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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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찍는 건 탁점이다.

이후에 쓰여질 모든 토대 위에 혼자 외롭게 울고 있을 점이다. 묘사에 주의해야 할 사항은 외로움. 각도를 비튼다. 붓을 무디게 한다. 갈라진 먹의 가지들은 눈물이 되어 아래를 향하고, 그 이후에 그려질 획을 준비한다.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던 시기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병원에서 깨어나고 한 달쯤 후인 것 같다. 내가 서예를 배우겠다고 하자 담당 의사는 내가 원래 서예를 좋아했었다며 기뻐했다. 그 개체는 머리는 지울 수 있어도 근육의 세밀한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하는 모양이라, 처음 쓰는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모양새는 꽤나 멋졌었지. 스스로도 감탄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처음 쓴 글자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 획으로 옮겨 볼까.

그 위에 토대가 쌓였다. 가로로 그어지는 획은 탁점이 떨어질 지면이다. 부숴져버릴 행복과 기대를 가득 담아 획을 긋자. 내가 써놓은 저 점에 곧 부숴지겠지만, 아직은 그 결말을 모르는 기억을 천천히 그어 나간다.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같은 각도로 탄탄한 선이 남겨져 있을 때에야, 비로소 떨어지는 붓의 흔적이 미련을 담을 수 있다.

서면으로 내 과거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받은 건 윤리 위원회의 결정 덕이었다. 내가 내 옛날 자신에 대해, 내가 얼마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가에 대해 전달받는 건 그렇게 흔한 경험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격리에 기여했던 개체의 보고서들을 천천히 읽어봐도 아무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 머리에 남겨진 건 오로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왔던 추억의 조각들 뿐이었다.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커피를 맛있게 타는 법. 논문 쓰는 법도 머리 한 구석을 뒤지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곧 그을 획과 비슷하다.

뻗어나가는 획은 내가 아닌 나의 팔이 그려준다. 기억 위에 위태롭게 쌓아올린 마음을 붓으로 풀어놓는다. 아래로 한 번, 다시 옆으로 한 번. 오른쪽이 휑하니 뚫려 불안해 보이지만, 어찌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안하기에 신뢰가 있었고, 불안하기에 사랑이 있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감정이 두 개의 획에 실린다.

연인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사고에 휘말렸다고 들었다. 그 이상은 기지 안에서 날뛰던 바이러스가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도무지 할 수 없다. 어느 거리를 걸었는지, 어느 풍경을 보았는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 어떤 상상을 해도 부족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머리가 길었을까, 짧았을까. 난 행복했을까. 그렇게 나는 떨려오는 붓의 끝을 종이의 밑으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오는 건 마음이다. 점점이 흩어진 채 일부는 서로 끌어안고 일부는 서로 바라보는게 고작인 나의 마음이다. 규칙 안에 내재된 불규칙성, 제멋대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점 세 개를 애써 모아보려는 획 한 줄. 평범히 마음을 그릴 때와 다르게, 처연함과 슬픔을 흠뻑 묻혀 내려긋고 나면, 완성이다.

화선지 위에 놓여진 글자는 어느새 완전히 그 모습을 갖추었다. 이것이 내가 쓴 글자다. 망가져버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놓을 수 없는 마음이 화선지 위에서 날 지그시 올려다보는 무엇이다. 무너져버린 기억이 마음을 한없이 짓누른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나를 부른다. 이것이 내가 지난 1년간 수백번도 더 썼고, 앞으로도 쓸 글씨였다.

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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