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치전』을 찾아서 - 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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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잠―깐, 잠깐잠깐잠깐」

「왜? 얘기하는 중에」

「그래서. 구미호가. 전우치를. 덮쳤다고?」

「응」

「…………………………」

「왜?」

그때 내가 어떤 표정으로 설하를 되쏘아봤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본 설하만이 알겠지. 경악과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을 비롯한 각종 감정을 섞어서 감정의 수만큼 나눈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네가 찾았다는 그 책, 사실은 위서인 거 아니냐? 그리고 네 교수는 뒤늦게 그걸 알고 쪽팔려서 잠적한 거고」

설하는 다시 엿을 들어 보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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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0년 (서기 1515년)

어느 산 속

「나, 낭자야말로 귀신이요 사람이요」

「네 눈엔 엇뎨 보이느냐」

「자, 잘 모라겠소」

「모라다?」

여자가 깔깔 웃더니 우치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우치는 그에 맞춰 뒷걸음질을 하다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중간에 무언가에 가로막혀 땅바닥에 드러눕지 못하고 그 "무언가"에 기대게 된 형세였다. 무언가가 무엇인가 싶어 좌우를 둘아보니 등 뒤에서 우치를 받쳐주던 것은 웬 무덤이었다. 무덤 한 쪽은 뗏장이 떨어져 나가 있었는데, 그리를 통해 길쭉하고 푸르스름한 무언가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뼈였다.

「으아아아으아아악!」

우치가 혼비백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여자가 그런 우치의 가슴팍을 떠밀어 우치는 도로 무덤 위에 벌렁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귀, 귀, 귀, 귀시, 귀신이다!! 으아악!」

「시끄러」

여자가 우치의 입을 후려쳤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치의 오른손을 붙잡아, 자기 옷섶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바닥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도는 귀신도 본 적이 있느냐?」

우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방금 전까지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이 이제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의 자셕이 뭘 주물떡거려?」

「………」

「몇 살 먹었냐?」

「여, 열일곱이오」

여자가 자기 품 속에 들어온 우치의 오른손을 가만히 둔 채, 자기 오른손으로 우치의 저고리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다 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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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으아아 이 요망한 여우년아 저리 썩 꺼지지 못할까!」

전우치가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다시 털퍽 쓰러졌다.

「으으으으으 이 벼락맞고 염병 오라져 육시랄……, 아파 죽겠네……」

그 망할 년을 처음 만난 날의 꿈을 꾸는 것을 보니, 역시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 팔도의 어떤 의원, 도사를 데려와도 이 상처는 고치지 못하리라. 피는 멎었지만 서서히 속으로 썩어 들어가다가 그 썩은 피가 심장에 닿으면, 그 날에이말로 정말 저승길을 면치 못할 날이 될 것이다. 그 년을 처음 만나 정을 통했던 그 때 삼켰던 호정(狐精)이 아니었다면 서서히 썩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상처를 입은 즉 바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허어. 허어. 이걸 고마워 해야 하나. 니미……. 쿨럭쿨럭」

좀전의 통증으로 보아 걷기는 커녕 일어서기도 아직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도 팔은 다 나아가는 듯 자유로이 음직여 주었다. 머리맡의 소금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들었다. 입가에 갖다대고, 날숨으로 후 하고 불었다. 소금들이 흰나비가 되어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우와」

「누구냐」

인기척에 이은 탄성에 전우치가 문 쪽으로 고개만 돌려 바라보았다. 물동이를 채우러 온 동네 계집아이였다.

「할아버지 도사님이에요?」

「응? 므슴 말이냐 그게」

「소곰으로 나뵈를 맹갈았잖아요!」

「아, 뭐. 이런 거?」

전우치가 소금기가 남아 있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두어 번 문질렀다. 그러자 그 손가락 사이에서 소금 알갱이들이 흰색 꽃잎으로 변해 흘러내렸다.

「더, 도술 더 보여 주세요!」

「내 다리 분질러 진 거 다 낫거들랑 다시 오니라. 그리고 이건 도술이 아냐. 환술(幻術)이란 게지……」

전우치는 그 말을 툭 던진 뒤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다른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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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그러니까 이게 고오전소설이란 말이지. 아동 포르노가 아니고」

설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대에 남자가 열일곱 살이면 성인이지 뭐」

「아니 난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그 전우치가 우리가 관공서 가면 홍길동하고 같이 성명 디폴트값으로 사용되는 그 전우치라고?」

「응」

설하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설명한 대로면 그건 정황이 거의 강간 아니냐?」

「전우치가 저항 안했으니까 아님. 아무튼 간에, 그 다음에 구미호가 열일곱 살의 전우치를 여성상위 체위로 범하는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데 가히 문화유산으로서 중국의 금병매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됐어. 됐어. 일이나 하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방바닥에서 일어나 바지 엉덩이와 재킷 팔꿈치를 털었다. 하지만 설하는 설명충 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 부분의 관능성이 교수님과 내가 주목한 부분 중 하나였다구. 이게 온갖 『전우치전』들의 원본이라면, 다른 판본들은 이 내용들을 오히려 검열해서 잘라냈다는 건데, 우리나라에도 관능적 통속적 소설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서 넘어가는 그 즈음에 벌써 출현했다는 의미가 있기도 하거든. 뭐 그래도 세계 최초의 야설을 넘어 세계 최초의 소설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겐지모노가타리』 앞에선 다들 설설 기어야 하지만」

「야설 일찍 쓴 게 문화선양이냐. 이해가 안 된다 난……」

「성적 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전우치가 구미호와 처음 만난 그 부분 뿐이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관계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그냥 언급만 되고 상황 묘사는 안 하고 넘어가지」

「내가 작가였어도 기빨려서 더 못썼을 거 같다」

「아무튼, 그때 전우치와 구미호가 하는 도중에, 구미호가 인간의 정기를 흡수할 때 하는 행동, 즉 여우구슬을 자기 입에서 희생자 입으로 넘겼다가 다시 자기 입으로 넘겨받는 행위를 하는데, 그 도중에 전우치가 그걸 꿀꺽 삼켜버려. 그래서 그게 전우치의 도력의 근원이 되었다는 게 이 판본에서의 줄거리야. 희한한 건, 경판 37장본에서는 전우치가 여우구슬을 삼킨 것과 절에서 술도둑질을 하는 여우를 잡아 여우의 둔갑서를 뜯어낸 이야기가 따로 나오는데, 이 판본에서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거고, 둔갑서 얘기는 나오지도 않지. 또 경판 37장본에서는 전우치가 여우들―구슬을 빼앗긴 여우와 둔갑서를 뜯긴 여우가 동일 여우인지 불분명하니까―을 농락하는 데 반해서 내가 발견한 판본에서는 여우, 보통 여우도 아니고 구미호가 전우치를 눕혀서 기승위로 강ㄱ……」

「오케이 거기까지. 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설하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 그의 떠벌이를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선 도저히 볼 장 다 본 거 같은데, 책 다 도로 꽂아 놓고 가자. 더 할 거 없겠다. 아, 혹시 그 교수 컴퓨터, 우리가 뜯어가도 되냐?」

「어, 글쎄. 학교 비품이니까 아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나가서 박스 하나 구해 와. 라면이나 뭐 그런 식료품 종류 박스가 좋고, 이 컴퓨터 본체 들어갈 만한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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