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갑자기 아무 말 없이 탈퇴했다가 갑자기 다시 얼굴을 내미는 XCninety입니다. 3월 19일 새벽 1시에 침대 위에서 탈퇴를 눌렀다가, 4월 1일 오후 8시 반에 침대 위에서 신청서를 다시 제출했습니다. 승인 처리는 4월 2일 새벽 1시에 되었으니, 정확히 14일 동안 탈퇴했던 셈이네요.
혹시 안부를 물으신다면, 전 잘 지냈습니다. 생활에 딱히 특별하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공부하고, 과제하고, 쉴 건 다 쉬고… 그러면서 마음을 이 글을 쓰자고 결심할 정도까지는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 쓸 시간은 잘 안 나데요. 이번 학기 처음 치는 퀴즈가 준비하기 어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고…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드린 말씀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글솜씨가 부족합니다만 사건의 경과를, 그리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보려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2013년 2월에 SCP 재단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 패러디 유머 사이트 "백괴사전"에 "SCP 재단" 항목이 생겼을 때였는데, 설명이 정말 빈약했는데도 "이건 대체 뭐지???"라는 생각에 공부도 손 놓고 그 페이지만 들여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다른 글도 읽고, 포럼 구경도 하고… 하면서 한국어 위키에 발을 들이게 됐죠. 저는 위키 가입은 수능을 치를 때까지 미루자고 다짐했고, 아홉 달 동안 간간히 눈팅을 이어가다 수능 친 그날 오후에 바로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조마조마한 하루가 지나서, 가입 신청서가 승인되었습니다. 이때 지은 XCninety라는 닉은, 다른 데서 사용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SCP 위키에서만 사용했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입 직후에 바로 번역 하나를 내놓았고, 포럼에서 조금씩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동경하던 존잘들이 지인이 되었다는 기쁨, 그 존잘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제 마음은 가득 찼습니다. 아마도 모두가 한 번씩 느끼신 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포럼에 상주하려 노력하면서 알게모르게 이름값을 올렸고, 외국어 작품을 번역했고, 어쩌다 SCP 비슷한 것도 하나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SCP는 제 대학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저는 하루하루 덕질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구석에서는 좋지 않은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제가 "SCP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SCP를 제가 좋아하지만 너무 작고 아담한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14년 초에 유별난 사건이 하나 발생해서 그랬을까요? 15년 5월에 첫 번째 복귀 이후 (사족이지만 첫 잠수는 이번 일을 계기하고는 별 상관은 없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린 걸 만회하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정확히 언제부터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 "사명감"이 제 안경알을 색칠하고 나니까,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를 자처했습니다.
악마의 변호사란,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을 시성할 때 결점을 찾아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점으로 들고 나오는 문제가 많을수록 시성이 어렵겠지만, 일단 시성된 사람은 결점이 없다는 뜻일 테니 권위를 단단히 다질 수 있겠죠. 이에서 파생한 말로, "악마의 변호사"는 나쁘게는 시비를 거는 사람, 좋게는 악역을 떠맡아 강력한 검증을 요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는 15년 이후 "악마의 변호사로서"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글이 있으면 고치는 게 아니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좀 "예의 바르게" 하겠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저는 거의 몰아내다시피 했습니다. 나쁜 글이 만족하는 기준을 설정하고, 기준에 들어맞으면 비평을 쏟아냈습니다. 기준에 애매하게 걸칠 때가 있다면, 기존의 글 백 개를 참조해서 기준 속으로 구겨넣으려 했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저지른 + 내가 고쳐 줘야 할 과오"는 하루하루 눈에 밟히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매일 어떻게 그 과오를 고쳐 드려야 할까 하는 고민만 쌓여 갔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과오들은 제가 고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저 자신부터 완벽해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저는 완벽한 덕질이란 무엇인지 하는 이상향을 만들고, 그 이상향에 저 자신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창작은 없더라도 이론에는 빠삭하고, 논리는 몰라도 주장은 강하고…
물론 그 행동들 자체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이 건실하고 정도가 적당하다면야 세상에 나쁜 행동이란 없겠죠. 하지만 정말 확실히, 저는 절제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절제를 모르면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SCP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제 안에서 몇 번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전에 제가 건강 때문에 조금만 쉬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방 안의 불빛이 아주 잠깐 꺼졌다 다시 켜지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처음엔 형광등이 고장났나 싶었는데,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참 분석한 끝에 증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안과에 가 봤지만 진단은 안구건조증밖에 없었습니다(참고로 건조증 때문에 제 눈이 미생의 오과장이 돼 버렸습니다). 신경과에서 MRI까지 찍었지만 별 이상 없다고 나오고, 약도 안 듣고 그랬습니다. 더 분석한 끝에 혹시 의식이 잠시 깜빡깜빡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간질 검사 받으러 대학병원까지 가 봤지만 기립성저혈압 때문이라는 (맞기는 한데) 영 쓸모없는 진단밖에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봤을 때 원인은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과는 빼고, 병원을 갈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혹시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많으세요?"
저는 교우관계가 모두가 걱정할 만큼이나 매우 좁고, 일명 대2병에 걸려서 1학년에 비해 고민도 많이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쪽팔리는" 일을 차마 어디서든 말할 수가 없어서, 혹은 정말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인인지 몰라서, 병원에서 그런 말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딱 두 곳에서밖에 말한 적 없습니다. 한의원에서 한 번, 밑에 나올 글에서 한 번. 한의원은 상담을 정말 잘 해주셨지만, 저는 그때 눈만 문제라고 생각해서 엉뚱한 약을 받았습니다. 밑에 나올 글은 약간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 결국 본질에는 한 번도 다가간 적 없는 셈이네요. 매일 천 번씩 잠시 의식을 잃는… 혹은 "죽는" 일이 생기는데, 그 원인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니 참 씁쓸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악마의 변호사" 놀이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경험을 숱하게 했습니다. 어쩌다 저는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덕질을 했던 걸까요? 그런 것도 묘미라고 생각했을까요? 왜 즐겁자고 하는 일을 괴로워하면서 했을까요?
작년 9월의 두 번째 잠수는 이런 생각이 커지는 중에 나왔던 한 가지 행동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3학년 2학기 미필이었고, 다음 해 사정이 아주 불확실했습니다. 탈퇴하기 며칠 전 늦은 이사를 했는데, 일손 때문에 내려오신 아버지하고 오래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진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미래 걱정을 하다 보니, 현재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나 많이 재단에 시간을 투자하면 내가 나중에 불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방학도 막 끝난 참이라 더 이상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다는 자괴감도 들었고요. 그래서 추석 즈음에 글 하나 던져 두고 발작적으로 탈퇴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서 다시 돌아왔고, 여느 때처럼 활동하다가 잠시 스탭 자리도 맡게 되었죠.
그때는 사실 지금 말하는 문제점들에 가까이 가기는 했습니다. 그때 재단에 대해 적었던 글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의 나인티가 고민했던 일들이 지금의 제가 고민하는 일들과 아주 닮았습니다.
- 그런 전제가 나인티가 SCP를 열심히 하는 데는 도움을 줬지만, 동시에 나를 좀먹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 나는 즐거움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의무감에 휩쓸려서.
- 그때처럼 취미를, 어떤 때는 의무감에 넘쳐서 바라볼 수 있더라도, 어떤 때는 취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돌아와서 이제 다 해결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한 가지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두 번째 복귀 때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점을 알았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해결에는 두 가지 도구가 필요했고, 하나는 문제 속에, 하나는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탈퇴하고 일어난 날,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허무함 앞에 갑자기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번역하고 싶다.'
저는 첫 신청서에 "우리말을 잘 살린 번역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우리말을 살린다 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좀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번역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SCP는 희한하게 작가가 독자와 이야기하기 쉬운 구조입니다. 덕분에 제가 평생 얼굴 보고 살지 않을 듯했던 사람들에게 연락도 해 보고, 감사 메시지도 받아 봤습니다. 특히 444-JP 할 때 locker의 메시지는 제가 당황할 정도였고… 좋은 표현을 찾으려고 사전을 들락날락하다가 우리말 공부도 하게 되고, 읽기밖에 못 하지만 일본어 프랑스어도 좀 알게 되고, 무엇보다 영어가 늘었습니다. 영어의 향유층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쭉 익숙해져서 그랬는지 어학성적에도 은근히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글 하나가 끝날 때 생기는 만족감 성취감도 있겠죠. 하지만 정말 번역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공헌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번역을 하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번역한 글이 특집에 갔을 때도 아니고, 번팅님 글을 영역했을 때의 뿌듯함도 아니었습니다. 둘 다 정말 기쁜 일이지만, 가장 기쁜 순간은 즈사오님께서 SCP에 제가 번역한 설정을 사용했을 때였습니다. 다른 번역할 SCP 때문에 급하게 작업했지만, 어찌 보면 제가 그 글을 "약간" 창작하게 된 셈입니다. 제가 글 하나를 소개함으로써 누군가의 세계관이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제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번팅님이 "기분이 이상하게 좋네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정말 좋은 일이었고, 사실 글 하나하나를 누군가 읽을 때마다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실 번역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쭙잖지만 창작을 하나는 해 봤고, 포럼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SCP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이기 때문에 재미있고. 제게는 괴로운 일에 집중하고 그 괴로움을 줄이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에 집중하고 그 즐거움을 늘려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 동안 저는 정말 즐거웠고, 어떻게 즐거웠는지 기억한다면 그걸 마냥 저버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겁게나마 돌아오는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어쩌면 22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원래 저는 플랫폼을 따로 마련해서 활동을 재개하려고 했습니다. 블로그, 페이스트빈, 디시 SCP 재단 갤러리… 등등 여러 곳을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3월 30일, 저는 술자리에서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형은 너무 많이 참다가 갑자기 폭발하듯이 말하는 것 같아요. 그때그때 부드럽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 성격이 이렇다 이렇다 말하기는 꽤나 낯간지럽습니다만, 저는 고집이 세고 소심합니다. 고집이 세기 때문에 불만을 많이 품습니다. 하지만 소심하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 어려워합니다. 참거나, 참다 참다 폭발하거나,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저도 세 번째 길, 압력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방법들이 있다는 걸 알고, 많은 분들께 그 방법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대로 깨우치지는 못했나 봐요. 폭발해서 모두가 곤란해진 일이 많았습니다. 재작년엔 동아리 연습 중에 복도에 널브러져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가위로 머리카락을 직접 자를 때도 있었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던 적도 있었죠. 방충망이 잠겨 있지 않았다면 저는 머리를 깨뜨려서 짧은 삶을 마감했을 텝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깨달은 것은 후배가 그 말을 꺼낸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루룩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복도에 엎어짐으로써 동기들 후배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내가 정말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면 가족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지금까지 말한 제 괴로움? 악마의 변호사? 스트레스? 즐거움? 공헌감? 이론이란 좋죠. 하지만 저는 SCP-1715가 아닙니다. 제가 인터넷 속에 살아 있고, 제 사고를 구성하는 수많은 명제 속에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시간을 제가 좋아하고요. 하지만 저는 결국 현실 속에 머무르는 존재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고, 사람을 만나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내 마음 속이야 어떻든, 그걸 표현하려 한다면 올바르게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저에게도, 다른 회원분께도 전혀 올바른 표현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올바르게 표현할 줄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 어디에선가 우러나왔습니다. SCP 재단은 제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고, 좀더 나은 자신을 만들려면 이곳에서도 마땅히 나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싸질러놓은 일들부터 정리해야 할 테고요.
그렇게 저는 세 번째로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전부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큰 불편을 끼쳐 드린 제 잘못이 큽니다.
신이 징벌하는 모든 죄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배신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 아무 말 없이 탈퇴함으로써 세 가지 배신을 저지른 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저는 세 가지 사과를 드려야 합니다.
첫 번째 사과는, 저를 스탭으로 적당하다 여기시고 스탭의 자리를 제안해 주신 글래시즈님, 선거를 여는 것을 수락해 주신 노래마인님, 그리고 선거에서 찬성표를 주신 여섯 분 (정확하게는 쿼크세개님, 이젠켈님, 카잔님, 자우님, 그둬님, 누에님) 께 드려야 합니다. 제가 스탭 자리를 맡은 것은 여러분께서 나인티가 스탭을 맡을 만하다고 믿어 주신 덕분이지만, 저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 자리를 저버림으로써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두 번째 사과는, 탈퇴 중에 제가 PM으로 몰래 연락드렸던 러브골드님과 쿼크세개님께 드려야 합니다. 무슨 겉멋이 들어서인지 저는 두 분께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답장은 받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정을 아는 분께 연락드렸다 하더라도 당황스러워하셨을 텐데, 제 사정을 전혀 모르는 두 분께서는 정말 어쩔 줄을 모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께 저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사과는, 제가 스탭으로 있었던 동안 포럼 및 챗방에서 활동하신 모든 분들, 다른 플랫폼에서 SCP 재단을 알고 계신 분들, 그냥 SCP 하는 나인티를 알고 계신 모든 분께 드려야 합니다. 한국어 위키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SCP 한국어 팬덤을 대표합니다. 제가 스탭을 맡은 이상, 저는 대표의 대표자로서 진중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탈퇴함으로써 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렸고, 한국어 위키와 SCP 팬덤의 모든 분께 실망감을 안겨드렸습니다.
이상의 분들께 저는 세 가지 배신을 저질렀고, 저는 이 모든 분들께 사과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편을 끼쳐드린 분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과의 말씀도 불편을 메우기에 부족합니다. 다시 이렇게 유치한 모습 보여드리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탭 자리를 사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는 데 적합한 행동은 아닙니다. 제가 사임하는 것이 책임을 저버리려 한다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고, 처벌이 필요하다면 저는 적절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제 자리를 대체하실 분을 위키에서 모집하는 중이기도 하겠고요.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스탭 자리으로 맡은 모든 자리를 사임한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싶습니다.
두 번이나 막무가내로 행동한 저는 침착하고 조리 있게 한국어 위키를 관리하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없습니다만 위키에 저보다 절도 있으신 분이 많다는 사실은 늘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분들께서 저처럼 크나큰 사고도, 자잘한 사고도 일으키지 않으며 한국어 위키를 더 잘 이끌어 나가시리라고 감히 믿어 보고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과 그 안의 저를 들여다볼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아무 불이익 없이 복귀한다 하더라도 당장 나은 모습을 보여 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블로그, 이달의 소식, 애슼픔 관리는 "악마의 변호사"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스트레스와 관련 없다는 이유로 제가 이것만 맡겠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적당하지 못합니다. 다른 운영진분들이 논의하셔서 처리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그게 대단해서도 아니고,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해서도 아니고, SCP 팬덤에 도움이 되어서도 아니고, 깐깐하게 따질 때 저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제가 잘 하는 것도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어쩌다 보면 누군가 고마워할 수도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내가 좋으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아주 쉬운 이야기지만 제가 전혀 못 하던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언젠가 잊어버렸을 테죠. 이제 다시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습니다.
또 재단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더 다듬어 보고 싶고요. 제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두 번이나 걸려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겨우 실마리나 잡았으니, 이젠 뭐가 좀 되겠죠.
그리고… 또 낯간지럽지만 사실 저 되게 가벼운 사람이에요. 평소에야 포럼에서 진지한 척 다 하고 살았지만, 저는 매사에 그렇게 진지하지 못합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못 깨달았던 때가 많습니다. 분위기 파악도 잘 못 하는 편이고. 챗방에서 드립만 치다가 혼도 나 보고… 그런 삶을 살다 보니 제 마음에는 "진지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키에서 그런 생각이 올드비라는 명분을 만나서 커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면에서 제 자캐는 클레브슈 교수도 아니고, 심민경 교수도 아니고, XCninety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겁지 못한 ███이 무겁게 살고 싶어서 만든.
이제는 저한테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습니다. 여전히 저는 진지한 척을 하면서 포럼에 나타날 테지만, 말 속에 제가 알게 모르게 심어 뒀던 꼬장꼬장함과 깐깐함을 덜어내고 싶습니다. 진지하더라도 ㅋㅋㅋ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습니다. 거울 속에서 XCninety 대신 ███ 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이상, 두서없는 소명글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 번째로 가입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