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그리고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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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그는 주머니 안에 든 권총의 무게를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지 전체가 수많은 개체의 탈주로 최악의 상황을 직면하며 발칵 뒤집혀 있었다. 누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살기위해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기지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말 아이러니하네. 레퀴엠(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살기위해 뛰고 있다니. 그는 구역 차단이 이루어지기 전에 가까스로 B-1 구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뛰어다니며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고, 그 역시 그 행렬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보조 연구원 한 명을 밀쳐내며,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갔다.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그냥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방들이 늘어선 복도 끝에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3등급 보안 카드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말 여기 있군. 좋아. 그는 화물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대며 뒤를 연신 돌아보았다. 막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눌러댔다. 막 문이 닫히려는 찰나, 갑작스레 손 하나가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숨 막히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벽 쪽으로 붙으며, 주머니에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꺼내들었다. 탕. 총알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지만, 손의 주인은 멈칫하더니 잽싸게 손을 뺐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는 바닥에 서서히 미끄러졌다.

다섯.
그는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기동부대나 대응반이 들이닥쳐서 사방에다 총을 쏴댈 것이 뻔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는 뛰어나왔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먼저 와있었다. 엘리베이터보다 어떻게 빨리 온 거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살기위해서는 생각하기보다는 뛰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발견했고, 고함소리와 함께 그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권총을 들고 쏘았다. 이번에는 좀 더 진정된 손으로 쏘았지만, 총에 대한 지식은 영화에서 배운 것밖에 없는 그가 제대로 맞출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더욱 흥분해서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른 이들도 죽였을까? 연구부장도? 그 보안 요원도? 잡역부도? 하지만 난 아니야.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그냥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그냥 그 연구부장이 명령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야. 전부 그의 잘못이라고. 지금 기지가 이 꼴이 된 것도. 모두 다.

넷. 아니 셋.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아있었다. 그는 화물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까지만 올라간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한층만 더 올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계단 쪽에 쫙 깔려있었고 그 많은 수를 그 혼자서 뚫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들의 주의를 돌린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전력실로 뛰어갔다. 전력실 문 앞에 헐떡거리며 도착했을 때, 요원 하나가 그를 붙들었다. “뭐하는 겁니까? 보안 절차를 따르시죠. 당장 위치로 돌아가십시오. 아니면 사살하겠습니다.” 그 요원 역시 그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그냥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그 요원이 그를 사살하기 전에 그가 먼저 해치워야 했다. 요원과 그 사이의 거리는 30cm도 되지 않았으니, 아무리 그가 총을 못 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잽싸게 오른손으로 옮기고 한발 쏘았다. 그는 보안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선반과 레버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여기 있군. 레버 위에는 B-1, B-2 구역 전력 공급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레버를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팍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더니, 불이 꺼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뒤이어 고함소리가 미친 듯이 들리고,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둘.
그는 이제 다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런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그들을 따돌리는 것까지는 해냈지만, 이제 계단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비상경보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기계적인 목소리가 말을 시작했다. “알림, 알림. 대응반 추가 투입 90초 전. 지상 교전 종료됨. 지하 시설 재확보를 위해 투입될 것임.” 그 알림에 그는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 서부 총잡이 같은 놈들이 들어온다니. 이제 온 사방에 총을 갈겨대겠지. 그는 그 생각에 다시 빛이 팍 하고 들어올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눈부심에 눈을 찡그리며 주춤거릴 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다!” 그는 그 외침이 들려온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손 하나가 그를 붙잡는 걸 느끼자, 그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총을 다시 들어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나. 아니면 그것도 없나?
그는 정말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갔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갑작스레 반대편 복도에서 그들이 나타났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쪽에서도 이미 그들이 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더러운 배신자 자식. 반란에 협조해서 이 빌어먹을 난장판을-“
그런 소리는 그에게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총을 쏘았지만, 총알이 다 떨어진 총은 그저 철컥거리는 소리만 낼뿐이었다. 이제 그는 멍하니 서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총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성과 함께 쓰러질 때, 그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그냥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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