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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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어두웠다.

김뭄은 비가 추적추적 내림에 따라 슬슬 나무하기를 멈추어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이런 진날에는 나무도 잘 베이지 않을 뿐이거니와, 괜한 흙 사태 따위에 휘말릴 수 있는 까닭이다. 그는 도끼를 내리고 하늘을 높이 올려다보았다. 거뭇거뭇한 하늘에서 추깃물처럼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열병처럼 은밀하고도 우울한 습기와 함께.

그가 나뭇단을 지게에 올리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끝낼 제는 거의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즈음이었다. 김뭄은 서둘러 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귀로에 올랐음에도 뭄의 발걸음은 축축하지 아니하였다. 해가 나 있을 때 이미 많은 양을 베기도 했고, 더군다나 집에는 내다 팔 삼이 더미로 쌓여 있음이다. 마(麻) 값을 후하게 쳐주는 아랫골 아주먼네를 뵐 생각을 하니 그는 더욱이 다리가 거뿐해지는 것을 느끼었다. 그러자면은, 꼭 지친 몸뚱어리도 금세 힘이 솟는 듯하는 것이었다. 일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어느새 박두한 자신의 변화가 서글프면서도 후련한 심정으로, 뭄은 지게를 고쳐 매고 다리를 재게 놀려 귀로를 달려 내려왔다.

김뭄이 자신의 집 — 집이라기보단 을씨년스러운 폐가에 가까운 보금자리에 다다랐을 때, 궃은 비는 여전히 의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게를 내리며 평소보다 훨씬 아득허이 일렁이는 큰 집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달뜬 기대감에 산길을 뛰어 내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몇 발자국 전부터서 알았을 마른 기시감 — 너무나도 익숙한 3년 전 즈음의 그것을 닮은 공기가 자욱하니 퍼지고 있었다.

집안에 무언가가 있다.

그는 잠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마당에 나뒹굴던 낫을 잡아채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집에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한 몸놀림이었다. 비는 궃게 추적거리었고, 질척거리는 흙이 신에 묻고 있음에도 한 발짝 떼기가 고통스러웠다. 사랑채 저 안에 들어 앉아있는 무정형의 무언가가 김뭄의 손발을 차거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로 비를 맞아내며 천금처럼 느껴지는 제 걸음을 걸었다. 걷는다고 해도 그저 힘겨운 것을 감내한다는 느낌이라, 결국엔 걷는 것이 아닌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하였다.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운 좋게도 지난 3년간 그럴 일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문이 눈앞으로 덜컥 다가왔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잡았다. 흙바닥에 발을 내딛자 부드럽게 패이면서 그의 발자국이 남았다. 그 좁은 신발 모양 테두리에서 그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것이 금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리하면 자기 앞에 박두한 일말의 두려운 미래에서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일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문은 이미 그 앞에 도래하였다. 어떤 일은 영영 바꿀 수 없었다. 그 미래가 얼마나 두려운지 알면서도. 마치 그의 조국이 붕괴했을 때처럼.

그는 더 나아가보려다가 안에서부터 날아드는 어떤 인기척을 강렬하게 느끼고 멈추었다. 분명 인기척이었다.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는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달아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과 달려들어 저 문을 열자는 생각 사이에서 헤메었다. 김뭄의 입술은 파리해졌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저 안에 있는 걸까.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도대체 무얼 하려고ー

그런데 그가 제대로 들은 걸까? 수 분, 혹은 수십 분, 혹은 수 시간을 그렇게 서 있다가 문득 깨달은 바였다. 김뭄의 뇌리에 의문이 피었다.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인기척은 어느새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들어가기 힘겨웠다. 공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행여나 정녕 저 안에 그가 어찌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의 거처를 차지하고 앉아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 따름이다. 물론 그러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두려운, 초조한, 긴장 따위가 다 저 망할 놈의 날씨 때문임도 잘 알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김뭄은 아주 느리게 발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내디뎠다. 주변의 모든 소음ー 빗소리, 바람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는 금세 제 실체를 잃었다. 텅 빈 공간을 거닐고 있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공허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땅은 땅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삶은 삶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 싶다는 욕망이 삶에 대한 욕망을 이길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 김뭄은 바로 그때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닿아있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오로지 숨겨진 것,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의 정체만이 중요할 뿐.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창호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밝은 방 안에 인영이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하였지만, 이내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 안에 사람이 있었다.

눈이 밝기에 익숙해지자 뭄은 제집을 차지한 기묘한 찬탈자들의 행색을 또렷이 여겨볼 수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강렬히 다가오는 여인의 수려하고도 기이한 외모가 스쳐 지나가며 그 주변에 신라 의복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중년의 사내, 그리고 그들 옆에 우물쭈물하며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는 가장 어려 보이는 사내의 행색이 눈에 걸리었다. 성년은 넘긴 듯하나 스물은 아직 안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어딘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유약하고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어린 사내를 제외한 세 사람은 한눈에 봐도 신라인은 아닌 것이, 신라인이기보단 고구려인, 고구려인이기보단 말갈인, 말갈인 같으면서도 회회 사람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어딘가 공포스러운 마음을 일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이는 비단 세 이방인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었다. 어린 사내의 얼굴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행색이 그것을 희석시킬 따름이었다.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들이었다. 김뭄은 살짝 맥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 앞에 자리하고 있는 이 네 침입자를 향해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 뉘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당혹스러운 되물음이었다.

— 그러는 그쪽은 뉘시오?

청년의 입에서 나온 그 어조와 인상으로 미루어보아 결코 오만방자함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김뭄은 너무나 피곤하고 당혹스러웠다. 더군다나 이제 빗줄기가 더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 남의 집 안에 기어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게냐, 이놈!

— 그것이 무슨 소리요! 이 집의 주인은 대대로 나와 연이 있거늘…

당황해하며 측은해질 정도로 안색이 파리해지는 청년의 말에, 뭄은 되받아 소리치려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 혹시, 이부잣집을 말하는 거요?

그 이름을 듣자 어린 사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마치 뭄이 그의 손을 붙들고 네 말이 옳거니, 라고 말하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 옳소. 내 유모의 자손들이지. 뼈대 있는 가문으로 한때 빈곤해지긴 하였으나, 내 스승님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오. 일전에 신라를 떠났을 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요? 또, 그대는 어찌 이곳에서 거처하고 있는거요?

— 내가 이곳에 왔을 제 마땅히 살 곳이 없어 움막을 지었소. 헌데 추위와 바람에 금방 죽게 생겼더군. 그래서 사람이 없어 다 쓰러져가는 이곳 사랑채만 좀 치우고 살고 있는 것이오.

김뭄은 조금 몸을 옹송그리며 대답했다. 비가 그의 몸을 적잖이 적신 탓이었다. 그는 마루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 이부잣집은, 나는 모르오. 금성에 돌아온 지 몇 해 되질 않아서. 세상살이란 것이 퍽 괴이쩍어서 풍요롭던 마을이 폐허가 되기도 하잖소. 이곳 역시 그러한 세월의 풍파를 맞은 지라, 보셨겠소만 이웃 하나 없는 공허한 곳이오. 다들 다른 마을로 뿔뿔히 흩어진 모양이던데.

— 허어…

한숨을 터억 내쉰 사내는 삼인(三人)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김뭄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무어라 이야기했다. 듣자하니 왜(倭)어도, 당(唐)어도 아닌 것이 어릴 적에 들었던 말갈어 따위의 종류인 듯하였다. 그렇다면 저이들은 말갈인이라는 말인가? 김뭄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는 표정으로 어린 사내를 치어다보았다.

— 그, 거처…를 정해야 하는데.

어린 사내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민망한 말씀이오만…

— 댁들이 사랑채를 쓰시오.

어린 사내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일었다.

— 그리하여도 되겠소?

김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래 친절한 성품이라고 자부하지도 않았고 특히나 지금의 상황으로는 전혀 관대한 주인 행세를 할 계제도 아니었으나 무슨 일인지 이 기묘한 자들에게 관심이 생긴 탓이었다. 더욱이 가장 마음이 동하는 연고가 된 것은 이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근래의 의복이라기보다 약 삼사십 년 전에 유행한 형태라는 사실이었다. 그저 그런 여행자들은 아닌 듯했다. 더 기이한 자들이 분명했다.

— 오래 머물지는 아니할 것이오. 우리는 왕을 접견하러 왔소. 하여, 길어야 일주일만 이곳에서 머무를 것이니…

— 왕을 어찌 이곳에서 접견하오?

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 그야, 수도가 이곳 금관경 경주에 있지 않소.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사내의 얼굴에 혼란이 들어찼다.

— 신라가 망한 지 세 해요.

김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삼을 모아두는 방을 정돈하려면 지금부터 치워야 했다. 적어도 그곳을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방으로 만들려면. 그는 충격이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 왕은 개경에 있소.


— 아니, 그러니까 그, 견훤이라는 자가 왕을 갈아치웠다는 말씀이오?

— …안 주무시오?

김뭄의 짜증 섞인 눈초리가 사내의 얼굴에 직격했다. 사내는 멋쩍은 눈초리로 그를 마주 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오가는 한 마디도 없이, 그저.

두 남자는 같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이따금 흔들리는 호롱불이 벽면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김뭄은 꽤나 불편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하는 사내를 치어다보았다. 사내가 대뜸 방으로 쳐들어온 것은 날이 매우 어두워진 연후였다. 계획에도 없던 손님이 되어버린 침입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싶어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하는 말이, 예의상 차마 스승들과 함께 방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말인지 나귀인지. 김뭄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별수 없이 방의 한쪽 구석을 내주었다. 변변한 이불도 없이 둘은 삼베를 덮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얼마 흐르던 와중, 사내가 갑자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신라가 도대체 어떻게 멸망한 것인지.

김뭄은 한숨을 쉬며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견훤은 그전까지 신라를 다스리던 박씨를 몰아내곤 내 아, 아니, 선왕을 왕위에 옹립했소. 허수아비 왕이었으나 고려와 백제 사이에서 훗날을 도모하려 하였지. 허나… 이제 모두 수포로 돌아갔소. 경순왕은 끝내 고려에 신라를 바쳤고, 즈믄 해는 그리 져버리고 말았소.

— …그리 되었구료.

사내가 허탈한 말투로 대답했다. 숨길 수 없는 애석함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 허면, 부흥 세력은 없는 게요?

— 부흥 세력이라니?

— 비록 실패하였다고는 하나 백제의 부여풍과 고구려의 고안승은 자신의 조국을 잊지 않고 사람들을 일으키지 않았소. 신라라고 못할 것이 뭐요?

— …하.

김뭄은 헛웃음을 흘렸다.

— …그것이 능히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소.

— 그리하여도 노력은 해봐야 하는 것 아니오!

김뭄은 뚱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청년은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채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혈기가 그의 콧날에 깃들어 있었다. 만약 신라가 망조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그와 같은 자들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김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나라를 조금이나마 위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이 있었더라면. 진골이라며, 귀족의 위신을 떨며 백성을 착취하기나 할 줄 알던 겁쟁이들과는 달리. 그리고 선왕과는 달리.

김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니다. 그는 생각을 고쳐잡았다. 이미 그러한 자들은 있어 왔지 않았던가. 이미 많은 자들이 신라를 개혁하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다. 아무리 더러워도 제 나라라고, 돌아와 신라를 바꾸어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약점은 단 한 가지였다. 진골이 아니라는 것. 태어나길 귀족으로 나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무슨 애국지사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들을 내친 것은 신라 그 자체였건만.

— 아무리 국운이 기운다고 하나, 참으로 통탄할 일이오!

사내의 분노는 어렸다. 어린 자만이 낼 수 있는 분노를 그는 내고 있었다. 초연할 수 없기에 내는 분노와 초연함을 내포한 분노는 질적으로 다르다. 김뭄이 보기에, 사내의 분노는 전자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귀한 집 자제가 낼 법한 그러한 분노. 김뭄은 헛웃음을 내쉬었다. 무겁지 못한 분노는 요란한 법이다. 그런 분노를 보고 헛된 가정을 하다니. 퍽 절박해진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이름이 뭐요?

사내는 주춤했다.

— 김철현이오. 그대는?

— …김뭄.

— 김문?

김뭄은 사내를 쏘아보았다.

— 김뭄이오, 김뭄.

— 무슨 그런 이름이 있소? 한자가 어떻게 되오?

— 모르오.

— 헌데 어찌 그런 이름을?

— 내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이오. 싫으면 관두오.

청년은 난색이었으나 이내 수긍했다.

— 남의 이름에 귀치 않게 굴 이유는 없지. 알았소. 헌데 노형은, 어찌 이곳으로 온 거요? 노형 말대로 이곳은 참, 사람도 없고 적적할 터인데.

— 세상 일이 어려워서 이곳으로 온 것이오. 자세한 건… 묻지 마시오.

김뭄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 허면, 전엔 어디서 사셨소?

— 개골산.

— 개골산이면, 이곳에서 아주 먼 거리가 아니오? 어찌 그 거릴…

— 나한테 정보 캐내러 온 거요? 자꾸 그리 묻기만 할 거면, 불 끌테니 알아서 하시오.

— 미, 미안하오.

둘 사이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김뭄은 멍하니 천장으로 시야를 옮겼다. 쏟아지는 비가 문에 튀겨 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타는 소리인 것만 같아 그는 눈을 감았다. 꼭 삼 년 전 그날도 이날만큼이나 비가 많이 내렸다. 지독히도 우중충한 날이었다. 그때 김뭄은 날씨보다 격렬한 적의와 무기력에 차 있었다. 적의와 무기력이 동반될 수 있는 것임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이따금 뒤채는 소리에 김뭄은 청년이 자신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제 유모의 자손들이 살던 곳… 어떤 향수라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고향에 돌아온 자들은 무릇 기이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김뭄이 처음 이곳에 돌아왔을 때에도 그러했다. 유년과 청년기를 보낸 금성 땅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가만 그런데 유모의 자손들이라. 김뭄은 문득 그 말에 내포된 이상한 점을 느끼고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저 청년이 살던 집은 어디 있단 말인가. 필경 이 근처여야 할 것인데, 김뭄이 알기로 이 근방에 이 고택 만한 큰 집은 없었다. 죄 무너지고 망가졌다지만 여전히 그 위용은 알아주는 집이었다. 그런 집에 살던 이가 가난한 집의 유모를 한다니.

— 주무시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

— 무엇 말이오?

— 그대가 살던 곳, 이 근방이 아니오?

— 게 무슨 말이오?

— 유모의 집이 이리도 큰데, 그런 유모에게 양육된 그대는 혹여 왕궁 근처에서 살던 진골 가문인가 하여.

— 아,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 여기가 내 집이오.

— 유모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소?

김뭄이 얼굴을 찌푸렸다.

— 본래는 내 집이었소. 설명하기 복잡하나, 형세가 그리되었다고 해야겠구려. 몰락한 나의 가족은 타향으로 갔다고 들었소.

들었소?

청년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김뭄은 그 미소에 수천 마디의 말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는 없지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긴긴 밤을 모두 염(染)하고 말리란 어떤 경고. 지금까지 기나긴 삶을 살아왔으나 아직도 그놈의 삶이란 여정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 자들이 으레 짓는 미소를 그는 짓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가 나직이 대꾸했다.

— 긴 사정이 있소이다.

— 대체 그대의 스승이란 자들은 어떤 존재요? 그대는 어떠한 경위로 그들과 함께 다니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김뭄은 내친김에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점을 물었다.

— 그 역시 긴 사정이 있소.

— 길던 짧던 간에 한 번 이야기해보시오. 범상치 않은 기운에, 도대체 어디의 사람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외양… 이인(異人)임을 내 아나 그 내력조차 듣지 못하리이까. 부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시오.

— 하하, 함부로 내가 입에 올릴 분들이 아니오. 아주 먼 땅에서 큰 뜻을 품고 신라에 당도하신 분들, 이 정도로만 알고 계시오. 내게는 아주 지엄한 스승들이시자 자애로운 주인, 그리고 가장 친한 친우라오.

김뭄은 청년이 제 스승들에 대해 말하는 품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이질적인 두 감정이 섞인 듯한 말투. 그 자세한 성분은 알 수 없었으나 단순한 경애나 존경 등의 감정은 아니었다. 의외였다.

— 알겠소. 허면 내 그것은 더 묻지 않으리다.

김뭄은 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 어디서 오는 길이오?

— 연이오.

청년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 나그넷길에 방향이란 없다 하나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법이라 하니… 내 주인들의 고향 땅에 가려다 돌아오는 길이오.

— 연나라 사람들이시오?

— 그것은 아니오나…

청년은 예의 그 미소로 다시 말꼬리를 흐렸다.

— 신라는 어쩌다가 떠나게 되었소?

청년은 그 질문을 듣고 입을 벌렸다가, 그 상태로 인상을 찌푸리곤, 어딘가를 거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황한 것은 김뭄 쪽이라, 귀신처럼 창백해졌다가도 금세 불꽃처럼 붉어진 얼굴을 한 청년에게 물이라도 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 아니, 거 도대체 연유가 무어길래 그러시오?

청년의 얼굴은 고통이나, 나쁜 기억이나, 분노로 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세 가지가 김뭄에게는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었으나, 청년에게는 그러한 감정이 어려 있지 않았다. 청년은 그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 그것…역시 긴 이야기라오.

얼마 뒤 청년이 대꾸했다. 회복된 모양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혈색 없는 피부가 희어멀건하게 빛을 냈다. 여전히 내막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흩뜨리는 그의 모습에 김뭄은 반쯤 허탈한 표정으로 외쳤다.

— 도대체 그놈의 이야기는 길면 얼마나 길기에 그렇소?

— 범부(凡夫)는 아무리 헤아려도 다 못 셀 정도로 아주 길고 긴… 그런 이야기요.

— 그리하여도 해보시오. 어찌 이 밤에 다 못할까.

청년은 난처한 듯 웃음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소. 허면 조금이나마 말을 해보리다. 어느덧 밤도 깊었으니…

청년은 김뭄을 바라본 채 예의 그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더니, 그리고는 고개를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에서 우렛소리가 소용돌이쳤다. 그의 짙은 검정색 눈동자는 호롱불의 일렁임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 그때가 어느 때였는고 하니, 바야흐로 대순(大順) 말기였소. 세상이 어지럽던 때, 세상이 마구 흩날리던 때, 세상이 시야 밖으로 흩어지던, 바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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