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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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 속에서 약간 뒤척이다가 마지못하는 듯이 일어났다. 목뒤를 주무르며 창밖을 보는데 간밤에 약간 비가 왔는지 숲에 촉촉이 이슬이 맺혀있었다. 그 광경에 놀라 잠에서 완전히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시원하게 맴돌았다. 뜰을 거닐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숲 전체가 내 뜰이긴 하지만, 저 뒤편에 남아있는 풍경들은 오늘의 나머지를 위해서 남겨두기로 했다.​ 새삼스럽게 오두막 앞에 피어있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보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엌으로 돌아가 아침을 준비했다. 냉장고를 열어서 재료를 확인했다. 당근, 양파, 치커리 모두 싱싱했다. 다만 어제 먹다 남은 고기에 도톰한 힘이 없는 게 좀 더 오래 두면 상할 것처럼 보였다. 내일까지 다 먹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를 닫고 찬장에서 도마를 내왔다. 채소를 썰다가 문득 오늘 하루는 좀 호사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다시 냉장고로 돌아가 고깃덩어리를 꺼냈다. ​다시 봐도 팔뚝보다 큰 것 같았다. 몸무게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하루 정도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다. '저건 팔뚝보다 크지 않아. 그래, 딱 팔뚝만 하다고 치자. 원래부터 그랬는걸.' 물이 끓는 동안 아무 의미 없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물이 끓는 순간을 정확히 맞추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아마 시계를 보고서는 절대 모를걸. 마음먹고 차린 상은 언제나 그렇듯 맛있었다. 고기는 뼈까지 발라서 다 먹었다.

뼈다귀와 고기에 딸려온 또 다른 것들을 자루에 담아 묶었다. 아직은 멀쩡한 배를 바라보면서 잠시 걱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늘 그렇듯, ​'그에 상응하는 운동을 필연 하고 있으니 괜찮다'라는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옷에 묻은 빨간 얼룩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는 손톱에 꽃물을 들이곤 했었지. 실없는 생각이었지만 지금도 못할 건 없다고 입을 비죽거리곤 벌써 시간을 들여 손톱에 물을 들일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다.

보랏빛 꽃님 손바닥 하나 꺾어서 이파리를 뜯어 곱게 빻았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옛날처럼 왼손 중지부터 새끼까지 세 손가락을 물들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것들을 손에 고정시킬 만한 것이 없다. 약간 모양 빠지는 것 같았지만 목장갑 속에 젓가락으로 한 자밤씩 집어넣고 고무줄로 묶어두었다. 그래도 나름 재치있게 해결해낸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장난은 그쯤 해두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고기를 먹었으니 일을 해야지. 이리저리 몸을 둘려가며 기지개를 켰다. 준비 운동은 이걸로 끝. 편한 옷을 갖춰 입은 뒤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꽤 무거운 자루와 함께 삽을 등에 지고 작은 물병 하나를 챙겨서 길로 나섰다. 햇살이 천천히 키가 커지고 있었다.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 사이를 거닐고 있으니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흙 밟는 소리에서 피어오르는 냄새가 좋았다. 주변을 살피며 여유롭게 산길을 ​올랐다. 아쉽게도 다람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슬슬 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휘파람을 그만두었다. 언제나처럼 가는 길에 상상하던 것보다 예쁜 강가에 도착하니 금세 얼굴을 씻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해졌다. 그렇지만 일을 끝낸 뒤의 차례다. 기다림이 길면 설렘은 더 커지고, 그 자체로서 굉장해진다!

강을 따라 산 중턱의 기슭에 도착했다. 물병을 들고 반절을 한꺼번에 마셨다. 해가 다 피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침에 먹은 고기가 충분히 소화되었겠다. 손을 땅에 치대보며 바닥을 살폈다. 아직 축축해서 삽이 잘 들 것 같았다. 자루를 내려놓고 삽을 들어 흙을 파기 시작했다. 흙은 밟는 소리도 파는 소리도 모두 좋다. 그것도 나름 신기한 일이다.

적당히 구멍이 깊어지자, 자루를 집어넣었다. 내려놓을 때 끈이 풀렸는지 내용물이 약간 흘러나와 있어서 허리를 숙여가며 그것들을 주워내야 했다. 자루를 묻은 뒤 땅을 다지면서 오늘도 하나의 소중한 기억이 생겼다는 것에 흐뭇해졌다. 이렇게 뭔가를 묻을 때마다, 갓 난 아기의 초라한 마음속에 하나씩 그것들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얼마든지 더 쌓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도 이미 가득한 기분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낯익은 감각에 뒤를 돌아보자 이곳을 향하는 올망졸망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움은 다람쥐보다도 더 귀한 것이었다. 순수한 모양이 감탄스러워 서둘러 주워들고 강물에 씻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함에 쓰다듬으니 으레 심술을 부리던 강물의 거품도 물러나 함께 애틋해했다.

손을 놓았다. 다정한 그 모습이 강물을 타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시 삽을 등에 메고 물병을 챙겨 섰다. 휘파람을 불어보려 했지만 왠지 슬픈 마음이 들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뒤돌아보자, 폭포 끝에 걸린 그것이 손을 뻗어 배웅하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웃으며 끝없이 이어질 길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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