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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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어딘가에 위치한 난민 캠프에 소형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짐칸에서 내린 3명의 재단 인원들은 버려진 건물에 조악하게 세워진 구호 병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들이 무너진 기둥으로 마련된 기다란 의자 앞에서 잠시 동안 기다리고 있자, 구호 단체의 장이 타월로 손을 닦으며 ​급히 들어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신지."

"아이작 레인 씨 되시오?"

셋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그래 봤자 중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말투나 눈빛만큼은 이미 노인네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만." 흰 가운의 의사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네 눈빛의 남자는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더니 아까부터 벽을 쳐다보고 있던 한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 깨우고 말했다.

"역시 사람 찾는 솜씨는 자네만한 인재가 없구먼. 훌륭했네, 레버." 그리곤 다시 아이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반갑습니다, 레인 씨. 저희들은 '재단'에서 온 사람들인데…… 저는 알베르토라고 합니다. 혹시 재단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럼요."

"아, 어떤 식으로……?"

"초자연적인 것들을 격리하는 단체죠."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알베르토 박사는 그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군요. 그래, 나도 알았어. 어떤 기부 단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재단에서 오신 분이라면 제게 딱히 뭔가 숨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일가족이 모두 재단 관련 사람이거든요."

"아, 정말입니까? 누군지 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작은 특별할 건 없다는 듯이 눈썹과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예, 뭐. 부모님은 재단의 투자자였고, 양자인 제이미 형과 친누나 펠릭스가 재단 소속 직원입니다."

"아! 확실히. 펠릭스 양에 대해서 조사할 때 당신 이름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가 아는 체를 했다.

"조사요?"

"펠릭스 양하고도 한 번 만나보려고 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안 좋은 의미의 조사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맞는 말이잖아. 아, 혹시나 제가 또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참고로 제이미 형의 부모님께서 재단의 연구원 소속이었다가 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만……."

알베르토 박사는 아이작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아, 괜찮습니다. 유감이군요."

"아닙니다. 어떻게 찾아오셨죠?"

"아, 우선 다른 두 사람부터 소개드리죠. 늦었습니다. 이쪽이 레버 베일리 군." 박사가 방금 어깨를 두드렸던 젊은 남자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작은 그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이 숙녀 분이 섀넌 베일리 양입니다." 갈색 머리카락 끝이 살짝 꼬여있는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부부 사이였습니까? 몰라 뵀습니다."

아이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버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섀넌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였다.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제 아내지만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만해요, 레버." 섀넌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레인 씨가 곤란해하시잖아요."

"하하하, 아닙니다. 사실인데요."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섀넌이 레버를 향해 짐짓 쌀쌀한 눈짓을 했고 레버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가렸다.

알베르토 박사가 웃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이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리지웨이라는 분을 알고 계십니까?"

"리지웨이 박사님이요?" 아이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요. 알죠."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혹시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예, 물론,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요즘에는 바빠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거든요. 혹시 번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죠." 알베르토 박사는 웃었고, 아이작은 그를 따라 얼떨떨하게 미소 지으며 리지웨이 박사의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서 건네주었다.

"그러면…… 그냥 연락처 때문에 오신 건 아니겠죠?"

아이작이 물었다. 알베르토 박사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다면 리지웨이 박사에 대해서 좀 들어보고 싶군요."

"오늘 해야 할 수술은 모두 끝났습니다. 다른 분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시간을 내보죠."

"감사합니다."

아이작이 방을 나가자 레버가 말했다.

"그러면, 저희들은 나가보겠습니다. 건물이 꽤 넓으니 자리가 남는 방 하나쯤은 있을 것 같군요."

"그런가? 그러면 쉬고 있게. 얘기가 끝난 뒤에 들르지."

레버와 섀넌이 나갔고, 얼마 뒤에 아이작이 다시 돌아왔다.

"좋습니다, 박사님. 어떤 내용을 듣고 싶으시죠?"

"리지웨이 박사에 대해서 아는 걸 모두 듣고 싶습니다만."

"질문의 범위가 난감하군요."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리지웨이 박사는…… 제게 또 다른 아버지 같은 사람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이미 형, 펠릭스 누나에게도요. 부모님께서 사업 때문에 바빴거든요. 우리들은 어린 시절에 리지웨이 아저씨를 만났고, 지금껏 거의 삼촌처럼 생각하며 지내왔습니다. 리지웨이 아저씨는 집에 자주 들러서 저희들과 놀아주셨고 이야기도 꽤 많이 들려주셨죠."

"이야기요?"

"물론 SCP에 대한 것들이죠."

아이작이 알베르토 박사에게 눈짓을 했고 두 사람은 다시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리지웨이 박사를 보안 규율 위반으로 잡아가야겠군요."

"그러지 못할 텐데요. 요즘 세상이 워낙 빠듯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혹시 그가 맡았던 SCP에 대해서도 들어보셨습니까?"

"기억 나는 게 하나 있군요. 불타는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였죠."

"아아, 뭔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거 말하는 거지. 지금 그 얘기 중이잖아. 리지웨이 박사는 꽤 굵직한 사건을 맡았네요."

"그랬습니까?"

"지하철 노선 하나 정도의 규모면 큰 편입니다. 그런 식으로 실적을 올리다가 출세한 걸까요?"

"출세라뇨?"

아이작의 물음에 알베르토 박사가 눈썹을 들며 말했다.

"리지웨이 박사는 기밀 인원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저조차도 연락처 하나 알아볼 수가 없었지요."

"네? 그럼 괜찮습니까? 이렇게 알아내도."

"괜찮습니다. 전 중립적인 존재니까요. 단순히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아이작은 미심쩍은 심정으로 알베르토 박사를 쳐다봤다. 박사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은색 테두리의 검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쨌건, 그게 뭐였든지 아저씨가 자청해서 맡은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리지웨이 박사는 그다지 출세에 욕심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저희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하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승진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요."

알베르토가 키득거렸지만 아이작은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랑 형, 누나 탓에 큰 사건에 한 번 같이 얽힌 적이 있었어요. 했다면 그 때 덩달아 주목을 받으면서 승진했을 겁니다. 본래라면 리지웨이 아저씨는 늘 자기는 검시관이니 더 이상 올라갈 자리도 없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검시관이요? 검시관이라면…… 아,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군요. 검시관이라. 검시관이면 오히려 윤리위원회 쪽과는 좀 더 어울리기도 하죠……. 그래. 네 말이 맞았군."

아이작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알베르토가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면 당신도 칼을 대는 대상은 다르지만 리지웨이와 같은 의사로군요. 공교로운 우연에 불과한가요?"

"아, 아닙니다. 사실 보면 저희 아버지도 박사였고 저를 키워주신 분도 박사였죠. 제 말은, 학위를 딴 박사와 의사인 박사요. 그래서 전부터 저도 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인 박사 말이죠."

"예, 둘 중에 고민하다가 그걸로 결정했었죠."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이작은 알베르토 박사 앞에서 길게 웃는 것을 자제했다.

"의사로서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예? 검시관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그런 얘기는 잘 안 하시려고 했어요."

"이곳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여기 말인가요?"

"그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잊고 말았군요. 저희들 말입니다만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싶습니다. 어쩌면 3-4일보다도 더. 정말 죄송합니다, 찾아뵙기 전에 먼저 얘기드렸어야 했었는데요. 가능한 일인가요?"

아이작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입원해야 할 환자는 없거든요. 난민들이 병원에서 자는 걸 꺼려하더라고요. 대부분 밖에 있는 자기 텐트에서 지내서 방이 남습니다. 아무 곳이나 쓰시죠. 반쯤 무너진 곳이라도 상관없다면."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럼 여기 구호 병원과 그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거든요."

"글쎄요, 뭐라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군요. 주변에 뭐가 퍼져있는지는 아실 거라고 봅니다. 거대한 늑대 무리가 유럽을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쭉 이 상태였지요. 전염병이 돌고, 강도가 들끓고, 그리고 그 끔찍한 머리카락 거미들까지도."

"머리카락 거미라고 했습니까?"

"저도 알아요. 원래는 격리 대상이었죠. 재단에서 정보 유출을 막았던 그 기생충 말입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인도나 중동, 남미 같은 제3세계에서는 이미 환자가 쏟아지고 있었어요. 이제 폐허가 된 유럽과 아시아로까지 번졌을 뿐이죠.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가 시발점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감염 소식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더군요. 러시아가 그걸로 끝장났다는 것도 맞고요. 하루에 한 번 씻기만 해줘도 막을 수 있는 기생충인데 말입니다. 재앙이 있은 뒤로는 난민들에게 두 번째 재앙이 됐죠."

"이 난민 캠프는 그 기생충을 막는 것을 주된 일로 합니까?"

"지금은 실질적으로 그런 셈이죠. 하지만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무장 단체가 한바탕 쓸고 간 뒤라서 부상자가 굉장했습니다. 이슬람 쪽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도 지금쯤이면 다 죽었을 겁니다. 테러리스트 단체가 매일 몸을 깨끗이 씻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국제 관계가 무너진 지금에야 이슬람 테러 단체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강도떼에 불과하죠."

"글쎄, 난민들한테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실례했군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머리를 감겨주고 깎아주는, 아 자꾸 왜?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겠네요?"

"그럴 겁니다. 그러나 교육도 끝났으니 이제 우리는 여길 떠날 때가 됐지요."

"곧 떠나실 생각입니까?"

"그래요. 배운 걸 썩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이작이 주머니에서 하얀 장갑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참으로 모범적인 의사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나참, 하는 소리 하곤."

"아닙니다. 그보다……."

아이작은 인상을 찌푸리고 알베르토 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지를 들여다보던 알베르토 박사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실례되는 말이지만…… 아까부터 그러시는데, 혹시 대화 중간에 혼잣말하시는 버릇이 있으신 건가요?"

알베르토 박사는 그 말을 듣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좀 이상하게 보이지요! 하지만 혼잣말은 아니랍니다."

"그럼……?"

그가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반지를 보였다.

"이 반지가 제게 자꾸 말을 건답니다. 귀찮은 녀석이에요."

"그렇군요."

아이작은 실없이 웃으며 그를 돌려보냈다.


"레버, 여기 있나?"

두 사람은 방안에 함께 있었다. 벽을 쳐다보고 있던 레버가 일어나 돌아봤다. 그를 쳐다보며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섀넌의 고개도 함께 들렸다.

"아, 박사님. 얘기는 다 끝났습니까?"

"그래, 덕분에. 자네 이제 뭔가 따로 계획 있는가?"

알베르토의 질문에 레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뇨, 딱히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나와 함께 여기 좀 더 머물러주게. 기다릴 사람이 있어."

"예?"

"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그리고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요. 벌써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금 말씀해주시지 그러세요?"

레버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알베르토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상대의 기대가 무색하게 대답했다.

"글쎄…… 자네를 좀 더 두고 보는 중이네."

레버가 입을 내밀고 뒤통수를 긁었다.

"물론 제가 대기만성 형이긴 하죠."

웃음이 터지는 소리를 들은 레버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섀넌, 박사님이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 것 같아? 자기 심리학 전공했잖아."

"아직 졸업한 거 아녜요." 섀넌이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심리학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하는 학문이 아니라고요."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같이 단순한 사람이라면 어쩌면." 섀넌은 천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거렸다. 레버는 그녀의 행동을 따라했다.

"어쨌든 자네도 함께 남아줬으면 좋겠군. 말했듯이, 자네를 지켜볼 시간이 더 필요하네."

알베르토 박사가 반지를 문지르며 얘기했다. 레버는 그를 마주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재단의 높으신 분이라면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요, 그렇게 말하셔도 역시 곤란한데요. 아무 계획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저도…… 그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알베르토의 제안을 거절할까 고민하는 속내를 은근히 비쳤다. 생략된 뒷말을 이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알베르토 박사가 먼저 의표를 찔렀다.

"아직도 화이트를 쫓고 있나?"

레버가 웃음기를 거뒀다. 침대에 앉아 있던 섀넌이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공기가 느닷없는 그림자에 드리워지기라도 한 듯 싸늘해졌다.

"그 여자를 조사하는 행위는 상부에서 허가하지 않았어. 알고 있지?"

대답이 없어 방안에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레버는 알베르토 박사를 훑어보며 의중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 박사는 그럴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레버가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침묵을 깼다.

"화이트는 제 사건입니다. 도중에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알베르토 박사는 굳어있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방금 섀넌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흔들거리며 수긍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뭐…… 자네를 두고 한 소리는 아니었네. 그래서, 이대로 떠날 건가?"

그림자는 찾아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흐려졌다. 맥이 풀린 레버는 눈동자를 위로 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떠날 거냐고? 아니. 마치 곧 추적에 나설 것처럼 얘기한 꼴이 되었으나 사실 지금 그 여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팔짱을 꼈다. 기지로 돌아가 보았자 상황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레버는 섀넌을 쳐다봤다. 그녀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도 그 산이군요. 그 사건이 벌어졌던 비공식 기지의 터가 바로 뒤편입니다. 동료의 무덤을 찾아가볼 시간 정도는 낼 수 있겠죠?"

"클레멘스……." 섀넌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물론이네."

레버가 알베르토 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섀넌은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그저 너무 오래 끌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굴 기다리는 거죠?"

"혼돈의 반란의 흔적을 쫓는 수사원이야. 이름은 베이커. 형사라네."


베이커 형사는 저녁 즈음에 도착했다. 그는 난민 캠프를 둘러보고 휘파람 소리를 내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무엇이 놀라웠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놀랐다는 것을 모두 알아보았을 정도로 감정의 표현력만큼은 충만한 사람이었다. 활동적인 베이커는 처음 보는 난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오전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작과 만나 악수를 한 뒤에 또한 구호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드러내는 대화를 나눴다. 아이작은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한 가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면 머리카락 거미에게 뜯어먹히고 있는 감염 말기 시신의 사진을 가져와 일행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제기랄, 형사님. 이런 건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고요." 레버가 불만을 토로했다.

"난 단지 자네들의 청결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 지대에 발을 들였으니 어쨌든 자네들도 감염됐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거든. 하루에 한 번 씻고, 정기적으로 머리를 깎아."

"알겠습니다." 섀넌이 입술을 달싹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장자리로 움직이는 것을 본 베이커가 사진을 들어 그녀 앞에 대보였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안 돼!"

"재밌군요, 형사님. 아주 재밌어요."

"고맙군. 아, 미안하네. 자네 말대로 재밌어서. 박사님, 저 좀 보실까요?"

알베르토 박사가 일어섰고, 직후 레버와 섀넌이 반사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다.

"아닙니다, 저희가 자리를 비키죠. 얘기하세요."

"얘기 나누세요."

두 사람이 미소 지으며 황급히 방을 나섰다. 베이커 형사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 거미로 인한 죽음이 꽤 징그럽고 참혹하긴 하죠."

"내게도 마찬가지네, 형사. 넌 저게 마음에 든다고? 제정신이야? 이만 넣어두지 그러나? 부탁하지. 됐으니까 조용히 해."

"박사님은 아직도 반지에 빠져 사시는군요. 빼버리면 덧납니까?" 그가 시체 사진을 한 손가락에 말아 접으며 반지를 가리켰다.

"방금 내 반지가 자네보고 개소리 지껄일 거면 입을 꿰매버리는 게 낫다는군."

"성깔 있네요."

"반지를 빼버리면 저주를 받을 걸세. 꽤 유용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 녀석이 쓸데없이 아는 건 많거든."

"그거 성깔 있는 반지 아닌가요?"

"그래, 또 한 소리 들었네."

알베르토 박사가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감싸 쥐었다. 무심한 미소로 그것을 지켜보던 베이커가 말했다.

"혼돈의 반란이 세력을 다시 끌어모으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중심점이 있다는 얘기겠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죽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고 알베르토는 머리를 저으며 피식거렸다.

"위원회 녀석들 골치 좀 썩이겠는걸. 그래서, 이번엔 또 뭘 노리고 있나?"

"이번에도 '생명의 샘'이라던가 뭐 그런 걸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SCP-006과는 다른 존재 같습니다."

"생명의 샘이라…… 흠, 설마 그건가……."

알베르토 박사는 턱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베이커 형사가 놀라 물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알려줄 수는 없네. 난 관찰자가 아닌가."

그가 미소로 대답하자, 베이커 형사는 입술을 깨물며 혀를 찼다.

"이 관계는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해결할 문제는 그쪽이 아니니까 말이야."

"관찰자께서 해결할 문제가 있으신가요?"

알베르토 박사는 멈칫했고, 베이커 형사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미 끝나버린 문제군요."

베이커가 말했다. 알베르토 박사는 다시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래. 단지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고 싶을 뿐일세."

침묵이 흘렀다. 그 문제가 어떤 것이었든 알베르토 박사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베이커 형사가 시선을 돌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이 주변에서 난민들 몇 명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몇 번 있었죠. 행방불명 자체야 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을 어디선가 다시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들어와요. 그것도 여러 명을요."

"복제되었다는 얘긴가?"

"SCP-222가 관련된 일일까요?"

베이커는 알베르토 박사에게 되물었다. 박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의문을 해결해줬다.

"재단은 SCP-222의 작용 원리를 대략적이나마 알아냈었지. 혼돈의 반란이 그 연구 자료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이런 젠장, 그런 게 가능했습니까?"

"연구팀이 괜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게. 어쨌든 그 공식에는 동굴이 필요했고, 이 주변 지대에는 동굴이 많지."

"그렇군요. 제 생각에 혼돈의 반란은 저 난민들에게 접근해서 지원자를 받는 형식으로 인원들을 모으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족의 가장들을요. 돈을 주고 사는 듯해요."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군. 그렇지?"

"그렇죠. 전사들을 영입하는 느낌이죠."

알베르토 박사가 계속해서 반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라……."

"옛날 이야기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베이커 형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알베르토 박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놈들이 영웅일 리는 없겠지."

베이커는 박사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 응급 환자입니다!"

"무슨 일이야?"

아이작이 벌떡 일어나 수술실로 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손에 끼면서 보조의 설명을 들었다.

"정확히 뭘 마신 건진 모르겠습니다. 위장, 장내 출혈이 있고 토혈 증세로 호흡에 문제가 있습니다."

"응급 조치는?"

"지금 장비로는 흡입기로 솟구치는 피를 빨아들이는 게 전부입니다."

"알겠어. 위세척 준비되어 있지?"

"예."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

마스크를 착용한 아이작이 수술대로 향했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이 쿨럭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만약 30대라면 젊어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그 얼굴을 보고 아이작은 멈칫했다. 그는 보조들에게 흡입기를 물리게 한 뒤 기도에 호흡용 관을 삽입하고, 다시 식도에 고무관을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피를 보일 때마다 아이작에게 토마토 주스라고 말해줬다. 아이작이 아무리 어렸어도 그게 피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작은 언제나 그게 정말 토마토 주스이길 바라곤 했다.

환자가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보조들이 발작하는 여자를 잡고 눌렀다. 아이작은 붉게 물들어가는 장갑을 보며 계속 애를 썼다.


레버는 아이작의 방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허락은 구했지만 남의 컴퓨터를 붙잡고 기밀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붕이 완전히 날아가서 위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기도 했다. 그는 계속 주변을 신경 쓰면서 키보드를 두드려 재단의 최신 보고 자료를 둘러봤다. 검역소 설치 관할 문제로 세계 오컬트 연합과 충돌이 있었고, 연방수사국과의 SCP 합동 생포 작전에 대한 보고가 있었으며, SCP-173의 격리실을 청소하던 인원 두 사람이 또 죽었다.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버, 뭐하고 있어요?"

섀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버는 황급히 창을 닫았다. 데이터 베이스의 메인 화면만을 띄워둔 채 그가 시치미를 떼자 섀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데이터 베이스?"

"난 모범 직원이야."

그녀가 레버를 신통찮게 바라보더니 컴퓨터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잠깐 제가 써도 되요?"

"물론이지." 레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섰다. 섀넌은 데이터 베이스의 검색창을 클릭해 기록을 확인했다. 레버는 순간 꿈쩍했지만 화면에는 이미 '손수건'이라는 단어가 띄워져 있었다.

섀넌이 한숨을 쉬었다. "또 이걸 찾아보고 있어요? 레버, 적당히 좀 해요."

"알았어, 미안해." 그가 사과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이것 말곤 달리 할 게 없어서 이러는 것 같아요."

"아냐, 그렇지 않아. 다른 일이 있었어도 이 건을 우선 순위로 하고 매달렸을 거야."

"그렇다면 문제인 게 맞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녜요?"

"그렇다면……" 레버는 섀넌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그 뒤편의 벽을 보고 있었다. 섀넌이 소리쳤다.

"레버! 거긴 아무 것도 없어요!"

"알았어, 미안." 그가 다시 사과했다.

문이 열리고 아이작이 지친 표정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마스크에 피가 약간 튀어 있었는데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섀넌이 물었다.

"레인 씨, 수술은 어떻게 됐나요?"

아이작이 착잡하게 대답했다. "실패했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마스크를 벗던 그는 붉은 얼룩을 발견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괜찮으십니까?" 레버가 물었고 아이작이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예. 환자가 죽는 거야 비일비재한 일이니까요. 거기에 마음 쓰는 일은 이미 졸업했습니다."

"무슨 일이었죠?"

"하수구 세제를 마셨어요. 술인 줄 알았다는군요. 사실 그것도 마시면 안 되는 환자였는데."

"안타까운 일이군요. 요즘 세상에도 술은 문제없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미쳐 돌아가는 거죠."

레버가 흐릿한 눈을 들며 얘기했다. 아이작은 그가 대화를 할 때마다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 뒤에 있는 벽을 두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의심했다. 자폐 증세 중에 벽과 얘기를 나누는 행위가 있던 것 같았다. 반지와 얘기하는 박사가 또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재단에서 일하는 형과 누나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돌아간다고 하니 생각나는군요.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도 유동 인구가 더 늘어났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슨 뜻이죠?" 아이작이 물었다. 레버는 벽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재앙 때 비교적 아무 일도 없었던 저기 미국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지금 그곳인데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이유를 들어볼까요?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서'라고 그러더군요. 밖이 어떻게 되어있는 지도 모르고 다만 여기보단 낫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더라 이겁니다. 미쳐 돌아간다는 게 이런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상징하는 바가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인가요?"

"글쎄요. 저도 사회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집단 사고가 크게 꼬여있다는 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괴상한 일이에요."

"괴상한 일이죠."

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섀넌은 레버의 시선을 불안하게 쫓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베이커 형사는 알베르토 박사에게 사진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뭔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되물음에 알베르토 박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진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사람 형태인데."

"맞아요. 사람 시체죠. 바싹 탔습니다."

"불에 탔다고?"

"아니요, 아니, 글쎄요. 아니라고 해야하나요? 잘 모르겠군요. 굉장한 세기의 전압에 감전된 흔적입니다."

두 사람이 시간차를 두고 한쪽 눈썹을 세웠다.

"전기에 지져진다고 사람이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제우스의 번개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 괜히 한 소리는 아니겠지?"

"네, 오딘입니다."

박사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죽은 지 적어도 한 달은 됐습니다. 이미 이 주변엔 없어요."

"그거 다행이군. 하긴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 와 있을 테지."

"무슨 뜻입니까?"

"아, 아니네. 반지가 괜한 소리를 했다고 난리 치는구먼. 자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사과하지."

"이런 젠장, 궁금하게 만들지 마십시요."

알베르토는 형사의 손에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해석할 테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남자가 신에게 궁니르를 던지게 할 만큼 화가 나는 짓을 했을까요?"

"그럼 이 뒤에 있는 산더미 같은 숯 더미들도 마찬가지였겠군. 그놈을 앉혀두고 개그콘서트라도 했나 보지. 그러고 보면 자기 창은 또 언제 건져 올렸단 얘기가 되는 거겠지?"

"숨어지내는 동안 럼주나 마시고 있었을 리는 없겠죠."

"그래, 그렇군."

베이커 형사가 알베르토 박사의 손에서 사진을 다시 가져왔다.

"오딘이 뭔가 실험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저번에 무시했던 목격담인 '번쩍거리는 사람들'하고도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정말로 발할라의 전사들을 만들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 밖에는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왜 굳이 다시 재래적인 방식으로 돌아가는 거지?"

"세상이 이렇게 무너졌으니까?"

형사가 사진을 집어넣으며 말했고 알베르토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사. 그런 문제가 아니라네. 전승되어 오고 있는 오딘의 이야기에 대한 재해석은 이미 이루어졌어. 그런데 또 이렇게 되었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재해석이라뇨?"

박사는 습관처럼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어. 틀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야. 절망적인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래서 그 교수가 책을 들고 그렇게 말했어요. 정말 훌륭하군, 허트 양!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주면 되겠어!"

복도에 서 있는 섀넌 베일리가 교수의 굵은 목소리를 흉내냈다. 레버가 그 옆에서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베일리 양. 기분이 어땠지?"

"끝내줬죠, 그날 수업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니까."

"부정적인 뜻이길 바래."

"누구나 하루쯤의 농땡이가 필요한 법이죠."

"섀넌, 아니길 바랬는데."

섀넌은 웃지 않았다. 레버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레버?"

"뭐라고?"

"또 화이트 생각이죠?"

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섀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있잖아요, 레버. 저도 당신과 같이 그 사건을 겪었고, 당신이 왜 그녀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 알아요. 하지만 이제는 그만두는 게……" 레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섀넌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 때 이후로 화이트에 대한 소식은 단 한 건도 들려오지 않았잖아요."

"영리한 여자야. 자기 몸을 숨기고 있는 거라고." 잠자코 있던 레버가 내뱉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그녀를 계속 쫓아다닐 필요는 없어요. 레버, 만약 화이트가 정말로 몸을 숨기는데 귀신이라서 당신이 그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이건 그냥 시간 낭비에요."

"시간 낭비라고."

"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5년이 넘었어요. 당신이 무슨 소문을 듣고, 또, 이름이 하얀색과 관련된 여자라던가, 그런 이야기만 가지고 훌쩍 떠나버렸다가, 그냥 그대로 돌아온 게 벌써 5년이 넘었다고요."

섀넌이 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 화이트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제 말은, 어쩌면 화이트도 재앙 때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확신해요?"

"화이트는 그렇게 쉽게 퇴치되는 싸구려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레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섀넌이 애가 타는 심정으로 표정을 흐리며 그를 마주보다가 입을 열었다.

"레버…… 전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 유령을 쫓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누누이 말했잖아."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뱉었다. 섀넌이 그 표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가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화이트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내가 그녀를 잡는 걸 포기해버리면, 지금까지의 나도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거라고."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에요?"

"화이트가, 내, 존재 이유라고." 레버가 단락을 하나하나 끊어가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섀넌이 다급히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요.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지금의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요!"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가 레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은 그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뿐이에요. 과거의 망령은 잊어버려요!"

"그렇군. 이제 당신도 내가 헛것을 쫓고 있다고 생각해?"

차갑게 돌아오는 레버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당혹했다.

"그게 아니라…… 뭐라고요? 나도 당신과 같이 화이트를 봤어요, 레버!"

"아니, 당신은 화이트를 본 적 없어. 당신은 그저 기지가 봉쇄되고, 클레멘스가 떨어지는 모습을 봤을 뿐이야. 지금껏 살아있는 사람 중에 그녀를 본 자는 오직 나밖에 없다고."

그 역시 섀넌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말했다. 섀넌은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났다.

"당신……"

그때 아이작이 환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레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섀넌은 조용히 벽 쪽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아이작은 유쾌하게 그들의 방과 자신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버는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의사 뒤를 졸졸 쫓고 있는 젊은 여자를 곁눈질했다. 헐렁거리는 누더기 같았지만 깨끗이 빤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섀넌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상담이 있어서. 따라오세요, 프로스트 양."

아이작이 레버에게 인사를 건네고 복도를 따라 더 들어가려는데, 레버가 움찔하며 프로스트라고 불린 여자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이름이…… 프로스트입니까?"

갑작스럽게 레버에게 팔을 잡힌 여성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과 섀넌도 마찬가지였다.

"실례하지만 혹시 손수건 가진 것 계십니까?"

"레버!"

섀넌이 다가가 레버를 잡아끌었다. 레버는 그녀를 뿌리치며 돌아섰다.

"왜, 그럼 이걸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섀넌이 소리쳤다. 아이작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하고 서둘러 난민을 데려갔다. 레버가 그녀의 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본 섀넌이 그의 어깨를 잡고 한 번 흔들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당신 농담하는 거야? 젊은 여자, 하얀 옷, 하얀 이름이었다고! 이게 단순히 우연일 리가 없잖아!"

"우연이에요, 레버! 당신 정말 단단히 미쳤군요!"

"미쳤다고! 결국 당신 입에서도 그 말이 나오는군!"

"그래요, 미쳤고 말고요! 장장 5년 동안이나 허탕만 쳤으면서 자나깨나 화이트 생각밖에 없죠!"

레버는 그녀의 팔을 내치며 소리쳤다. "그리고 방금 화이트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내 옆을 지나갔다고! 5년 동안이나 찾아 헤맸다는 걸 알고 있다면 날 막지 마!"

그가 복도 뒤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섀넌이 그를 쫓아가 다시 붙들어 세웠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당신 정말 왜 이래?"

"방으로 돌아가요. 어서! 돌아가요!"

"왜 이러냐니까!"

"몰라서 물어요?"

그는 우뚝 멈춰 섰다. 섀넌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버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서 두 사람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던 섀넌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벽에 기대섰다.


다음 날 아침, 섀넌이 꽃다발을 들고 무너진 병원 로비를 나섰다. 구석에 놓인 기둥 파편에 앉아 있던 레버가 민감한 태도를 보이며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무덤에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쌀쌀하게 대답했다.

"나한텐 꽃 한 번 준 적이 없으면서 클레멘스는 꼬박꼬박 챙겨주는군."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레버의 말에 섀넌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흘겼다.

"아니, 그렇지 않아."

"유치하게 굴지 마요, 레버."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며 밖으로 나갔다.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린 뒤 트럭 한 대가 구호 병원을 빠져나갔다.

통로 입구에 서 있던 알베르토 박사가 인기척을 냈다. 레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제가 따라가야 했나요?"

"내가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주변에 강도들이 득실거리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네."

레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로비 정경을 둘러보던 알베르토 박사는 고개를 가로젓고 아이작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이작이 짐을 싸는 중이었다. 사무실은 비록 반쯤 부스러져 있었지만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베르토 박사는 그를 두고 인상에 남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떠나십니까?"

"내일이요. 아, 박사님께는 얘기를 안 드렸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떠난 뒤에도 계속 머무르셔도 괜찮습니다. 뭐 어차피 저희 건물도 아니니 할 말은 아니지만도."

아이작은 웃음을 띠며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알베르토 박사가 그를 도와 몇 가지 자잘한 정리를 도왔다. 짐 정리를 마친 아이작이 하얀색 의사 가운을 챙기며 고마워했다.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은 여러모로 다른 분들의 귀감이 되는 분이신 것 같군요. 외향적이고, 능력 있고, 자율적이고 또 진취적이지 않습니까."

"빈말이라도 듣기 좋군요, 박사님. 그렇지만 내향적인 성격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의사에 몸담은 것이 다른 일보다 능력 있다는 증명은 아니지요."

"바로 이런 점이 귀감이 되는 겁니다, 레인 씨.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을 텐데요……."

"골치를 썩이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아이작이 싱글거리며 물었고 알베르토 박사도 웃는 소리를 뱉어내며 손을 내저었다.

"뭐, 딱히 누군가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모스크바로 갈 겁니다."

"모스크바라고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토 박사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분명 의도도 좋고, 레인 씨라면 잘 해내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도 합니다만…… 역시 위험한 곳이죠, 러시아는."

"예, 그렇습니다. 질병과 기생충만이 문제는 아니죠."

"그래도 가시겠지요?"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알베르토 박사는 이어서 물었다. "혹시 호위 인원들을 데려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레인 씨를 돕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알베르토가 묻는 눈으로 상대의 의사를 관찰했다. 아이작은 그런 박사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미소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뜻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스스로 해결할 테니 박사님은 재단의 문제에 힘써주세요. 기왕이면 제 형하고 누나를 좀 지켜봐 주시고. 이런 봉사 활동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레인 씨. 폐를 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모두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한동안 대화를 멈추었다. 박사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앞에 놓인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구름을 한 번 했다. 그는 의료 도구가 담긴 그 가방을 어루만졌고, 환자들의 자료가 가득한 컴퓨터를 어루만졌고, 그가 일하던 책상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재단에게는 재단의 일이 있고, 제게는 제 일이 있는 거죠. 그리고 여기서 제가 맡은 일은 끝났습니다."

알베르토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숙이니 손에 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작도 자신의 의사 가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박사님께서 도와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재단 사람이 아니니까요."

알베르토 박사가 중얼거렸다.

"그런가……."


레버는 병원 내부를 거닐다가 모퉁이 뒤에 서 있던 알베르토 박사와 마주쳤다. 고개만 끄덕이고 그를 지나치려고 했던 레버는 박사의 말에 붙들렸다.

"이상적인 목표라는 게 있지. 그런 성질의 녀석들은 말이야, 사람들을 자극하고 열광하게 한다네."

레버가 뒤돌아섰다. 그는 박사의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상적이라는 말에는 한계 또한 존재하잖나."

레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박사는 흘리듯이 얘기를 이었다.

"너무 먼 곳을 보고 있지는 않나?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못하게 되니까 말이야."

마침내 레버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 의심하십니까?"

"난 화이트가 단지 만들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을까 의심하네."

"화이트는 명백히 존재합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박사가 온기 없는 눈빛을 레버에게 던졌다. 마치 풍파가 지나간 뒤의 폐허를 그린듯한 눈이었다. 레버는 그 눈을 바라보며 깊은 구덩이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포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알베르토는 관찰하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 자네를 두고 한 소리는 아니었네."

박사는 항상 그런 식으로 제가 한 말을 주워 담았다. 레버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복도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반지하고 얘기하는 망할 정신병자 같으니.


"혹시 프로스트 양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레버가 물었다. 텐트 앞에 앉아 있는 난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다시 다음 텐트로 건너가 물었고, 다시 다음 텐트로 건너가 물었다. 프로스트라는 여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섀넌은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 로비의 창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는데도 레버는 도무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레버는 그녀에게 반한 것 같더군."

섀넌이 움찔하며 돌아섰다. 알베르토 박사가 멀찍이 서 있었다.

잠시 그에게 시선을 두던 그녀는 다시 창밖을 향해 섰다. 섀넌은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로 알베르토 박사의 위치를 짐작하고 옅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가끔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화이트가 자신에게서 도망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여요."

섀넌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알베르토 박사가 난민 캠프를 뛰어다니는 레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실제로 그러고 있지 않나?"

"그가 화이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히 범인을 쫓는 형사의 눈이 아니에요. 뭔가 좀 더…… 열정적이고……."

그녀는 떨리는 숨을 끊어 내쉬면서 말을 멈추었다. 박사가 그녀를 곁눈질했다. 섀넌은 이제 레버가 아니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버림받는 사람이 될 것처럼…… 레버는." 그녀가 침을 삼켰다. "화이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알베르토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레버에게 눈을 돌리며 생각했다.

닮았어.


베이커 형사가 웃었다. "승인이 났습니다, 박사님. 수색조가 파견될 거래요."

"동굴을 뒤져보러?"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 일은 다 끝난 셈이군. 내일 중에 여길 뜨지."

"그래요. 의사 양반도 오늘 떠날 테고, 여긴 이제 난민들만 남겠군요."

"그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떠날 걸세."

알베르토 박사는 베이커 형사가 사무 가방을 정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형사가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군요. 그 '빛나는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말입니다. 사람 한 명을 세워두고 냅다 충전한 궁니르를 꽂는 건가요? 설마 그렇게 무식한 방식이진 않을 테죠?"

"글쎄, 우리는 모르지. 어쩌면 끝끝내 모를 거고."

"SCP-222도 밝혀낸 연구진들이 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꼭 의뢰해보고 싶습니다."

"그럴 기회는 없을 테지."

"아쉬운 일이 되겠군요."

"자네는 뭘 그렇게 챙기고 있나?"

형사는 가방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래뵈도 가지고 다니는 게 많습니다. 형사니까요."

"그걸로는 충분히 납득이 안되네."

"100% 납득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저냥 넘어갈 수준이라면 넘어가세요."

"그렇다면 나도 짐을 싸야겠군." 그 말에 형사가 웃었다.

"박사님, 그러고 보면 박사님은 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직접 행차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했듯이 찾을 사람도 있고. 어차피 달리 남아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말이네."

알베르토는 조금씩 붉은 빛이 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왜 찾는 거죠? 물론, 저번에 그 '마지막'을 알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시긴 하셨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건 이미 끝난 일 아닌가요, 박사님."

"그렇지만 끝난 것 같지가 않네. 계속 마음 속에 맴돌고 있거든."

베이커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진지한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박사님이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하고 계신 건 알겠습니다. 주제넘는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도 자기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못하게 되는 법이죠."

알베르토가 웃음을 내뱉었다. "듣고 있었나?"

"박사님께 말해드리고 싶더군요."

"자네가 맞을지도 몰라. 지금도 돌아서서 뒤를 그리고 있지. 나 역시 마찬가지로군." 그는 코웃음을 두어 번 뽑아냈다. "알면서도 저지르고 있어."

"알면서도 저지른다라…… 그 친구 말입니까."

"그래."

형사가 가방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레버 베일리."

"레버…… 베일리." 그는 시선을 위로하고 곰곰히 생각했다. 박사가 물었다.

"아는 이름인가?"

"어쩌면요. 제가 경찰 시절일 때 자주 마주친 애송이였죠. 쥐뿔만 한 녀석이 뒷골목 틈바구니에서 자잘한 말썽은 다 일으키고 다녔어요. 이름만 같은 녀석일지도 모르죠."

"꽤 의외로군."

"그 녀석은 무슨 실수를 저지르려고 하고 있습니까?"

"여자 문제라네."

형사가 피식 웃었다. "싱거운 녀석이군요."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문제도."

알베르토 박사가 무겁게 말했다. 베이커의 낯빛이 변했다.

"정말입니까?"

알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커 형사는 그를 마주보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군요." 그는 말했다.

"화이트를 쫓는 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박사님도 알고 계시죠."

"알고 있네."

"그리고 금지 조치를 무시하고 계속 그 여자를 쫓는다던 남자가 그 녀석이었군요."

알베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이커 형사는 시선을 위로 하여 이제 노을이 무르익어가는 하늘에 대고 기억을 떠올리듯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레버 베일리는…… 자기 구미를 끌어당기는 거라면 뭐든 무섭게 몰두했었죠. 집착이 심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

형사가 알베르토를 돌아보고 물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네."

구름 속에 가려졌던 햇빛이 이따금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면서 번쩍거렸다. 그는 붉은 구름 너머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 그가 그 여자를 정말로 찾아버릴까 봐 겁이 납니다……."


섀넌은 화이트에 대해 생각했다. 레버는 그녀를 찾아내야만 한다고 수없이 뇌까리곤 했다. 지금껏 그녀는 미온적이기는 해도 그런 이야기에 늘 반대했다. 하지만, 찬성한다면 어떨까? 만약 그녀가 화이트를 발견하고 격리시키는데 성공한다면, 그러면 레버는 돌아올까? 화이트에게서 벗어날까?

그러나 화이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타오르는 노을을 지켜보던 섀넌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녀가 레버와 그녀 자신 두 사람을 위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중에, 병원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한 명과 마주쳤다. 그녀는 인사했고, 난민이 하얀 티셔츠 차림인 것을 발견했다. 프로스트 양이었다.

섀넌이 몸을 가다듬고 말했다.

"일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 바깥사람이 실례했었죠."

프로스트는 갑작스러운 사과에 흠칫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이가 직접 사과해야 할 텐데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네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프로스트는 남들과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의사 선생님은……."

"레인 씨요? 레인 씨라면 분명 오늘 떠나실 텐데요. 벌써 떠나셨나?"

"떠나셨다고요……?"

프로스트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섀넌은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도 도와주셔야 한다고 그러셨거든요. 이곳만 힘든 상황인 건 아니니까요. 아마 러시아로 떠나신다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프로스트가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쥐어뜯고 있었기 때문이다. 섀넌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얀 옷, 하얀 이름, 하얀 손수건.

뭐야, 그러면 이 여자가 화이트란 말이야? 그녀는 프로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프로스트는 불안한 눈으로 시선을 계속 옮기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섀넌이 따라서 한 발짝 다가갔다. 프로스트는 다시 놀랐고 섀넌 역시 놀랐다.

프로스트는 나약한 여자다. 기지를 차폐시키고 클레멘스를 서서히 죄어갔던 유령이 이렇게 유약한 모습일 리가 없어. 섀넌은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하얀 이름과 하얀 옷이었다. 그것도 이 난민촌에서 이렇게나 깨끗한 흰색의 옷. 이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프로스트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아 종종 걸어가버렸다.

섀넌은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화이트가 나타났을 리가 없다. 화이트의 모습도 아니었다. 레버라면 분명히 그녀를 쫓아 나갔겠지. 그러나…… 섀넌은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정말 화이트라면……. 그렇지만, 설령 아니었더라고 해도. 레버는 달려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붙잡았을 때 그녀라는 것을 발견한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까?

그녀는 프로스트가 하얀 손수건을 움켜쥐었을 때부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되뇌고 있었다.

왜 나타난 거야. 왜.


레버는 허탈하면서도 빛을 잃지 않은 눈으로 돌아왔다. 프로스트는 캠프에 없었다. 그렇다면 주변의 거주민일까? 어디서 나타난 여자지? 그는 그런 생각에만 계속 골몰했다.

그가 로비를 지나치려고 할 때, 섀넌이 다급하게 다가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버, 프로스트를 봤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섀넌은 레버의 반응을 마주하고 숨이 막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어디, 어디 있어?"

"그 여자가…… 하얀색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어요."

"뭐라고?"

레버의 그 눈빛이 흔들렸다. 섀넌이 안간힘을 쓰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붙잡지 못했어요. 밖으로 걸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그녀는 잘못을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얘기하면서 목이 메는 듯 연신 울컥거렸다. 레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그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결국 북받치는 호흡을 내뱉고는 뒤로 돌아 달려 나갔다.

섀넌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은 캠프를 벗어났다. 보조들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아 병원을 정리하고 나온 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건만 난민들이 계속 그를 붙잡는 통에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난민들이 모여 서서 그를 향해 작별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도 언젠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한 중년 여성 한 명이 소리치며 튀어나오더니 아이작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어라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아이작은 피곤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그녀를 맞았다.

"제 남편을 찾아주십시요, 의사 선생님! 제 남편이…… 제 남편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떠밀듯이 건넨 봉투와 편지를 펼쳤다. 작별 인사와, 지폐다발과, 사랑한다는 말.

아이작은 착잡한 눈을 하고 땅에 엎드려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는 그녀를 위해서 자신을 팔았다. 그리고…… 이 아이를 위해서.

작은 여자 아이는 엄마 옆에서 울먹거리는 눈을 하고 아이작의 의사 가운을 붙잡은 채 물었다.

"의사 선생님," 그녀가 아이작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아빠는 저 때문에 가버리신 건가요? 그저께 제가 빵이 먹고 싶다고 아빠한테 화를 냈어요."

아이작은 조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아이의 손은 나지막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이제 배 안 고픈데."

그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네 탓이 아니란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프로스트는 사라졌다. 레버가 돌아왔다. 그는 섀넌이 있을 방으로 향하지 못하고 로비를 서성거렸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프로스트. 프로스트. 수틀리게도 알베르토 박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양심이라는 것도 모르고 다시 지껄였다.

"떠나 있는 사람을 데려오기란 쉽지 않지만, 떠나버린 사람을 되돌리는 건 더 어려운 일이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레버가 거칠게 응답했다.

"하고 싶다는 말이 이런 부부 상담이었습니까? 또 절 두고 한 말은 아니라고 해보시죠."

"아니, 이건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일세."

알베르토는 일전에 없었던 무게감으로 레버를 억눌렀다. 레버는 고개를 수그리고 기세를 한 풀 꺾었다.

"그래서 뭡니까? 갑자기 사랑의 전도사라도 하실 셈인가요?"

"자네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틀렸다고 말하진 않겠어. 그러나 너무 나가지 말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지 들었잖는가."

레버가 알베르토를 쏘아봤다.

"섀넌은 떠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절 사랑하니까요."

"자네는 그녀를 사랑하나?"

그가 움찔했다. 알베르토는 놀랍도록 건조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봤다.

"당연하죠,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자네도 아마 이유를 알겠지."

박사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레버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섀넌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까 나는 왜 멈칫한 거지? 왜 놀랐던 거지? 도둑이 제발을 저리는 것처럼?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한 잿빛 속에서 부스러진 파편들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하얀색, 또 하얀색…….


섀넌은 침대 위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레버는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던 섀넌은 시간이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듯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침울함에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레버…… 화이트를 붙잡을 수 있었는데……."

"그런 말 하지 마, 섀넌. 괜찮아. 화이트라는 보장은 없었어."

그의 말에는 질질 끄는듯한 미련이 있었다. 섀넌은 그녀가 정말로 화이트였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붙잡았다면, 그렇게 수없이 생각했다. 오늘이 그 5년간의 종지부가 될지도 모르는 날이었는데. 그랬는데 그녀가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미안해요."

레버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 봐, 이게 그의 본심이지. 섀넌은 울음이 터지기 전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던 거야? 레버가 결국 화이트를 붙잡게 되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화이트가 레버를 빼앗아가기라도 할까 봐?

그래.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 그녀는 다리를 감싼 팔을 더 끌어모으고 북받치는 숨을 억지로 소리 없이 내쉬었다.

그 숨소리는 레버에게도 들렸다. 그는 섀넌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섀넌. 그러고 있지 말고."

섀넌이 고개를 들었다.

"레버……."

"일어나."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말없이 섀넌을 마주 보던 레버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섀넌은 레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괜찮아, 섀넌……. 괜찮으니까."

레버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섀넌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심리학을 전공했던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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