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에 그린 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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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해초, 물보라, 죽은 이들 냄새가 풍겨왔다.

꼭 날 찾으러들 돌아올 거야.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스며들었다. 우리가 떠나야만 했을 때 내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아니다. 진짜로 있었던 일은 그게 아니다. 우리가 떠나야만 했던 적은 없다. 떠나야만 했던 건 서커스고, 우리가 같이 갔을 뿐이었다. 아직도 여기 있는 나만 빼고, 바닷가에 자리잡아 뒀던 모든 것들이.
서커스는 자기가 어떤 때 위험해졌는지 알았고, 가끔 아주 크게 무서울 때가 있으면 겁에 질려 바닥짐 같은 것들 (풍선, 안내판, 사탕, 신발, 소녀 등등) 을 버려두고 전속력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바닷가에 있었다. 해초, 물보라, 죽은 이들 냄새가 풍겨오고, 서커스는 없는 이곳에.

서커스의 시작을 기다리는 중에, 모두가 손인 아주머니가 나랑 놀아주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밭에 원들을 그려놓고 그 원들만 디디며 걸었다. 아주머니에게는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손이었으니까. 나한테도 쉽지 않았다. 내 다리는 너무 짧았으니까. 뭐 그랬다. 그런데 그때, 매니Manny가 헐레벌떡 괴수동으로 들어와 이렇게 외쳤다. "엣씨피다! 엣씨피!" 그러자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고, 잠시 뒤 서커스는 떠났다. 내 신발 한 짝도. 빨간 땡땡이 신발이었다. 내가 되거 좋아하는 거였다. 무당벌레 닮았고. 예뻤는데.

아직도 모래밭에는 우리가 그린 원들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손인 아주머니가 찍은 손자국도. 그것들 말고도 모래밭에 널려 있는 물건들은 많았다. 사진실에서 현상되다 만 사진들. 방수포. 파란 솜사탕. 괴수동 소개하는 리플렛. 마법의 호랑이를 묶어두는 알록달록한 말뚝 – 이거 동물 관리팀이 빨리 발견해야 될 텐데. 호랑이는 광대들이 무슨 맛이 나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호랑이한테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싶다. 광대한테는 안 좋겠지만.

저 멀리 바위 옆에 갈매기 한 마리가 보인다. 모래밭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보인다. 엣씨피도 안 보인다. 엣씨피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들 엣씨피를 겁내는 걸 봐서는 서커스를 때려부수고 싶어하는 나쁜놈들인 것 같다. 그 엠씨디라는 거랑 비슷하게. 엣씨피가 엠씨디가 가까이 오면 우리는 바로 떠나야 했고, 지금이 딱 그럴 때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발에 남아 있는 다른 빨간 신발 속으로 모래가 스며들었다.

어디로 갈 수 있으려나? 너무 멀리 간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럼 서커스에서 날 못 찾을 텐데. 길을 잃었으면 그곳에 가만히 있으라고들 했는데.
옛날 집, 어딨었는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되게 멀리 있을 텐데. 따뜻한 동네에 있기는 했다, 여기는 시원한 동네인데. 그리고 부모님, 이제는 내 부모님도 아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부모님은, 항상 나 원하는 대로 못하도록 시켰다. 특히 먹는 거. 나는 동물을 먹을 때마다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 커다란 귀가 생겨나고, 털이 자라고, 비늘, 아가미, 깃털이 나고 그런다. 처음에는 고기만 못 먹게 시켰지만, 나중에는 과일이며 야채도 똑같은 일이 생기고, 머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하다 보니 나를 숨기려고 그랬다. 하지만 매니가 날 찾아내 줬고, 나는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독특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건 너무 말도 안 된다고 말해줬다. 그렇게 나한테 새로 가족이 생겼다. 바로 서커스였다.

서커스는 마치 사람 한 명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딨는지 잘 알았고, 언젠가는 찾아냈다. 불행하거나, 너무 외롭거나, 머리에 나뭇가지가 잔뜩 돋아나거나 부모님이 부끄러워한 나머지 지하실에 갇혀버린 사람을. 그런 사람들한테는 자기한테 일어난 어떤 사건을 생각해 보더라도 서커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장소였다.

아직 특급 프로그램에 바로 참여할 실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괴수동에서 먼저 살았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이 친절했지만 조금은 무서운 것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밤에 기괴한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심술궂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던지면서 장난치기도 했다. 다행히 마담 레자르타랑 모두가 손인 아주머니가 나를 지켜줬다.

괴수동 티켓을 파는 눈 하나 더 난 남자아이가 있던 바깥 광고판에서는, 나를 "다윈의 어린이 카리마Karima (눈앞에서 그녀의 진화를 감상하세요!)"라고 불렀다. 관람객들이 돈을 내고 나를 보러 왔다. 나만의 프로그램도 생겼다. 내가 연어 한 덩어리를 먹고 팔이 은빛 비늘로 뒤덮이면, 사람들은 "우와아아아아!" 그랬다. 양귀비를 먹으면 머리카락 자리에 초록빛 나뭇잎과 보랏빛 새싹이 돋아났다. 닭날개를 먹으면 두 뺨이 갈색 하얀색 깃털로 뒤덮였다. 어느 날은 매니가 앵무새를 한 마리 가져와서 특별한 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알록달록한 깃털 대신, 나한테 생겨난 건 부리 하나뿐이었다. 많이 아팠고, 매니는 많이 화가 났다. 내가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야단을 많이 맞았다.

모래밭에 서커스가 버리고 간 물건들 중에서, 내가 모으던 자갈들도 여러 개 보인다. 알아볼 수 있다.

나쁜 엣씨피들 닥쳐오기 몇 시간 전에, 모두가 손인 아주머니랑 모래밭에 원을 그리기도 이전에, 매니는 또 나한테 야단을 치고 있었다. 주머니에 자갈을 꽉꽉 채워 다닌다고. 줄무늬 나고 잘 닦은 예쁜 자갈들이었다. 매니는 이렇게 말했다. "카리마, 서커스는 커다란 가족 같은 거야. 다른 어떤 가족도 너를 서커스만큼 사랑해주지 않아. 너 지금 가족을 버리려고 했던 거니?"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매니, 절대로 가족을 버리려던 거 아니었어요, 진짜예요, 그냥 울타리 바깥에서 자갈만 주우려고 그랬어요, 꼭 다시 돌아오려고 그랬어요, 진짜요, 매니, 제발요 매니 저 때리지 마세요.
그러니까 꼭 날 찾으러들 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올 거야. 나도 가족이니까. 가족은 버리는 게 아니니까.

혹시 아직도 서커스에서 자갈 때문에 화난 걸까? 그래서 나 혼자 덩그러니 모래밭에 남겨두고 간 걸까? 정말 그래서 그런 거면 너무 억울한데.

갈매기 한 마리가 파란 솜사탕을 쪼아먹고 있었다.

저 갈매기를 먹으면 하얀색 검정색 깃털로 뒤덮이게 될까? 목소리도 조그맣고 날카롭게 될까? 아니면 날개가 생겨나게 될까? 하늘 높이 날아올라 서커스한테 날아갈 만한?

밀물이 가만히 밀려와 모래톱에 그렸던 원들을 지운다.

꼭 날 찾으러들 돌아올 거야.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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