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약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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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H.H. 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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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냐?」
「깜짝이야!」
「회의실에 혼자 앉아 뭐 하나 했더니. 이게 뭐야, 수학에 한국사에」
「제 공부 하는 거거든요! 요새 워낙 더워서 여기서 공부해요. 그리고 기척 좀 내고 다니세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내 앞에서 간 얘기 하고, 이거 지금 시비 거는 거지?」
「아파요! 헤드락 풀어요!」
「이야, 나 때하고 비교해서 교육과정 엄청 바뀌었네. 그러고 보니 이젠 이과도 국사 필수라지?」
「이젠 국사가 아니라 한국사요……」
「독립운동 부분이라. 이거 옛날 추억 생각나누만. 가만 있자, 너 본관이 어디 서씨지?」
「대구 서씨요. 그건 갑자기 왜요?」
「대구 서씨? 혹시 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름이 어찌 되냐?」
「에?」
「몰라? 혹시나 세상이 참 좁은가 싶어서 물어본 건데, 모르면 됐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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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대장님. 어제 말씀하셨던 거요. 아버지께 여쭤서 알아와 봤는데요」
「어제? 어제 뭐?」
「아, 왜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아, 그거. 야, 그게 뭐라고 또 알아보고 온대냐」
「궁금하잖아요. 대장님이 궁금하게 만들어 놓으시구선」
「그래서, 네 세제곱 할아버지가 뉘시라고」
「서신보라는 분이래요. 1831년생. 1908년 몰. 왜, 대장님하고 알던 사이셨나요?」
「나하고 알던 사이는 아니고, 나하고 알던 사람의 알던 사람이었지. 야, 역시 세상 참 좁아. 네가 그 양반 7대손일 줄이야」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건데요?」
「흐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마침 너 어제 한국사 공부하고 있었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3・1 운동이 왜 일어났지?」
「그건 한국사 공부가 아니라 그냥 상식 차원의 문제잖아요. 1919년 1월에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계 계기였죠」
「돌아가셔. 킬킬킬킬」
「왜요?」
「그래. 고종이 밥숟갈 놓은 게 방아쇠가 되긴 했지. 궁극적 원인은 그게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요샌 고종이 왜 죽었는지 가지고 입방아들도 찧더라」
「에, 뭐. 총독부에서 독살했다잖아요. 그 뭐더라 이회영 선생하고 같이 국외 망명을 시도하려 그래서, 그 망명이 성공했을 경우에 일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니까」
「이회영이……. 것도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그리운 울림이구만」
「우와, 이회영 선생하고 아는 사이셨어요?」
「에헤이. 바싹 다가앉지 말어. 부담시러」
「에구. 대장님 오래 사신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실감이 되는 건 처음이라서요. 죄송. 히히」
「말 참 잘 했다. 그래서 고종 모시고 외국으로 튀려 했던 이회영이는, 고종이 죽어버려서 원래 계획은 못 하게 되었지. 무슨 소린지 알겠어? 이회영이나 그 일가 사람들은 원래, 고종을 대빵으로 모시는 망명정부를, 왕정 망명정부를 차리려고 했단 말야. 당연할 일이지. 애초에 그 사람들은 유교 사대부들 출신이니. 그런데 고종 없이 중국에 혼자 남은 이회영은, 너도 알겠지만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버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유교 사대부가, 기성체제의 귀족이. 극좌 혁명이념인 무정부주의에 투신을 했다니깐?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어? 아니, 다르게 물어 보자. 고종이 살아 있었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어……. 듣고 보니까 이상하긴 하네요」
「3・1 운동도, 이회영 같은 사대부가 혁명가가 된 것도. 다 고종이 딱 그 때 죽어줬기 때문이라는 거지. 반대로, 이회영이 고종을 밖으로 모셔 나가는 데 성공했어 봐. 한국이 독립하고 나서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럼 대장님 말씀은, 고종황제가 그때 독살당한 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는 건가요?」
「그래. 그게 뭐 이상해?」
「보통 고종 독살은, 막 비극적인 역사! 그렇게들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대장님은 담담하다 못해 그게 잘 된 일이었다니……」
「난 총독부에서 고종 독살하려고 계획하는 거, 실행 한 달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근데 일부러 안 막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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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눈 밑이 퀭해선」
「한 잠도 못 잤어요. 어제 그 말씀 듣고. 설마, 농담이시죠?」
「농담? 뭣하러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겠냐?」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내가 어쩌다 그 계획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알고도 안 막은 이유?」
「전자도 충분히 궁금하긴 한데요, 쇼킹하기는 후자가 엄청 쇼킹하네요」
「일단 3・1 운동이 고종 덕이 아니라는 것부터 말해두자. 1918년 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가 자결권론을 들고 나왔지. 그러고 나서부터 거의 1년 가까이 준비는 진행되고 있었어. 특히 몽양의 신한청년당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지. 그러다 마침 때 좋게 고종이 죽어서, 일을 시작하는 핑계로 딱 써먹은 거지. 말하자면 여기서 고종의 역할은 불쏘시개랄까」
「불쏘시개……」
「고종이나 이회영 같은 유림들은, 그 1년간 자결권 흐름에 편승해 보려고 이래저래 움직였어. 어찌 보면 독립운동이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독립할 경우 왕정을 복고하려는 수작이기도 했지.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시 고종이 하려고 했던 건, 몽양이나 김규식 같은 공화주의자들이 차린 상에 숟가락만 올리려고 한 짓거리였거든. 난 그게 참 마음에 안 들었고. 아무튼 내가 1918년 4월에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그 뒤로 내가 한동안 보전원 잔당 새끼들 때려잡고 있었거든」
「보전원을 때려잡아요? 왜요?」
「그 씹새끼들 9할이 친일파로 넘어갔잖아. 이자메아 새끼들 백택3호계획 앞잡이 선 게 그 새끼들이었으니까. 하여간 그러던 도중에 암살 계획을 알게 됐어. 맞아, 단순 독살이 아니었고, 이자메아가 끼어 있었다. 내가 막을 마음만 있었으면 막을 수도 있었을 거야. 내가 이회영하고 아는 사이였으니까. 근데 안 그랬지」
「왜요?」
「말했잖아? 나는 고종이 그때쯤 공화주의자들 노력에 무임승차 하려는 게 꼴도 보기 싫었거든. 뭐, 1905년 이전까지는 나도 그렇게까진 생각 안 했어. 조선의 멸망은 불가항력이었으니까 고종 개인에게 그 책임을 다 물 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1918년에 귀국해서 보니 아무래도 그게 아닌 거야」
「1905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을사조약이요?」
「어, 뭐. 그것도 있으려나. 근데 그것보다 내가 미국 건너간 게 1905년이었어. 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 때문에, 그 전까지의 나하고 그 뒤로 지금까지의 나하고는 사고방식이 완전 달라졌거든. 야, 내가 그 때부터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게, 그 전까지 300년 동안 보고 배운 걸 다 합친 거에 곱절은 될 거다. 우물 안 개구리 정도가 아니었지, 정말」
「300년이요? 대장님 1517년생이니까 1905년이면 거의 390살……」
「나 간다」
「아, 잠깐만요! 잘못했어요! 계속 얘기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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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 대장님한테 좀 많이 놀랐어요. 희지 언니는 이 얘기 알고 계셨나요?」
「거의 다들 아는 얘기지. 딱히 일부러 숨기는 얘기도 아니고. 그냥 네가 신입이라서 아는 게 좀 늦은 거야」
「근데 대장님은 미국에서 뭘 그렇게 많이 배우셔서, 조선에서 390년 동안 배운 것보다 미국에서 13년 동안 배운 게 더 많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정확히는 13년이 아니라, 1909년부터 1918년 4월까지 9년간」
「13년도 아니고 9년이 390년보다 더 가치있었던 시간이라구요? 그 9년 동안 무슨 경험을 하셔서……」
「그건 우리가 왜 뱀의 손 가맹조직이 되었느냐, 그것하고도 관련이 되는 얘기야. 궁금하면 직접 여쭤 봐. 그 시절 얘기 하는 건 좋아하시거든. 반대로 1795년 을묘화변 얘기는 진짜 싫어하시니까, 그 얘기는 꺼내지 말고」
「그냥 언니가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저 어제 얘기 듣고 대장님 좀 무서워졌단 말예요」
「그거 얘기하려면 참 한 세월인데……. 요점만 말하자면, 대장님이 1905년에 미국 간 건 유학이나 그런 게 아니었어. 하와이 농장노동자들하고 섞여서 갔지. 한동안 거기서 일했고」
「어? 거기서 일한 건 거의 남자들 아니었나요?」
「둔갑. 둔갑」
「아」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데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니. 쥐꼬리만한 월급 15달러 받아 가면서.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도 없지. 미국노총은 백인들만 도와주고. 그따위니까 태반이 3년 계약 끝나자 귀국해 버렸어. 그런데 대장님은 하와이에 계속 머물러 계셨고」
「왜요?」
「방황을 좀 하셨던 것 같아. 새 세상을, 유학생 엘리트가 아니라 백성들의 눈으로 보자고 고생을 자처했는데, 막상 목격한 현실이 너무 갑갑해서 그러셨을까. 한 1년을 사탕수수 농장에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 사람들을 만났지」
「그 사람들요? 누구요? 뱀의 손?」
「아니. 그쪽하고 접촉된 건 좀 뒷일이고. 그보다 먼저 세계산……」
「뭘 둘이서 쑥덕거리고 있어? 내 욕했지?」
「네」 「히익」
「그리고 너 임마, 내가 무섭긴 뭐가 무서워?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냐?」
「아니, 그게요……」
「전 나가 볼게요」
「어, 언니!」
「야, 넌 나한테 대답이나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무서워? 설마, 내가 고종 죽게 냅뒀다고?」
「네」
「내가 다 설명했잖아. 그 새끼가 살아 있어서 골치 아팠다고. 오히려 죽어서 3・1 운동 땔감도 되어 주고, 이회영 같은 유림 사대부들이 혁명가로 전향하고. 얼마나 좋은 결과냐. 세상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도움이 되는 인간들이 있는 법이야. 우리 마지막 황제 폐하도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고. 그뿐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무섭다구요. 설령 대장님 말씀이 다 맞다고 해도, 사람의 죽음과 삶을 도움이 되는지 여부로, 마치 도구처럼 판단하는 게……」
「뭐야, 너 칸트주의자였냐?」
「경우에 따라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알아요. 저도 그런 걸 각오하고 여기 들어온 거구요. 하지만 피는 최대한 적게 묻히는 게 맞잖아요. 그게 죄 없는 사람의 피일 경우엔 더더욱요」
「피는 일본놈들 손에 묻었지, 내가 이명복일 죽였냐? 그리고 이명복이가 왜 죄가 없어?」
「무능했지만 그게 죄인 건 아니잖아요」
「뭐래. 그건 죄야. 그것도 죽을 죄」
「그 사람이 임금이었기 때문에, 무능한 것도 죄가 되는 건가요?」
「아니.
임금이었던 게 죄야.
군림하는 자 누구도 무죄일 수 없어
On ne peut point régner innocemment









「그러고 보니 제 조상님은 이 얘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요?」
「아, 얘기 안 했던가? 서신보. 그양반이 이회영이 장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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