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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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나는 설하가 열쇠로 자기네 연구실 문을 따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설하의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몇 달 전 대구의 한 헌책방에서 『전우치전』이라는 제목의 고서를 발견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그전까지 알고 있던 『전우치전』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이에 지도교수인 문헌학자 장하영 교수에게 책을 가지고 가서 문의했다. 교수는 그 내용에 크게 놀랐고, 책이 만들어진 시기를 특정하기 위해 종이의 시료를 채취해 물리천문학부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보정을 거쳐야 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1950년 기준 350여년 전 물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설하가 헌책방에서 줏어온 그 책은 그전까지 알려진 『전우치전』의 판본들 중 최고본인 경판 37장본(1847년)에 비해 250여 년 앞서는 물건이었고, 교수는 이에 관해 논문을 준비했다. 설하 역시 발견자이자 교수 휘하 원생으로서 저자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2주 전, 논문 초안이 완성되었고 1차 동료평가를 겸하여 인트라넷을 통해 국문과의 다른 교수들에게 초안을 돌렸다. 그 다음날 교수는 실종, 연락이 두절되었고 문제의 『전우치전』 최고본(추정)도 사라졌다. 스캔본이 저장되어 있던 교수의 컴퓨터 드라이브도 초기화되었고, 인트라넷에 올라갔던 파일과 물리천문학부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던 시료들도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진짜. 꼭 여우한테 홀린 것 같다니까?」

「혹시 이 모든 게 그냥 네 망상이 아닐까? 그 책도, 네 교수도 사실 세상에 실존하지 않았던 거지. 너 이 학교 학생은 맞냐?」

내가 비꼬자 설하가 말없이 엿을 날렸다.

「그나저나 참 학교 오랜만에 와 본다. 학교 다닐 땐 참 지긋지긋도 했는데. 간만에 다시 오니 뭔가 아리네」

「넌 도대체 졸업은 어떻게 했어?」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넌 기억 나냐?」

「나랑 너랑 과는 커녕 단대도 달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래서 여기가 네가 실종자, 장 교수님을 마지막으로 본 곳이다 이거지」

「장 교수님과 『전우치전』 현존 최고본을 마지막으로 본 곳이지. 사실 그 책만 있으면 논문은 나 혼자서도 쓸 수 있는데……. 솔직히 교수님보다도 그 책을 찾는 게 더 문제야. 교수님은 못 찾아도 그 책은 꼭 찾아야 하는데. 교수님이 어디 갔는지 알면 책의 행방도 알 수 있겠지?」

「거 참 솔직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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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이지함과 양사언을 불러 오라 한 뒤 전우치는 이지함의 흙집에서 내리 열흘을 앓아누웠다. 머리맡에 소금과 물을 놓고 이따끔 그것으로 염분과 수분을 보충할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몸집이 거의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 되었다. 이지함이 있는 보령과 양사언이 있는 회양은 한양에서 정 반대 방향인 남서쪽과 북동쪽으로 걸어서 40여 일 가까이 떨어져 있다. 소식을 전하러 간 보부상들이 거기까지들 도착하는 데 40일,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이 마포나루로 찾아오기까지 40일. 두 달 넘게 꼼짝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신세였다.

「봉래(蓬萊)는 지금 사또질을 하고 있으니 말을 타서 좀 더 빨리 오려나. 쿨럭쿨럭」

또 피 섞인 기침을 내뱉고, 전우치가 자기 몸 상태를 찬찬히 톺아보았다. 양 다리는 부러져서 부목을 대고 있는 상태고, 등을 온통 뒤덮은 흉측한 열상을 지혈하기 위해 삼베로 몸을 칭칭 감았다. 얼굴을 더듬어 보니 따끔따끔한 것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래 놓으니 꼭 계집들 가슴가리개 같구먼. 낄낄. 쿨럭쿨럭」

처음 며칠 동안은 시끄러울 정도로 마포나루 사람들이 오고갔었다. 토정 션생의 사형이라는 말에 마포나루 사람들이 의원을 부른다 어쩐다 호들갑들을 떨었으나 전우치가 이것은 사람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물리쳤다. 그 뒤로는 며칠에 한 번 물동이를 채워 주러 아해들이 드나들 뿐, 다른 때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흙내나는 토굴집 천장에 지네 한 마리가 빨빨거리며 붉은 다리를 바삐 놀리며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전우치는 지네의 다리 개수를 세어보다가 열일곱에서 세기를 그만두었다.

「이러다 상처로 죽기 전에 무료해서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움직일 수도 없고 아주 미칠 지경이로다……. 부적 주머니를 아니 잃었다면 인편에 갑마(甲馬)를 딸려 보냈을 터인데. 허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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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나는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나 정 교수 연구실 곳곳을 뒤져보았다. 서가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들을 다 꺼내보며 한 쪽 한 쪽을 너풀너풀 넘겨 훑기까지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 지랄을 몇 번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아이고 죽겠다. 좀 쉬었다 하자」

내가 살펴본 물건들을 따로 방 한 구석에 모아 두던 설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빼 앉았다. 나는 리놀륨 바닥에 그냥 벌렁 드러누웠다.

「근데 네가 발견한 『전우치전』이 어떻게 내용이 달랐다는 거야? 쉬는 김에 그 얘기도 한 번 들어나 보자」

「『전우치전』 내용은 알지?」

「씨바, 존나 상식이지. 이과인 나도 안다」

「전우치가 왕한테 황금 기둥 삥뜯은 얘기 말고 더 아는 거 있어?」

「……」

「일단, 내가 찾은 판본에선 결말부터 전혀 달라. 흔히 알려진 내용에서는 도사 전우치가 유학자 서경덕에게 발리고 서경덕의 제자로 들어가는 걸로 끝이잖아? 이게 조선 중기부터 교조화된 유교 세력이 도교 세력을 완전히 보내버린 걸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찾은 판본에선 전우치가 서경덕의 제자가 된 뒤로도 이야기가 이어져. 그리고 그것 이외에 서경덕과 만나기 이전 이야기들도 어딘가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다르고. 그 다른 정도가 거의 황당할 수준이라서 위서가 아닌가 싶어 물리과에 연대측정도 의뢰했었지」

「그래. 그리고 결과는 진퉁이라고 나왔대매」

「『전우치전』의 시작 부분에선 전우치가 도술 능력을 얻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지. 내가 그 책을 찾기 전까지 최고본이었던 경판 37장본에서는, 어린 전우치가 서당을 가는 길에 산을 넘어가던 도중 대나무 숲에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우는 것을 발견하고, 그 여자를 달래다가 여자와 하게 돼」

「하다니, 뭘?」

「에이, 알면서」

「"어린 전우치"라고 안 그랬냐?」

「아무튼, 전우치가 그 여자와 정을 통하고는 결혼을 약속했는데, 서당에 갔더니 스승인 윤공이라는 사람이 돌아가 그 여자를 또 본다면, 여자 입 속에 구슬이 있을 테니 그것을 빼앗아 가지고 오라고 시켜」

「왜? 존나 뜬금없네」

「고전소설이 다 그렇지 뭐. 아무튼 전우치가 다시 그 여자를 만나서 2회전을 치르다가, 그 여자 입 속에 들어 있는 구슬을 자기 입으로 옮겼다가 그만 삼켜 버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둔갑한 여우였고, 구슬은 여우구슬이었던 거지. 그게 전우치의 신통력의 기원이라는 거야」

「우리 조상이란 사람들 의외로 유쾌했구나」

「그런데 내가 찾은 판본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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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0년(서기 1515년)

어느 산 속

열일곱 살의 전우치는 절간 술독대 뒤에 숨어 뭐라 시부렁시부렁 뇌까리고 있었다.

「망할 놈의 땡초들 같으니. 내 반시 진범을 잡아 이 억울함을 밧으리라」

우치는 산중 절간에 들어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중들이 마을에 내려간 사이 술을 빚던 술독들 중 하나가 깔끔하게 비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절에 남아있던 사람이라고는 우치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들은 우치가 술을 다 먹어 버리고 시치미를 뗀다고 짐작하고는, 어린 치기에 그럴 수도 있으나 몸이 상하니 과음은 말라는 둥 훈계를 늘어놓았다. 우치는 자기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펄펄 뛰었지만 중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술독이 채워진 오늘 밤, 우치는 커다란 술독들 사이에 몸을 감추고 찾아올지 여부도 모르는 진범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렸을까, 술독대 뒤에 옹송그리고 있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우치는 환한 보름달 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고 퍼뜩 눈을 떴다. 술독들 중 하나가 없어져 있었다. 그 술독이 가리고 있던 달빛이 쏟아진 것이었다. 우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황급히 도로 술독대 뒤로 몸을 집어넣었다. 술독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술독을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 있었다.

「꺼어어, 오늘은 영 저번보다 못하구먼. 역시 좀 기들우다 술이 익을 즈음에 왔어야 하나」

술독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여자 목소리였다. 보름달이 남쪽 하늘을 비추는 한밤중에 산 속의 절간에 나타나 술독을 통째로 들어올려 비우는 여자라니, 지금 내가 헛것을 보는 것인가? 말로만 듣던 귀신인가? 순간 두려움이 와락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보다도 진범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고양감이 더 컸다. 분명 비정상적인 감정이었지만, 당시의 우치는 그 생각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방금 비운 술독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우치는 술독들 사이의 틈으로 여자가 움직이는 것을 살펴보았다. 흰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산발을 한 여자는 모퉁이를 한 번 돌아 들어가더니, 절 뒤의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우치는 살금살금 그 뒤를 따랐다.

숲 속을 얼마나 헤메었을까, 대나무 잎에 살이 베이고 나뭇가지에 옷이 찢기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대숲 속에서 홀로 하이얀 소복의 뒤만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숲을 빠져나오자 탁 트인 공터였다. 이전까지 본 적이 없는 곳인 것을 보니, 숲을 건너 엄청 멀리까지 온 모양이었다. 쫓던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우치는 공터 한가운데로 뛰어가려다, 칡덩쿨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고!」

땅에 턱을 찧은 고통에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놀라 입을 막았지만 이미 소리를 내어버린 뒤였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우치는 눈알을 마구 굴리며 여자의 모습을 찾았다.

「누기에 감히 나를 예까지 따라왔느뇨? 사람이면 썩 나오고 귀신이어도 썩 나오라!」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어디선가 소리쳤다. 우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되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송도 사람 전우치요! 진딧 술도둑을 잡아 나의 누명을 밧어야 하겠으니, 낭자야말로 그 모습을 썩 드러내쇼!」

「아, 그래?」

라는 말과 함께, 서늘한 것이 우치의 뒷목을 콕 건드렸다. 우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힘들여 뒤따라온 여자가 서 있었다. 우치가 워낙 왜소한 체격이었기에, 여자였지만 그 키가 우치보다 컸다. 여자의 얼굴은 보름달 빛의 역광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등 뒤로 무언가 굵고 길쭉한 것 아홉 개가 마치 뱀이 사행하듯 곡선을 그리면서 하늘하늘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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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잠―깐, 잠깐잠깐잠깐」

「왜? 얘기하는 중에」

「그래서. 구미호가. 전우치를. 덮쳤다고?」

「응」

「…………………………」

「왜?」

그때 내가 어떤 표정으로 설하를 되쏘아봤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본 설하만이 알겠지. 경악과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을 비롯한 각종 감정을 섞어서 감정의 수만큼 나눈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네가 찾았다는 그 책, 사실은 위서인 거 아니냐? 그리고 네 교수는 뒤늦게 그걸 알고 쪽팔려서 잠적한 거고」

설하는 다시 엿을 들어 보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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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0년 (서기 1515년)

어느 산 속

「나, 낭자야말로 귀신이요 사람이요」

「네 눈엔 엇뎨 보이느냐」

「자, 잘 모라겠소」

「모라다?」

여자가 깔깔 웃더니 우치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우치는 그에 맞춰 뒷걸음질을 하다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중간에 무언가에 가로막혀 땅바닥에 드러눕지 못하고 그 "무언가"에 기대게 된 형세였다. 무언가가 무엇인가 싶어 좌우를 둘아보니 등 뒤에서 우치를 받쳐주던 것은 웬 무덤이었다. 무덤 한 쪽은 뗏장이 떨어져 나가 있었는데, 그리를 통해 길쭉하고 푸르스름한 무언가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뼈였다.

「으아아아으아아악!」

우치가 혼비백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여자가 그런 우치의 가슴팍을 떠밀어 우치는 도로 무덤 위에 벌렁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귀, 귀, 귀, 귀시, 귀신이다!! 으아악!」

「시끄러」

여자가 우치의 입을 후려쳤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치의 오른손을 붙잡아, 자기 옷섶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바닥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도는 귀신도 본 적이 있느냐?」

우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방금 전까지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이 이제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의 자셕이 뭘 주물떡거려?」

「………」

「몇 살 먹었냐?」

「여, 열일곱이오」

여자가 자기 품 속에 들어온 우치의 오른손을 가만히 둔 채, 자기 오른손으로 우치의 저고리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다 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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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으아아 이 요망한 여우년아 저리 썩 꺼지지 못할까!」

전우치가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다시 털퍽 쓰러졌다.

「으으으으으 이 벼락맞고 염병 오라져 육시랄……, 아파 죽겠네……」

그 망할 년을 처음 만난 날의 꿈을 꾸는 것을 보니, 역시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 팔도의 어떤 의원, 도사를 데려와도 이 상처는 고치지 못하리라. 피는 멎었지만 서서히 속으로 썩어 들어가다가 그 썩은 피가 심장에 닿으면, 그 날에이말로 정말 저승길을 면치 못할 날이 될 것이다. 그 년을 처음 만나 정을 통했던 그 때 삼켰던 호정(狐精)이 아니었다면 서서히 썩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상처를 입은 즉 바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허어. 허어. 이걸 고마워 해야 하나. 니미……. 쿨럭쿨럭」

좀전의 통증으로 보아 걷기는 커녕 일어서기도 아직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도 팔은 다 나아가는 듯 자유로이 음직여 주었다. 머리맡의 소금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들었다. 입가에 갖다대고, 날숨으로 후 하고 불었다. 소금들이 흰나비가 되어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우와」

「누구냐」

인기척에 이은 탄성에 전우치가 문 쪽으로 고개만 돌려 바라보았다. 물동이를 채우러 온 동네 계집아이였다.

「할아버지 도사님이에요?」

「응? 므슴 말이냐 그게」

「소곰으로 나뵈를 맹갈았잖아요!」

「아, 뭐. 이런 거?」

전우치가 소금기가 남아 있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두어 번 문질렀다. 그러자 그 손가락 사이에서 소금 알갱이들이 흰색 꽃잎으로 변해 흘러내렸다.

「더, 도술 더 보여 주세요!」

「내 다리 분질러 진 거 다 낫거들랑 다시 오니라. 그리고 이건 도술이 아냐. 환술(幻術)이란 게지……」

전우치는 그 말을 툭 던진 뒤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다른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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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

말을 잃은 내 반응을 보고, 설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대에 남자가 열일곱 살이면 성인이지 뭐」

「나도 잘 알지. 조선시대에 성인은 16세부터였다는 거. 그런데 별개로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그 전우치가, 우리가 전래동화 같은 데서 보고, 관공서 가면 홍길동하고 같이 있는 그 전우치라고?」

「응」

설하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간에, 그 다음 내용도 이게 아주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데 가히 문화유산으로서 중국의 금병매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됐어. 됐어. 더 듣고 싶지 않다. 일이나 하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방바닥에서 일어나 바지 엉덩이와 재킷 팔꿈치를 털었다. 하지만 설하는 설명충 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 부분의 관능성이 교수님과 내가 주목한 부분 중 하나였다구. 이게 온갖 『전우치전』들의 원본이라면, 다른 판본들은 이 내용들을 오히려 검열해서 잘라냈다는 건데, 우리나라에도 관능적 통속적 소설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서 넘어가는 그 즈음에 벌써 출현했다는 의미가 있기도 하거든. 뭐 그래도 세계 최초의 야설을 넘어 세계 최초의 소설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겐지모노가타리』 앞에선 다들 설설 기어야 하지만」

「야설 일찍 쓴 게 문화선양? 이해가 안 된다 난……」

「중근세의 관능소설은 근대인의 개인의식이 발현했다는 강력한 증거니까. 이탈리아의 데카메론도 그런 작품이고. 그런데 아쉽게도 성적 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전우치가 구미호와 처음 만난 그 부분 뿐이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관계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그냥 언급만 되고 상황 묘사는 안 하고 넘어가지」

「내가 작가였어도 기빨려서 더 못썼을 거 같다」

「아무튼, 그때 전우치와 구미호가 하는 도중에, 구미호가 인간의 정기를 흡수할 때 하는 행동, 즉 여우구슬을 자기 입에서 희생자 입으로 넘겼다가 다시 자기 입으로 넘겨받는 행위를 하는데, 그 도중에 전우치가 그걸 꿀꺽 삼켜버려. 그래서 그게 전우치의 도력의 근원이 되었다는 게 이 판본에서의 줄거리야. 희한한 건, 경판 37장본에서는 전우치가 여우구슬을 삼킨 것과 절에서 술도둑질을 하는 여우를 잡아 여우의 둔갑서를 뜯어낸 이야기가 따로 나오는데, 이 판본에서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거고, 둔갑서 얘기는 나오지도 않지. 또 경판 37장본에서는 전우치가 여우들―구슬을 빼앗긴 여우와 둔갑서를 뜯긴 여우가 동일 여우인지 불분명하니까―을 농락하는 데 반해서 내가 발견한 판본에서는 여우, 보통 여우도 아니고 구미호가 전우치를 눕혀서……」

「오케이 거기까지. 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설하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 그의 떠벌이를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선 도저히 볼 장 다 본 거 같은데, 책 다 도로 꽂아 놓고 가자. 더 할 거 없겠다. 아, 혹시 그 교수 컴퓨터, 우리가 뜯어가도 되냐?」

「어, 글쎄. 학교 비품이니까 아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나가서 박스 하나 구해 와. 라면이나 뭐 그런 식료품 종류 박스가 좋고, 이 컴퓨터 본체 들어갈 만한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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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0년 (서기 1515년)

어느 산 속

여우는 반 나체로 무덤 위에 엎어져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겨울 정도로 오래 살았지만 그동안 이런 황당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정기를 빨기 위해 교접을 하고 서로의 입 속에서 구슬을 굴린 것 까지는 예사 일이지만, 그 도중에 그만 이놈의 새끼가 구슬을 꿀꺽 삼켜버린 것이다. 사람이 여우구슬을 삼켰다는 얘기는 서너 번 들어 보았다만,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또 그 이야기들마다 일어난 일이 생판 다르기에 지금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야, 이놈아」

「무, 무무 무엇이요」

「바지나 줏어 쳐 솝어」

「아, 알겠소」

허둥지둥 바지를 입은 소년이 잽싸게 도망치려 하자 여우가 그보다 더 잽싸게 손을 뻗어 소년의 댕기머리를 낚아챘다.

「아코, 내 목아지야!」

「어델 도망 가? 죽을래?」

「왜 이러쇼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너, 이름이 무어랬냐?」

「우치, 전우치요」

여우가 우치의 댕기머리를 계속 잡은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눈으로 쭉 훑었다. 아무리 꿰뚫어 보아도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한자는?」

「이, 임금 이름 우(禹) 자에 다스릴 치(治) 자요」

「네 아까 무엇을 삼키었는지 아느냐」

「그것이 무엇이요. 내가 그것을 삼킨 것이 죄라면 그 죄를 갚을 만큼 그대에게 두터이 보답하리이다」

「그래? 무엇으로 보답하려고? 그냥 너의 배를 갈라 내 구슬을 찾고 마음을 시원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이고 살콰만 주쇼. 무엇이든 다 할 터이니」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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