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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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는 늘 해안가에 있던 것 같다.

꿈 속의 사람들이 늘 그렇듯 얼굴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라는 게 그를 유추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외형과 상관 없는, 아침 햇살에 지워지지 않았던 감정으로 그를 채색해보자면 지금이라도 선명하게 할 수 있겠지만 - 난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는 항상 서정적인 안개로 자신의 정체를 감싸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가볍게 웃으면서, "기분이 좀 나아졌으려나?" 하는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하지만 감정은, 그를 구성하는 감정들은 잘 알고 있었다. 우울함이 아닌 침울함과 남을 위하는 배려심. 깨지기 쉬운 듬직함에 연약한 마음을 숨기고, 누구에게도 그걸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조바심.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느긋함.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따뜻함. 아침이 돌아오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용기와, 그걸 매일 단념하게 했던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조각해낸 하나의 보답받지 못한 감정이 그를 구성하고 있었다.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 때는 눈치채지 못한 후회가 한 켠에서 속삭이는, 그 감정.

중학교 때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기분 좋게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악몽의 중간에서 누군가 날 구원해주는 존재가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어디에서인가 바람이 불어와 나를 싣고 날았다. 괴물이 날 쫓았을 때, 그것의 뒤에는 풍선을 든 거대한 곰인형이 있었다.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뜨면 세계가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악몽을 전혀 꾸지 않는다는 걸 자각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 해안가에 가게 되었다. 그는 조용히 내게 인사했다.

그의 인사는 참으로 따뜻했다.


그의 세계는 시간이 멈춘 해안가였다. 수평선 위로 마지막 인사를 보내는 해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허공에 못 박힌 듯 멈춘 이름 모를 새와, 누군가 세워둔 나무 탁자가 있는 해안가.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은 때로는 혼자였고, 때로는 아니었다. 그 곳에서 그는 항상 능숙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파도를 뒤로 하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의 첫 모습이었다.

그는 산책을 좋아했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하는 산책이 늘 그랬듯, 바다는 그의 기분에 따라 몇 번이고 색을 바꿨다. 그 곳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얘기를 했고, 나는 가끔은 꿈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고민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침대에서 깨어나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대개 말할 수 없는 고민이란 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정말로 무겁지 않은 소재가 되버리고 마니까.

산책은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루시드 드림을 했다. 손을 휘둘러 해안가를 정글로 바꿨다. 고래가 하늘을 날고, 거대한 모래성이 세워졌다. 그는 으스대는 나를 볼 때마다 가볍게 웃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두 개의 태양이 뜨고, 지고, 다시 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그림을 그렸다.

난 그가 오롯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의 친구. 한 발이라도 넘어가면 나를 피그말리온으로 만들, 나의 조각상. 나는 그와 함께 하면서도 그를 몰랐다. 그가 내가 모르는 일을 내게 말해주는 게 어째서 이상한 일인지, 꿈 속의 존재가 루시드 드림을 가르쳐 주는 게 어째서 가능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알기 싫었다.


7월 5일, 해안가에 이제 같이 놀 수 없게 되었어. 미안해. 라고 적혀진 쪽지가 있었다. 그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고, 그를 조금 기다리다 혼자 이리저리 장난을 쳤다. 꿈에서 깨었을 때에는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해안가는 기억 속 그대로가 아닌, 내가 장난쳤던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 세계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이제 나의 것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하루가 이틀이 되었다.
이틀이 일주일이 되었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되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었다.

그래도, 해안가에는 여전히 내가 혼자 서 있었다.

난 그에게 화가 났다. 홀로 울었다. 그가 알려주었던 대로 손을 휘두르며 해안가를 모조리 뒤엎었다. 파괴와 슬픔의 연주를 장엄하게 지휘했다. 모든 것을 나의 상상으로 덮고, 덮고, 덮었다. 그의 상상이 모래 한 톨도 남지 않을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결과 앞에 서서 - 조용히 다시 울었다. 그가 남긴 메세지는 정말로 그 쪽지 하나밖엔 없었다.

내가 세운 고독의 도시 아래에서 나는 납득했다.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되뇌임이 나를 도왔다. 그는 오지 않아, 그는 오지 않아.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아.

이제 나는 꿈을 꿔도 해안가에 가지 않는다.

그가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레이는 해안가 사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재단의 요원이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는 취미였다. 오늘도 그는, 벽에 걸어놓은 사진 - 몰디브의 해안가에서 찍은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내려갔다 올라가곤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자우에게 속삭였다.

굳이 직접 하지 않고 약을 쓴 이유가 있었나?

맛있을 것 같기는 했죠.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소년이 대답했다.

때로는, 먹는 것보다 보는 게 더 만족스러운 음식도 있으니까.

확실히.

형광등에 비친 그레이의 눈이 슬프게 반짝였다. 의안이라 그런 건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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