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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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베이스의 맨 위에는 늘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도, 죽일 수 없는 파충류도, 흑사병 의사도 아니었다. 간혹 RAISA의 공지가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첫 번째'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늘 재단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다른 문서들과 같은 크기의 붉은 글자로 일련번호가 적혀 있지만, 그것만은 유난히 붉은 글자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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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SCP-001이었다. SCP-001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 실질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꽁꽁 기밀로 숨겨진 만큼 무슨 장소라는 둥, 괴물이라는 둥, 아니면 그 자체라는 둥 뜬소문만 가득했다. 물론 말단 직원에게는 애초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저 누군가는 이 비밀을 알고 있으려니, 하고 업무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게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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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할 때부터 많은 잔소리와 지시를 받아 왔지만, 정작 SCP-001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가 한꺼번에 의도적으로 망각한 무언가처럼,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찍힐까 봐 질문하지도 못했다. 과연 뭐가 있길래 저리 감추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저들만의 비밀 속에서 내가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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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SCP-001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재단에 회의감이 들어서 일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최고 기밀문서에 접근하려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도 자살을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 001의 정체를 아는 데 성공한다 해도 죽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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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마지막으로 남아 야근하며 그날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려면 보안 인가를 입력해야 했다. 길고 긴 보안 인증 절차를 거칠 것을 생각하니 피로했다. 그런데, 로그인이 되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금이 모두 열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군가 기기를 해킹한 것일까? 아니야, 재단의 보안이 얼마나 튼튼한데… 그러면…?

그때 작은 나방 친구를 발견한 것이다. 손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나방이 본체에 붙어 있었다. 그것도 밝게 빛나며 말이다. 그 빛에 홀린 듯이 펜을 이용해 나방을 조심스레 본체에서 떼어낸 다음 유리병에 담았다. 그 순간 모든 기기에서 로그아웃되었다. 그 기묘한 나방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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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뒤, 나방을 재단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험할지도 몰랐다. 본 것 외에 또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방이 지닌 변칙성은 명확해 보였다. 닿은 기기의 보안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그 전에 무언가를 해 보기는 해야지.

노트북을 열고 자주 방문한 커뮤니티의 주소를 쳤다. 나방을 꺼내서, 노트북의 자판 옆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나방은 날개를 천천히 움직일 뿐 날아가지 않았다. 그날, 운영자 권한을 갖고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다양한 비공개 댓글과 게시글들을 읽었다. 늘 궁금했던 것들을 읽으니 정작 기분이 이상했다. 중간중간 가끔 살펴보아도, 나방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심스레 병에 담자, 다시 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순간, 어떠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가슴이 서늘해지고 심장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방, 나방이 있으면, 보안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SCP-001도 가능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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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에서부터 희미하게 푸른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방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밤새도록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방은 아직도 따뜻했다.

마치 촛불처럼.

그러나 다시 유리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만큼 용감하지 않아.

문을 닫고, 집을 나왔다. 새벽 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옷 소매를 목 중간까지 여미고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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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춤추던 삶이여.

[데이터 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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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비상하는 그대여.

[데이터 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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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자판 위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곧 올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았다. 너무 두려워 두 다리가 마구 떨렸다.

다 내 탓이야

그러나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나아가야만 한다. 손이 흔들렸다. 나아갈 곳도, 후퇴할 곳도 없었다. 난 혼자였다. 후회감이 밀려들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청하게 001이나 쫓아서 여기까지 온 내 탓이라고.

귀에는 보안 위반 발생의 원인을 찾아 들이닥칠 인원들의 둔탁한 발소리 환청이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따스한 빛이 내려왔다.

나방…하지만 어떻게…?

나방은 살포시 기기의 본체에 앉았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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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닦아냈다.

그래…내려보자.

여전히 손이 떨렸지만,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스크롤을 재빨리 내려 그것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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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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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꿈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이게 살해 인자구나..

나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묘하게 꼬여서 말려 있는 형체를 바라보았다. 주황빛이 화면에서 아른거렸다… 나방…나방 덕분에 멀쩡함에도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어렸을 때 봤던…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래 나열된 문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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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온몸이 마비된 것마냥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눈만이 살아서 바쁘게 글자들을 좇았다. 재단의 기원, 역사, 설립, 존재 이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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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 탁 풀렸다.

이제 안다.

왜 세상은 기괴한 변칙적 개체들로 넘쳐나는지,
왜 누군가는 음지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왜 재단은 이것들을 확보하고, 격리하고, 보호해야 하는지…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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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방은 아직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멀리서 쿵쾅대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날 찾으러 온 거야…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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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줄기 빛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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