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C와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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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사내는 버려진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맑게 갠 하늘에서 내리쬐는 봄 햇살이 가로수와 함께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인적 없는 길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을 스멀스멀 풍길 뿐이었다.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정부의 실험 시설이라고 알려진 그 하얀 콘크리트 건물은 제대로 된 마을이라곤 없는 넓은 평원에 홀로 서서 기묘한 위화감을 흘리고 있었다.

잠깐 생각에 빠진 채 건물을 바라보던 사내는 잠자코 다시 발을 뗐다. 대형 차량이 오갈 수 있도록 넓게 닦인 차도를 따라 길을 올라가면서 사내는 주변에 교통 표지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건물은 어느새 바로 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정문에 다다르자, 초소에 기대어 서있던 경비병이 다가와 그를 제지했다.

"여기는 통제 구역입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사내는 군말 없이 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들었다. 카드를 건네받은 경비원은 잠깐 카드를 살펴보고는 리더기에 가져다 대었다. 삣,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올리브드랍 요원’이라는 신원 정보가 출력되었다. 경비병은 카드를 요원에게 돌려주면서 물었다.

“다른 기지 소속이시군요. 무슨 용무시죠?”
“연수와 임무 인계 때문에 말이지. 한 사흘 정도 머물 겁니다.”

경비병은 잠시 기다리라 한 뒤 초소 창문으로 몸을 숙여 차트 몇 개를 꺼냈다. 올리브드랍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약간 긴장하여 침을 살짝 삼켰다. 그는 허리춤에 숨겨둔 권총에 손을 뻗으려다가, 경비병이 웃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손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네, 장부에 이름이 있군요. 들어가십시오. 제19기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차단봉이 조용히 위로 들려졌다. 경비병이 신원 카드를 돌려주자 사내는 모자의 챙에 손을 대어 답례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가짜 신분이 적힌 카드를 코트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면서, 젱킨스는 참고 있던 숨을 푹 내쉬었다. 잠입 성공이었다.
 

 * * * 


 
세계 오컬트 연합, 젱킨스가 몸담고 있는 이 비밀스러운 UN 산하 기관에서 특수 격리 절차 재단에 대한 극비 조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 변칙적인 물체를 격리해 보관하려는 재단과 파괴하려는 연합은 많은 사건에서 대립해 왔으나, 근본적으로 ‘인류의 보호’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해야 할 관계라고 연합은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갈등과 충돌은 연합 지도부에게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그들은 재단에 대해, 막대한 양의 위협 요소를 수집하고 있는 이 대규모 단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한 채였다.

연합의 지도부는 재단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전에 우선 정보를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특수 잠입 요원인 젱킨스는 재단의 중심 시설에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아, 지난한 사전 공작 끝에 드디어 제19기지에 무사히 발을 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젱킨스 요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기지에 다가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큰 건물이었다. 이런 시설을 세간의 이목으로부터 완전히 감출 수 있을 정도라니, 재단의 정보 조작 능력은 연합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수준인 것이 확실했다.

윙―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자동문이 길을 텄다.
 

 * * * 


 
시설 내부는 새하얗고 깔끔했다. 그러나 길게 뻗은 회랑의 문마다 붙어있는, 어색할 정도로 커다란 잠금 장치들은 젱킨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재단의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곳에도 수백개의 괴물(怪物)들이 각자의 격리실에 갇힌 채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젱킨스를 긴장하게 했다. 젱킨스는 모자와 코트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문득 젱킨스는 기지에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계를 보니 점심 시간 무렵이었다. 과연, 멀리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음은 분명 구내식당에서 나는 것일 터였다.

그 순간, 웬 오랑우탄 한 마리가 복도의 코너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젱킨스와 부딪힐 뻔 했다. 젱킨스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오랑우탄은 잠시 젱킨스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가던 길을 마저 뛰어갔다. 그의 왼손에 붙어있는 보석같은 무언가를 보고서야 젱킨스는 전에 조사했던 잭 브라이트라는 박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보석 목걸이에 영혼이 갇혀버린 재단의 고참 연구자. 분명 최근에는 오랑우탄의 몸을 빌리고 있다고 했다.

"이봐! 그쪽으로 브라이트 박사 가는 거 봤나?"

곧이어 한 중년 남성이 뛰어오며 젱킨스에게 물었다. 다른 연구자들도 여럿이 뒤따라 왔다. 젱킨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브라이트 박사가 도망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들은 고맙다고 말할 틈도 없이 브라이트의 뒤를 쫓아 달려가 버렸다. 젱킨스로는 언짢기도 할 일이지만, 오히려 쓸데없는 주목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그는 만족하면서 멀어져가는 추적자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유쾌한 녀석들이지. 오늘은 브라이트가 좀 심했어."
"예… 뭐라고요?"
"아, 초면에 소개가 늦었군."

사내는 우쿨렐레를 꺼내들더니 가온다 화음을 가볍게 퉁겼다. 젱킨스가 당황해서 가만히 서있자, 사내는 우쿨렐레를 휴게실 문으로 던져 넣고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알토 클레프. 다들 그렇게 불러."
"클레프 박사님…이셨군요. 사진으로 본 것과는 좀 다르시네요."

젱킨스가 물었다. 그가 조사했던 사진 자료에는 분명 거미 대가리의 사내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 사진만 찍으면 그렇게 된다네. 신입인가?"
"올리브드랍 요원입니다. 104기지에서 잠깐 연수를."
"흠, 그래…?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아무쪼록 할 일만 마치고 바로 돌아가라고. 난 가네."

클레프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유유히 옆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도록 하지요."

젱킨스는 그의 뒤에 대고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돌아서서 복도를 걸었다. 마침 보는 눈도 적은 시간,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 * * 


 
사고로 폐쇄된 격리실의 구석에서 모니터가 빛을 발했다. 방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졌지만 컨트롤 컴퓨터는 피해를 별로 받지 않은 듯 했다. 젱킨스는 이것이 재단의 네트워크와 아직 연결되어 있기를 빌며 자판을 조작했다.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컴퓨터는 느리기만 했다.

―SCiPNET 접속 승인―

작은 팝업창의 뒤를 따라 재단 전체 데이터베이스가 화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아직 네트워크가 연결되어있는 것이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쎄, 나라면 하느님 원망하기 전에 그걸 끌 텐데 말이야."
"뭐? 누구야!"
"방금 만나지 않았나? 올리브드랍 요원."
"…클레프 박사."

젱킨스는 권총을 꺼내들어 박사의 면상에 들이댔다. 클레프 박사는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카드 하나를 꺼내보였다. 재단의 것과는 다른, 젱킨스에게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다.

"다시 소개하겠네. 세계 오컬트 연합의 우쿨렐레 요원일세. 그러니 정신자적 살해 물질 보고 뒈지기 싫으면 그 창부터 얼른 닫으라고."

젱킨스는 몹시 당황했다. 우쿨렐레 요원은 그가 초보 요원일 적부터 활약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젱킨스는 권총을 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저, 당신은 분명 은퇴하지 않았습니까?"
"조직에 항상 진실만을 알리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라네. 권총 이리 줘 봐, 흠. 젱킨스 요원? 이름 재미있구만."

클레프는 건네받은 권총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질문했다.

"그보다 방금 몇등급 보안 승인으로 접속했나?"
"그, 4등급으로…."
"잘했군, 세상에 대체 어디의 기지 관리관이 굳이 다 무너져가는 폐쇄된 격리실까지 와서 데이터베이스나 훔쳐보고 있겠나? 이제 추적당하는 건 시간문제야. 그보다 재단에는 왜 잠입한 건가, 젱킨스 요원?"
"그게… 현 지도부는, 재단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보부터 모으겠다 이거구만. 나 있을 때 보단 머리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왜 하필 자네같은 머저리를 보냈는지는 도통 모르겠군. 뭐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거지만."

우쿨렐레 요원은 한참 떠들더니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흐르고, 조급해진 젱킨스는 땀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젱킨스가 뭐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우쿨렐레가 갑자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건…."
"혹시 그냥 여기서 대충 정보 긁고 빨리 떠야겠다는 생각이면 관두는 편이 신상에 좋을 걸세. 우린 정보가 전부라는 걸 다 알아. 누군가가 데이터 하나라도 빼돌리면 즉시 기지를 봉쇄하고 한명 한명을 철저하게 조사한다네. 밖에서 해킹하는 쥐새끼는 정신자적 살해 물질로 처리해버리고, 내부 소행은 직접 찾아내서…."

우쿨렐레―아니, 클레프 박사는 권총으로 젱킨스의 머리통을 노렸다.

"…죽여 버리지. 운이 좋으면 D계급 처분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클레프 박사는 씩 웃으면서 물었다.

"선택하게. 여기서 그냥 죽을 겐가? 아니면 아는 것을 전부 털어내고 자비를 구할 겐가?"

젱킨스는 옆의 의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클레프 박사. 세계 오컬트 연합의 이번 스파이 행위에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 확실합니까?"

O5-1의 물음에 클레프는 웃으며 답했다.

"있기야 있죠, 제가 스파이를 잡았으니까. 하지만 제가 연합의 스파이인지 묻는 거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연합의 신원 카드를 아직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글쎄요. 별 이유는 없습니다. 이번에도 잘 써먹었고, 안 그래요?"
"진지하게 답하시오, 박사. 이건 귀관에 대한 우리 O5 평의회의 신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니."

클레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이번처럼 엿먹여주기 위해. …답이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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