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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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들뜬 기동특무부대 감마-01("토끼굴 속으로") 대원들 사이에서 혼자 긴장하고 있었다.

SCP-522-KO는 노트북 속에서 플러그소프트 신작 FPS 게임의 우회 침입로를 파고 있었고, 쌍둥이인 라피스와 라즐리는 노트북 앞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드디어 제대로된 총싸움이라며 게임용으로 개조된 본인들 총기를 손질했다.

오직 레이나만이 예외였다.

연구원으로 시작해서 기동특무부대 지휘관이 된 지금까지 플러그소프트의 꽁무니라곤 저 토끼가 다였다. 그 후로는 늘상 놓치거나 누가 죽거나 사라지거나의 연속이었기에 임무의 부담감도 늘어갔다.

대원들은 늘 괜찮다고 했지만 레이나는 괜찮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 속의 적을 현실로 끌어와 잡으려는건, 마치 '반지의 제왕'에 총알을 난사하는 기분이었다.오직 우리만 지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끌고가야한다는 지휘관의 의무감이 레이나의 심장에 자물쇠를 걸어 진동했다.

"출발까지 30초 전!"

토끼가 이렇게 말하며 노트북에서 나와 레이나 어깨에 장착된 스마트폰에 들어갔다.

이번엔 완전 새로운 장르였다. 더 유리하거나, 불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나의 막연한 불안감도 해소되거나 더 심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플러그소프트 제1서버장 서리는 경고음이 울리자 노곤한 눈을 떴다. 직원들이 부르고 있었지만 이어폰을 빼고 있어서 안들렸고, 대신 모니터 구석에 <해킹 유저 침입!> 이라는 경고문이 보였다.

여전히 이어폰을 벗어둔 채 서리는 경고문을 클릭해 해킹 유저의 상판을 보았다. 이질적인 그래픽 속에서 낯익은 마크가 보였다.

'또 쟤네야?'

서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당당하게 운영자를 찾아 달려드는 인간들을 바라봤다. 참 장르가 달라져도 정석대로 재미없이 오는구나 싶었다.

굳이 제압해야하나 싶지만, 직원들이랑 관리자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게 더 컸으므로 일단 진압하기로 했다.

순간 정석대로 오는 인간들에게 굳이 정석대로 진압해야될까란 생각이 서리에게 들었다. 그리곤 서리의 프로그래머적 광기가 위험한 생각을 해내고야 말았다.

서리는 침입자 전원을 지정하고 제2차세계대전 참호전처럼 꾸며둔 전장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가장 불만이 많았었던 직원 몇 명도 침입자의 상대편으로 지정해 이동시켰다.

서리는 그제야 이어폰을 끼고, 작업용으로 입는 암워머를 꼈다. 그리고 30분 내로 끝내주겠단 생각으로 전두지휘를 시작했다.


30분 후..

“의무병!”

“FPS는 우리가 더 유리할 거라 한 사람 누구야!”

“토깽이! 붕대가 다 떨어졌어!”

“그러게 처음부터 넉넉히 챙겨오자 했죠!”

“후퇴한다! 후퇴!”

“30초 내로 귀환 터널을 열겠습니다!”

“낙오자는 30초 내로 챙긴다. 25초 전!”

“두 명 비는데?”

“쌍둥이가 아직 안왔어.”

“10초전!”

“저기 온다.”

“야 뛰어!”

“5초 전!”

“잡았어! 내가 잡았어!”

“잠ㄲ…”

팟.


“A-7 구역에 화력 증강 필요.”

“확인. 전투용 AI를 배치 중이야. 가면서 무기 업그레이드 뚫었으니까 하고 가고.”

“캡틴, 근데 아까부터 저랑 같은 사람 뛰어다니던데 이거 버그에요?”

“아 그거? 내가 네들 리스폰 할 때 두 명씩 리스폰하게 해서 그래.”

“뭐요 시벌?”

“홀로그램 아녔어요?”

“아니 잠깐만요, 이거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고?”

“야 쟤네 간다, 가.”

“말 돌리지 말고요!”

“괜찮아, 괜찮아. 다른 서버가 요즘 인력난이니까 오히려 잘됐지 뭐.”

“우리 중 누가 가는데요.”

“싸워서 진 놈.”

“캡틴!!!!”


회색빛 방 안에 놓인 노트북에서 갑자기 총천연색의 빛깔이 뿜어져 나왔다. 불안정하게 치직거리던 빛은 천장을 비추었고, 그 타원형 반짝임 속에서 한 무리의 무장을 한 사람들이 튕겨져 나왔다. 지친 표정과 당황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방안 여기저기에 흩뿌려지듯이 떨어졌고, 개중은 노트북 위로 수직낙하했다. 그러자 책상에서 비껴 떨어진 레이나의 어깨에 붙은 스마트폰에서 토끼가 튀어나와 슬픈 몸짓으로 노트북을 어루만졌다.

토끼가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동안, 레이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누가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30초 전에 쌍둥이가 없었다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이제 한 명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라피스! 라즐리!”

본인의 호출명을 듣고 책상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들고 헬멧을 벗었다. 표정은 아직도 노트북을 어루만지는 토끼와 비슷했다.

“저 여깄습니다. 레이나.”

레이나는 토끼 너머의 쌍둥이 중 한 명을 보았다. 분명 함께 훈련하고, 함께 작전을 뛰었지만, 작전이 실패한 뒤의 혼란 속에서는 둘을 구분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럴 의지도 없었다.

“라즐리, 라피스는?”

라즐리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본인이 20년이 넘게 겪었던 오해임을 알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라피스입니다. 라즐리는…”

라즐리 라피스는 책상 밑에 있던 팔을 가슴 위로 꺼냈다. 왼팔에 악수하듯이 다른 왼팔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몸통과 이어지지 못한 채 새빨간 선혈을 바닥에 흘리고 있었다.

레이나의 표정도 라피스와 비슷해졌다. 서서히 정신이 든 대원들도 회색빛 방에서 유난히 눈에 띠는 붉은 빛을 보고 똑같아졌다. 작전에 시작할 때와 같은 팽팽한 침묵 속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방안을 일렬로 지나갔다.


꿍얼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져 서리는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몸을 뒤로 젖혔다. 게이밍 체어의 푹신거리는 솜의 감촉과 빳빳한 가죽의 질감이 등을 감쌌다. 기지개를 한 번 피고 그 반동으로 전투 전에 미리 타놨던 코코아을 쥐어 홀짝였다. 이미 다 식었지만 승리감을 조미료로 뿌리니 나름 괜찮았다.

예전부터 시작된 길고긴 싸움이 이제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정지됐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버그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저들은 언젠간 돌아올 것이었다.

늘 올 때마다 귀찮긴 했지만, 이번처럼 맥없이 끝나면 서리로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인원 관리와 게임 관리만 하는 일에 권태감이 저들 덕분에 풀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감정이, 저들이 들어왔을 때의 감정과 같았기에 지금보다 권태감이 더 빨리 돌아왔으리란 예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안쓰러운 얘기였다. 다음번엔 인간 복사보다 더한 짓을 해서 둘 다 박살내버릴 수 있으니까.

서리는 고개를 돌려서 벽 한 가운데에 설치된 창문모양 디스플레이를 바라봤다. 일종의 밀실 공간인 사무실에서 기분 전환용으로 준비해둔 장치였다. 서리는 가끔씩 저 창문을 진짜로 열고 몸을 던져버릴까란 생각을 한다. 쾌락의 역치를 맛본 인간에게 어울리는 마무리를 맞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비워버리려는 순간, 이어폰을 통해 성토가 터져나왔다. 복제된 인간들이 자기들을 책임지라면서 모니터 속에서 소리 질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리는 새로운 상황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손은 매우 사무적으로 움직이면서 성과에 따라 직원들을 걸러내어 선택했다.

'귀하가 이 서버에서의 헌신들을 높이 평가하며, 새로운 서버로 이동한 후에도 플러그소프트의 앞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플러그소프트 제1서버장 서리 주Surrey County,'

서리는 마지막으로 ‘다른 서버로 보내기’를 눌렀다. 설정은 진작 랜덤으로 보내기로 해뒀다.

이어폰에서 날아오던 성토가 절반으로 줄었다가 남은 목소리가 두 배로 커지자 서리는 아예 불륨을 줄여버렸다. 이대로 다시 의자에 몸을 묻어 눈을 감아버릴까란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딱히 다른 할 일이 생각 안 나서 그러기로 했다.


“대장, 저희 얘기 좀 해요.”

스치듯 지나가는 레이나를 향해 라피스가 소리쳤다. 레이나는 들은 척도 안하고 길을 꺾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라피스는 짜증과 염려가 섞인 한숨을 쉬었다. 라즐리는 공식적으론 실종 상태였지만, 구할 방법이 보이지가 않으니 사실상 사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면서도 쌍둥이 남매보다 더 크게 상심했다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쫓아가서 잡아야지 뭐하는 겁니까.”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에 들어간 SCP-522-KO가 말했다. 그 특유의 꿍얼거리는 소리에 라피스의 한숨에는 이제 한탄이 섞였다.

“정말 방법이 있는 거지?”

“절 못 믿다니, 실망이에요.”

“끄응.”

라피스는 레이나를 향해 달려갔다. 부디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게 정말이야?”

레이나가 스마트폰 속에 팔짱 낀 토끼에게 물었다. 토끼는 또 자기 말이 재확인되자 기분이 나빠져 귀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넵. 이번에 베타테스트용으로 지정된 부지가 확인됐어요. 사람이 많이 안 보이는 걸 보면 싱글 플레이 게임 같고, CBT라던가 그런 얘기도 없었으니까 아마 회사 내부인들만 이용할 수 있을 거고요. 물론 제 힘을 이용하면 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나 혼자 가야한다.”

“아무래도 싱글 게임이니까요. 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그 쪽에서도 혼자 올 테니까요. 설마 얼굴이 허옇게 뜬 프로그래머 하나 못 이기는 건 아니죠?”

“혹시 모르잖아. 나도 예전엔 연구원이었어.”

“지금은 부대 하나 이끌고 있으면서 엄살도 심하셔.”

"그렇다고 나 혼자 가도 안전하다는 게 증명되진 않아."

“아 거참 말도 많으시네. 혹시 모른다는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여기에 라즐리 씨가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바로 임무 끝인데, 어떻게 할 거예요?”

레이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의 토끼를 바라봤다. 머리로는 게임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생각했다. 그들을 생각할수록 무력감과 공포와 분노에 레이나의 주먹이 떨렸다. 그렇기에 토끼의 제안은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웠다.

결국 질문은 이거였다. 리더로서, 팀원을 위해 어디까지 도박을 던질 수 있는가?

레이나는 라피스를 바라봤다. 라즐리와 똑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매를 상실을 겨우 버티고 있는, 동시에 토끼 앞에서 어딘가 희망을 얻은 눈에 레이나는 속이 아렸다.

“가자.”

저걸 베팅액으로 아득바득 걸어봐야지. 그렇게 레이나가 결심을 굳혔다.


서리는 평소대로 코코아를 마시며 키보드와 함께 회사를 굴리고 있었다. 오늘도 뛰어내리고 싶은 창문과 짜야하는 코드 사이에서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이 있던 벽에서 노이즈가 일어났다. 서리는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마저도 귀찮은 것처럼 지지직거리는 벽을 쳐다봤다. 서리의 반응과는 별개로, 노이즈의 중앙에서 원기둥 모양이 툭 튀어나오더니 곧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그 유사 사람은 곧 색깔도 생기면서 활동적인 옛날 의복을 입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이 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오지 좀 말아줄래요? 인신 공양이라도 해야 할 거 같잖아요.”

“미중년 간지가 나잖아.”

“전 미중년보단 꽃청년이 좋거든요. 다른 서버장한테 가서 그러던가 해요.”

“솔직히 네 반응이 제일 재밌어서.”

“나빴어, 정말.”

그러면서도 서리는 관리자에게 코코아 하나를 타주었다. 관리자는 잠시 그 달콤한 맛을 음미하다가 평소 성격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게임 하나 더 만들었다.”

“아니 씨, 저희도 만들 시간 좀 줘요. 안 지쳐요? 사실 당신이 프로그램 아니야?”

“내가 베타 테스트는 시켜주잖아.”

“잘못하면 목숨도 날아갈 만한 게임 만들면서, 그걸 특권이라고 말해요?”

“손님 모가지보단 우리 모가지가 날아가는 게 낫잖아. 그래서 자기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로만 모아놨고.”

관리자가 코코아를 깊게 한 잔 들이마신 다음에 앞을 보자, 서리는 이미 저 구석에 가서 부스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하냐?”

“짐 싸는데요.”

“안 갈 듯이 얘기하더니?”

“심심해 죽겠는데 마침 잘 된 거죠. 불만은 많지만.”

“그렇게 많이 챙길 필요는 없어. 짧은 힐링 게임이야.”

서리의 몸과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포 게임이어도 모자란 판에 힐링 게임이라고?

"뭐. 왜. 뭐."

서리는 자기 표정이 관리자를 묻어버릴까란 표정임을 알았지만, 표정을 푸는 대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관리자는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달래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돌아가서 워프 시켜줄게 간단하게 차려입고 있어."

악랄한 가주가 연기처럼 사라지자, 서리는 며칠 전에 자기가 보내버린 직원들처럼 꿍얼거렸다.


레이나는 자기가 고요한 숲길의 입구에 서있다는 걸 알았다. 총소리도 없고, 어떤 모험도 없고, 어떤 소리도 없는 숲 속이었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위화감이 들어 어깨에 달린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아, 아, 아, 아파요. 왜요, 왜!”

“너 나한테 뭐 말 안한 거 있지.”

“그것만 말 안했겠어요?”

“빠짐없이 말해봐.”

“당신 지난번 임무 이후로 얼마나 침울하게 있었는지 알아요? 그 상황에서 다른 임무를 보낼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습니까, 잠깐 속임수 좀 썼죠.”

“그러니까 베타 테스트는 없고, 그냥 너랑 등산하려고 보냈다는 거야?”

“사람을 낚으려면 어느 정도 진실은 있어야 하죠. 여기가 베타 테스트는 맞고, 플러그소프트 간부가 올만한 곳도 맞아요. 하지만 여긴 누구랑 싸우는 게임이 아니에요. 여긴 힐링 게임이죠.”

힐링 게임이라는 말에 레이나는 맥이 풀려버렸다. 사람 잡아가는 악랄한 것들이 힐링 게임까지 테스트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누군가를 찾거나 잡아 족칠 기회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게 부하들 의도도 아닌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보고 힐링이나 하라는 거구나.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돌아가면 그 당당함부터 개조해주마.”

레이나가 으르렁거리면서 숲길에 발을 들였다. 토끼는 귀찮아서 정론적인 변명만 했다.


서리는 고즈넉한 숲길의 입구를 바라봤다. 한 손에는 게임의 간단한 정보가 적힌 팜플렛이 있었다.

“왜 평범한 직원을 안 쓰나 했더니, 생각보다 위험한 물건을 만들었네요. 생각에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건 꽤 있는데, 기억을 본격적으로 싹 뒤져놓는다니.”

“그러니까 내가 널 불렀지. 머리 어지럽거나 그런 건 없어?”

서리 귀에 낀 이어팟 너머로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없어요. 전보단 훨씬 잘 만들었네요. 근데 이거 잘못하면 위험한데 어떻게 이게 힐링 게임에요?”

“이건 자기 기억을 찾는 여정이니까. 자연 안에서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느끼고, 과거의 모습을 투사함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보는 거지. 잊고 살았던 걸 되돌아보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걸 바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심오한 게임이야.”

“아 뭐 그건 그렇다 치고요. 근데…”

서리는 손에 쥔 팜플렛을 지난 5분간 그랬듯이 다시 펄럭거렸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닌지 앞 페이지를 또 봤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팜플렛에서 눈을 뗀 서리는 숲길 앞쪽에 안내인처럼 관리자가 있는 것처럼 입구를 보고 말했다.

“근데 왜 하필 물고기에요?”


숲 속은 햇살이 비쳐 들어왔지만, 전체적으로 그늘이 져 있었다. 하지만 분명 초록빛이 산뜻하게 채워주기는 해도, 근원모를 섬뜩함과 우중충함을 담은 습기가 목을 싸고돌았다. 레이나는 어제 비가 와서 그런가보다 했다.

“이상하네요. 일반적인 숲보다 습기가 더 높아요. 이거 게임을 잘못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방에서 게임하자고 할 걸.”

평소대로라면 스마트폰을 한 대 쥐어박았을 거다. 하지만 언제나 있었던 실전이라는 긴장감, 공포 게임이 좋아하는 혼자라는 환경, 그리고 지난번의 실패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대신 레이나는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켜 토끼에게 반응할 정신마저도 주변을 파악하는데 쓰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발소리를 죽였다. 나무뿌리를 밟는 투박한 소리에도 바로 주변을 돌아보며 허리춤에 찬 3단봉으로 손을 가져갔다. 피부 하나하나에 습기가 부딪치면서 숨쉬기 힘들다는 기분이 들었다. 동물이 된 것처럼, 피부로 호흡하는 양서류가 된 것처럼, 레이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무언가가 레이나의 본능을 건드렸다. 이번에는 나무뿌리 같은 사소한 게 아니라, 실제적인 일렁임이었다. 습기로 고인 공기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면서 대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레이나는 삼단봉을 빼들고 본능에 따라 몸을 돌렸다. 삼단봉 주위로 공기가 회오리치는 게 순간적으로 보였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순간이 지나자, 불쑥 공기가 갈라지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레이나는 놀라 고개를 뒤로 흠칫 뺐다. 그러자 초점이 맞으면서 그 존재가 제대로 보였다.

열대어가 크기에 걸맞지 않게 고고히 헤엄쳤다.

레이나는 눈만 끔벅거렸다. 허무함에 순간의 놀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으로 하기도 뭣한 숨을 뱉었을 때, 열대어가 레이나를 향해 다가왔다.

열대어가 레이나의 미간에 푹 꽂혔다. 레이나는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기다린건 딱딱한 흙이 아니라 부드럽게 감싸는 심연이었다.


레이나는 형광등의 인공적인 불빛 아래 눈을 떴다.

주변에는나무 대신 콘크리트 기둥이 서있었고, 몸을 덮었던 습기는 에어컨 바람에 지워졌다. 눈앞에는 머리로 파고들던 열대어 대신 유명한 런앤건 게임이 놓여있었고, 그 양옆으로 똑같이 거대한 게임기가 늘어선 걸 보니 이런 게임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곳 같았다

레이나는 오랜만에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이내 뭔지모를 이곳을 뜨려고 몸을 움직였을 때, 익숙한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몸이 좀 작아졌다. 아예 10년 전 꼬맹이로 돌아간 체형이었다. 옷도 작전 때마다 입던 테크웨어 대신 평범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였다. 어깨에 달려있던 스마트폰도 없어졌다.

레이나는 라즐리의 잘린 팔을 봤을 때와 비슷한 충격과 올라오는 신물을 느꼈다. 레이나가 공포와 당황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자리를 뜨려는 순간, 머리 안 쪽 어딘가가 '덜컥'하더니 반쯤 일어선 몸을 주저앉혔다. 슬슬 패닉에 다다를 레이나와 달리 몸이 멋대로 손을 풀고, 동전을 넣고, 조종간과 버튼에 손을 대어 놀리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레이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몸은 물 흐르듯이 스테이지를 깨갔다.

몸의 통제권을 잃은 레이나는 이 부드러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청 애를 써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려했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의지를 깍지 끼듯이 잡고있어서 결국 근육의 움직임에 맞춰 춤추기만 했다.

눈앞에는 경이였지만, 몸이 제멋대로라 레이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인지 레이나가 더 힘을 줬고, 반동으로 몸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삐끗했다. 덕분에 캐릭터는 최종보스 앞에서 쓰러졌다. 별 쓸데없이 본능적인 승리감이 들었을 때, 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이윽고 나온 점수판에 클리어했어도 10위권에 못드는 점수를 냈다는 사실이 나오자, 이젠 팔장까지 끼고 게임화면만 노려봤다.

레이나도, 몸도, 이제 어쩌지라는 생각에 잠긴 5초였다.

"그냥 무식하게 밀고 나가니까 그렇지. 이건 부활절 토끼까지 찾을 기세로 뒤져서 점수 먹어야해."

드디어 몸과 레이나의 의지가 맞아 소리나는 쪽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키가 큰 사람이라 체크무늬 셔츠와 면바지만 보였고,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다시 해볼래?"

남자의 손에서 동전이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레이나가 고개를 들 생각도 하기 전에 의식은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몸에서 빠져나갔다.

레이나는 헉 소리와 함께 숲에서 눈을 떴다.


서리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처음 기억 속으로 들어간 것도 있거니와,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억을 조작당할 뻔해서 깬 지금도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서리는 물고기 꽁무니도 못 봤지 않는가.

서리는 양손을 바라봤다. 암워머가 감싼 손바닥에는 방금까지 손의 주도권을 가지고 싸웠던 느낌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있다. 누군가 여기서 서리의 기억을 함께하고 있다.

뭔가 두근거리는 말이라 좋기는 한데 누가 여길 올 수 있는가? 아직 출시도 안했고, 오픈 베타도 안해서 불법적인 방법 외에는 올 수가 없을텐데 말이다.

순간 서리 머릿속에 며칠 전의 해커들이 떠올랐다. 분명 그들이라면 여기까지 뚫고 올 수 있다. 분명 뭣도 모르고 왔다가 서리의 테스트와 겹쳐 기억을 같이 보게 됐나보다.

멀티 플레이 지원은 안되겠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아까 적당히 끊어서 다행이었다. 얼굴을 보여선 곤란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남은건 저 인간을 잡아 족치는 일이었다. 서리는 턱을 괴고 어떻게 족쳐야 잘 족쳤다 소문날지 생각해보았다.

그 때 방금의 기억이 들어왔다.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조이스틱과 버튼들을 놀리던 그 때의 기억을. 오랜만에 다시 만져본 그것들에는 환영한다는듯이 은은한 온기가 배어있었고, 서리는 어느새 이젠 다시 만질 수 없겠지라는 생각도 잊고 예전 자신의 손놀림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 손을 두고 서로 맞잡았던 두 손도 떠올랐다. 서리는 다시 손을 보았다. 무도회에서 춤추듯이 그렇게 잡았던 적이 있었나?

서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위쪽의 말들과 기분과 감촉을 곱씹고는, 피식 웃었다.

서리는 손바닥 중앙을 꾹 눌렀다.암워머에 감춰진 소형 단말기가 작동해서 손 위로 흰 토끼 아바타를 띄웠다.

"관리자 권한 좀 부여해줘. 여기 침입자가 있네."

"네엡"

화면이 꺼졌다가 팔을 감싸는 화려한 발광 이펙트와 함께 손바닥 위로 키보드 형태의 관리자 인터페이스 홀로그램이 나왔다.

'뭐, 조금 골려만 줄까.'

서리는 실시간으로 변하는 게임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뛰었다.


레이나도 일어나 뛰었다. 여기에 다른 인간이 있다는 건 레이나도 깨달았다. 다만 그게 라즐리가 아닐테니 빨리 게임을 벗어나는게 상책이었다.

"토깽이! 빨리 귀환 터널을 열어!"

"노력 중이에요! 여기 오는 길 뚫는데만 몇 시간이 걸렸는데요!"

둘 다 예상치 못한 방금의 상황에 다급하게 굴었다. 레이나의 머릿속에 자꾸만 잘린 팔이 나타났다. 아까처럼 쓰러지거나 몸의 주도권을 잃는던가 하면 바로 잘린 팔 신세였다. 한 부대의 지휘관과 기동특무부대 감마-01의 필수품인 SCP-522-KO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레이나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레이나는 뛰고, 또 뛰었다. 머리에 절박함과 공포를 가득 안고.

"숙여요!"

토깽이의 말에 레이나는 숙였다. 거대한 곰치가 숲에서 나와 레이나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나가 똑바로 달리려 허리를 들었지만, 그 반동으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한 번 구른 레이나의 발이 닿은 바로 앞에서 날치떼가 땅에서 끝도없이 솟구쳐 하나의 방벽을 만들었다.

레이나는 발꿈치로 지면을 밀어 주춤대며 물고기벽에서 멀어졌다. 바닥에서 날아올라 쏟아지는 물고기떼에 아까의 경외와는 다른 감정으로 레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그 많은 날치떼가 서서히 앞쪽으로 기울어지자, 레이나는 작은 딸꾹질과 함께 달려나갔다.

레이나는 계속되는 딸꾹질을 삭이며 생각했고, 생각했다. 지금이 본격적으로 이 인간들의 엿맥이기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써 최선의 방법은, 역으로 엿을 맥이는 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숲길 옆으로 탈선하는 거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 대한 대비를 안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 인간들의 현실 뒤틀기에 당할공산이 컸다. 실제로 나무 저편으로 깜빡이는 망둥어의 눈이나 가느랗게 스쳐 지나가느 가오리가 보였다.

그렇기에 레이나는 앞으로 더 빨리 질주했다. 힐링 게임 특성상, 메인이 되는 도로는 크게 바꾸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귀환 터널 뚫는데도 오래 걸리니, 역으로 입구까지 질주하는 편이 나가기에도 안전하리란 계산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만난다면, 뭐, 토끼 말대로 프로그래머 하나 못 이기겠는가.

라고 생각한지 얼마 안되어 저기서 뛰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어떻게 뛰는거지 싶을 정도로 긴 머리와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덮는 암워머가 눈에 띄는 여자가 캥거루처럼 뛰어왔다. 비유가 아니라 한 번에 사람 키만한 거리를 펄쩍 뛰었다. 자세히 보니 땅에 닿는 발 끝으로 돌고래 뒷지느러미가 보였다.

레이나는 속으로 거리를 쟀다. 자신의 보폭과 저 여자의 보폭, 삼단봉을 휘둘렀을 때 타격범위부터 타격부위까지. 그 짤막한 계산을 마쳤을 때, 삼단봉을 뽑기까지 세 걸음이 남았었다.

두 걸음, 레이나는 삼단봉을 세게 쥐었다.

한 걸음, 레이나는 강한 심호흡을 했다.

도달. 하지만 삼단봉은 빠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계산이 어그러졌다. 여자는 계속 뛰던대로 뛰지 않았다. 마지막 한 발을 남겼을 때 레이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돌고래의 뒷심이 달려 레이나가 한 발을 뻗기도 전에 레이나를 향해 날아왔다.

레이나는 당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여자는 레이나의 품에 쏙 안겨 꽉 껴안았다.

동시에, 레이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대왕고래가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두 명을 삼켰다.


레이나는 눈을 떴다. 이번이 두번째였지만, 속이 매스꺼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주변이 아까와 똑같았다. 습기로 가득 찬 숲 속이 아닌 인공적인 불빛이 가득한 곳이었다. 옷도 아까랑 디자인까지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과 여전히 남은 누군가에게 안긴 듯한 감촉이었다.

레이나는 몸부림치려고도 해보고, 소리치려고도 해보며 발악을 했다. 모든 행위는 아까처럼 발바닥에 저릿한 느낌을 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 절박함이 의식을 뚫고 가시를 세울 그 때, 몸을 덮던 포옹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이 레이나의 의식에 들렸다. 그래도 레이나는 주먹을 펴지 않았다.

모든 게 안전해. 여긴 내 공간이고 나와 있는 동안 당신을 해치게 두지 않아. 목소리가 달래듯이 두드렸다. 이미 울고싶었던, 긴장에 짓눌려 어린애가 됐던 레이나는 서서히 걸음마를 떼었다.

괜찮아.

생각해보니 이 말을 들은지 오래되었다고.

내가 당신을 보호해줄게.

새삼 레이나는 생각했다.

이제 쉬어도 돼.

레이나가 주먹을 펴고 앞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신은 전혀 아니었지만 육체는 게임에 몰입해있었다. 만약 레이나가 이 게임을 한다고 치면 게임 소리마저 안 들리고 조이스틱이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중간중간에 남자가 주는 조언을 에너지 삼아 레이나의 몸은 조종간을 비틀고 버튼을 눌러댔다.

무언가 상황 파악도 할 새도 없이 게임이 끝났다. 화면에는 ‘High Score!'라는 말과 함께 이름을 적는 칸이 나왔다. 거뭇거뭇한 화면에 레이나의 몸이 비쳤다. 놀랍지도 않게 그건 레이나가 아니었다. 레이나보단 한참 어린 한국 고등학생이 거기 있었다.

아이는 점수창의 다른 이름들처럼 AA를 적어나갔다. 그 때 옆에 있는 남자가 마지막 조언을 했다.

“그러지 마. 여기 무수한 AAA들이 보여? 솔직히 이 사람들은 인생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고 봐. 어차피 즐길 것도 적은 인생, 이런 데에서라도 우리 이름을 남겨야 되지 않겠어?”

아이는 으흠, 하면서 아랫입술을 빼면서도 손이 움직이며 알파벳을 하나씩 새겨나갔다. LSY.

“LSY?"

“제 이니셜이에요. 이서리.”

“이서리… 재밌는 이름이구나.”

“영국에 있을 때 친구들은 절 서리 주라고 불렀어요. 아저씨도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던가요.”

“됐다. 난 이름 가지고 장난 안 쳐. 아무튼 오늘 너의 실력 잘 봤고, 만나서 즐거웠어. 나중에 다시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줄 수 있겠니?”

“아저씨가 저한테 연락을 왜 해요?”

“내가 게임 관련해서 일을 하나 할 거거든. 거기에 사람이 좀 필요해.”

“엑? 전 평범하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인걸요!”

“평범? 너, 내가 말해준대로 게임해놓고 평범한 게임 즐길 수 있겠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이나는 이미 주도권을 넘긴 채 어떤 말이 나올지 지켜보고 있었기에 자기가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다행히도 서리라는 인간의 입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저씨 이름이 뭔데요? 전 아저씨 이름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같이 해요?”

“나? 난….”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이 끝나더니 어두워진 실내가 아득해지고, 주변에서 나무가 자라났다. 저 멀리에서 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쳐갔다.

“그건 기밀이에요.”

서리가 레이나의 입을 빌려 대신 말을 했다.


누워있던 레이나가 벌떡 일어나면서 서리와 머리를 서로 부딪쳤다. 어느새 튀어나온 토끼가 스마트폰에서 붕대를 꺼내 레이나와 서리에게 나눠줬다. 둘은 각자 붕대를 붙였고, 고통이 가라앉자 서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어…”

서리가 다시 팜플렛을 꺼내고 그냥 읽어내려갔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이 접속할 때부터 여러분의 기억에서 중요한 부분을 추출했습니다. 뇌라는 바다에서 여러분의 해마가 행복한 기억을 줬으니, 기억들은 해마의 친구가 되어 산 속 바다에서 헤엄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행복하던 순간을, 의지를 다지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행복과 그때의 의지를 다시 찾아보세요!”

서리는 레이나를 흘끗 보았다. 레이나와 토끼 모두 멍하니 서리만 바라보았다. 서리는 머쓱해하며 계속해서 읽었다.

“주의. 시스템 오류로 트라우마가 자극될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물고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 임산부나 노약자, 심장질환자는 주의하여 주십시오. 물고기가 여러분에게 돌진하는 건 집을 찾는 생명체의 본능이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는데요?”

“응?”

“일단 게임에 오셨잖아요.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해야 하니깐요. 아, 제 기억은 어떠셨나요? 좀 맛깔날 지점에서 끊긴 했는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제 기억이니까 당연히 저도 알죠. 저도 제 기억에 영향이 가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잠깐, 그럼 그 남자가 당신네 사장 맞아요?”

“게임에서 스포일러 방지는 생명이라 어쩌나.”

서리는 싱긋 웃었다. 그 순간 레이나에게 잊고 있었던 이들에 대한 혐오감이 불쑥 솟았다. 언제나처럼 돌아가던 직감은 이 사람을 제압하면 해결될 일이 많다고 말해왔다. 레이나는 손에 쥔 삼단봉을 서리에게 휘둘렀다.

서리는 바로 레이나를 향해 파고들어 어깨를 밀쳐 레이나를 다시 넘어뜨렸다. 레이나가 다시 휘두르기 전에 삼단봉을 든 팔에 체중을 실어 그대로 제압했다. 그 싱글거리던 표정은 그대로였다.

“관리자님은 초심을 찾으라는 의미에서 절 보낸 거 같은데, 더 재밌는 일이 생겼네요? 게임 너머로 달리고 또 달렸는데, 뒤로 돌아서 당신과 직접 함께하니까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을 준 몰랐고요. 설마 이것도 노렸나? 그럼 평생 함께 하면 또 지루해질텐데, 거기서 또 도망칠 방법 생각하긴 싫단 말이죠. 결국 저흰 계속해서 부딪쳐야 제맛이겠네요.”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리는 제압하고 남은 팔로 허공에 뜬 홀로그램을 두드렸다.

“30초 뒤에 귀환 터널이 열릴 거예요.”

레이나는 입을 앙 다물었다. 서리는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마주치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요? 당신도 제 실력을 보면서 즐기지 않았던가요? 중간에 제가 말을 안 할 때 저 대신 말하려고도 했잖아요? 그 순간에 저희는 하나였어요, 숨기려 하지 마요. 적어도 저희와 함께 하는 일에 진지해지지 마요. 마냥 즐기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다가와 봤자 피곤한 건 그 쪽이란 거, 몇 번 만나봐서 알잖아요? 그러니까…”

레이나의 등 뒤로 포탈이 열리면서 레이나가 떨어졌다. 서리는 그 순간에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다. 그래도 레이나 귀로 서리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즐겨, 이 양반아.”


“결국 졌네요. 얼굴 허옇게 뜬 프로그래머에게.”

“닥쳐.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전 연약하고 귀여운 토끼라서 어쩔 수가 없었네요.”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안도감과, 적절한 체념과, 여유와 활기가 담긴 긴 한숨을 쉬었다.

“레이나 씨.”

“왜?”

“메시지가 있어요. 아까 온 건데.”

“뭔데?”

“당신 부하는 무사합니다. 일주일 내로 무사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일주일 뒤..

제05K기지 기동특무부대 감마-01(“토끼굴 속으로”)의 주둔지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며칠 전부터 실종이었던 라즐리가 어제 새벽에 SCP-522-KO 격리실에서 발견되어 오늘 출근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일부러 조금 늦게 출근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사무실에서는 라즐리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없어진 한 쪽 팔은 짙은 푸른빛 기계팔로 되어있었다. 라피스가 먼저 보고 레이나에게 손을 흔들었고, 라즐리도 레이나를 향해 기계팔을 흔들었다.

레이나는 무표정하게 이 둘을, 그리고 모여있는 대원들을 바라봤다. 묘한 상황에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마저도 들릴 정도였다. 라즐리가 사라진 전투 때와 마찬가지의 긴장감과 좆됐음을 감지하는 기운이 퍼졌다.

푸흐. 레이나가 일부러 참던 숨을 풀었다. 그리고 키득거리면서 라즐리에게 말했다.

“이제 둘이 구분돼서 좋네. 진술해야할 내용 많으니까. 적당히 하고 면담실로 올라와라.”

“대장, 근데 저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쓰읍.”

“올라가겠습니다.”

레이나가 밖으로 나갔다. 방금 대장님이 장난친 거냐며 당황하는 목소리와 나머지가 터뜨리는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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