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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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9년 (서기 1530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오랜만일세, 전군」

「이천년 선생」

3년만에 만나는 이천년의 모습에 전우치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천년이 반가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의 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차오른 눈물이었다.

「자당께서 돌아가셨네」

「……」

전우치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은 더 나오지 않았다. 이천년이 책을 건넸다.

「하권일세. 이제 더 이상 매여 있을 바 없으니, 속히 그 요물의 곁에서 몸을 빼내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오는 그믐날에 여기 마포나루로 오시게」

「이 불효를 어찌해야 좋겠소」

「이리 된 이상 의협의 길을 걷는 것만이 죄를 씻는 길이 아니겠나?」

이천년이 품속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기회를 보아 요물에게 이것을 먹이게」

「이것이 무엇이오?」

「포도 말린 것일세. 임금도 함부로 못 먹는 귀한 것인데, 구하느라 혼났네. 사람에게는 탈 없고 여우에게만 독이라네. 독이 퍼지거든 요물이 토사곽란을 일으키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테니, 그 틈을 타 내빼시게」

「죽이지 않구요?」

「구미호를 이런 것으로 죽일 성 싶은가. 허투루 죽이려다 도리어 제압당할 수 있음이라. 여우를 죽이는 것보다 자네 목숨 지키는 것을 먼저 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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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방랑자의 도서관

「……」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팔은 어느새 해방되어 있었고, 입에 재갈도 풀려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정신이 들어?」

「고생하셨습니다」

순서대로 모리안과 희지의 목소리였다. 뭐라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그대로 고개를 의자 등받이에 젖힌 채 늘어졌다. 하지만 희지의 다음 말에, 그나마 있는 힘을 다 끌어내서 소리를 질렀다.

「뱀의 손 대한민국 지부에 어서 오십시오. 우사 전우치의 따니……」

「야, 이 니미씨발놈년들아! 말로 좀 먼저 하면 어디 덧나냐! 뒤지는 줄 알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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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9년 (서기 1530년)

경기도 과천현 남태령

「이 새끼……. 쥐새끼같은……. 무슨 짓을……」

전우치가 바지춤을 추스르며 바닥을 기어 허겁지겁 여우에게서 멀어졌다. 여우는 가슴팍을 붙잡고 방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무리 기회를 살펴도 여우가 먹는 고기에 건포도를 섞어넣을 틈은 없었다. 이천년과 약속한 그믐날은 다가오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선택한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혀 밑에 건포도들을 숨겨놓고 있다가 교접 도중 입으로 넘겨 먹이는 것.

「전우치……. 이 갸이새끼야아!」

당연히 이변을 눈치챈 여우는 교접하던 자세 그대로 전우치를 붙잡고 늘어졌다. 목이 졸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여우의 젖가슴을 무릎으로 걷어차 벗어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방 한구석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이 난리판에 잠이 깨서 눈을 부볐다. 배와 가슴을 붙잡고 뒹구는 어미를 본 아이가 달려가 엄마 왜 그러냐고, 괜찮냐고 조막만한 손으로 어미를 흔들었다. 여우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둘러 후려쳤다. 아이가 뒤로 넘어졌다.

「죽여 버린다……. 내가 분명히 그랬지……. 네 가족, 친지 다 죽여버리겠다고……. 네가 지금 그대로 도망치면……, 송도에서 남양 전씨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

여우의 붉은 홍채 주위의 흰자위에 벌겋게 핏발이 서서, 눈 전체가 시뻘건 핏빛으로 보였다. 입에서 침과 피를 흘리면서 악다구니를 하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죽을 상이었지만, 방금 전 여우의 손아귀 힘을 목으로 맛본 전우치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거친 숨을 내쉬던 전우치가 아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냈다.

불타는 귀틀집을 뒤로 한 채, 전우치는 아이를 안고 북쪽으로 마구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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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방랑자의 도서관

희지가 내 얼굴과 목의 땀을 닦아 주었다. 제지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담배 좀 피워도 되냐?」

「여긴 도서관입니다」

희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조까라 그래. 시팔, 사람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놨으면 담배 한 대쯤 피게 해 줘야지. 어이, 마스크 덩치. 내 코트 주머니에 물부리하고 지포 있을 거야. 갖고 와」

마스크남이 고분고분 흡연도구들을 건네 주었다. 나는 아직도 골이 나서 쏘아붙였다.

「뭐, 임마? 니가 붙여」

마스크남이 궐련을 끼운 물부리를 내 입에 물려 주고 지포를 켜 궐련 끝에 불을 갖다댔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담배를 다섯 번 거푸 뻑뻑 빨아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궁금하신 게 참 많으실 것 같은데요,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니들 뭐야? 니들이 뱀의 손이라고? 그리고 여긴 또 어딘데?」

「우선, 네. 저희는 뱀의 손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함께 한국에 뱀의 손을 세우시고, 의열단을 도우셨죠?」

「어, 그래. 그때 생각 나네. 그땐 일본놈들하고 싸웠다만 지금 네들은 뭐 하냐?」

「우리 같은 이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가두어 통제하거나 죽여 없애려는 무리들이 현재 초상세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데, 그들과 항쟁하고 우리의 동류를 찾아 보호하고 포섭하는 일을 하지요」

「시팔, 무슨 엑스멘이냐?」

「농담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 의열단과 함께 이자메아를 상대한 경험이 있으시니, 보통의 세계에는 숨겨여 있는 뒷세계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당신께서……, 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그냥 호야라고 불러. 지금 쓰는 이름은 그거니까. 그래서 저 서양인 친구도 뱀의 손 소속인 건가?」

「모리안 너 헤런(Morríghan na hÉireann)이라고 해. 안녕안녕?」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모리안이 손을 흔들며 과장스럽게 인사했다.

「그리고 방랑자의 도서관이라는 건, 여러 시공간, 여러 우주들에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도서관입니다. 마술, 도술, 초능력, 무엇이라고 부르건, 그런 것에 관한 지식들이 가득하지요. 그리고 이건 아까 들어오면서 모리안이 간단하게 설명했던 거기도 한데,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방랑자의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들 중 하나 주변에 저희가 만들어낸 공간입니다. 한국 뱀의 손의 베이스캠프로 사용하고 있죠. 도서관을 파괴자들에게서 지키는 것 또한 뱀의 손의 주요 임무니까요」

「그래, 네들이 누군지 대충 이제 알겠다. 좋은 일 하네. 그런데, 난 왜 데려온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와 다시 함께해 주세요」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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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9년 (서기 1530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왔는가. 어서 배에 오르게. 경창에 세곡을 내려놓고 전라도 나주로 돌아가는 조운선일세」

이천년의 안내를 받아 전우치가 배에 오르려는 순간, 이천년이 전우치를 붙잡았다.

「자네 품에 그건 무엇인가?」

「……내 딸이오」

「그 요물의 자식인가! 데리고 살아 어찌 하려고! 이리 내게!」

「……」

「후환을 남겨 어쩌자는 겐가. 자네 손으로 그 숨통 끊을 수 있겠나. 할 수 없다면 이리 건네게」

「이보오, 배 떠나오. 안 타시겠소?」

「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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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방랑자의 도서관

내가 즉답을 해 버리자 희지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어째서 거절하시는 건가요?」

「야, 내가 지하도사들하고 연 끊은 게 이백……, 보자, 이백하고 스무한 해 전이야. 1795년 을묘년 때였으니까. 일제시대에는 의열단 애들이 나하고 지하도사들을 각각 알았던 거지, 그때도 행동은 같이 했지만 일 끝나자마자 도로 헤어졌어. 싫은 기억이 나니까」

「을묘화변 때 끔찍한 일을 겪으셨던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희지의 얼굴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결국 나는 또 없는 기력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긴 뭘 알아! 니들이 열흘 밤낮으로 고문을 당해 봤냐, 눈알이 터져나가 봤냐? 연암 선생 아니었으면 난 그때 죽었어!」

담배가 다 타들어갔다. 물부리에서 꽁초를 빼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새 개피를 끼웠다. 고개를 까딱이자 마스크남이 불을 붙여 주었다.

「그 뒤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냐? 사람들을 홀려서 가짜 신원을 만들어내고, 세상이 바뀔 때마다 주민번호, 전화번호 같은 것들도 모두 그렇게 가짜로 만들어내고. 한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짓을 반복했어. 그래서 나는 호적상으로 내 자신의 어머니이자 딸이자 할머니이자 손녀지」

「그런데 기억은 왜 그 모양이었던 거야? 정신조작계 능력자라고 얘기는 들었는데, 우리 추측이 맞다면 혹시 스스로……」

모리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그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맞아. 매번 신분세탁을 할 때마다 마지막으로 내 자신을 홀려서 기억을 봉인, 또는 조작했지. 난 스스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인간으로서 나를 나타내는 모든 정보가 가짜라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사실을 잊고 싶었지. 그리고 매 신원 때마다 잊고 싶은 기억들도 워낙에 많이 생겨서 말야」

「과연, 그래서 수십 년간 전혀 발견조차 되지 않았구만. 한 20년 전에 내가 한국에 왔을 때부터 이미 애들이 최우선 목표가 널 찾는 거였는데, 당사자 멘탈이 이래서야 찾을 수 있을 턱이 있나」

「아무튼 초상세계가 어쩌니 그런 거, 난 이제 관심 없어. 지지던지 볶던지 네들 알아서들 하고, 난 그만 집에나 보내 줘」

「죄송하지만, 저희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호야님의 존재가 저쪽, 옥리들에게 알려졌고, 무엇보다 『전우치전』 최고본도 저쪽에 넘어가 있으니까요. 호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저희와 함께 행동하셔야 합니다」

「아, 맞다. 『전우치전』 최고본! 그게 왜? 그냥 소설 아냐?」

「사실에 가장 가까운 판본의 소설이니까 그렇지요. 호야님 당신의 부친과…… 모친이 만난 경위, 부친께서 돌아가신 경위, 그리고 무엇보다 호야님 당신의 탄생이 적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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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네가……. 네가 내 딸이라고?」

「네, 아버님」

여자의 눈이 슬쩍 여우 같은 세로동공으로 변했다가 사람 눈으로 되돌아갔다. 그 눈이 슬픈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어떻게?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황망해하는 전우치에게 황진이가 대답했다.

「지난 임진년, 우사가 범궐하여 난리를 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허암 션생이 화담 션생께 찾아와 이 아일 맡기셨소. 화담 션생께서 내게 다시 맡기어 우리 기방에서 지냈다오」

「내가 허암 션생을 뵙고 사사한 것이 그때였는데, 그게 그때였는가보구료!」

이지함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감탄했다. 그러자 차식이 의문을 표했다.

「아니, 헌데 그 때면 30년도 더 전인데 이 처자는 아무리 봐도 스물을 갓 넘겨 보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전우치는 눈앞의 딸의 손을 잡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내 이 죄를 다 어찌 갚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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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방랑자의 도서관

「……」

담배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벌써 다섯 개피째 줄담배였다. 희지와 마스크 덩치는 방에서 나갔고, 모리안과 나만 남았다. 모리안은 의자에 늘어져 있는 내 양 옆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무얼 그렇게 볼 것이 많은지 여기저길 뜯어보았다.

「야, 그래서 이 얼굴이 지금 500살 먹은 할머니 얼굴이라 이 말이지?」

「499살이다. 만으로」

「너희 한국인들은 태아 기간까지 나이로 쳐서 태어나는 순간 한 살이라며?」

「나는 태아 기간이 3개월이었으니 그렇게 쳐도 아직 500살 아니야, 임마」

「그렇게 오래 사는 건 어떤 느낌이야?」

「사돈 남 말 하네. 너도 보통 사람 아니잖아. 거 변신하는 거 말고. 수명이」

「어떻게 알았어?」

「느껴지는 게 있지. 알잖아?」

모리안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 울음소리 같아 듣기에 거슬렸다. 내 어깨를 잡고 섰던 그가 검은 연기―처럼 보이는 무엇―에 휩싸이더니 전신이 새까만 검은 고양이로 변해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우리랑 함께 안 할 거야?」

「모르겠다……. 모르겠어……」

「뭐, 쟤네들은 네가 자기네 초대 대빵 딸이라고 어떻게든 재영입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난 그런 건 몰라. 애초에 내가 여기 온 건 스무 해도 안 되었고. 그래도 난 네가 우리하고 같이 갔으면 좋겠어」

「왜?」

「그냥 네가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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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 ? ?

「네. 그렇습니다. 기억조작 능력을 가진 인간형 SCP가 새로 발견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네. 대응반 투입을 요청합니다. 요원들은 관악 경찰과 공조해서 대상에 대한 수배를 돌리겠습니다」

〔…… …… …… ……〕

「물론입니다. 알아냈습니다. 자백제 사용해서요. 대상이 단순 기억소거 대상 민간인이 아닌 잠재적 SCP로 판단되었기에 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대상의 자택 주소는 관악구 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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