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프와 드미트리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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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이라고?"

"적어도 한 달은 떠나 계셔야 합니다." 글라스 박사가 초조하게 클립보드 아래편의 비상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박사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기괴하리만치 다채로운 눈을 깜빡이며 (그는 눈동자가 원래 무슨 색이여야 하는지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다) 손에 든 분홍색 결과지를 자세히 읽고 있었다. "심리 검사를 해 본 결과 마지막으로 쉬신 지 몇 년은 지나신 듯합니다. 머리를 식히셔야죠."

"이미 갔다 왔다네. 이탈리아로 멋진 여행을 다녀왔네만." 클레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술집에 갔었네. 재밌었지. 친구도 새로 사귀고." 스트렐니코프가 받아쳤다.

"MTF 대원 6명이랑 목표를 제거하러 가신 비밀 작전은 휴가가 아닙니다. 내상 치료를 하느라 5주 동안 병원에 계셨던 것도 휴가가 아니고요." 글라스가 탄식했다. "들어보세요. 그냥 여행을 떠나시면 됩니다. 어디로 가서 뭘 하시든 상관없으니 딱 한 주만 지구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고 지내보세요."

"그건 좀… 어렵겠네만." 클레프가 종이조각을 정확히 삼등분해 접으며 말했다. "차라리 숨을 쉬지 말라고 하지."

"멍청해." 심리학자 건너의 다른 사람이 검사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체첸놈들이 너무 지쳐서 체첸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야. 전쟁에 정시 퇴근은 없네."

"그러면… 최소한 지구 수호를 부차적인 과제로 둘 순 있으신가요. 정기 점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자동차도 만 마일을 달리면 정비가 필요한 것처럼, 두 분께서도 정비를 받을 때가 되신 겁니다." 글라스 박사가 말했다.

"정비소에서 정비받을 수는 없는가? 아마 훈련 기지에 잠깐 가 있거나 아니면 현장에 나가서…" 클레프가 중얼거렸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쉬어도 되나? 완벽한 러시아식 휴가가 될 걸세."

"안 됩니다. 야전도, 훈련도, 서류 작업도,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냥… 쉬세요. 여러분께 주어진 휴가입니다. 그럼 즐거운 휴가 되십시오."

서사시의 결말이 나듯 문이 닫혔고, 복도에는 재단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두 남자가 교장실에 불려온 불량 청소년처럼 분홍색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인재개발부의 모든 지원직군 직원들은 칸막이친 자리에 앉아 애써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굉장히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여직원 하나는 메모장에 주기도문을 절박하게 쳐넣고 있었다. 불경을 중얼거리는 직원도 있었다.

긴장감을 깬 것은 분홍색 결과지로 뒷목을 긁어대던 클레프였다. "그래서…" 그가 말을 꺼냈다. "올해는 브라질이 꽤 괜찮다고 들었는데."


공항 바는 에어버스나 보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려는 지친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긴 바에는 딱 두 자리가 남아있었고, 말없이 돌아다니던 스트렐니코프와 클레프가 자리를 차지했다. 둘은 바텐더와 두 시간 동안 비행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옆자리 사람에게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했는데, 화려하고 과시하는 듯한 옷차림을 했기 때문이다. 스트렐니코프는 녹갈색 군복에 정모를 쓰고 있었고, 클레프는 매춘업 종사자들의 음란한 모습이 화려하게 칼라 인쇄된 하와이안 셔츠 차림이었다.

그들의 성격은 각자 주문한 술에서 잘 나타났다. 하루종일 일하느라 머리가 떡진 바텐더가 클레프를 가르키고는 그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봄베이 사파이어 마치니, 흔들진 말고 저어서. 얼음은 두 조각만, 진이랑 베르무트는 6대 1로 맞춰주시고, 올리브 두 조각, 양파 하나. 그리고 베르무트를 망치면 저주받을 겁니다.” 클레프는 마치 바텐더가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를 되풀이하는마냥 말했다. 바텐더는 잠시 벙쩌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트렐니코프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드릴까요?”

“보드카.”

“뭘 넣어드릴까요?”

스트렐니코프는 그를 기분나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얼음.”

“선호하시는 브랜드는 없으신가요?”

드미트리는 굳은 눈빛으로 주먹을 바에 내리치며 말했다. “얼음 넣은 보드카.”

주문한 술이 나왔고, 곧 분위기가 밝아지고 둘의 혀가 풀려갔다. 잔이 한 바퀴 돌았을 때, 둘은 활기차고 그들다운 대화를 시작했다.

“드미트리. 좋은 술은 부드럽다네. 한 모금만 머금어도 풍미와 향기가 조화를 이뤄 숨을 앗아가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손길이자, 손에 들고 있으면 내가 상류층 자식이라는 걸 보여주는 징표라네.”

“술? 클레프 밬사. 술은 지위나 계급의 상징이 아니야. 술을 마신다. 취한다. 더 마신다. 한계가 온다. 어느새 술이 깨있다. 이게 다야.”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진 않군 그래.”

계속 이어지던 둘의 활기찬 대화는 점차 주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괴상하게 차려입은 두 남자가 서로의 기호를 비방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바라봤던 것이다. 빈 보드카와 마치니 잔이 탑을 쌓아갈수록, 논쟁은 사그라들고 둘은 괴상한 행동에 대한 행복하고 가족적인 대화로 옮겨갔다.

“직접 얼굴을 보고 죽이고 싶었다네. 그래서 저격수들더러 사격 중지를 명령한 거지. 잘 들어봐. 내가 이렇게 그놈 뒤에 다가가서…“ 클레프는 손동작으로 설명했다. “얼굴을 권총으로 내리쳤어. 그런데 그놈이 칼로 나를 찌르는 바람에 온갖 난리가 일어났고, 뭐 어쩌다 보니까 몇 주 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적이 있지. 재밌었다네.”

스트렐니코프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체첸에 있을 때는 항상 물자가 부족했지. 그래서 항상 총을 못 쏘고 총검을 쓰곤 했다네.” 그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 총검에 수많은 체첸인들이 얼굴과 목을 찔렸지. 많이. 피도 많이 봤고.”

“탱크로 서른 명을 깔아뭉개봤나?”

“APC도 쳐주는가? 그나저나 자네는 무기가 없을 땐 어떻게 하는가. 목을 꺾나?”

“나는 척추 쪽이 더 쉽다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인 목 꺾기를 택하지만, 나는 머리를 잡고 등을 있는 힘껏 차는 방식을 쓰지.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라네.” 스트렐니코프는 따질 수 없었다.

“저번엔, 야간 작전이었는데, 폭탄맞은 창고 안에 반란군 본거지가 있는 거야. 그래서 두 팀을 보냈지. 두 팀을.” 그는 손가락을 펴보였다. “두 팀을 양쪽 입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창문을 타고 혼자 넘어갔었네. 칼이랑 권총만 가지고 말이지. 모두 자고 있더라고. 경비병들도 자고. 우리는 반란군들 목을 베어놓고 까마귀 밥이 되도록 놔뒀지.” 기침. “나중에 들어보니 휴전 협정이 이미 맺어졌었다는군.”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끝냈다.

“이 사람도 참. 알겠네. 한번은 연구 중이던 전기톱을 써보고 있었네. 격리해야 된다고 판단된 물건이었지. 그런데 D계급들이 난동을 피운 거야. 뭐, 그 상황에서 내 손에 전기톱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자네도 알잖나. 내가 다음으로 기억하는 건 D계급 시체더미 위에서 머리 위로 톱을 들고 피에 굶주려 소리지르던 내 모습인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방금 그건 매년 열리는 코스프레 파티였고 내 밑에 있는 연구원들이 반쯤은 여기서 죽었다고.” 으쓱임. “알고 보니 톱은 그냥 평범한 톱이었다네.” 스트렐니코프는 클레프의 슬픔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스트렐니코프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휴전협정 이야기는 그냥 농담이었네.”

“…음. 난 농담이 아니었는데. 진짜 코스튬 파티였다네.”

드미트리는 한숨을 쉬고는 술을 더 주문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 너머를 보려고 고개를 길게 뺸 그가 본 것은 창백하게 질린 바텐더였다. 바텐더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 하고 있었다. 스트렐니코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스로 병을 가져와 잔에 부은 뒤 다시 클레프를 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뒤편의 상황을 보았다.

바는 완전히 비어있었다.


"우리 상관들이 누구인가. 분명 우리한테 이코노미석보다는 좋은 좌석을 잡아줄 돈은 있었을 텐데." 클레프가 툴툴거렸다. "아니 정말, 건조햄 샌드위치랑 사이다 반 캔에 5 달러라니. 완전 날강도 아닌가."

"그래도 80년대 아에로플로트보단 낫네." 드미트리가 꼬집었다. "무슨 음식인 지 알아볼 수도 있고. 객실 공기가 새지도 않고. 승무원들은 소리지르는 대신 살짝 웃어주잖나." 그는 음료수 카트를 밀며 다가오는 매력적인 아가씨를 보고는 눈썹을 올렸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지. 아에로플로트 승무원들은 죄다 뚱뚱하고 못생긴 할머니들이었는데."

"그건 모르겠고. 차라리 삶은 무에 말가죽을 씹어먹는 게 이…것보단 낫겠네. 도대체 이 초록색 즙은 또 뭐야." 클레프는 샌드위치를 가르키며 투덜댔다. "도마뱀 오줌?"

"682가 싼 정액 아닐까. 거대한 도마뱀이 샌드위치에 대고 잔뜩 적신 거지." 스트렐니코프가 빈정댔다. 그는 왼손으로 "딸 치는" 동작을 해보였다.

"맛이 좀 나아지면 좋겠는데… 실례합니다. 아가씨. 아가씨?" 창가자리에 앉은 클레프가 드미트리 너머 승무원의 팔꿈치를 건드려 불렀다. "죄송합니다만, 주문이 잘못 처리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는 햄과 치즈가 든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오줌과 플라스틱이 나왔습니다. 맛으로 보건대 둘을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손님." 승무원이 한숨을 쉬었다. "샌드위치가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면 죄송합니다. 환불하시려면…"

"나는 지금 빌어먹을 환불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원하는 거요." 클레프가 말을 끊었다. "이제 당신이 말라붙은 정액이랑 스티로폼 밑에 진짜 식품을 숨겨둔 걸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쁜 엉덩이를 굽혀서 조금만 더 자세히 찾아보지 그래요, 이쁜이?"

"아아아아!" 승무원이 소리쳤다. 그녀는 클레프에게 웃어보였는데,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큰 억지웃음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손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건 네가 병신이란 거지!"

그는 드미트리 너머로 몸을 기울여 당황한 클레프에게 설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엄했지만,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진 덕에 모두에게 울려퍼졌다. "잘 들어 이 새끼야. 이 벼락맞을 음식을 내가 만드는 줄 알아. 그냥 갖다주는 거라고. 문제가 있으면 요리사한테 항의서를 쓰든지 하란 말이야. 근데 항의서를 보내려면 착륙을 해야 한다고. 상 파울루까지 여섯 시간 남았는데, 그동안 너 같은 새끼 말을 들으려면 돌아버릴 것 같다고. 그러니까 닥치고 샌드위치나 쳐먹던가 불평 좀 그만해봐. 안 그러면 청테이프로 입을 싸매서 의자에 묶어버릴 테니까." 그녀는 기울인 몸을 되돌렸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쁜이가 아니라 루시야. 이 빌어먹을 놈아."

어리벙벙해진 사람들이 잠시 침묵을 유지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설픈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승무원은 복도를 마저 내려갔고, 감사할 줄 아는 승객들에게 커피와 사이다를 나눠줬다. 클레프는 의자에 기대 살짝 웃었다. "난 저 승무원이 좋아. 활달하잖나." 그가 인정했다.

"멋있네."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는 벨트를 풀고 천천히 일어났다.

"어디 가나? 조금만 있으면 영화가 나올 텐데." 클레프가 말했다.

"오줌 좀 싸러… 그리고 자네랑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클레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의자를 최대한 뒤로 기울였다. 뒷자리 뚱뚱한 여자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말이다. 그가 막 잠에 빠져들 쯤 큰 싸움소리와 고함이 그를 깨웠다.

"움직이지 마!" 소리친 수염난 남자는 루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비슷한 무기를 든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머리 위에 잡고 있었다. 셋은 모두 두건을 쓰고 위장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지금부터 체첸독립공화국의 신성한 군대가 관할한다!"

"알라 후 아크바르! 위대한 신이시여! 체첸 만세!" 다른 하나가 소리쳤다.

"이런 씨발… 장난하는 거겠지." 클레프는 몸을 움츠렸다.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바람에 스트렐니코프는 제대로 오줌을 눌 수 없었다. 언제나 이런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니까 그는 비행기에서 전장으로 뛰어내리는 데에는 일말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오줌을 누는 것같이 간단한 일에는 항상 문제를 겪었다. 이런 인간 정신의 복잡함과 함축성이 동시에 빠져나갔고, 스트렐니코프는 스스로를 ‘계집애 같이 굴지 말자’고 나무랐다.

그가 정신을 다잡고 나가려 하자마자 누군가 밖에서 문을 걷어찼고, 그의 어깨를 붙들어 통로로 끌어내렸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지를 올리려고 비틀거릴 뿐,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체첸인은 제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모자에 달린 러시아 장식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비행기의 앞쪽으로 끌고 갔다.

“바지도 못 잠그고 잡혔군 그래.” 스트렐니코프가 통로로 끌려오자 클레프가 빈정댔다. 그렇지만 그의 유머가 이번에는 별로 먹히지 않은 듯했다. 순간 클레프는 통로로 발을 뻗어 체첸인을 넘어뜨렸다. 체첸인은 바닥에 얼굴을 찧었고, 드미트리도 덩달아 넘어졌다. 다른 둘은 클레프를 제압하려 바로 달려왔는데, 하나는 여전히 수류탄을 머리 위에 든 채 체첸식 러시아 억양으로 성내고 있었다.

스트렐니코프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이놈들은 체첸인이다.

그들이 비행기에 있다. 이 비행기에.

체첸인이 이 비행기에 있다. 세 명이다.

“…세 명은 너무 많다!” 스트렐니코프가 고함을 질렀다. 클레프가 특이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 것은 스트렐니코프가 갑자기 넘어진 남자의 코를 깨물고, 부츠에서 단도를 꺼내 남자의 콩팥을 찌르는 모습이었다.

클레프는 그 즉시 겁에 질린 승객들 위를 뛰어넘어 한 놈에게 나가갔다. 그는 칼을 든 자를 아까처럼 바닥에 넘어트렸다. 클레프가 상대를 뒤로 당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내리치자, 순식간에 콧대가 무너져내렸다. 클레프가 합기도식 손목꺾기로 무장해제시키자 상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피가 쏟아지는 코를 움켜쥐었다. 클레프가 적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었을 때, 스트렐니코프는 아까의 상대를 죽어가는 핏덩어리로 만들어놓은 참이었다.

이제 한 명이 남았다. 그는 여전히 수류탄을 들고 있었고, 계획이 완전 틀어져서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움직이지 마! 이거 폭탄이야!” 그가 소리쳤다.

클레프와 드미트리는 시체더미를 보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느데, 웅웅거리는 엔진소리 대신 드라마틱한 음악만 깔렸다면 싸구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었을 모습이었다. “어쩌라고.” 클레프가 말했다.

드미트리는 그저 웃었다. 은니가 반짝였다.

테러리스트는 초조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루시가 오금을 차자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넘어진 곳엔 칼을 든 스트렐니코프가 있었다. 클레프는 능숙한 솜씨로 손잡이가 눌린 상태를 유지하도록 그에게서 수류탄을 낚아챘다. 객실 전등빛에 드미트리의 피묻은 은니가 반짝였다. 그것이 테러리스트가 맞은,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최후의 장면이었다.

드미트리가 찔러넣을 때만큼 난폭하게 칼을 빼내자, 주변에 핏방울이 튀고 시체가 풀썩 쓰러졌다. 사람들은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피튀기는 싸움에 대한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었기에, 수류탄을 든 채 자리에 앉는 클레프에게 박수치는 이들은 없었다. 스트렐니코프는 비행기 뒤편으로 걸어갔다.

“오줌 좀 싸고 오겠네.”


"문제가 좀 생겼네." 화장실에서 나와 바지를 잠그던 드미트리에게 클레프가 말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피비린내를 풍기는 러시아인과 비교하면, 어떻게 된 건지 클레프는 몇 분 전 일에 전혀 휘말리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문제가 왜 생기나. 체첸놈들은 다 죽었는데." 스트렐니코프가 따졌다.

"바로 그게 문제야. 테러리스트 세 명이 죽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마워한다. 매스컴. 영웅 행진. 우리는 신문에 실릴 거라고. 뭘 말하고 싶은 지 알겠나." 클레프가 짚어 말했다.

스트렐니코프는 글라스의 말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불편." 그가 중얼거렸다. "글라스 박사에게 허구한 날 불려가서 '안정'과 '근신'에 대해 들어야겠군."

"듣기만 하면 다행인가. 여기 있게. 잠깐 기다리다가 따라오게나."

꺾다리에 코가 큰 박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어깨를 으쓱이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가 향한 앞켠엔 약간 충격받은 채 커피잔을 꺼안고 있는 승무원 아가씨가 앉아있었다. 엔진이 울려대는 통에 스트렐니코프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듣지 못했지만, 몸짓은 볼 수 있었다.

클레프는 첫째 열 근처에 기대선 채 뭔가 말했다.

루시는 대답했다. 여전히 양손에 커피잔을 든 상태였다.

클레프가 또 말했다.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였다. 그는 미소지었다.

루시도 살짝 웃었다. 그는 눈을 굴리며 뺨을 닦아냈다.

클레프는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는 루시 옆의 벽에 기대어, 루시를 내려다보며 손짓했다.

루시는 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클레프는 뺨을 닦았다.

루시는 귀 뒤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클레프는 눈을 찡긋했다.

루시는 목과 쇄골을 문질렀다.

클레프가 통로를 걸어내려왔다. 그는 화장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루시는 아랫입술을 약간 깨물었고, 이내 클레프를 따라 주방으로 갔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드미트리는 스물까지 세었고, 머리를 내밀어 주방 쪽을 보았다. 수화물 보관소까지 이어지는 사다리 입구가 열려있었다. 그는 사다리를 내려가 어두컴컴한 수화물 보관소로 들어섰다.

처음 그가 본 것은 클레프가 의식을 잃은 루시의 몸을 적하물 보관소로 조심스레 옮기는 장면이였다. 그의 옷깃엔 립스틱이 묻어있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잠겨 있었던 박사의 하와이안 셔츠가 조금 열려있었다. 그가 키 한다발을 스트렐니코프에게 건넸다. "우리 가방을 가져올 수 있겠나." 그가 말했다. "아마 저기 잠긴 적하물 컨테이너들 가운데 어딘가에 있을걸세."

"밬사." 스트렐니코프가 차분히 말했다. "그냥 나에게 말해주게나. 지금 상황에서 가방을 찾을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뛰어내릴 때 놓아두고 내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네."


“난 슈트 없이 아니 뛰어내리네. 예전에 한 번 해봤는데, 별로였네. 뼈가 많이 부러졌었지.” 스트렐니코프는 창고들을 열고 그 안을 뒤져, 짐가방을 꺼내 클레프를 따라 움직였다. “더 좋은 생각이 있네.” 그들은 기체의 깊은 공간을 찾아다녔고, 직원용 통로와 말단 날개 청소부들만이 사용하는 보수 통로를 기어나가기도 했다. 비행기의 알루미늄 외피는 그에 흐르는 공기에 의해 진동했고, 멍한 소리가 울려댔다. 마침내, 그들은 기체의 최하단에서 멈추었다.

“이제부턴 기다리세.”

조종사는 겉으로는 체첸인들이 요구한 방향으로 조종간을 돌리는 척을 했지만, 실제론 버려진 군사 공항을 향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활주로는 군데군데가 깨져 있었고, 그 사이로 잡초들이 비져나와 하늘을 향해 자라나 있었다. 공항이 헐린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남아있는 건물이라고는 녹슬고 우글우글해진 격납고 몇 채와 헐어빠지고 쓰이지 않는 관제탑 뿐이였다. 조종사는 좀 전의 사건에 아직 놀란 상태였다. 그는 조종간을 꽉 잡은 나머지 손이 하얬고, 눈에는 경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아까의 학살극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루시가 그에게 잔인한 실상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나저나 그녀는 어디 있는거지? 그는 술이 필요했다, 정말로.

기내 플랩이 살짝 각도를 낮추었고, 그리고 살짝 더 낮추자 비행기의 공기 저항과 고도가 높아졌고, 전미가 살짝 위로 올라가며 점점 속도를 낮추었다. 격렬하게 울려대던 엔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고 기체가 서서히 밑의 활주로로 하강했다. 클레프와 드미트리는 고도가 낮아지며 전해져오는 동체의 떨림을 느꼈고, 착륙장치가 작동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수압 표시기가 울리는 소리 또한 들었다.

“멈춰 있게! 속도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게나!” 스트렐니코프가 소리쳤지만, 소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파묻혀버렸다. 클레프는 그에게 혼란스럽단 표현을 했지만 이미 기어에 다리를 걸고 있는걸로 보아 중력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행기가 속도를 줄였다. 지상으로부터 백 미터 남짓까지1 내려가자 착륙을 위해 기수를 올리고2, 지면효과가 발생했다. 해치가 아래로 열리면서 랜딩기어가 펼쳐지자, 둘을 찢어버리는 듯한 무자비하고 폭발적인 바람이 불어왔다. 밑으로 보이는 땅은 무섭게도 흐릿한 모습을 보이며 빠르게 흘러갔다. 조종사가 기수를 내리자, 콘크리트 활주로는 놀라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바퀴가 땅에 닿자 긁히는 소리를 났다. 무거운 무게를 견디는 데에 반항해 짜증내는 듯한 소리였다.

조종사가 브레이크를 작동시키자 기체가 감속하였고, 활주로의 끝까지 달려가다가 멈추었다. 그들은 착륙장치에서 뛰어내려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서 일렬의 나무들을 향했고 이윽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다른 승객들이 어지간히도 품위없는 탈출을 할 기구인, 우습게 생긴 팽창 고무 미끄럼틀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작은 덤불나무들 속에 몸을 숨겼고, 아무도 그들을 따라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비행기 내부, 루시는 머리를 들어올리고 신음했다. 그 망할 자식 — 그리고 그 자식을 거의 좋아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가 무슨 기관에서 일하는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고는 관자놀이를 눌렀고, 제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비상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앵앵거린 후 그녀에게 보안 번호를 묻자 그녀는 의무에 충실하게도 번호를 눌러넣었고, 그들이 그녀의 혼란한 정신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파크스 중위, 보고합니다. 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두 인원을 발견했으며, 본인의 위치로부터 추적해 즉시 미행 부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합니다.”


"아무래도 인정해야겠네." 클레프가 말했다. "자네의 의견이 더 나았을 것 같네."

두 남자는 숲의 끝자락에 숨어 특수부대가 팽창 미끄럼틀을 통해 승객들을 탈출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양복에 타이를 맨 남자가 승객 하나하나 사이를 오가며 뭔가를 묻고 있었고,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위쪽엔 위장색 무기를 든 젊은 남자가 왼쪽 출입구 밖으로 몸을 기울여 도로를 향해 토해내고 있었다, 마침내,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 몇 명이 세 구의 시신을 들것에 실은채 미끄럼틀을 통해 조심스레 옮기기 시작했다.

"더 머무르며 보다가 가겠나?"

"아니, 충분히 본 듯 하네. 이제 떠나세."

그들은 수풀 아래를 조용히 통과하며 움직였고, 철사 절단기와 침낭을 이용해 전기 담장을 가로지르고 사막을 향해 나아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깨진 아스팔트로 포장된 이차선 도로가 저 너머를 향해 멀리 뻗어있었다.

"음." 클레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가 브라질은 아니지만, 글라스가 말하는 업무와는 확실히 멀리 떨어진 곳일걸세. 차를 잡아타도록 하세."

"먼저 우린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하네. 죽음의 계곡에서 끝나버리는 것은 좋지 않지 않나. 몇 마일 밖에 사람이라고는 없을테니 말일세."

"좋아, 그러면 GPS를 확인해보겠네." 클레프가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켠 뒤 지도 프로그램을 켰다. "씨발." 그가 내뱉었다. "이건 좀 아니지."

"여기가 어디인데 그런가? 볼리비아? 죽음의 계곡?"

"더 나쁘네." 클레프가 엄하게 말했다. "텍사스일세."

마치 미리 짠 듯이 침묵은 굽은 길을 따라 달려오는 찌그러진 트럭 소리에 깨졌다. 흰 카우보이 모자를 쓴 두 남자가 오래된 포드 트럭에 요원들을 태워주었다. 트럭 뒷유리는 연방기로 장식되있었고, 지붕 위에는 산탄총 두 정이, 보닛 위에는 죽은 사슴이 늘어진채 놓여있었다. 남자들은 잠시 쉬기 위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인, 반백으로 보이며 애꾸눈에 반항적인 검은 머리를 한 카우보이가 담뱃진을 스트렐니코프의 신발에 뱉고는 빈정거렸다.

"당신들 멕시코 유대인 도마뱀 찌꺼기 한 쌍이 우리들 숲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좀 말해주겠수까?" 그가 말을 내뱉었다.

클레프와 드미트리는 멍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나하고 지랄하자는 건가." 드미트리가 중얼거렸다.


스트렐니코프의 눈이 피로 들끓었다. 드미트리는 이 사람들이 차려입은 꼴을 보자 역겨움이 몰려옴을 느꼈다. 어느 누가 도대체 저렇게 입고 다닐까? 그는 정모를 바로잡아 쓰고 싶다는 순간적인 욕구를 느꼈다. 그들의 불쾌한 복장을 꺾기에는 무력한 시도이겠지만. 클레프는 그저 웃을 뿐이였다.

“도대체 당신들은 어딜 보고 있는거요, 뭐 바보라거나 그런 거요?” 애꾸눈의 카우보이가 창 밖으로 내밀었고 운전자가 방금까지 거슬리는 음량으로 토니 케이스의 노래가 흐르던 라디오 소리를 껐다. “오, 내 짐작하건대, 당신은 공산당 사람이오, 그렇지 않수까?” 그가 또 침을 뱉었다. “난 당신네 사람들과 월남에서 싸웠었수다.” 운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은 당신네 사람들과 월남에서 싸웠소!” 클레프가 불쾌하고 큰 미소를 자아냈다.

저런 말을 꺼낸 사람이 멀쩡하지 않으리란 것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고, 스트렐니코프는 신속히 상황판단을 한 뒤 남자의 얼굴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당신들은 전쟁에 대해서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네. 나는 체첸 전쟁터에서 적어도 당신들보다는 더 명예로웠을 애송이들을 만나 두 번을 싸웠네,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우리 할아버지께서 베를린을 탈환하셨을 때, 당신네 조상들은 들어앉아 독한 술이나 홀짝이며 우리처럼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겠지. 당신들 나라는 모두 애송이야. 당신들 모두는 애송이라고.” 그의 손가락이 분노로 떨렸고, 클레프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카우보이는 혼란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요?”

스트렐니코프의 주먹이 그의 입을 강타했다.

카우보이는 뒤로 넘어졌고, 그의 동료와 부닥치며 함께 도로를 향해 떨어졌다. 클레프는 매우 빠른 동작으로 그를 들어올린 뒤 상당히 아파 보이는, 우두둑거리는 관절의 꺾임소리와 함께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애꾸눈은 대견스럽게도 그의 평정심을 유지했고, 드미트리의 앞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멍청한 공산당 친구, 당신이 시발 내 얼굴을 부러뜨려 놓다시피 만들었잖수! 왜 이렇게 구는거요, 전쟁에 져서 화라도 난 거요?”

러시아를 향한 그의 애국심은 더이상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남자를 들어메어 목부터 땅에 매다꽂고, 마르고 죽은 나무에 그를 끌고 갔다. 카우보이는 거세게 밀어댔고, 그를 때리려고 하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스트렐니코프와의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그는 잠깐 남자를 목매달아 버리는 걸 고려해 보았지만, 밧줄이 없었기 때문에 애꾸눈의 벨트를 가지고 나무에 묶어놓기로 했고, 클레프도 다른 놈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 클레프와 스트렐니코프가 그 두 명은 태양에 달궈지도록 내버려두고 트럭으로 걸어가는 사이, 큼지막한 론 스타 벨트 버클 두 개가 남부 지역의 무더운 태양 아래 반짝거렸다.

“이제 누가 전쟁을 이긴것 같나, 얼간이?” 클레프가 운전석에 몸을 실으며 빈정댔다. 그들은 텍사스의 고속도로를 수 시간동안 달렸고, 먼지와 바위 덩어리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조수석에 앉아 멍하게 앞을 보고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끝없이 넓은 풍경은 훨씬 메말랐음에도 그에게 고향에 대한 무언가를 상기시켰다.

먼 뒤편에는, 두 카우보이가 도로를 달려오는 검은 SUV 차량을 보며 환희했고,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내린 뒤 그들에게 빠르게 나가왔다. “자네들이 여기 오기까지 끔찍한 시간을 보냈수다.” 애꾸눈이 건방지게 말했다.

“그들이 트럭을 가져갔나?” 그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그들을 거의 잡은 걸세.”


"빌어먹을 놈의 미국 차 같으니라고." 클레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연기를 내뿜고 있는 보닛을 세게 쳐닫고 자동차의 전방 범퍼를 기운없이 찼다. "빌어먹을 놈의 쓰레기 같은 차. 포드는 수리 서비스 외에는 존재가치가 없는 회사네."

"그러니까 우리가 훌륭한 러시아산 자동차를 몰아야 한다는 걸세. 라다가 대표적인 예지. 훌륭하고 맷집도 좋은 차량이라네. 이런 미국 똥차같이 고장나버리지는 않는다는 말일세." 스트렐니코프가 자랑했다.

"자네 그 망할 놈의 러시아에 대해서 닥쳐본 적은 있나? 한 번이라도?" 클레프가 대꾸했다. "정말로, 자네는 마치 우주에서도 볼 수 있는 그 거대하기도 한 자네 모국에 대해서 성적으로 흥분한 것 같단 말일세. 빌어먹을."

"자네는 그렇게 빌어먹을 자식처럼 구는 데에 지치지도 않는가? 진지하게, 자네 엉덩이는 너무 큰 나머지 깃대로 쓸 수 있을 정도일터네!" 스트렐니코프가 소리쳤다.

"엿이나 먹게, 드미트리! 시발 자네도, 시발 러시아도, 시발 이런 멍청한 시발놈의 휴가도!" 클레프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시발, 내가 오로지 바랐던 것은 브라질 해변가에 누워 끝내주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였지, 끝내주는 선탠을 하면서, 그리도 아마도, 그저 어쩌면, 남미 아가씨랑 섹스도 할 수 있었겠지, 많은 코코아 버터진이랑 어쩌면 가죽 채찍과 함께하는 섹스 말일세! 근데 지금은 그런 것들 대신 사람이라고는 자네하고 나밖에는 없는 시발놈의 허허벌판 텍사스에 있고, 얼마 안있어 우린 열사병으로 죽게 생겼단 말이지!"

"근데 그렇게 된 데에 내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나!?" 스트렐니코프가 소리쳐 대꾸했고, 동시에 주먹으로 고장나버린 포드의 보닛을 세게 내리쳤다.

"시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클레프가 소리쳤다.

그 때 두 남자는 뒤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돌아서자 체리 붉은 색의 오픈카 카마로가 보였다. 차는 마치 보석같이 반짝였다.

차에 타 있는 세 명의 아가씨도 보석처럼 반짝였다.

운전하는 아가씨는 갈색 머리에, 그 길고 굽은 머리를 그녀의 벗은 어깨 위에 드리우고 있었고, 그녀의 꿀같은 피부는 따스한 텍사스 햇살에 땀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장난스럽게 오므렸고 자신의 선글라스를 약간 내려 두 남자를 재밌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친구 (짙은 금발에 흠 없는 살결, 화려한 녹색 눈을 가졌다)가 몸을 기대어 흔들었고, 뒷자리의 빨간 머리는 불던 껌을 터뜨리고 눈을 찡긋했다.

"거기 친구들," 갈색 머리가 말했다. "보니까 차에 뭐 문제가 있어 보이는걸. 태워줘야 하나?"

"…그래. 필요하네." 스트렐니코프가 말했다.

"음, 조금 좁지만, 낑겨 타지 뭐! 마을까지 데려다 줄게!" 갈색 머리가 말했다. 그녀는 카마로의 문을 열고 나왔다. 클레프와 스트렐니코프는 세 여자 모두가 데이지 듀크3처럼 입고, 샌들을 신은 것 외엔 특별히 입은 것이 없음을 보았다. 셋 모두 슈퍼모델들이 샘낼만한 몸매였다. 몸매가 팽팽한 나머지 셔츠를 터트리고 나올 지경이었다.

클레프와 스트렐니코프는 조금 전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건 일어날 수 없어." 클레프가 소근거렸다.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그 누구도 황폐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갈색, 금발, 붉은 머리의 세 아가씨에게 차를 얻어 타기란 불가능하네."

"의문은 그만, 그냥 감사하며 차에 타세나."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클레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트렐니코프가 뒷자리에 기어타 한 편엔 금발, 한 편엔 붉은 머리 사이에 끼여, 그를 눌러오는 덜 입은듯한 두 여성에게 억지웃음을 지여 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했다.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거군요."

그는 어쨌든 차를 탄 것이였다.


“그나저나 당신들이 일하는 스트립 클럽까진 얼마나 멀리 남았소?” 클레프가 카마로의 경쾌하게 부릉거리는 엔진 소리 사이로 말했다. 그의 옆에 앉은 금발은 그저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몇 시간을 달렸다. 클레프와 스트렐니코프는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가씨들이 자신들에게 아양을 떠는 것에 만족하고 그것에 집중한 나머지 신경쓰지 못하였다. 클레프는 앞 자리에 앉아 금발 아가씨를 무릎에 앉히고, 한 팔은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론 술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귀에 온화한 이탈리아 남자처럼 유쾌한 찬사를 속삭였고, 그녀는 수줍게 웃고는 성가시게 그의 코를 때렸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짓고는 고개를 돌려 스트렐니코프와 붉은 머리를 보았고, 그녀의 금빛 머릿칼이 살랑대며 클레프의 얼굴을 스치었다.

“어라, 저 사람은 뭘 하는거야?” 그녀가 클레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는 그들을 보려고 목을 빼들었고, “블블블블블블블”로밖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오, 아마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것 같네.” 그녀는 우스꽝스럽단 시선을 보냈고, 스트렐니코프는 다른 여자의 가슴에서 눈을 떼고 정확한 영어로 말하려고 오래 생각했다. “이건 가슴을 가로지르는 입의 빠른 동작일세.”

그녀는 킬킬대며 그의 손에 술을 들려주었고, 그는 클레프에게로 향해 건배했고, 아가씨들의 미소가 커져갔다. 그들의 머리는 축 늘어져서 아무런 조치도 못 취했지만 전화벨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는 것을 들었고, 도로는 마치 회색과 흰 색의 뒤범벅마냥 평평한 구분선으로 보였다. 하늘은 위에서 핑핑 돌았고, 그들은 함께 어둠 속으로 쓰러졌다.

"음, 쓰러졌어." 금발이 말했다.

다른 두 아가씨가 한숨을 쉬고 축 늘어졌다. "그들이 영원히 안 쓰러질 것 같았는데." 갈색 머리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 사람들을 쓰러트리려고 우리가 쓴 플루니트라제팜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거지?"

"평소 양에 비해 거의 세 배야." 붉은 머리가 한숨을 쉬고, 스트렐니코프를 밀치며 그녀의 윗옷을 잠구었다. "이 사람은 쓰러질 때까지 계속 얼굴을 가슴에 부빈 거 알아?"

"음, 이제 어쨌던 끝난거야." 금발이 한숨쉬었다. "이제 남자들이 자기네 일을 해야 되겠지."

빨간 오픈카는 지도에도 없는 골목길로 달려갔다. 조금 있어 검은 SUV 차량이 뒤를 따라왔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매우 추웠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손과 발에 수갑과 안대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들이 발을 끄는 소리가 텅 빈 콘크리트 방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들 뒤에서 문이 열리었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장화 신은 발이 바닥을 걸어와 그들을 둘러싸는 소리가 들렸다. 무자비한 광선이 안대를 벗길 것이라는 예고조차 없이 그들의 눈동자에 내리쬐었고, 무표정의 사내 세 명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곱슬히 다림질되고 깔끔히 재단되어 있는 군복 느낌의 제복을 입고 있었고, 갓 없는 백열등이 그들의 뒤를 비추었다.

눈이 충분히 적응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고, 적응되자 그들은 남자들의 가슴주머니에 GOC 인장이 인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인 거야?” 스트렐니코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데이터는, 당신들이 아주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편집’되었네.” 한 남자가 대답했다.

“시발,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클레프가 화난 듯 한탄했다.

"아니, 우린 자네랑 장난치려는 것이 아닐세." 제복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의자를 당겨와 두 남자 건너편에 앉았다. 그의 옷깃에 새겨진 황금색 독수리 모양 훈장이 어두침침한 조명에 반짝였다. "우린 지금까지 자네들과 장난을 쳐 주었네. 그래서 이제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가려고 하네."

그는 옆면에 '공산주의는 엿먹어라' 라고 적혀져 있는 은색 지포 라이터를 꺼내어 크고 검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매운 연기가 구름을 이루며 궐련으로부터 떠올라, 온 방이 흰색 연기로 뿌옇게 들어찼다. "이제." 대령이 말했다. "자네들은 지금부터 자네들 두 재단 인원이 진행되고 있었던 GOC 작전에 끼어들어 뭘 하려던 건지 말해주면 되네. 도대체 목적이 뭔가? 무엇을 이루려고 그런거지?"

클레프와 스트렐니코프는 서로를 쳐다보았고, 다시 돌아서 대령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이루려던 것은… 아니 이거 어떻게 설명하지…" 클레프가 중얼거렸다.

"우린 푹 쉬고, 취하고, 술을 마시려고 했네." 스트렐니코프가 말했다.

"딱히 정해진 목적은 없었지." 클레프가 덧붙였다.

"그리고 또 태닝도 하려고 했었지." 드미트리가 말했다.

"아마 멋진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와인 시음도 할 수도 있었겠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짧게 말하자면, 우리는 휴가를 나온걸세." 클레프가 정리했다.

대령은 그의 옆에 놓여있던 가방 안에서 부츠 나이프를 꺼내어 아래쪽을 향해 책상에 꽂아넣었다. "여행 나온 친구들이라 보기엔 꽤나 중무장을 하셨구먼 그래." 대령은 지적했고, 계속해 아까의 가방에서 칼들과 작은 폭탄을 꺼내어 탁자에 늘어놓았다.

"솔직히, 우린 아니야." 클레프가 지적했다. "총도 없잖나. 예를 들자면 말이지."

"맞아, 그리고 칼 뿐이잖나. 도끼도 없고. SVD는 집에 놔두고 왔네." 드미트리가 덧붙였다.

"그렇지. 친구 사이에 자그마한 C-4가 어때서 그러나. 여기 텍사스에선, 차를 모는 것만큼 자연스런 일일텐데 말이야."

"기폭장치가 장착되어 있지도 않았다고. 나는 멍청하지 않았고, 비행기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네."

"그렇나. 그래서… 자네들은 재단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것이 아니란 말이지? 여섯 날 전에 재단 요원에게 연락을 받고 점점 늘어나는 KTE 활동에 대응하기 위한 보충 인력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전혀 아닐세."

"심지어 텍사스에 오려고 한 적 조차 없지." 드미트리가 끼어들었다. "브라질에 가려 했던건데."

"정말인가." 대령이 중얼거렸다. 그는 그의 뒤에 있던 화면에 손짓했다. 까만 눈에, 밝은 빛깔의 하와이 프린트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의 형상이 화면에 나타났고, 총기를 든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건 우리 리우데자이네이루 지부에서 보내오는 것이네. 이 남자, 익숙한 얼굴인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자가 비틀거리며 머리를 들고는 화면을 응시해다.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클레프 박사! 드미트리!" 요릭 요원이 웃었다. "날 구하러 온 겁니까!"

두 남자는 요릭을 잠시 응시했고, 서로 쳐다본 뒤, 다시 대령에게로 향했다. "난 평생 살아오며 이 남자를 만나거나 본 적 조차 없소만." 클레프가 거짓말했다.

"완전히 낯선 사람이네." 드미트리가 말했다.

"… 당신들 나랑 장난하자는 거군요." 요릭이 흐느꼈다.


"… 그리고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났나?" 글라스 박사가 물었다. 심리학자는 가만히 볼에 손을 괸 채, 그의 사무실에 황홀히 매료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음…" 클레프가 말했다. "우리는 요릭을 남겨두고 올 순 없었네."

"… 그래서 우린 그들에게서 벗어나 모두 총으로 쏴죽였지." 드미트리가 말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GOC 비행기를 뺏었고… "

"배였네." 드미트리가 정정했다.

"그게 배였나?" 클레프가 물었다. "난 그게 비행기인줄 알았네만… "

"내 기록에도 배라고 써있는걸." 드미트리가 지적하듯 말했다.

클레프는 매우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미소지었다. "수상 비행기였네."

"맞아." 드미트리가 무척 안심하며 말했다. "수상 비행기. 헷갈린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래. 그래서 우리가 GOC 수상 비행기를 탈취한 뒤에, 우리는 리우데자네이루로 날아 내려가 요릭을 찾아냈고, 그를 구해냈지."

"잘 알겠네." 글라스가 매우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네들이 휴가 기간보다 늦게 돌아온 이유인가?"

"음, 우린 바로 날아 돌아올 수 없었다네." 클레프가 말했다.

"GOC가 우릴 주시하고 있었지. 매우 위험했네."

"전 그들의 고문실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죠." 요릭이 흐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객처럼 위장해 그들이 주시를 풀기를 기다렸지."

"여행객처럼… 위장이라." 글라스가 따라 말했다.

"음… 그렇네. 마치 돈 많은 회사 임원들의 휴가처럼…"

"잘 알겠네. 그러면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 글라스는 눈길을 내려 그의 앞에 놓인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 호화 4성급 호텔에서 여섯 날을 잤고, 식당과 술 값에 오천 달러 이상을 지출했고, 그리고… 존경하는 친구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콘돔을 산 건가? 그리고 비키니 여섯 개는 또 왜?"

"… 젊은 아가씨들이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했다지." 클레프가 말했네. "그리고 그네들은 뜨거운 욕조에 알몸으로는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네."

"… 클레프 박사. 존경하는 요원들. 나는 어린 애가 아니네. 재단 경비 기금은 꼭 필요한 급한 비용에만 쓰이는 것일세. 이것은 납세자의 세금으로 방탕의 한 주를 보내는데 쓰여서는 안 되고, 자네들의 우스운 이야기는 내 지식을 모욕하는 것일 뿐 아니라… "

마치 그들이 예행 연습이라도 한듯 (어쩌면 했을지도 모른다) 일제히, 세 남자는 그들이 입은 하와이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세 장의 신문 조각을 꺼내어 글라스 앞의 책상에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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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는 신문 조각을 하나 하나씩 읽어보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세 남자를 보았다.

그는 요릭이 볕에 그을은 손목의 띠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클레프가 피 묻고 찌그러진, 그리고 "공산당 조져라"라고 적혀져 있는 지포라이터로 시가에 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스트렐니코프가 웃는 것을 보았고, 그의 입은 철치아로 가득했으며, 그의 넓고 슬라브인다운 얼굴은 마치 천사같은 순백 같았다.

글라스 박사는 깊은 숨을 들이마쉬고 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자네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군." 그가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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