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려나갈 종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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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에서 일하다 보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어디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되고, 그래도 되는 것은 거의 없죠. 다만 그 중에서도 더 말해선 안 되는 것과 조금은 말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전자는 말해선 안 되기에 말하지 않겠지만 후자는 조금 얘기해보자 합니다.

세단기는 아시나요? 세단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종이 잘라주는 기계입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한 번 더 설명드리자면, 민감한 정보가 들어있는 종이를 잘게 잘라서 이후에 무슨 글이 종이에 적혀있었는지 모르게 만들어주는거죠. 재단만큼 정보 유출에 민감한 곳도 없는만큼 이용하는 재단에서 이용하는 세단기도 복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선 겉모습은 어느 재단 시설을 가나 똑같습니다. 금속 재질 외관에 무광 검정으로 도색되어 있고 크기는 평범한 세단기보다 조금 큽니다. 세단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얼마동안 기다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세단기를 작동시키고 15분 정도 기다리면 그때부터 세단이 가능해집니다. 세단기를 작동시키고 나면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종이는 꽤 많습니다. 공책 몇 권을 한 번에 갈아버리는 모습도 본 적이 있고, 가장 놀랐던 건 100페이지 정도 되는 소설을 읽던 동료가 책이 정말 '불쏘시개'라고 말하곤 그대로 세단기에 넣어버렸는데 조금의 멈춤도 없이 갈아버렸죠.

물론 그렇다고 종이 말고 다른 걸 넣으면 센서라도 있는지 금세 멈춰버리고요. 그렇게 되면 저흰 정비 담당을 불러야 했고 정비 담당의 표정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에 처음 몇 번 빼고는 종이 말고 다른 걸 넣은 적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종이를 넣으면 0.2cm × 3cm짜리 종이 조각으로 갈려나갑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갈려나온 종이 조각을 즉시 태워버리는 소각 장치가 달려있습니다. 이 소각 장치가 충분히 열을 받도록 기다리느라 작동시키고 15분이나 기다려야 되는 거고요.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단기가 별로 큰 크기도 아닌데 연기도 거의 안 나게 깔끔히 종이를 태워버리더라고요. 물론 연기가 전혀 안 나서 방 안에서도 쓸만한 건 아니였죠. 타는 냄새가 난다고 세단하러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요.

소각되고 남은 재는 그 밑에 있는 종이 상자에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자가 가득차게 되면 빼내서 다시 태워버리기 위해서 소각장으로 옮겨야 하고요. 종이 몇 장 세단하기 위해서 15분이나 기다리는 것도 귀찮은데 상자에 가득한 재를 빼내서 옮기기까지 해야되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동료들은 다들 가득 찼다고 표시가 나와도 상자를 꺼내서 한 번 눌러주고 세단한 다음에 상자는 비우지 않고는 도망치기 일수였죠. 그럴 때마다 상자를 빼내는 것은 저였습니다. 딱히 억지로 떠맡은 건 아니고 저 좋아서 하는 거였죠. 가끔씩은 상자를 옮기다가 재가 쏟아지거나 옷에 묻는 일도 있었지만, 재밖에 들어있지 않는 상자를 옮기는게 힘든 일도 아니고, 잠깐 쉬기에도 좋았으니까요.

상자를 소각장으로 가져가면 한 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그리다가 충분히 쌓이면 상자 채로 전부 소각해버립니다. 그러면 정말 하얗고 고운 재만 남게 되죠. 이렇게 2번이나 소각하고도 모자란 건지 이 재들은 모두 모아서 나무 상자에서 넣어 보관하다가 한 달에 한 번 다른 기밀들이랑 같이 어딘가로 보냅니다.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요. 듣기론 원래 이 재는 그냥 버렸다고 하는데 어떤 기지에서 나온 재를 가져다가 변칙적인 어쩌구를 써서 이 2번이나 태운 하얗고 고운 재에서 원본 문서를 복구해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수십에 가까운 기밀 문서와 SCP 문서가 유출됐다고 하고요.

그 뒤로 바뀐 절차라고 하지만, 제가 재단에 들어오기도 전 일이라고 하니, 제게는 재도 버리지 않는게 당연하게 다가올 따름입니다.

저희 기지는 말그래도 종이란 종이는 모두 그냥 버리면 안 되고 이 세단기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 부대는 연구를 하지 않는 기동특무부대 시설이라고 해도 나름 기밀이라고 할 것이 넘치는데 보안 의식이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매일하는 요주의 인물들 교육에서 나눠준 종이들은 금세 복도와 방 곳곳에 널부러지고요. 전자기기로 교육하는 방안도 잠시 고려됐지만 종이를 잃어버릴 위험이 전자기기 해킹의 위협보다는 휠씬 적다고 판단됐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종이가 떨어져있는 걸 볼 때마다 챙겨다가 세단합니다. 딱히 기밀 유출이나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대에 배치되서 행정 업무를 보게 된 게 재단에서의 첫 업무였던 만큼 이 세단기도 여기와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세단기를 작동시켰을 때는 15분 정도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이가 갈려나가는 모습은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소리도 시끄럽다기 보다는 깔끔했고, 종이도 천천하지만 막힘 없이 내려가더군요. 기밀이 사라지고 있다는 정신적 만족감도 있었고요. 제가 다루는 기밀이라고 해봤자 진짜 SCP 문서는 없고 부대의 배치나 부대원들의 신상, 요주의 인물들 같은 것 뿐이지만 그것들도 모두 중요한 기밀입니다.

뭐 실제로 세단하는 종이의 반은 인쇄가 잘못된 문서고 나머지 반은 부대원들이 버리고 간 종이지만 그래도 전부 기밀이니까요.

전 가끔 생각하길 저의 계약이 끝나고 이 부대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온다면, 제게 기억소거제를 투입해서 여기서 보낸 모든 시간을 평범한 중소기업에서 일했다고 기억과 기록을 모두 바꿀 때가 온다면, 제가 이곳에 와서 쓴 모든 일기와 메모, 편지, 기록을 없애버려야 할 때가 온다면, 저는 제 모든 종이를 들고 이 세단기 앞에 서서 천천히 모든 종이를 집어넣고, 소각장으로 가져가 재가 다시금 타오르는 모습을 느긋하게 쳐다보다가 그 재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그때가 오면 이 종이도 함께 타오르겠죠.

10월 11일, 기동특무부대 에타-17 소속 행정계원 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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