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톱니바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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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에게 말했던 예의 '부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기지 내에서 얘기 할 것을 권했다. 통화 보다는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물론 나는 상관 없었다. 다만 집안에 큰 골칫거리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나 회사 다녀 올 거야."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기지로 출근 할 때에는 아내가 항상 넥타이를 매 줬었다. 이후 기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집에 들어 올 일이 거의 없어졌을 때 부터는 스스로 매는 법을 터득했지만, 처음엔 스스로 넥타이를 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간신히 모양만 잡힌 채 숙소를 나가곤 했고, 그마저도 몇 번 돌아다니면 풀리기 일쑤였다. 지금이야 스스로 넥타이 매는 것도 꽤나 늘긴 했다. 그럼에도 아내가 넥타이를 매주는 것이 그리웠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때문에 더 아쉬움이 컸다.

"다녀 올 게."

아내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평소라면 분명 가지 말라고 때를 썼을 텐데. 물론 상관 없었다.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다만 정신상태도 온전하지 않은 아내를 혼자 두고 오려니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요즘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예전만큼의 민폐는 끼치지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가스 레인지라도 잘못 건드려서 불이라도 나면 어찌하며,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 어찌하고, 온갖 걱정이 다 들었다. 이쯤되니 괜히 기지로 찾아가겠다고 말 한 것 같았다.

"나 없어도 집 잘 볼 수 있어?"

쇼파에 앉아 있는 아내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물었다.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집을 보라고 시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고, 실제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긴 했지만 큰 의미를 두고 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에 가스 밸브에 안전 장치를 채워 잠구었고, 창문은 걸쇠를 걸어 잘 열리지 않게 했다. 대문을 나설 때 에도 집에 아무도 없는 것 마냥 잠그고 나왔다.

"쌀쌀하네."

밖의 날씨는 추웠다. 요 며칠 점점 쌀쌀해진다 싶더니 이젠 체감이 될 정도 였다. 뿌연 입김이 눈에 보이고, 목이 시렸다. 목도리가 필요했다. 길고 따뜻한 목도리가.


빅터 박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곧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안에는 다소 피곤한 모습의 그가 있었다.

"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곧 싸구려 커피믹스 한 봉지와 종이컵을 가져와 커피 한 잔을 뚝딱 만들어 내주었다.

"천천히 들게. 마시면서 얘기 듣고. 아니다, 자네가 들을 것도 없겠군. 딱 잘라 말하겠네."

빅터 박사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가 이런 눈빛을 띈 다는 것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는 일 임을 암시했다. 내가 지금보다 등급이 낮았을 때, 고 위험 SCP와 관련된 실험을 요청 했을 때 에도 이런 눈빛 이었다. 그 때 그의 표정과 눈빛에 압도되어 실험 요청을 철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후회 할 일도 없고, 후회 하지도 않을 것이다.

"후회 안 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빅터 박사는 의자의 등받이를 살짝 젖혔다.

"자네는 항상 성급하게 판단해 왔어. 이전에 자네 와이프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했을 때 에도 무작정 거길 찾아갔었지. 들여주지 않는 경비병들을 때려 눕히고, 이후엔 기지 자네 상사까지 패 버렸지. 물론 그 자식 코뼈가 나가버린 건 속 시원한 일이긴 했어."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자넨 후회 할 거야. 반드시."

빅터 박사는 여전히 진지한 눈빛을 고수했다. 그런다고 내가 의견을 바꾸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가 강하게 나오니, 나 역시 강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안 합니다. 반드시."

빅터 박사는 나를 노려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곧 눈을 지긋이 감았다. 단념한 듯 보였다.

"알겠네. 정리 할 시간을 주지. 3주면 충분한가?"

"당장 내일 시행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빅터 박사는 미간을 좁혔다.

"3주 주지. 더 이상은 내 선에서 줄이지 못하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더 이상 그의 시간을 뺐는 건 실례였다. 꾸벅 인사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집에 들어온 것은 저녁 시간이 거의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아내가 투정을 부리기 전에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나 왔어."

집 안은 조용했다. 아내를 불러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쇼파 위에도, 거실에도, 주방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아내는 안방에 있었다. 그것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뭐해?"

아내는 나를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벽에 붙은 장롱에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뭘 던졌는지 알아 챌 수 없었다. 물론 별 관심은 없었다. 그래봐야 종이 쪼가리를 접었다 폈다 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자 봉지에 적힌 영양 성분표를 외울 기세로 읽는 것 일테니까.

"또 숨기는구나. 일어나, 밥 먹자."

나는 아내를 데려다 주방 식탁에 앉혔다. 늘 먹는 저녁으로 간단하게 때울까 했지만, 문득 빅터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정리 할 시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에이, 기분이다.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아내는 규칙적이고 맑은 태엽소리를 들려주었다. 즐거워 하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자면 그 결심을 철회하고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난 내 편의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앞으로, 3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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