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비오는 날, 눅눅한 방울소리, 무진과 곡성 그 사이의 안개없는 폐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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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래 가방 하나만을 등에 지고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져 울적했던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거닐다가 지쳐 잠시 외딴 곳에 위치한 낡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사람 하나 없는 폐촌과 가파른 산 사이에 껴있어 이런 곳에도 버스가 다니는구나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잠시 의자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졸음이 제 몸을 끈적하게 휘감았습니다. 그 찝찝한 졸음 때문에 저는 결국 순식간에 곯아떨어져 해가 산봉우리에 걸려 넘어가기 직전에 눈을 떴습니다. 폐촌과 산 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절 지켜주었던 햇빛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저는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폐촌의 다 망가진 집에 들어가 쉴 수 있을 정도로 제게 용기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자 저는 패닉에 빠져 군데군데 구멍 뚫린 정류장 지붕을 우산 삼아 의자 위에 쪼그려앉아 하염없이 아침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빗소리가 사방을 가득 매우기 시작하고 정류장 지붕의 구멍에서 홍수가 난 것처럼 빗물이 잔뜩 쏟아지기 시작할 때 즈음 저 멀리서 선명한 방울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듣자 하니 저 멀리 폐촌에서 들리는듯하여 어릴 적에 들었던 귀신이란 귀신들은 전부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라 벌벌 떨기만 하는데 방울소리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20분 정도 떨고 있다 보니 갑자기 소리의 근원지가 궁금해지더군요. 제가 워낙 겁이 많아 차가 없으면 짧은 터널도 지나가기 힘들어했었는데 그때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입고 있던 겉옷을 우산 삼아 폐촌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제가 다행히 손전등을 가지고 있어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땅에 난데없이 튀어나와 있는 흙더미들에 발이 걸려 여러 번 걸려 넘어졌을 겁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방울소리가 가까워져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잠깐 멈칫하고, 뭐 어떠냐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걷다가도 갑자기 무서워져 뒷걸음질 치는 짓을 반복하며 오만 가지 생각을 다했습니다. 사람일지 귀신일지, 사실 어디 폐가에 있는 혼들이 방울 소리를 내어 날 부르는 게 아닐지, 그냥 바람 소리를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방울소리는 가까이서 들리더군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히 방울소리였습니다.

제가 걸음을 멈춘 것은 길가에 난데없이 나타난 팻말이 제 앞을 가로막았을 때, 그리고 그 팻말에 쓰인 글귀 때문이었습니다. "무진까지 앞으로 500m 남았습니다"라고 적혀있던 그 팻말은 누가 봐도 잔뜩 녹슨 모양새가 마치 한동안 사람 손길 한번 닿은 적이 없는 것 같아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갔을 겁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저는 분명 탁 트인 평지에 위치한 폐촌을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팻말이 나타나서는 무진까지 얼마나 남았습니다 하는 것이, 마치 땅에서 솟아올라 저를 무진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느낌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그전까지는 팻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갑자기 이런 게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도망치듯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제 방울소리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침이 될 때까지 버스정류장 안에서 기다리다가 아침이 되면 바로 떠나버리자고, 다신 근처에도 발붙이지 말자고 다짐하며 점점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방울소리가 갈수록 커지기 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분명 방울소리의 근원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터인데 방울소리가 커지다니. 마치 방울소리가 절 따라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달렸습니다.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방울소리는 우습다는 듯이 점점 커져가기만 했고, 버스 정류장은 물론 도로조차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센 빗줄기가 온몸을 두드려 제 어깨를 무겁게만 만들었고 축축한 땅바닥은 제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려는 듯 제 발을 휘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그 찰나에 무언가에 발이 걸려 저 멀리 나뒹굴었습니다.

제 발목을 붙잡은 그것, 그 팻말은 왠지 묘하게도 아까 전에 봤던 것보다도 훨씬 녹슨 형상이었습니다. 모서리가 문드러져 그 형체조차도 불분명한데다가 곳곳에 뚫린 구멍들은 마치 제 몰골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하나의 인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앙상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무진까지 앞으로 200m 남았습니다"라는 그 내용만은 너무나도 선명하였기에 온몸의 털들이 곤두섰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보다도 절 더욱 무섭게 만들었던 건 그 팻말이 작은 흙더미에 꽂혀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분위기 탓인지 아님 본능적으로 그리 느낀 것인지 그 흙더미는 무덤과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비록 조금 작은 크기였지만 코를 찌르는 눅눅한 악취와 그 앞에 놓인 꽃들을 생각해보면 확실할 겁니다.

그런 끔찍하리만큼 눅진한 상황에서 그나마 제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손전등 불빛 너머로 조금씩 눈에 띄었던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보인 그 흙더미들이었습니다. 온몸을 끈적하게 휘감은 빗물과 진흙이 절 있는 힘껏 붙잡는 듯하였지만 저는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한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비를 피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우산 삼아 쓰고 있었던 옷가지를 내팽개치고 달리며 저 끝없는 어둠 어딘가에 있는, 사실은 없을지도 모를 그 버스 정류장으로 냅다 달리기만 할 뿐 이성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지 오래였습니다. 제 얼굴을 적시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저는 울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계속 달렸습니다. 다리가 아파졌지만 저는 달렸습니다. 그러나 방울소리는 무심하게 갈수록 더욱더 커져가며 제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그럼에도 전 계속 달렸습니다.

달리면서 저는 많은 것들을 곁눈질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라던가, 가로수라던가, 잔뜩 망가진 폐차라던가, 죽은 사람의 머리라던가, 사형수의 마지막 단말마라던가, 혹은 저를 무진으로 안내하는 녹슨 팻말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을요.

그리고 제가 멈춰 섰을 때, 저는 아직까지도 그때 보았던 "무진까지 앞으로 4m 남았습니다"라고 적힌 그 팻말을, 그 마지막 팻말을 잊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생생한 것이 마치 제 뇌에 총알처럼 박혀버린 듯 느껴집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이었습니다. 비록 팻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제 키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분명히 그건 강렬한 인상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 그것이 제 목을 짓누르고 머리를 쥐어 터트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망가진 몸을 춤추게 하며 기분 좋게 바라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보다 아래에 있었지만 절 내려다보았고, 살면서 본 그 무엇보다도 녹슬었으나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미소를 띤 채로 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뒤돌아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었고 그래야만 했지만 그러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옳고 그름이 무슨 의미냐마는, 결국 저는 처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끝없는 지옥의 굴레에서 공처럼 구르고 늑대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달렸으나, 제 폭포수 같은 눈물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늑대는 잔혹하게 제 목을 잡아채 안개로 가득 찬 잿빛 강에 절 던져버렸습니다. 눈을 감고, 숨을 강하게 몰아쉬었습니다. 팻말은 여전히 무진을 향한다는, 아마도 제 것일 한마디의 단말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발자국, 온몸을 휘감는 무력감의 한쪽은 손으로 잡고 다른 한쪽은 입에 물어 뜯어냈습니다. 그러자 무력감은 온몸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갔습니다. 오른쪽 발에는 제 과거를, 왼쪽 발에는 제 미래를. 다시 오른쪽 발에 들숨을, 왼쪽 발에 날숨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저는, 참으로 모순되지만, 꽤나 아름다운 쾌락에 젖어 마치 가면무도회에 온 어린아이를 대하는 심정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보았습니다. 그 우아하고 징그러운 자태를.

무진까지 0m 남았습니다.

그 순간 거미가 등줄기를 따라 올라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제 피부는 확실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거미는 하나에서 둘로, 둘어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 늘어나며 제 등을 기어 다녔고, 곧 강렬한 아픔과 동시에 등 가죽을 찢어발겨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럴수록 팻말은 절 비웃었고, 거미가 뇌를 후벼파며 온 장기를 먹어치우고, 심지어는 빈 눈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꽤나 기분 좋은 순간부터 저는 인간이 아닌 거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빗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울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진의 안개입니다. 그리고 팻말입니다. 그리고 무진입니다.

무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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