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톱니바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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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술병을 빼앗았다. 고개를 슬쩍 돌렸다. 빅터 박사였다. 그는 다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과하게 다물고 있는 그의 입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외출증 끊어놓고 잠수 타 버리더니 여기서 병나발 불고 있었나? 안주도 없이."

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 하나를 발로 밀었다. 빈 병에서 울리는 맑은 소리가 퍼졌다. 하나, 둘, 셋… 연구실 바닥에는 대여섯개의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빅터 박사는 빼앗은 술병을 가져다 들이켰다.

"젠장, 미적지근해서 맛도 없네. 이걸 무슨 맛으로 몇 병 씩이나 마신건가?"

그는 술병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그의 말에 이유없이 화가 나려 했다.

"술을 맛으로-"

"그래, 술이 맛있어서 좋다고 먹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 취하고 싶으니까 마시는 거 아니겠나, 여러가지 이유로."

빅터 박사가 내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시시껄렁한 아침 드라마 같은 대사 같아서 말 안하려 했지만, 이런다고 바뀌는 일은 없지 않나. 제발 정신 차리게."

그는 한 쪽 의자에 앉고 내 쪽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나도 얘기는 해 봤지만, 징계가 확정되었네. 그건 나도 막을 수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사과를 하십니까.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빅터 박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몇번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연구실을 나설 때 까지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오늘은 초침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구실 인터폰이 울렸다. 나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든 모양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사무실로 오게나.]

익숙치 않은 목소리였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그것이 O5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엔 그 '징계'가 다가 온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는 연구실에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O5의 사무실로 가는 길은 여전히 복잡했다. 이전에 모종의 실험 관련으로 면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복잡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드키를 몇 번이나 긁었고, 홍채 인식, 지문 인식까지 마친 후에야 O5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있는 O5가 이전에 만났던 O5가 맞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대리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앉게나."

O5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별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너무 급하게 부른 모양이군."

그의 말마따나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산발에 흰 가운은 구겨져 있었고, 가운 소매에는 침이 흐르다 말라붙은 흔적까지 있었다. O5는 안경을 쓰고 문서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는 페이지를 몇장 넘겼다.

"본론부터 말하지. 현 시간부로 감염체 217-20130418-F-025의 관리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는 감염체의 프로필을 건넸다. 그가 말한 감염체는 다름 아닌 내 아내였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황당한 거 알고 있네. 하지만 그건 우리가 결정한 징계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관리 중에는 대상의 모든 기록을 빠짐없이 지켜봐야 하네. 대상의 행동, 감염 진행 과정, 그리고 대상의 모든 음성까지. 면담에는 제한을 두지 않겠네."

그의 말에,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별 생각 없었다. 그저 아내를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 지긋지긋한 면담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은 별개 문제이긴 했지만.

"기쁜가보군."

O5의 사무실을 나설 때,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낸 것 같아 조금은 조바심이 느껴졌다. 일단은 이것이 징계라는 사실은 잊지 않아야겠다.


다시금 아내 앞에 설 수 있었다. 여전히 유리벽이 그녀와 내 사이에 놓여있긴 했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그녀를 관리하는 동안에는 자유로운 면담이 허락되었으니까. 생물 방호복이 있다면 접촉도 가능하다. 직접적인 접촉은 하루 5분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당신 왔네."

아내는 애써 웃어주었다. 어딘가 쓰디 쓴 미소였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우린 지금까지 힘든 일 많이 겪어 왔었지? 빚도 있었고, 유산도 두 번이나 됐고, 알고보니 임신은 아예 안 돼고. 그래도 다 이겨낼 수 있었잖아. 그리고 앞으로 겪을 더 힘든 일도 다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번 일은…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을 것 같아. 미안해."

그녀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눈이 좀 건조하다는 핑계로 눈을 비비며 눈물을 훔쳐냈다.

"당신, 내가 여기서 박사로 일하고 있는 거 알지? 지금 치료법 연구 중이야. 임상실험도 거의 다 끝났어. 조만간 결과가 나올거야. 그 땐 당신도 여기서 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지? 응?"

"당신은 거짓말 할 때 항상 눈이 커지더라."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가 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선의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하얀 거짓말은 어느 새 검게 썩어버려 허풍이 되어버렸다. 사실 내가 하려던 것이 정말 선의의 거짓말인지, 아니면 그저 헛된 희망을 심어주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 그녀는 한참 동안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약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그땐 꼭 입맞춤 해줘."

그것이 무슨 뜻 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다만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 더 좋은 차를 타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 것이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래, 알았어. 백번이고, 천번이고, 잔뜩 해 줄게. 약속할게."

"한 번이면 충분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유리벽에서 조금 떨어졌다.

"면담은 여기까지 해도 될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격리구역을 나왔다.


징계 방침에 따라, 나는 격리구역 바로 옆에 있는 감시소에 머물러야했다. 감시소에는 격리구역 내부 상황을 두 각도에서 보여주는 화면 두개와 스피커 하나, 침실과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징계 중에도 연구원들이 보내는 서류 검토는 계속 해야했다. 징계는 징계고, 업무는 업무니까. 저녁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연구원들이 보낸 불쏘시개들을 검토했다.

…윽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화면을 보니 아내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스피커 음량을 조금 키워보았다. 감시소가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그 소리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내의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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