 만이었다. 그 전에는 기지 내 숙직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버텼다. 그에게 숙소가 배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6달을 버텼다.

12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 유다의 삶은 간결했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 7시부터 8시까지 준비운동을 했고, 8시에 아침 식사,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전 업무ー가 되었어야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사 파행 탓에 일정은 늘 바뀌었다. 유일하게 공통되는 시간은 새벽 3시의 독서. "마녀의 시간, 예수의 삼위일체가 조롱당하고 신성과 선함이 더럽혀지는 그러한 시간"을 그는 깨어 있었다. 니힐리즘과 20세기의 서적을 읽으며 그는 깨어 있었다. "죽지 못한 삶"을 생각하며.

진은 3월 10일에 죽었다. 향년 32세.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다. 사인은 SCP-177-KO와의 상호작용. 그렇게 진은 죽었다. 죽었으므로, 떠나가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 고치자. 떠나가지 못한 쪽은 유다였다. 진의 죽음을 믿을 수 없고 또 믿을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유다는 떠나가지 못했다. 진의 장례식 날 만난 그는 조문객들과 담소를 나눌 정도로 호전되어 있었다. 열심히 재활을 했다고 했다. 무얼 어떻게 재활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건 그 재활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십 분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진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적갈색ー유다가 '고추장색'이라고 표현한ー머리칼과 아담한 키, 근육질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친근히 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유다가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운명처럼 만났고 한여름의 수영장처럼 서로 사랑했다.

그래서 유다는 더 버티지 못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ー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비일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401호는 그 훌륭한 수단이 되어주었다.

401호에서, 유다는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과 정지돈의 「창백한 말」, 그리고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독파했다. 정지돈의 글은 사빈코프의 글에 영향을 받은 콜라주적 소설로 대부분의 글에 사빈코프와 여타 러시아 작가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어 사실상 사빈코프의 글을 읽지 않아도 대강은 그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게끔 하고 있었다. 유다는 두 글을 읽고 찬찬히 비교하며 읽어나갔다. 묵시록은 그 독서의 디저트에 해당했다. 그의 일기는 세 글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맨 첫 장에, 정지돈의 소설에 드러나듯,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도 적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는 이 시를 쓰고 한 해가 지나서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로부터 1년 7개월 뒤 윤동주는 사망한다. 이오시프의 삶처럼 그는 예술가란 이유 자체만으로 국가에 의해 탄압받지 않았다. 국가에 유용하지 않다는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죄목을 얻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아, 해방이 된 후 북이나 남이나 어느 광장에 나아갈 수 있었다면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소설에 등장하는 장의 말마따나, "예술가를 기생충으로 보는 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쨌거나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너무 일찍 죽었다.

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예수는 서른 셋의 나이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어떤 복음에서는 그가 죽을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했다고 기록했지만, 어떤 복음에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쳤다고 기록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유다는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서술했다. 진은 그보다 한 해 덜 살았다. 진은 죽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허무주의에 빠진 나의 의식은 1년의 시간을 무감(無感)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더 살았든 살지 못했든 결국 결과는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그러한 생각들이 내게로 온다. 사빈코프의 알려진 결말을 재현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궁극적 종말ー쇼펜하우어와 같은 입장이다."

그 남자가 찾아 왔을 때는 유다가 그러한 생각들에 빠져 있을 시기였다. 적절한 시기였다.




3

유다의 일기는 어두운 복도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지직거리는 전등,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암흑, 고대의 무덤으로 진입할 때 느껴질 법한 짙은 긴장감. 남자와 유다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ー 복도의 거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의 초상이 비치고 있다. 그와 나는 똑같이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매를 지녔다. 그가 나를 불러들였지만 딱히 할 말은 없는 것 같았고 나도 그와 같았다. 우린 오래 침묵했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간 이방인처럼.

흔히 무속학부를 지칭할 때 이르는 말 중에 '가장 알려지지 않은 부서'라는 말이 있다. 다른 비밀부서들의 존재, 이를테면 정보부나 항밈학부, 그 밖의 모든 알려지지 않은 부서들의 존재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전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무속학부에 속해 있지 않은 인원들에겐 이 말이 옳았다. 아무도 무속학부가 사용하는 공간에 쉬이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침묵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자 참다 못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이 갈라져 나왔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한 겁니까.」

남자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안부를 물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가운 아래 받쳐 입은 그의 가톨릭 사제 차림은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차려 입은 것만으로도 무속학부 출신이라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말했다. 「공식적으로 진세연 요원은 사망했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겠지요」 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다고 말했다. 눈 앞에서 모두 보았다고. "순간적인 불쾌가 일었다가 사라졌다. 세연이 죽은 이후로 내게 생긴 고질병이었다. 의심, 의혹, 불쾌."

「사망 일자는 논란이 있지만 SCP-177-KO-1로 변이한 그 순간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성 요원, 당신이 관여된 그 면담에서 육체마저 사망했죠.」

유다는 다시, 안다고 대답했다. 남자의 말은 그에게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나 다름 없었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길 바랐다. 세연의 이야기. 세연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지. 그러한 실무적인 이야기를." 남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유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곧 알림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정신병원의 엘리베이터처럼 공허한 분위기의 은빛 공간"이 나타났다. 둘은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남자가 대뜸 물었다. 「진세연 요원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엘리베이터는 덜컹, 하고 하강했다. 무속학부실로 가려면 올라가야 한다. 지하엔 부실이 아니라 연구실이 있다. 그것도 보안 인가가 제한된 연구실. 유다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불쾌는 실재하는 무언가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마치 그날 면담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처럼."

남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 없이 유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만을 원하는 듯했다. 갈구하지 않았지만 요구하고 있었고, 독촉하지 않았지만 관찰하고 있었다."

ー 어릴 적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 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성당으로 향하던 자신이 기억났다. 그때는 신부님이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졸리고 이해도 되지 않았으니까. 부모에게 강제로 이끌려 간 곳이니 열정도 없었다. 신에 대한 믿음도 적었다. 딱히 간절한 것도 없었으니까.

ー 그런데도 세연이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종교를 제일 먼저 찾았다. 재단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종교의 가치를 더욱 저평가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빠지게 되면 종교를, 아니, 간절하게 빌 무언가를 찾게 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간절하게 빌고 싶었다. 세연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제발 회복되기를 바랐다. 자길 아나스타샤 첸이라고 부르는 그 증상이 해소되길 바랐다. 일본에서 돌아오고 나서 며칠은 잠에 들지 못했다. 업무가 끝난 시각부터 계속 기지 인근의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기도했다. 울부짖었다. 살려달라고, 그 사람을 살려달라고.

ー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ー 그 현상이 SCP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부터 더 이상 하늘에 무언가를 바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크나큰 배신감 탓이었다. 그렇게 바랐는데도, 돌아오는 것이, 이것이라니. 발 밑에 수천 미터의 절벽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세연의 몸을 집어삼킨 그년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몰랐지만 세연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곳에 신은 없었다. 신앙과 율법이란 없었다. 현상만이 있었을 뿐.

ー 그리고 마침내, 그 빌어먹을 SCP-177-KO의 격리 입무에 투입되었을 때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세연의 영혼이 아예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걸.

ー 그날 처음으로 근무 중 술을 마셨다. 취했다. 술을 마시고 계속 마셨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도 세연은 그곳에 없으리란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세연은 아무 데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다.
나는 차라리 미쳤으면 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유다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이 육체처럼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죠. 육체와 함께 발생하여, 육체가 다치면 함께 다치고,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같이 죽는다고요」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필요치 않다.」 남자가 말을 받았다. 「분명 흥미로운 학설이나 정말 그리했다면 무속학부가 탄생할 수 없었겠죠. 물론, 영혼의 정체를 규명하며 그의 이론을 반영할 때도 있긴 합니다만…」

「난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믿기 싫다는 게 더 맞을 거요」 유다가 피식댔다. 「죽어서도 영혼이 남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무 이 현실에 매인 존재 같으니까」

「진세연 요원의 영혼이 남아 있길 원하는군요.」

유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로마의 대리석 조각을 생각나게 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배어 있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와 대조되어 보였다. 불순물 같은 동정보다야 차라리 그게 더 좋았다."

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압니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세연은 경찰이 되고 싶었대요」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어릴 적에 한 형사가 자길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졌답니다. 자기도 그 사람 같은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죠」

유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삶이란 게 워낙 종잡을 수가 없죠. 경찰대에 입학하고 졸업을 앞둔 즈음에… 변칙 사건에 휘말려서는, 또 그걸 잘 대처하는 바람에, 그만 재단에 영입이 되었다는군요」

유다가 웃음을 흘렸다.

「…인생이란 게 참 웃기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퍽 이상하게도 설계해놓으셨더군요. 원치 않는 것을 그리 쉽게 주시고는, 그토록 원하는 걸 사정 없이 빼앗아버리다니 말입니다」

남자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만약 신께서 공평하시고 선하시다면…」

기계음이 "흐느낌처럼" 멀리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내 앞에, 오늘 처음 본 남자 앞에서, 나는 하나 마나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말의 방향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 특이하고 고달팠던 인생에 천국을 허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래, 다음 생이란 게 있어서… 그 사람이 그 생에서야… 그리 되고팠던 경찰이 되어서 나쁜 놈들 때려잡고, 그리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종교가 있으십니까?」 남자가 대뜸 물었다.

유다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교인이랍시고 떠들어 댈 때엔 가톨릭교도였죠」

남자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금은 냉담자입니다. 일이 그렇게 된 이후로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빌었어요. 그런데도 돌아오는 건 딱히 없더군요. 그쪽은 어떤 종류의 구매자이십니까?」

남자는 조금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내겐 무기가 없다. 너를 해칠 마음이 없다.

「가톨릭입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어릴 적에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요. 부제까지 올랐었습니다」

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아도, 남자에게 세연에게 일어난 일이 일어났으리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보여준 능률. 취업 권유. 감언이설. 재단은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지구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고 꼬드겼다. 통계상 잘 먹히는 헌팅 대사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종교는 무슨 일로 물어본 겁니까?」

「말씀하시는 게 종교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유다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큰 일을 당해야 믿음을 가진다고들 한다. 예수는 다양한 이적을 행했다. 민중은 그를 믿었다. 그들에게 큰 일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삼십 년 넘게 냉담자로 살아왔는데, 그 일을 당하고 나서야, 정말 종교인이 되었던 것인가."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지하 3층을 가리키는 빨간 불빛이 번뜩였다. 남자가 먼저 내렸다. 지하의 복도는 어두컴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불을 꺼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남자는 손전등 하나 없이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유다는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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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기록: SCP-177-KO-1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면담이 중단되었으나 면담 당시 언급되었던 SCP-177-KO-1의 재생성 등의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 다시금 면담을 재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SCP-177-KO-1-a로 재지정된 진세연 요원의 시신은 소각되었다.

추보: 격리 총괄자 재량으로 성유다 요원에게 2주 간의 휴가를 부여하였다.




5

복도는 길다. 중간중간 기계음과 알림 소리가 이어졌지만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유다는 말 없이 거닐었다.

「아까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다시, 구천이 불쑥 말을 꺼낸다. 「기지 내에서도 함부로 말을 꺼내선 안 되는 일이라서요. 아시다시피 이 층이, 보안 인가가 극히 제한되는 곳이잖습니까」

「그건 알고 있었어요. 무속학부에서 이 층을 쓰는 겁니까?」

「정확히는 일부입니다. 다른 부서에서도 간혹 사용하게 되는 일이 있거든요. 우린… 이쪽으로」

복도 끝에서 또 다른 복도로 걸어간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장소인지. 유다는 지금까지 얼마나 걸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구천은 그런 길을 잘도 걸어가고 있다.

「제가 아까…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를 물어봤죠」

유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뜨고 구천의 등판을 바라본다.

「SCP-177-KO 담당 인원들이 뭐라 말하던가요?」

「정확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아마 그 반지 내에 든 것 탓에 영혼 자체가… 희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들 하더군요」

「하.」 구천은 뒤를 흘끗 돌아본다. 「제대로 헛다리 짚은 겁니다.」

「뭐라고요?」

「흔히 엑소시스트를 두고 구마, 제령을 한다고 하죠. 전자의 일은 악마ー네. 진짜 악마요.ー를 두고도 사용하니 후자로 설명해 봅시다. 제령…이라는 말은, 사실 조금 폭력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말입니다. 영(靈)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동시킬 뿐이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쫓아보낸단 말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심령질로 폭파시킬 때도 있지만.」

「그러니까… 엔트로피 제2법칙의 적용을 받는단 말입니까?」

구천은 눈썹을 까닥인다.

「비약이 조금 있지만,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원리는 단지 제령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호작용에도 대응됩니다. 따라서…」

따라서. 유다는 눈을 부릅뜨고 구천을 바라본다. 구천의 입이 움직이고 있다. 그 말을 말하고 있다.

「진세연 요원의 영혼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유다가 멈춰섰다. 구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유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을 가득 막고 있다. 영혼이 남았다, 는 그저 슬프기만 한 말이 왜 이렇게 안도감을 주는지. 재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었다면 여전히 슬픔의 농도는 짙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선, 이 장소에서는 다르다.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점차 시야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편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해하지 못할 경문을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계음이 이에 코러스를 넣고 있다. 유다는 멸망한 세상에서 생존자들을 찾은 것처럼 멍하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구천은 이러한 광경이 죄다 친숙한 모양이다.

문이 하나 나왔다. 고풍스러운 모양새다. 절이나 한옥촌에서나 볼 법하다. 재단 기지 내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건립 허가를 내준 이강수 이사관의 심중도 가늠하기 힘들다. 지금껏 들은 소음은 이 문 안에서 난 모양이다. 문 위에 걸린 명패엔 간결하게 명칭이 적혀 있다.

B324호-T.S.

구천은 도깨비 모양으로 조각한 문고리를 잡고, 세 번 두들긴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신분 확인."

구천은 유다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당신 이름과 직함을 말하고, 그 다음은 날 따라하면 됩니다. 패스워드는 동일해요」

그리고는 문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구천 B계급/2등급 연구원. 특수 보안 인가 사바하(娑婆訶). 패스워드 100-3824-4855-0177」

구천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유다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유다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문에다 대고 입을 연다.

「성유다 C계급/2등급 요원. 특수 보안 인가 사바하(娑婆訶). 패스워드 100-3824-4855-0177」

문이 벌컥하고 열린다. 안에서는 여러 가지 불빛이 찬란하게 점멸하고 있다. 유다는 구천과 함께 안으로 걷는다. 갖가지 실험 장비들이 부적이 붙은 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따금 불상이나 장군상도 눈에 들어온다. 제일 기이한 것은 벽 한 쪽에 세워진 사당인데, 누구를 기리는지는 알 수 없어도 상당히 소름 돋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신에게 맹세컨데, 유다는 그 안에서 무언가가 들락날락하고 있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신밧드의 모험을 타는 기분이군요」

구천이 피식 웃는다.

「재단에 들어와서 별 일은 다 봤지만, 이건 정말로… 이렇게 심령적 공포를 느낀 건 처음인데요」

「그야… 요원님께 하체가 없는 귀신이 달라붙었으니까요. 그런 기분을 느낄 만도 합니다」

유다는 흠칫 놀라며 주위를 살핀다. 구천은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농담입니다. 계속 가시죠. 얼마 안 남았군요」

유다가 인상을 찌푸린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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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보이는 허공에게 짓밟히는 그들을 지나쳤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어. 방금 헤어졌는데, 눈꼬리가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 쫓아가 종일 바라보았던 날도 있었는데. 벨보이가 출판사 창문에 돌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 누군진 몰라도 올라와 글쟁이 개새끼야! 네 졸작이 담긴 USB를 네 좆구멍에 쑤셔 넣어주마!

야근하던 문학팀 편집장이 창문을 열고 고함질렀다. 몇 팀원들이 편집장을 말렸지만, 편집장은 창문 밖으로 허리까지 내놓은 채 날뛰었다. 그럼 평생 떡 칠 때마다 네 좆이 네 좆같은 문장을 내뱉겠지! 모든 여자들이 네 대갈통에 오물을 쏟아낼 거고 결국 네 좆마저 너의 좆같은 재능을 외면하게 될 거다 씹새끼들아! 편집장이 팀원들에게 끌려 들어갔다. 혹시 내가 나를 사랑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녀가 나의 숨겨진 모습을 끌어냈고, 나는 내 안을 박살내고 탈주해버린 그런 신비함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벨보이가 다시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렸다.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기쁨이었어.

— 크리스마스에 저 새끼들 소설을 편집하느니 루돌프에게 눈을 짓밟히는 편이 낫겠어!

— 이상우, 「벨보이의 햄버거에 손대지 마라」




7

정지돈의 「창백한 말」은 비극으로 끝난다. "20세기 초반에 경도되어 있었고, 혁명에 물들어 있"던 주인공 장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그러니까 정말 문자 그대로의 아무것도. 일반적인 삶에서도, 예술적인 삶에서도 일구어낸 것 없이.

"그리고 그 장면을 읽었을 때 나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일구어냈던가.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성취했는가." 그 일이 있기 전, 유다는 항상 말했다. 재단에서, 이 지긋지긋한 관료제의 온상이자 구시대의 유물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는 이러한 공간에서 가장 평범한 형태의 사랑을 일구고자 한다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만나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유다의 계획이었다. "나는 가장 부지런한 농부처럼 일하고자 했다. 그들이 내게 족쇄를 매었지만 그 족쇄 내의 빈 공간을 이용하여 기쁨을 추구하고자 했다. 몇 년 동안 휴가 없는 삶을 보냈고, 우린 그렇게 결혼했다. 짧은 신혼 여행도 다녀왔다. 제주도였다. 몰디브나 괌 같은, 다른 이들이 많이 간다는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우린 생각보다 기뻤고 그 기쁘단 사실에 또 기뻤다. 행복은 오래 갈 것처럼 굴었다."

다채로운 실험 장비들과 무속 장비들 사이를 걷다가 마침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등장했다. 유다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훑다가, 문득 자신이 면도를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첫인상으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총 다섯 명의 사람이 거기 있었다. 탁자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곤 죄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유다는 남자의 뒤에서 걸음을 옮기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남자는 유일하게 그 대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 "이따금 하품을 하며 근처의 박스에 걸터 앉아 있는 투는,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노곤해 보였다. 그는 짧은 포마드 머리에 요원복 차림이었다. 장년에 접어든 듯했고, 자세나 몸 근육을 보아하니 연구원보단 요원 쪽이 더 설득력 있었다. 나잇대를 계산하면 아마 4등급 정도의 직급일 터였다. 그렇다면 아마 부대의 장 정도는 맡고 있겠지." 남자는 김수동이라는 이름의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오래 전 들은 설교처럼."

그 옆에 있는 여자는 꽁지머리에 키가 작았고, "열정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초에 세 단어 이상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몇 미터 밖에서도 누가 시끄럽게 떠들더라니." 유다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상당히 어려보였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이십대에 머무를 것만 같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단 특성상 젊은 인원을 뽑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요원이나 연구원 모두 노련하고 베테랑인 사람들이 필요했지, 경력을 쌓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필요한 게 아녔다. 그런데 눈 앞의 이 사람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꽁지머리의 말을 받아주고 있는 남자는 "무뚝뚝한 인상에 큰 키, 긴 머리를 묶어 일본식으로 상투를 틀어올"리고 있었다. 분명히 미용실에 갈 시간도 없어서 그리 했을 거라고, 유다는 추측했다. 상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조선식 상투가 아닌 게 어딘가.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많았는데."
유다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SCP-177-KO의 실험 담당자, 휘발유 박사였다. 휘 박사는 특유의 건조한 화법ー마치 보고서를 그대로 읊는 듯한 어투, 극도의 문어체ー으로 유명한, 실력 있는 인원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가 여기 온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말 없이 서류 위에 무언가를 휘갈기고 있는 여자는 유다가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다. 며칠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올라갔었는데, 매번 갈 때마다 거기서 담배를 태우던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해 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검은 스웨터 위에 실험 가운을 입었다.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와 있었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듯, 여자는 이따금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짧은 곱슬머리를 쓸어넘겼다. 검은 테의 안경은 그런 모습을 더욱 연구자처럼 보이게 했다. 가운에 달린 명찰에는 뭐가 묻은 건지 잘 보이질 않았다."

「자네들, 드디어 왔구만」

유다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나잇대치고는 매우 젊어보이는 얼굴의 소유자"가 조금 피곤한 듯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의 목에 붉은 색 뱀머리 문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그 문신을 처음 보았다. 그 내력은 알 수 없었다. 가장 관료주의적일 것만 같은 인간의 측면이었다. 그에게 호감이 갔다." 실험 가운 아래 정장을 차려 입고 지팡이를 든 남자는 제21K기지의 이사관, 이강수였다.

「성유다, 오는 길은 편하였는가?」

「네, 이사관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사관은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의 직접적 관여자는 아니네만, 자네에게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지. 다각도로 말일세」

탁자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프로젝트의 일원입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되실 겁니다. 차례대로, 과학부 생물학과의 김현주 박사.」

짧은 곱슬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속학부 강신학과의 윤덕희 요원.」

꽁지머리가 밝게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과학부 정신재해학과의 휘발유 박사.」

휘 박사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으려고 했다. 도화지에 그은 선 같은 입술이 약간 구부려졌다가 되돌아갔다.

「그리고 저, 무속학부 강신학과의 이구천 연구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다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여기 부른 겁니까?」

모두의 시선이 구천에게 쏠렸다.

「아, 그걸 잊었군요」 구천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만약에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면, 어떨까요」

유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그런 사건들이 관측되고 있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되살린다면요」

현주가 조용히 반문했다. 유다는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원하는 사람을… 되살린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조금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 사람을, 세연이를 되살리겠다고요?」

「자네 생각대로 완벽하게는 아닐 거야」 이사관이 끼어들었다. 「완벽한 새로운 삶. 앤더슨 로보틱스나… M C&D 등의 사업가들이 줄창 부르짖는 그런 환생 같은 건 아니야. 그들도 못할 뿐더러 우리도 그런 기술이 없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이 이사관은 잠시 침묵했다.

「유다, 자네… 공생발생설에 대해 아나?」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학설… 말씀이세요?」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원생미토콘드리아였다고 하지. 이 원생미토콘드리아가 고세균 세포 내에서 내부 공생을 하다가, 진핵생물이 되었다네. 서로 다른 원핵생물이 결합하여 진핵생물이 된 셈이지. 신기하지 않은가?」

유다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사관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무속학부에서 같은 일이 영적 상호작용 간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밝혀냈다네. 심령독립체가,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오랜 시간 함께 지내게 되면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기능할 수 있게 된다는 걸세. 외부 심령독립체는 본 의식에 기억, 성격, 습관 등을 부여하고, 본래의 의식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지」

「그러니까 지금…」

「그래」 이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세연 요원의 영을 다른 인원의 의식 속에 이식할 걸세」

폐 속에서 숨이 흘러나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을 때 으레 그러는 현상이었다. 그들은 세연의 영을 다른 작자의 머릿속에 박아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다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왜, 왜요」 유다는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래야만 이식 받은 인원이 진 요원의 의식에 영향을 받을 테니까」

「…말도 안 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구천은 유다를 곁눈질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한 덕희는 유다와 구천, 그리고 이사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강수 이사관은 짐짓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말도 안 된다라?」

「세연이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건 인간 쓰레기 짓이니까요」 유다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한 사람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의식 속에 넣는다고요? 그럼 그 영혼의 주체성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요!」

휘발유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관의 앞에 섰다. 대신 말을 나누겠단 말이었다.

「감히 죽은 자에 대한 윤리까지 들먹이진 않겠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면 그녀는 다시는 불러 올 수 없다」

「그냥 불러오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여러분은 세연이를 다른 사람의 기억 저장고로 쓰겠단 말씀이잖습니까!」

「그 결정은 쉽지 않았다」 휘 박사는 미동 없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는 재단에게 이점을 가져다 줄 것이었기에, 윤리위의 총의를 모아 통과된 프로젝트다. 진 요원은 그러한 프로젝트에 차출된 셈이다」

유다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분노는 필체에 반영되었다. 정갈하던 글씨가 진동하고 있었다. "소시오패스가 같은 편일 때만큼 일이 잘 흘러가는 순간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시오패스의 목적이 내가 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세연이 뭐가 특별해서, 그 프로젝트에 동원된 거랍니까. 대체 어디에 쓰길래 그런 취급을 받게 되냐고요!」

휘발유는 잠시 말하지 않았다. 유다는 그를 보며 "코르시카의 파스콸레 파올리"를 떠올렸다. "그는 내게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한,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세연이 죽었을 때에도, 무속학부에서 무언가 도울 일이 있으리라고 말한 이였다. 내 희망은 그에게서 왔다. 이제 그가 나의 희망을 죽이고 있었다."

휘 박사는 천천히 말했다. 「진세연 요원의 능률은 엄청났다. 그녀는 그 기수뿐만이 아니라 전후 몇 기의 인원들을 모두 뛰어넘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런 이를 그만 사망한 채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유다는 그 순간에 대해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훗날 둘의 사이가 왜 그렇게 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유추할 정보가 많으리라. 나는 휘발유에게 이러한 것에 대해 질문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요원, 진정하세요」

구천이 유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다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은 것처럼. 그건 미안함에서 우러나온 감정이었다."

「아마… 당신이 직접 봐야…할 것 같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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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9

결혼식은 조촐하게 진행됐다. 양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모두 오지 않은 상태에서, 재단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공간에서 그들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제31K기지 대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파란 조명이 번들거리며 그들을 내리쬐었다.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그때 내가 그 장면을 주마등처럼 떠올린 것은, 비단 색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무얼 발견하게 될지."

그것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관에 투영된 존재가 양수에서 흔들거리는 태아처럼 천천히 유영했다. 온 몸으로 푸른 빛을 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이.

그 존재는 세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유다의 뒤에서, 구천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진세연 요원의 심령독립체입니다. 우리가 SCP-177-KO 내부에서 추출할 수 있었던 전부고요. 무슨 기작이 이루어졌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진 요원은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정지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죠. 심령독립체가 혼수 상태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유다는 구천을 돌아보았다.

「고칠 수 있나요?」

구천은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써는 방도가 없습니다」

유다는 멍하니 구천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다른 사람의 의식 속에 넣으려고 한 겁니까?」

「그 이유만으로 시행된 건 아닙니다」 구천이 시인했다. 「성한 영혼 역시 이 프로젝트에 사용될 계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진세연 요원의 영은 특히 더 사용되어야할 것 같았습니다」

「…왜요? 왜 하필 세연이인데요?」

구천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영혼이 어떻게 저승에 가는지 아십니까?」

유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정확하게 아는 바는 없습니다. 단지 추측할 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확보한 심령독립체는 뚜렷한 원한이 없는 한 최대 49일 내로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기 보단 이동했다는 말이 옳겠죠. 하지만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곳이 저승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옅은 기계음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그런데 세연이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겁니까? 그 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요」

「강제 빙의.」 구천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만 독립체가 정지 상태인 점 때문에 자주 빙의 상태에서 풀려납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시행해야 했죠. 하지만 이 역시 영구적으로 진세연 요원의 심령독립체를 이승에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유다는 구천을 바라보았다.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는지는 유다 자신도 몰랐다.

「최근 통일기적학 저널Journal of Unified Thaumatology에 실린 사토 준이치로 박사의 논문에서는 심령독립체가 인간 의식에 빙의할 시 받는 영적 충격에 대해 논한 바 있습니다. 그 논문에서 박사는 빙의 현상을 겪을 때 인간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심령독립체 역시 일시적으로, 소위 말하는,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고요.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사토 박사의 실험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구천은 유영하는 인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정지 상태에 돌입한 심령독립체에 영적 충격이 가해지면… 어쩌면, 다시 활성화되지 않겠느냐고요.」

「…」

「현재까지 밝혀진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통상적인 강제 빙의로는 필요한 정도의 영적 충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서 시행될 실험들, 심령독립체를 산 사람의 의식 안에 이식하게 되는 그 실험에서는… 아마 필요치까지 달성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의식 속에 녹여버리는 것 아닙니까? 결국 세연이를… 다시 보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예?」

구천은 세연의 형체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구천의 굳은 입매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내포한 사람의 입가가 으레 그렇듯.

「…아직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실한 게 아닙니다. 그 시술을 받고 난 뒤에… 피험자와 이식체 간의 관계가 역전되는 현상 역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네?」

「본래 이 시술을 할 때에는 심령독립체의 영적 작용을 감소시키는, 일종의 코팅을 덧씌우는 작업을 한 뒤에 피험자의 의식에 이식합니다. 하지만 진세연 요원과 같은 경우엔 이미 작용이 없는 상황에 돌입해 있죠. 그러니 이번 시술엔 그러한 코팅 작업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구천은 고개를 숙였다. 어둠이 깔린 그의 얼굴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세연 요원의 의식이 회복되고,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말씀드렸다시피 정반대의 상황이 가능한 겁니다.」

「…세연이, 다시 살 수 있다, 이 말이군요.」

유다는 "멍하니" 눈 앞에 서 있는 그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무심한 재판관처럼 세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품었을 감정은 오로지 말아쥔 주먹에서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남자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어떤 영적 개념ー신성(神性)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내부를 진동하는 어떤 기계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심장이 운동하는 소리가 몸 전체로 퍼져나가듯이.

「…자원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유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영혼이 오히려 밀려날지도 모른단 사실을요.」

「이번 시술에는 자원자를 쓰지 않을 겁니다」구천의 입이 다시금, 어둠 너머에서 단어들을 쏟아냈다. 「…훈련된 D계급 인원 가운데 요건을 충족한 한 사람을 골라, 시술을 받게끔 할 겁니다. 요원에게 하기엔 너무나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죠」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이 죽음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다. 한 사람의 목숨값은 비싸다. 그런 고로, 인간이 아닌 자원을 쓰자. 구천의 말은 그러했다. 그들의 논지가 그러했다.

「…」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똑같은 잿빛 평일이다. 사랑도 똑같고, 죽음도 똑같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 조지 오브라이언의 독백이다. 조지는 자살했다고 여겨진다. 정지돈의 소설에 나오는 장 역시 죽었다. 그는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지 못했지만 결국 엄밀히 말해 자살일 것이었다. 유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떤 형태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고 어떤 형태의 타살은 타살이 아니다. 자살과 타살이 모호해질 때 인간은 열반에 든다."

이러한 문장을 왜 적어두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유다는 그날을 기점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일기에 대한 해설도 듣지 못했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끝끝내 그에게 자살할 생각이었냐고, 묻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타살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삶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선택의 연속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마치 그때 그러했듯.

「결국,」 유다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연은 다른 사람의 목숨 위에서 살아야 하는 겁니까? 다른 이들의 피 위에 서지 않은 채 그저—」

「그저 백스페이스를 누른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당신의 진세연 요원으로 돌아갈 수 없느냐고요? 네, 성유다 요원.」 구천이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이킬 수는 없어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유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휘발유 박사는 무례하긴 했지만 그의 말이 옳습니다.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어요. 진세연 요원을 살리거나, 아니면 저 상태로 남아 있게 하거나.」 구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 편해서 이러는 줄 압니까? 내가, 우리가 단체로 도덕심이 제거된 상태로 일하는 줄 알아요? 전혀 아닙니다. 그 D계급을 우리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실험쥐로 쓴다고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린…」

유다는 구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빛을 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는 분노했고, 한편으로 실패했다. 그가 나를 연민하는 동시에 짜증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언제부터 휴머니스트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유다는 여백을 남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꾸깃꾸깃해진 종이에서 그의 혼란이 느껴졌다. "세연의 영혼만은 죄로 더럽히지 말아야겠단 생각뿐이었다."




10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적혀 있지 않다. 그가 기동특무부대 무호-17("도시 한가운데")에 배속받기 전날, 그는 내게 일기를 넘겼다. 제21K기지에서 처음으로 친해진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남의 일기 들여다보는 취향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어거지로 내게 넘겼다. 그간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는지, 이 일기가 대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옳았다. 일기에서 언급된 인물들은, 알게 모르게 그의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었다. 그가 왜 생판 연고도 없는 무호-17에 배속될 수 있었는지도 이를 통해 짐작하게 되었다. 일기에 등장한 김수동이란 남자는,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으니까. 그 일련의 작용을 용인한 자는 이강수 이사관이었을테고. 제21K기지는 평화롭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기류에 있어 평화롭다는 소리는 아니었기에,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아니, 납득한다기 보단 그것을 직관적인 하나의 현상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다고 해야겠다. 많이 일어났으니까. 많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 테니까.

유다에게서는 그날의 일을 모조리 캐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일기를 넘겨준 것도 심각한 보안 실패라고 이야기하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그런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물론 그런 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유다가 지금 만나는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나 싶지만, 그는 영 입을 열지 않는다. 사별한 아내를 그렇게 쉽게 잊었다는 자책 때문일까.

언젠가 그를 본 적이 있다. 갈색 머리칼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병원복을 입은 여자. 앉아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키는 큰 듯하고, 요원 직무를 수행하다 부상을 입은 듯,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죽은 진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귀여워 보이는 얼굴에 특징적인 몸짓, 그러한 부분들이 죽은 이를 떠오르게 했다. 아마 그래서 유다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언젠가 유다가 그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조용히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나의 청력은 온전했다. 잘못 들을 정도로 멀리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왜 그 말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유다는 왜 그를 세연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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