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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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이 켜졌다.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소녀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녀는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방문을 통해 의사 가운을 걸친 남자와 여자 한 쌍이 걸어들어왔다. 남자는 검은색 산발머리였고, 여자 쪽은 적갈색에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내린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곧장 다가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화이트. 오늘은 좀 어떠니?"

화이트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남자 의사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거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남자가 화이트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약간 물러나서 여자와 뭔가를 수군거렸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지 않아 그가 다시 다가왔다.

"화이트, 괜찮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약간 놀라워하는 얼굴로 여자 의사를 돌아보았다. 여자 쪽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화이트가 질문했다. 남자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가 재차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옅은 탄식을 지르며 한쪽 벽을 가리켰다. 어떤 광고 같은 것이 담긴 액자가 걸려있었다. 거기서 몇 가지 그림들과 함께 크고 검은 글씨로 '세인트 크로스 정신병원(Saint Cross Psychiatric Hospital)'이라고 쓰인 것, 그리고 그 옆에 '전 세계 각지의 ██이 후원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조그맣게 덧붙여진 것이 보였다. 중간에 한 단어를 검은 테이프로 가려놓았는데 아마도 화이트가 봐서는 안되는 단어였던 것 같다.

"네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단다. 17번지에 있거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의사는 잠깐 동안 그들만의 얘기를 더 했다. 그리곤 이번엔 여자 의사가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의 눈을 관찰했다.

"화이트, 너는 그동안 몸이 아파서 계속 병원에 있었단다. 지금은 좀 어떤 것 같니?"

화이트는 자신의 몸을 발끝부터 천천히 올라가며 눈여겨보더니, 마지막으로 머리를 문질러보고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화이트는 그녀가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도 정신병원이 뭐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실 아무런 문제도 없어보였다.

의사들이 전문적인 이야기를 내놓는 동안, 화이트는 방금까지 그녀가 있던 곳에 대해서 생각했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모두 쓰라고 하면 정말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괴상한 이야기였고, 화이트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진 게 맞을까? 아직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들이 정말로……

"……알겠니, 화이트? '재단'이라는 건 없단다."

화이트는 문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여자 의사가 무릎에 손을 짚고 화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잠자코 그들을 마주 보다가,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무슨 색깔이 제일 좋아요?"

여자 의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빨간색을 제일 좋아한단다."

의사의 대답이 약간 납득이 되지 않았던 화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장난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돌리자, 반지가 번쩍거리면서 소리를 냈다.

"공주님이 최고예요!"

화이트가 다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여자 의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땋은 머리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그건 선생님 머리 색깔이거든.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러자 한 가지 기억이 화이트의 머릿속을 스쳤다. 오래전의,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그만 놓칠 뻔한…… 화이트는 그제야 잊어버렸던 비밀을 떠올려낸 사람처럼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두 의사가 밝은 얼굴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의사가 다시금 물었다.

"화이트, 이제 말해주렴. 네 이름이 뭐니?"

화이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또 한 번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반지가 무어라 속삭인 것 같다.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다. 그렇지만 의사들이 걱정할 틈도 없이, 그녀는 이내 고개를 치켜들고 흐뭇하게 이야기했다.

"로라."

화이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로라 화이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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