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모른다 허브

노트북 화면이 홀로 등불로서 빛나는 작은 방에서, O5의 직위를 가진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기울어진 노트북의 작은 화면 속에서도 그런 그의 심정을 반영이라도 한 듯, 온 세상의 혼란을 가득 채워 따갑게 평의원 향해 쏘아대고 있었다.

무력함뿐만 아니라 자괴감까지 느끼며, 평의원은 손을 뻗어 노트북의 음량을 낮췄다. 그러고는 가벼운 편두통과 눈의 통증을 느끼며 안경을 한 손으로 벗어 남은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듯이 주물렀다.

그는 자신의 행태가 분명 지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단만이 아닌,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진 지금, 재단의 모든 명령체계가 그를 부르짖고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이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잠시 다른 평의원들을 생각해보았다.

아마 몇몇은 이미 도주했을 것이다. 적어도 다른 평행우주로. 다른 몇몇은 협상을 하러 갔을 지도 모른다. 다른 평의원의 목을 대가로. 하지만 어쩌면, 그처럼 어둡고 좁은 방안에서, 외로이 무력감에 휩싸인 채, 책임을 회피하며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누구에게 이를 해결할 책임이 있는 것인가? 이 책임을 누가 지게 할 것인가?

잠시 늘어져 있었던 그는 다시 상체를 세워, 여전히 떠들어 대는 뉴스 창을 끄고, 재단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는 전문을 작성했다.



모든 재단 직원에게

재단의 창설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재단은 변칙성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수호한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그 누구도 강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감사를 받을 수도 없었던 임무였다. 그러나 재단은 수십 년간 수많은 직원 여러분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제 재단이 마주한 현실의 변화로, 재단은 더 이상 본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재단이 노출되었다. 하지만 과정은 우리의 예상과 달랐다. 안타깝게도 현 상황을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따라서 현 상황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마지막 시련이 될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우리의 수고와 노력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이미 많은 직원들이 공감하고 있는 바,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은 불가능하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법적 공방 속에서, 재단의 직원 보호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나는 기록보관자이자 감독관 평의원의 자격으로 말소 규약을 선포한다. RAISA는 모든 인사 기록을 파기할 것이며, 모든 종류의 문서와 영상 및 음성, 통신 기록에서 직원 여러분의 정보는 삭제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직원은 GMT 기준 말소 규약이 완료될 오늘 18시부터 자유임을 선포한다. 직원 여러분에게 각자 부여된 모든 격리 임무는 해제되며, 자리를 이탈해도 처벌할 인원은 없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가까운 재단 의무 시설에서 적절한 양의 기억 소거제를 복용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결정권자로서 재단이 해체되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이며, 끝까지 책임을 질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해준 직원 여러분 모두가 자랑스러우며, 여러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

O5-10

P.S. 만일 이 연락을 받고도 이탈과 기억 소거제 복용을 거부하고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한 직원이 있다면.. 행운을 빈다.



평의원은 타이핑을 멈추고 가만히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영광이었어.

평의원은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전문은 발송되었다. 그는 손을 뻗어 노트북을 덮었다. 방안은 어둠 속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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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인류는 사반백만 년 동안 존재했지만, 인류가 세계의 무대 위에서 활약한 시간은 최근 4천 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난 250,000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다룰 수 없는 것을 다룰 수 있다 하여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초고대적부터 선조들과 함께 했던 속삭이는 별과, 유리로 된 살아 움직이는 백조를 두고서 과거엔 숭배했으며, 현재는 서로의 목적으로 위해 싸웠습니다. 누군가는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또다른 이들은 그것들과 맞서 싸워 인류를 그것들로부터 보호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들이 우주가 요구하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기로 맹세한 이후로, 인류는 온당하고 평범한 세상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인류는 선조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몰랐었던, 혹은 외면했었던 이유로 이제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인류는 우주의 불합리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또다른 불합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맹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무엇으로부터 보호받는지 영영 알 수 없어도, 정녕 인류가 우리의 맹세와 사명, 노력이 헛되었다고 비난하여도, 우리의 임무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우주의 불합리는 여전히 존재하기에.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인류가 영원히 양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음지에서 그것들에 맞서 싸우고, 격리하고, 가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온당하고 평범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음지이자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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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보하라. 격리하라. 보호하라.

— 관리자The Administrator







재단이 노출되었습니다. 재단은 그동안 노출을 대비해 부서진 가장무도회 시나리오를 비롯한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전부 틀렸습니다.

재단이 세계에 드러났지만, 일반인들은 '정상성'과 '변칙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재단을 비롯한 정상성 기관들이 왜 그들을 위해 싸웠는지, 무엇으로부터 보호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재단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정상성 유지 기관들은 그동안 장막과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저지른 위법 행위의 책임을 물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를 수호하는 그 기관들이, 바로 자신들이 수호하던 세계에게 '너흰 필요 없어.'라는 대우를 받게 된 것이죠.

왜 일반인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기 위해선 프랑스 위키의 요주의 단체, 사피르의 '필버슨 증후군'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필버슨 증후군이란, 변칙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증후군입니다. 이들은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정상성 유지 기관이 만들어낸 '장막'이라는 틀 바깥을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피르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이며, 재단은 1920년대부터 이러한 증후군을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었지만, 재단이 틀린 것이 있다면, 필버슨 증후군이 예상 외로 대단히 넓게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류가 되어, 그들 스스로 장막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요.

따라서 이 카논은, 재단을 비롯한 모든 정상성 유지 기관은 해체되었거나 지하로 잠적한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장막은 그대로 유지되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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