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톱니바퀴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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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났다. 눈길이 먼저 간 곳은 알람시계가 아닌 달력이었다. 빅터 박사와 예의 약속을 한 지 고작 사흘 지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론 지금까지 버틴 것 처럼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좀처럼 쉬운 말은 아니다. 특히 그 골칫덩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런 골칫덩이가 부쩍 조용해졌다. 게다가 오늘 아침도 조용했다. 이 시간 쯤 되면 내 이름을 질리도록 불러대고 난리를 피웠을텐데. 솔직히 놀랄 정도였다. 지능이 낮은 건 여전했지만, 반복적인 행동을 하다가도 조금 후에 멈추곤 했다. 이전에는 내가 뜯어 말리고 달래야 간신히 그칠 정도 였던 걸 생각한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증상이 좋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건 정말 가설일 뿐이지만, 아내가 먹었던 SCP-500의 복제품이 사실은 원본과 똑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CP-217의 증상이 워낙에 강해, SCP-500의 복제품으로는 치료효과가 더디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빅터 박사는 이런 상황을 생각해서 굳이 3주라는 긴 시간을 준 것일까? 만약 내 결정대로 했다면 진즉에 아내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빅터 박사는 아마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내가 나아지길 기대하며,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분명 아내가 차츰 나아질 거라고 생각을 했었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엿같은 희망이나 품고 있던 나를 발로 차버리고 싶다.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침실을 나와 거실에서 본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 내지는 그림들이었다. 그것들은 종이에 그려져 있지 않았다. 바닥, 벽, 가구, 심지어는 어떻게 한 건 지, 천장에까지.

"그래, 이럴 줄 알았지."

혀를 찼다. 예술 활동에 전념하던 아내는 날 돌아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놀란 듯 보였다.

"왜, 계속하지?"

내 말에 아내는 낙서와 날 번갈아 보더니 래칫 관절 소리를 냈다. 분명 슬퍼하고 있었다. 뭐가 슬픈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몰래 낙서 할 수 있었는데 내게 발각되어서 슬프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계속 하라니까? 내가 나오니까 왜 그만 하는 건데?"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그녀가 힘에 부쳐 비틀거리는 것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기우뚱 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는 내 앞에 쾅, 하고 주저 앉았다. 그래, 그건 말 그대로 '쾅' 주저 앉은 것이다. 그녀는 내가 손을 내밀었다. 기계로 변해버린 손. 속에서 역한 금속 냄새가 올라왔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선견지명은 무슨,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아내가 내미는 손을 무시한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아내에게 대충 말만 던진 채 집을 나와버렸다. 하지만 막상 나와도 갈 곳은 딱히 없었다. 그 동안 별다른 휴가도 없이 기지 내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어딜 가려고 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결국 찾아간 곳은 내 직장이었다. 기지 내 휴게실은 조용했다. 아무래도 다들 일에 몰두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한 명 정도는 밖에서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던데, 오늘은 그런 사람도 없었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쪽잠이나 자 보려던 찰나, 누군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자네가 왜 여기 있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빅터 박사였다. 그는 잘도 날 찾아내었다.

"제 몸에다 신호기라도 붙여 놓으신 겁니까."

반쯤 누운 채 말했다. 빅터 박사는 내 옆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 있나?"

주머니를 뒤적이고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저는 아직도 박사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내게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무얼 말인가?"

"왜 제게 3주라는 시간을 주셨는지 말입니다."

그는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잿빛 연기가 눈을 찔렀고, 매캐한 향기가 코를 감쌌다.

"솔직히,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박사님이 선견지명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아내는 바뀌고 있었으니까요. 확실히 이전보다 절 찾는 횟수도 줄었고, 집에 혼자 둬도 큰 말썽 없었습니다. 반복적인 행동도 스스로 그만둘 줄 알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거실로 나갔을 때, 아내는 뭘 하고 있었는 줄 아십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집안을 온통 상형문자로 덮어 놓았습니다. 그리곤 제가 다가갔더니, 슬퍼하는 소리를 내더군요. 뭐가 슬픈거죠? 오히려 미안해 하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지 말고, 대답을 해 달란 말입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아차 싶었다. 그래도 내게 도움을 준 은사님이나 다름 없는데, 이렇게 대우 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왜 슬퍼 한 걸까."

그는 반문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제로 내 주지. 약속일 전 날 까지 답을 알아 오게."

"만약 맞추지 못 한다면요?"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는 후회 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곤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이후로 몇 명이 휴게실에 들락날락 거렸지만, 나는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점심도 거른 채, 그가 내어 준 '과제'만을 골똘히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해가 졌을 무렵이었다. 집안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대문을 열면 짠, 하고 집안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길 바랬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소파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르고 자는 얼굴이 보였다. 남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얼마나 좋은 꿈을 꾸는 건지 혼자서 실실 웃고 있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부엌에 들어갔다. 식탁에 술을 올려놓았다. 안주는 없었다. 술병을 들고, 숨이 턱 막힐 때 까지 내용물을 들이켰다. 이제 18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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