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의 백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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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구에는 빌라 하나가 있었다. 변칙예술 특구인 명천구의 온갖 기이한 거주민들 사이에서도 그 빌라의 037호에 사는 이들은 종종 입에 오르내렸다. 왜냐하면, 그곳에 동거 중인 연인이 둘 다 꽤 유명한 변칙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오가는 묘한 비밀 때문일 것이였다.

지금 그 집의 시계는 기도 시간을 가리켰다.

한쪽 방에서는 얇은 안경을 낀 남자가 단정하고 익숙한 손길으로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남자는 지적이면서도 창백한 인상이였고, 스탠드의 희미한 백색등에 의지하면서 말씀을 읽어나갔고 묵상했다. 얇디얇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이따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멘" 하는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두꺼운 성경의 가죽 커버는 해져 있었고 그의 모태 신앙심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였다.

한쪽 방에서는 길고 검은 머리칼의 여자가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여자는 자신의 팔에서 혈액 70ml를 뽑아내고는 익숙하게 팔에 반창고를 붙였다. 여자는 일어서서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일곱 걸음을 걷고 일곱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여자는 그 원형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일곱 왕좌, 일곱 창, 주홍왕의 일곱 의지" 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이 촛불 빛을 받아 빛났다.

마침내 삼십 분 나절 후 한쪽 방에서는 '주기도문'이 한쪽 방에서는 '구속의 기도서'가 읊어지기를 마쳤을 때, 남녀는 각자의 방에서 나왔다. 집안 전체에 드리웠던 어둠이 가시고 다시금 거실에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은 반대쪽에서 걸어와서 거의 동시에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서는 마주보았다.

"기도는 잘 했어? 피는 잘 멎었고?"

남자가 물었다. 방금까지 유일신에게 기도드리던 신자는 어디 갔는지 그는 악마적 존재를 숭배하는 자와 다정히 말을 나누었다.

"어. 주홍왕께서 지켜주시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자기는?"

"나야 잘했지. 배고픈데, 뭐 먹을래?"

여자는 팔에 붙은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남자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어쩌다 묻었는지 핏방울이 검붉은 점을 이루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피를 닦았다. 피부의 촉감과 미지근한 피가 묻어 나오는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이질적이였다.

남자는 수년간 물감이나 도화지의 표현을 만져보았다. 변칙예술 경험에서 우러나온 촉감의 미학도 도무지 이 상황을 상세히 이해하라고 이리저리 지시해주지를 못했다. 그의 앞에 앉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왜 남자는 이단을 넘어서 붉은 색의 적그리스도를 모시는 이교도와 멀어지지 않고 있을까. 평생 남자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인간관계는 이런가. 남자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배고파? 그럼 나가서 뭐 좀 사 올까?"

"그럼 같이 가자."

남자는 피가 묻은 손가락을 물티슈로 닦았다. 있으나마나한 붉은 기운이 백지에 새겨졌다. 그는 이 자국을 보면서 그날을 회상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기 직전, 붉은 페인트로 주님의 고행을 채색하던 그의 모습을.



2019년 1월



2018년 12월 25일을 기점으로 명천구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 12그루가 불타 죽었었다.

차라리 십자가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십자가는 독실한 개신교인인 남자에게 최소한 아기자기하게 꾸민 침엽수보다는 더욱 소중한 것이였고, 십자가가 불탄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종교적 모독과 과거 있었던 끔찍한 인종 증오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명천광장 쪽에서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광선이 솟아올랐다가 불타는 형태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명천구는 변칙예술가들의 소굴이였으며 항상 소재에 목말라 있는 예술가들에게 종교성의 붕괴, 대중성의 붕괴, 서구적 사회성의 붕괴 같은 소재는 더할 나위 없이 흔해빠진 먹잇감이였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자 이 소재들이 봇물 터지듯 단번에 터져나왔고, 방화죄를 명목으로 출격한 방재원 경찰들과 예술가들의 술래잡기가 차라리 더 재미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트리 태우기가 흔해져버린 것이다. 남자는 미묘하게 슬펐다.

"…채색이나 하자."

그는 베란다에서 돌아서며 읊조렸다.

"채색이나…"

남자는 다시금 거실에 앉았다. 종일 그는 거실 한복판, 이젤에 실린 예수의 고난을 채색하고 있었다. 남자는 유화를 제법 잘 그리는 편이였다만, 이를 통해 변칙적인 힘을 불어넣는 것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변칙능력이래봤자 빛을 반물리적인 형태로 고정하는 것이였으니 변칙예술가였지만 변칙화가는 되지 못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지어다, 남자는 붓이나 펜만 잡으면 언제나 불타는 신앙심으로 가슴이 뜨거웠으니.

그는 주님의 고난을 섬세히 그려냈고, 변칙 대신 그의 기복과 감정 그리고 신앙을 담아낼 줄 알았다. 종교화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도 한번쯤은 돌아보게 되는 솜씨였다. 수 개의 붓이 예비되어, 각기 물고기를 낚아채는 새처럼 물감과 가볍게 맞닿았다가 다시 올라섰고 다시금 종이와 입맞췄으며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과 선과 면과 형체를 쉴새없이 그려냈다. 붉은 물감은 적절히 움직이고 굽히고 또 섞이면서 신의 성혈을 묘사하고, 검은빛이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몇십 분을 그렇게 집중하다가, 시계가 돌아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명천의 낮고 차다찬 공기가 좁은 창문 틈으로 기어들어오면서 그의 뒷목에 서린 식은땀을 차갑게 식혔다. 그는 휴지를 뽑아 땀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보아도 이번 작품은 완벽해 보였다. 그는 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드렸다. 이는 인간의 힘이 아닌 주님께서 하신 것이 아닌가.

과업을 끝낸 남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완성하고 나니 온 몸이 부러질 듯 쑤시고, 텅 빈 뱃속으로부터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기지개를 켰다. 몸 전체가 산업혁명기 기계 쪼가리처럼 굳고 녹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북 소리처럼 요란한 뱃속의 소리.

"이 밤에 무슨 배가 이렇게 고파."

투덜거리던 도중, 남자는 자신이 점심과 저녁을 걸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그만두었다. 그냥 잠들자니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의 배고픔에 그는 대강 패딩을 입고 슬리퍼를 걸치듯 신은 채 집을 나섰다. 어두운 명천구 골목 사이로 그는 걸었다. 편의점이라고 할 만한 곳은 이 변칙예술 특구에 없었으나 국가초상방재원이나 재단이 관리 감독하는 슈퍼마켓은 이곳저곳에 있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천 원 몇 장이 손에 잡혔다. 이 정도면 과자나 빵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리라. 남자는 빠르게 걸었다.

"어, 아! 으….."

그러다가 발목을 접질리고는 비명을 지르며 멈춰섰다. 그는 비틀대며 가로등에 몸을 기대서고는 이를 악물었다. 매일같이 다니던 길이니 도통 뭣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는데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남자는 고통을 참으며 대체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인지 확인해보려 방금 걸어가던 쪽을 내다보았다. 멀리 있는 가로등 불빛을 희미하게나마 반사하는 어떤 어둔 빛깔의 물건이 지면에 수직으로 올라서 있었다.

"저게 뭐야…?"

그것은 땅에 수직으로 꽂힌 단검이였다.

다른 칼들이 쇠로 만들어져 확실히 반사광이 나는 것과는 전혀 달리, 그 칼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마치 흑요석이나 석탄 같은 것을 정교히 깎아 만든 것과 같은 색이였다. 유일하게 빛깔이 있는 것은 중앙에 박힌 핏빛 보석. 그 모양이 실용적 도구 내지 무기라기에는 일종의 예술 작품에 가까워서 남자는 대강 그것이 어떤 전시 예술의 일종이라고만 생각을 할 따름이였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 다니는 길에……"

남자는 짜증을 내고는 접질린 발목을 질질 끌면서 다시 길을 갔다. 굳이 돌이켜 집을 가기에는 발목만큼이나 뱃속이 고통스러웠음이다.


"젊은이!"


그때, 갑자기 반대 골목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내지르면서 달려나왔다. 남자는 비명을 흘리며 뒷걸음질쳤다. 뛰어나온 것은 중년 남자로 추레한 옷을 입었으며 뺨에는 긴 상처가 나, 피가 몇 줄기 나고 있었다. 그는 부상자를 보고 놀란 자신이 잠시나마 부끄러워졌다. 그 사내는 내내 씨근거리다가, 갑자기 다시 소리를 쳤다.

"도와주게, 잠시만 숨겨 줘!"

"저… 괜찮으세요? 뺨에 상처가 큰데 병원부터…"

"병원은 나중에 가도 돼!"

그가 쌕쌕댔다.

"어서 숨겨주게나!"

사내는 남자의 뒤로 몸을 피하면서 주변을 연신 둘러보고 있었다. 꼭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과도 같은 모습에, 남자는 강한 공포와 동시에 의무감이 들었다. 그는 성경적 말씀들을 곱씹었다.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의무. 약자를 돕는다는 의무감이 핏줄을 타고 곳곳의 근육을 자극했다. 남자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지금 당장 경찰을 부르면 아마 방재원 요원들이라도—

"잠깐만! 젊은이, 그, 지금……"

사내가 고함과 신음 그 어딘가의 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눈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 골목 어딘가에서 분명 피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 어둔 골목을 내다보았다. 분명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키는 남자보다 조금 작고 손에는 무언가 긴 것을 든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을 타고 길게 드리우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일까, 남자는 그 순간 옛날 성경에서 읽었던 무수한 히브리 민족의 강한 적수들을 떠올렸다. 가나안, 로마, 이집트, 그런 군대들.

"당신 누굽니까!"

남자가 있는 힘껏, 나팔 부는 소리를 모방한 양 외쳤다. 한 삼 초의 시간 동안 침묵이 돌았다. 삼 초는 지옥처럼 길었다. 등 뒤의 사내가 내는 거칠고 공포에 질린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 남자한테서 비켜요."

대답은 정확히, 남자가 신고하기 위해 휴대폰을 쥔 그 순간에 들려왔다. 놀랍도록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증오만 이해하라는 듯, 남자인지 여자인지 목소리의 주인을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이 가로등 빛을 타고 빛났다. 남자는 저러한 본 적이 있었다. 마치 그 굴곡이 대나무와 같은 것. 그것은 삼단봉이였다.

"누군데 이 분을 찾으십니까?"

"알아서 좋을 거 없습니다."

여자가 천천히 그러나 명백하게 발걸음을 이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남자는 전화기를 한 손에 쥐고 칼이 박힌 쪽으로 조용히 몸을 뻗었다. 물론 최선은 칼을 쓰는 것에다 쥐지도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일 것이였다. 그의 아무 것도 쥐지 않은 왼손에서 흰색 물감이 새어나오더니 흰빛 빛가루가 되어 서서히 부양하기 시작했다. 보잘것 없는 변칙능력이지만 최소 호신에는 유용할 것이였다. 여자의 가는 눈이 왼손을 노려보았다.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여자가 비웃었다.

"하시던가."

그리고 여자의 오른손이 타올랐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삼단봉이 달궈지나 싶더니 불꽃 속에 집어삼켜졌다. 순수히 기적학적인 불꽃이 뱀의 혀마냥 날름거리며 삼단봉을 감쌌다. 그리고 여자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땅까지 내리찍었다. 불꽃의 색이 공중과 땅을 수직으로 이었고, 그 충격 속에서 기적술로 일궈낸 시뻘건 채찍의 형상이 중년 남자를 향했다.

남자가 다급히 중년 남성을 밀어 몸을 피했다. 채찍이 바람을 찢는 소리를 내면서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셔츠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을리거나 타오르진 않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주머니에 왼손을 뻗어 만년필을 꺼냈다. 남자의 심장 박동에 맞춰 손끝에 쥐인 만년필이 가늘게 진동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온 사고를 물감의 삼원빛 유리가 깨진 아수라장처럼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변칙예술도 결국은 예술이였기에, 저렇게까지 체술에 능통한 상대를 막아내는 것은 팔레트로 도검을 막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예술가라면 날카로운 팔레트를 조각할 수 있어야 하는 법.

남자는 펜을 쥐고 일직선 횡을 그렸다. 그 펜끝에서, 흰색 빛이 사인파를 만들어내면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펜을 긋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여자가 삼단봉운 고쳐쥐고 붉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붉은 빛이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더 이상 '조금씩'이 허가되는 시간은 없다는 듯이, 그는 순식간에 펜을 휘둘렀다. 그리고 공간과 빛이 그 뒤를 따랐다. 몬드리안의 구성을 연상케 하는 사각형의 공중 구조물과 흰색 빛이 시야를 메웠으며, 그 어디서부터 즐겨 듣던 찬송가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여자는 예술적 구조물에 부딪히기 전에 멈춰섰다. 그제서야 남자는 백색의 빛 사이에서 여자를 더욱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여자는 긴 생머리였고, 붉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귀에 걸린 작은 주홍색 보석이 덜컹였다.

"저— 저기요. 이게 무슨, 무슨 짓…"

남자가 피신시킬 길을 고르면서, 더듬대며 외쳤다. 여자는 독사처럼 침착했다. 너무나도 침착했고 이런 습격에 정평이 난 자 같았다. 혼돈의 반란, 세계 오컬트 연합, 그런 자들일까. 아니라면 단순히 괴담으로만 듣던 사이코패스 예술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오만할 만큼이나.

"나름 공무 집행 중이라서 말이죠."

"그럼….."

"아. 내가 재단이나 방재원 출신이라는 건 아닙니다."

여자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충격이 남자의 허리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가 빛이 물질화되지 않은, 그 현실성이 약한 구조물의 경계를 뚫고 지나간 것이였다. 남자가 다시 왼손으로 빛을 만들어내서 쏘려 했으나 여자가 더 빨랐다. 왼손을 후려친 채찍의 강타에 빛은 모여들지 못하고 스러질 뿐이였다.

"이, 이 년이!"

여자가 내달렸고, 채찍 끝이 날카롭게 회전하며 중년 남자를 향했다. 이 년이, 하고 욕을 흘린 중년 남자가 바닥을 더듬대나 싶더니 연달아 날아드는 채찍을 맞고는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그 중년 남자는 바닥에 꽂힌 칼을 쥐었다. 희한한 모습의 칼이였는데, 사내에게 쥐이는 순간 흡사 그를 위해서만 준비된 무기 같았다. 채찍의 끝이 독사처럼 사내에게 향했고, 그는 칼을 연거푸 휘둘렀다. 기적술로 만든 채찍이 꼭 나뭇가지마냥 잘려나갔다. 그 사내는 남자에게 보호를 요청했던 약자가 아니라, 어느 나라의 전사처럼 보였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나?"

여자는 훨씬 연상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다시금 공격을 퍼부었다. 그 손에서 불꽃 같은 홍색 빛깔이 연거푸 생겨나더니, 손을 떠나는 순간 돌과 같은 형상이 되어 그를 강타했다. 그럼에도 사내는 검으로 몇 차례 빛을 쳐냈다.

그 순간이였다.

"아이, 씨."

여자의 얼굴을 흰색 빛이 덮쳤다. 그 남자가, 다시 일어서면서 왼손으로 빛을 다시금 조작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덮은 빛이 비둘기나 배 같은 형상으로 변하면서 시야를 차단했다. 남자는 중년 사내에게 소리쳤다.

"어서 뛰어요!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사내가 거칠게 숨을 쉬며 미소했다. 쥐었던 칼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네, 고맙네….. 젊은이. 다리를 다쳐서 혼자선 못 뛰겠어. 부축을 좀 해 주게. 저 여자는 따라오지 못할 테니."

"아, 예. 선생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벽에 손을 짚고 연신 숨을 고르는 사내의 옆까지 뛰어가, 그가 몸을 맡기는 대로 그 팔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고 그를 천천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남자 또한 썩 좋은 상태는 아니였지만, 어찌 되었건 상대는 부상자였다. 그는 다시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뱀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였다. 다만 붉은 기적술의 힘만이 주변을 사슬 갑옷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 냉철함에 남자는 소름이 끼쳤다.

"대체 저 사람은……"

"아주 독종 같은 작자지. 이단자 년."

남자의 목에, 검은빛 금속이 찰나의 순간 인접했다. 목의 하얀 피부에 느껴지는 금속성 감촉.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사내는 몇 번이고 킬킬대며 남자의 목에 칼을 댄 채로 몸을 곧추세웠다. 남자는 그 상황에 얼어붙었다. 으레 사냥꾼을 본 짐승이 그렇듯이. 여자의 얼굴을 덮었던 빛이 떨어지고 부서져 흩어지며 그 얼굴이 다시금 보였다.

"제아무리 홍하나 너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자의 목숨까지 담보로 하지는 못하겠지."

여자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길게 사이렌 소리가 났다.

여자가 조용히 입을 뗐다. 입에서 냉혹한 증오가 느껴지는 어투였다.

"역시 사람은 바꿔쓸 수 없구나, 적백합교회 천강혁."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당면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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